피스레터(글)2018.10.18 21:22

[시선 | 평화의 마중물]


그란샤크 학교 이야기

 

송강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북쪽 약 40킬로 지점에 그란샤크라는 척박한 지역이 있다. 이곳은 카불 강 건너편 수키 지역과 나뉘어져 있고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곤 해서 그에 따른 지역 주민들의 희생과 피해가 막심했다. 러시아의 침공 때도 그랬고, 탈레반과 북부 동맹군과의 내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마을을 방문했던 2002년 이른 봄, 폐허가 된 가옥들과 버려진 불발탄들, 흙무더기에서 쉽게 눈에 띄는 해골과 인간의 뼈들이 거듭된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이 곳 흙먼지의 뜨거운 열풍이 들이치는 광야 한 복판에 슬픈 운명의 학교가 다 허물어진 채 놓여있었다.

 

비운의 학교

 

이 그란샤크 학교는 이미 40년 전 러시아가 아프간을 침공하기 이전에 지어졌다. 건물의 모든 벽은 아프간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육중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그 두께가 50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튼튼하고 강한 건축물이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둑에 위치해 있어서 강변의 푸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건너편 수키 지역에는 비록 나무는 한 그루 없지만 우람한 바위산들이 늘어서 있어 그 위용에 압도당할 것 만 같다. 바로 그 산자락 한 언덕 위에는 아프간 내전 때 탈레반 전사들이 이 마을을 포격 했던 녹슨 탱크가 그 포신을 그란샤크 마을 방향으로 겨눈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이 마을을 처음 방문했었던 2003년 봄, 이 학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 만치 파괴되어 있었고 학교 운동장과 주변들이 지뢰밭이 되어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나 빈집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거나 나무 밑 그늘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고 강한 모래 바람이 불면 높은 담벼락 밑에서 바람을 피해가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할 학교 운동장에서 지뢰를 밟아 자기의 다리들을 잃어버렸다. 나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이런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반드시 지뢰를 제거하고 이 학교를 재건하여 학생들을 다시금 자신들의 배움터로 돌려보내리라고 결심했다. 용기는 때로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현실의 강요일 수도 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교 운동장의 지뢰를 제거하고 무너진 학교를 다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을 주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튼 마을의 중요한 숙원 하나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에 몹시 반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가진 돈이 하나도 없는데 이런 당돌한 약속을 하다니 내가 이 낯선 모슬렘 국가에 와서 국제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당장 그 자리에서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수년 내에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지뢰밭 안에 놓인 학교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와 동정을 자아냈고 각처에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개척자들1)은 학교 지뢰제거와 재건을 위한 모금뿐 아니라 학교를 짓는 일에도 직접 참여했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어린 시절 지뢰밭이 된 학교 운동장에서 다리를 잃은 청년

 

전쟁의 결과는 건물의 파괴뿐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결과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심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단된 손이나 발이 다시 회복되지 않듯이 다시 치유되거나 재생될 수 없는 상처인 경우도 있다. 전쟁을 한 번 겪은 사람들은 그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다시는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 중에서 태어나서 전쟁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인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전쟁은 일상이 되고 폭력과 살상에 놀라거나 경계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변덕스러워 지고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이들에게 교육은 무의미하고도 불확실한 투자처럼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마을 어른들이 학교 건축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해서 기뻐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들이 학교 건축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다음세대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과 투자 때문이 아니라 그 건축 과정에서 혹 자신들에게 돌아갈 지도 모를 금전 몇 푼의 이익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마음이 씁쓸해 지곤 했다. 우리 개척자들은 자기 자녀들의 교육에 희망과 기대를 저버린 사람들과 더불어 학교를 재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경험했다. 일꾼들에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면 집에서 총을 들고 와 총질을 해대기도 했다.

 

내가 아프간에서 실감한 것은 분쟁은 어린 아이들이나 여인들도 사납고 거칠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쉽게 때리고 어린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힘으로 맞서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런 폭력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에게 총은 위대한 우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총구에서 모든 권위와 질서가 나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는 이 그란샤크의 이런 거친 어린이들이 훗날 평화를 위한 불굴의 사도들이 될 날을 꿈꾸며 학교를 재건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전에는 우리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던 주민들이 친구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전에는 만나기만 하면 바체시, 바체시하며 무언가를 달라고 조르던 사내아이들이 자기 호주머니에 토마토 등을 가져와 부끄러운 듯이 살짝 보여줄 때 우리가 거꾸로 바체시라고 하면 즐거운 표정으로 깔깔 웃으며 나눠 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

 

처음에는 지뢰 때문에 이 학교를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지뢰가 다 제거되자 그 학교 안에 들어가 그 내부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귀퉁이들이 무너져 검은 칠판들에 그려진 학생들의 좌절과 희망이 담긴 낙서들을 볼 수 있었다. 또 그 심한 포격에도 아직 무너져 내리지 않은 돌 벽을 쓰다듬으면서 인간에게 슬픈 운명이 닥치듯 이 아름다운 작은 학교가 겪은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 근처의 모든 집들은 진흙집들인데 비해 이 학교는 카불 강변 전망 좋은 위치에 돌로 튼튼하게 지어져서 전쟁이 나기만 하면 언제나 군인들의 요새가 되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기듯이 이 학교는 전쟁이 일어 날 때마다 자신이 품어야 할 어린 학생들을 잃어버리고 사납고 무례한 군인들의 총포에 짓밟혀야만 했다.

 

아프간 평화캠프


개척자들의 아프간 캠프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물을 길어오고 새벽 묵상을 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는 여러 마을에서 평화학교를 열었다. 오후에는 뜨거운 햇볕아래서 무너진 그란샤크 학교를 재건하기 위한 노동을 했다. 학교 안팎에 가득 쌓인 진흙과 무너진 돌무더기를 치워야 했고 수년 묵은 건조한 똥들이 진흙과 뒤 섞여 미세한 먼지가 되어 폐부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이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화장실도 고쳤다. 이 화석처럼 딱딱한 똥들을 직접 손으로 집어 함께 모아 처리하는 여자 청년들의 모습을 마을 젊은이들은 무너진 벽에 걸터앉아 묵묵히 쳐다 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문화도, 종교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이 나라에 들어와 그들 중의 하나처럼 몸 부쳐지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을 가르치고 무너진 학교를 재건하는 모습을 그들의 눈동자에 분명하게 그려준 것만은 사실이다.



학교를 다시 재건하기 위한 노동

 


평화캠프 참가자들이 학교 재건을 위해 노동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프간 청년들

 

우리는 새롭게 지어진 학교를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여학생들에게 헌정했다. 학교가 새로이 개교하는 날 어린 여학생들이 당당히 행진하여 남학생들 앞자리에 앉았다. 머리에 스카프를 한 어린 여학생들이 난생 처음 학교라는 곳을 들어와 어리둥절하면서도 희열에 차있던 모습이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날, 서러웠던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그란샤크 마을에 평화의 새 봄이 오는 것 같았다.



평화 캠프에 참가한 어린 학생들

 

천 년의 원한


20077월 분당샘물교회의 청년 23명이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라는 마을에서 피랍되고 배형규, 심성민 두 청년들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먼 나라의 전쟁이 어느새 우리나라의 일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개척자들의 아프가니스탄 평화학교도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중단되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모슬렘은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이슬람포비아(이슬람에 대한 두려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도 오래다. 그러나 정작 아프가니스탄에서 내가 만난 어린 아이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모슬렘들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모슬렘들을 처참하게 학살한 십자군전쟁의 쓰디쓴 기억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고 있다. 어쩌면 그 종교 전쟁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천 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모슬렘들의 마음속에 악마처럼 그려진 그리스도인 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몹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그리스도인이에요?” 처음에는 왜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는지 어리둥절했었다. 그란샤크 마을의 아이들에게는 낯선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자신들을 위해 지뢰를 제거하고 그 위에 무너진 학교를 다시 지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게다. 어느 날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땀과 흙먼지로 뒤덥힌 옷을 입은 채 차가운 카불 강물에 뛰어들어 목욕을 한 후 아직도 흰 눈이 쌓인 흰두쿠시의 영봉들이 붉은 노을로 빨갛게 물 드는 장관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저 만치서 어떤 소녀가 화급히 달려와 앞치마 자락 안에 숨겨온 작은 수박덩어리를 손에 쥐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버렸다.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당혹스런 일이 었다. 나는 이 소녀의 지극히 어린 아이다운 감사의 표현을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사이에는 천 년의 원한이 장벽처럼 막혀있지만 이 아프간 소녀의 용감한 행동은 우리에게 어느 날엔가는 이 장벽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예표가 아닐까?

 


다시 재건된 학교의 석벽에 새겨진 헌정사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