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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8_2 정영철_서울과 평양의 환호, 세계의 부러움: 2000년 정상회담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8. 1.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서울과 평양의 환호, 세계의 부러움: 2000년 정상회담


정영철


한 사람은 비행기 트랩 위에서, 또 한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2000613일 오전 1037, 역사의 한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바로 그날 2000613일은 한반도 분단사에 새로운 역사가 쓰인 날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동안 전쟁과 적대, 갈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소멸을 주장했던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평양의 하늘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던 희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바로 2000년 정상회담이었다.

 

우리처럼 오랜 세월 분단을 경험했던 동-서독도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정상회담을 통해 동-서독의 화해와 협력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비록 불행의 땅으로 변했지만 예멘 역시 남북 예멘의 정상회담을 통해 전쟁의 방지와 통일을 위한 숱한 회담을 전개했었다. 지금도 지중해의 조그만 섬나라인 분단된 키프로스에서 남북 키프로스의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상호 필요에 의해 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변국들의 중재와 압력에 의해 열리기도 한다. 예멘의 경우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중재가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으며, 키프로스는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00년 정상회담은 어찌 보면 1970년대부터 남다르게 한반도 문제를 고민해온 김대중의 필생의 역점 사업이었을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김대중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예비군제 폐지와 대체, 4대국교차승인론 등 굵직한 한반도 관련 공약을 내세우며 박정희를 압박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면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자신의 통일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정상회담은 아마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고, 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1998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그는 199811월부터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이로부터 약 17개월간에 걸친 막후접촉과 상호 밀사 및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마침내 2000410일 정상회담을 발표하게 된다. 이 당시 남북한의 막후 라인은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후일 국정원장)과 북한의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김보현과 북의 전금진(우리에겐 전금철로 잘 알려져 있는 북의 아태부위원장) 라인도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도 다양한 시그널을 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003월의 베를린 선언이었다. 베를린 선언은 경협의 확대’, ‘남북의 화해·협력’,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당국자 대화를 핵심 골자로 하는 대북 제안이었다. 이 베를린 선언이 나오기 이전, 북은 이미 우리에게 경협에 대한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북의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공식화시킨 것이 베를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남북정상회담

본 저작물은 '국정홍보처'에서 '2000'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김대중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상회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이었다.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났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평양에서의 모습은 파격 그 이상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정일위원장의 공항 영접, 북의 군인들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던 모습, 두 정상이 같은 승용차를 타고 환호하던 평양 시민들을 만나면서 퍼레이드를 벌인 점 등등.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 광경에서는 서울에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까지 눈물을 보일 정도의 감격이었고, 모든 기자들이 박수를 치며 이에 환호하기도 하였다. 외신 기자들 역시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였고, 이 순간만큼은 우리를 가장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다. 그간 북을 싸워 없애야 할 적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상대임을 인정하였고, 남북이 더 많은 만남과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실제 정상회담 이후로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경유하여 멀리 에돌아 평양을 가야하는 현실을 비판하였고, 결국 서울과 평양 간에 직항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함으로써 남북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김정일위원장 팬클럽까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정상회담이 가져다 준 남북 일상의 변화였다.

 

역시 가장 큰 변화는 국민들의 북에 대한 인식이었다. 적이 아니라 동포로, 협력을 통해 같이 공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할 통일의 다른 한 주체로 북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약 30만 명의 군중이 두 정상의 만남에 길거리 환영을 보여주었다면,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도 자발적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따뜻하게 환대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2000년은 서울과 평양이 세계 주요 외교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급박하게 서울을 찾았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평양과 서울을 동시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두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국 역시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베이징을 찾아 중국지도자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라면 북과 미국이 상호 특사를 주고받으면서 수교 협상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점이다. 그해 10월 조명록 특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역시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북과 미국은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여 수교까지 염두에 둔 합의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200010월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는 조명록 특사 (출처:통일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0001023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공연을 관람하던 중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출처:통일뉴스)

 

장 중요하게는 지금까지 남북이 서로를 향해 적대와 갈등의 패러다임으로 보던 것을 뒤집어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이다. ‘안보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아닌 공존과 평화화해와 협력이 더 인기 있는 구호가 되었고정치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 청사진을 발표하였다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당국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남북의 교류와 협력에 나서게 되었다제주도에서는 감귤을 북에 보냈고경기도에서는 휴전선 인근의 방역 사업에 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경상남도는 통일 딸기사업을 통해 지자체간의 새로운 협력모델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기업들은 개성공단을 넘어 북과의 더 넓은 경제 합작을 위한 진지한 모색을 하였고시민단체는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기찬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이 있은 후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그 사이에 남북은 그야말로 많은 일들을 벌렸고때로는 웃고때로는 울고때로는 싸우면서 서로를 이해하였다초기에는 참으로 많은 실랑이가 있었다호칭 때문에 얼굴을 붉혀야 했고남에 내려온 북의 응원단은 구겨진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에 분노하였다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그렇게 서로를 배워 가는 시간이었다이런 점에서 보자면정상회담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움이 아닐까통일은 아주 거창하게 보자면막막한 미래의 일이지만우리의 주변에서부터 만남을 이어간다면 소소한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이해하고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일상의 평화와 일상의 통일을 꿈꾸게 해준 것이 바로 정상회담이었던 것이다.

 

-미 공동코뮤니케: 코뮤니케는 일명 공식발표 혹은 공동성명서로 해석된다. 2000 -미 공동코뮤니케는 역사적으로 북미관계의 일대전환을 의미하는 공식발표였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북은 조명록 당시 총정치국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조명록 특사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북미관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그 결과 양국은 2000 10 12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게 된다.  -미 공동코뮤니케의 핵심 내용은 두 나라의 적대관계 청산과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의 협력, 양국 관계의 정상화였다. 또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북이 클리턴 대통령의 방북을 요청하고, 이를 위해 당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이를 준비하기 위해 방북하기로 한 점이다. 실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0 19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미 공동코뮤니케는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합의로서 의미를 갖지만, 이후 미국의 정치정세가 급변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 2000년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게 패하면서 북미 관계는 이후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정창현, 남북정상회담 600(서울: 김영사, 2000)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2(서울: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5)

임동원, 피스메이커(서울: 중앙북스, 2008)

임채완, 전형권, “6.15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및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한국동북아논총17(2000)

2000년 한·러 공동성명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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