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12.20 11:08

[시선 | 평화의 마중물]


평화를 가르치는 꿈

 

송강호

언덕 위에서 종을 울려라!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 설레임과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했을 때 처음에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너무 막막하고 불안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국가간에 혹은 인종이나 종교간에 갈등과 분쟁을 겪는 현장을 찾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르완다 내전이 한창인 1994년 6월 이런 물음을 갖고 세 명의 청년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아프리카에서 절대 가난과 더러운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상황은 차라리 생지옥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밖에서 상상했던것 보다 아프리카가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주는 매우 아름다운 땅이며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아프리카 사람들도 어떤 방면으로는 우리 보다 유능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들이 가난과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유는 바로 부족들 간의 갈등과 분쟁 때문이고 이런 분쟁은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소위 기독교 국가들에 의한 비인도적인 식민지 경험으로 비롯된 것들이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슬람이 강세인 북부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 전역의 많은 나라들의 기독교인 비율은 우리나라보다 높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기독교적인 사회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에는 돈을 사랑하는 병든 기독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전파된 기독교는 마치 에이즈에 감염된 피가 수혈된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에게 정의와 평화의 혈청이 죽어버린 썩은 기독교가 퍼져나가게 했다. 교회들의 모양은 있으나 생명력은 없는 그런 죽은 기독교 사회가 되어버렸다. 미사나 예배를 드리며 평화의 주님을 노래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면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현실 속에서 교회도 기독교 신앙도 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1994년 르완다의 내전은 농경을 주로 하는 후투족과 유목민인 투치족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전쟁이었다. 우리는 바나나 운송차량을 타고 거대한 바나나 농장을 지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가르는 카게라(Kagera)강을 건너 르완다 국경에 접한 한 난민촌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는 수 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작은 천막 하나 만을 두른 채 삶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UN 천막 앞에 줄을 지어서 옥수수와 콩 그리고 식용유를 배급 받았고 좀 더 큰 여자 아이들은 하루에 두 차례 정도 물동이를 이고 약 3, 4 Km를 걸어가서 더러운 식수를 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땔 나무 조차 없었기 때문에 불을 펴 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난민촌에서 밤만 되면 캄캄한 가운데서도 모여서 밤이 늦도록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어른이 소리를 매기면 어린이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따라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밤 나는 어느 한 그룹을 찾아가서 도대체 무슨 내용의 노래를 그리 밤새 부르는 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 노래가 자기 종족의 원수인 투치족들을 죽여서 눈을 빼고, 코와 귀를 잘라서 씹어먹자는 내용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린 세대의 미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어둠 속에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도망치듯이 뒷걸음질을 쳐 내 천막으로 돌아왔다. 이런 현실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뒤척이며 밤을 새우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깨어 일어날 즈음에는 이미 천막의 문 틈으로 환한 아침햇살이 내 얼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천막의 문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늘 그렇듯이 건너편 언덕에는 우중충한 옷을 걸쳐 입은 난민들이 삼삼 오오 둘러 앉아 노름을 하거나 마약을 함께 씹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수 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투치족들의 복수를 피해 죽음의 강을 간신히 탈출해 나와서 이곳 난민촌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조차 도박과 마약, 매춘으로 세월을 보내며 자녀들에게는 복수와 증오를 가르치고 있었다. 난민촌에는 내일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 다른 복수의 전쟁이 준비되고 있는 카라그웨(Karagwe) 분지의 한 언덕에 올라 그 아래 수없이 늘어선 난민들의 천막들을 바라보며 하나의 환상을 품게 되었다. 평화를 가르칠 젊은이들을 온 세상에서 불러 이 언덕 위에 천막 학교를 세우고 종을 울리자. 언덕 높은 곳에서 아래 너른 분지로 울려퍼지는 그 종소리를 듣고 저 밑에 늘어선 난민들의 천막들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학교를 향해 뛰어 올라오리라. 눈을 감으면 평화를 배우겠다고 언덕 위로 달려오는 어린이들의 천진 난만한 얼굴들과 빛나는 눈망울들이 떠올랐다. 평화학교에 관한 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민촌에 천막으로라도 학교를 세운다면 이 천막학교는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게 된다. 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회에 “당신들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라는 소리 없는 설교다. 그리고 한 사람이나 사회가 자신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한 과거의 원한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나 분쟁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개척자들을 통한 평화 사역을 하기 위해 분쟁 지역에서 평화 캠프를 열고 평화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평화학교의 꿈은 아프리카의 분쟁 현장 한 복판에서 피어났다.


평화학교 학생들의 활동: 종이 비행기 날리기


평화학교의 어린이들


평화학교의 시작


개척자들이 처음 평화학교를 연 곳은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동티모르였다. 1999년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강압적인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집들을 불살랐다. 끔찍한 고문을 당했거나 강간당한 여인들도 무수했다. 나는 동티모르 교회의 목사들을 만나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자국의 군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직접 보게 하고 화해를 위한 재건에 참여하게 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하셨던 한 여자 목사님이 하늘을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목사인 내가 화해를 하자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파서 아무리 부드러운 솜털이 닿는다 할 지라도 우리에겐 너무 큰 아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나이 많으신 목사님을 가리키며 “저 목사님은 자녀가 10명인데 한 사람도 그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목사님과 둘러 앉은 다른 목사님들을 둘러 보았다. 모두 고요한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이가 지긋한 한 목사님이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우리는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을 때 당신은 우리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해 우리는 평화학교에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불러 올 수 없었다. 한국 청년들과 독일 청년들이 첫 동티모르 평화학교에 참여하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평화로와 보였다. 집들이 불타서 초가지붕 밑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면서도 이따금 파티를 열고 밤새 춤을 추기도했다. 우리는 낮에는 함께 집을 짓는 노동을 해서 피곤했지만 저녁에는 파티장에 까지 초대되어 밤이 늦도록 춤을 함께 추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때도 있었다. 그저 뜨겁게 사랑하고 안아주며 위로해 주겠다는 결심으로 갔지만 그러기에 한 달은 생각보다 긴 기간이었다.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이 바닥이 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자 참가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동요들을 가르쳐 주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곰 세마리, 거미 줄에 걸렸네, 영심이 짝짝 맞아 영심이 등등. 우리들은 아무런 것도 나눈 것이 없는데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돌아가는 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모두 정글에서 원숭이를 사냥하여 특별한 원숭이 탕을 만들어 주며 떠나지 말고 남아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회의를 해서 자원하는 두 명의 여자 청년들을 남겨두고 동티모르를 떠나왔다.


동티모르 평화학교 학생들과 함께


동티모르의 평화학교 모습


동티모르 투민의 학살 희생자 묘역


평화학교 참가자들을 위한 환송 파티의 동티모르 전통춤


1년 후 우리는 그 마을을 다시 찾았다. 작은 마을 버스의 지붕에 올라타고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어린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우리는 마을 한 가운데 성당 앞 뜰에 둘러 앉아 다시 찾아 온 동티모르에서 우리를 반겨 준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한 어린이가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든 마을 아이들이 작년에 참가자들에게서 배운 한국 동요들을 모두 메들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1년 내내 아이들이 이 뜻도 모르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우리는 10년이 넘도록 동티모르에서 평화학교를 열었고 우리 자신이 평화교육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그곳에서 배웠다.


개척자들은 전쟁과 미움으로 원수된 나라나 부족들 간의 갈등과 분쟁을 억제하고 돌이켜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 말레이지아, 아프가니스탄, 캐시미르 등지에서 열어 많은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평화학교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분쟁지역의 난민촌 어린이들을 만나 그들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고 사랑의 손길이 되어 주었다. 우리가 가르치던 마을에는 이제 작은 평화 도서관들이 생겨나 어린 아이들이 그 곳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