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아메리카 대륙, 승자만을 위한 자유의 나라


김소울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경, 황금과 보석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콜럼버스 일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정복한 강자들이 미화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당시 해양진출을 활발히 도모하던 스페인의 팽창정책과 콜럼버스의 개인적 야망은 일치하였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앞으로 발견하는 지역의 식민지 총독 및 부왕의 칭호를 내리고, 그 곳에서 산출된 귀금속의 1/10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며 그 자손들에게 직위가 영구히 상속될 것이라 명시하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을 했다. 때문에 지금도 카리브해 연안의 섬들을 서인도라 명명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후에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땅임을 밝혀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다.


외젠 들라크루아,『콜럼버스의 귀환』(1839)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영웅으로 칭송 받았으며, 왕과 왕비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게 된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콜럼버스의 귀환>에서는 보석과 귀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명예와 부에 대한 그의 야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콜럼버스의 열망과 욕심은 그를 분명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 영광을 이룩하기 위해서 수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1492년 10월 12일 이후 원주민들에 대한 길고 험한 대학살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이는 유럽인들의 약 400여년에 걸친 아메리카에서의 착취와 정복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과 아메리카 본토의 총독 겸 주지사가 되었으며, 토착 원주민들에게는 공납과 부역을 명령하였다. 신속하게 노예정책을 도입하고, 그들로부터 옥수수와 면화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한편, 금광 채굴 등의 강제 노역을 시키게 된다. 그는 토착 원주민들이 할당량의 금을 채우지 못할 경우 수족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이 때 많은 원주민들이 도망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에 대한 조직적인 몰살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가혹정치로 인해 약 800만명으로 추정되는 타이노(Taino)족이 1500년경, 그가 총독의 자리를 떠날 때 약 10만명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콜럼버스가 떠난 이후에도 그가 표방했던 3G정책은 지속되었다. Gospel(기독교의 전파), Glory(왕에 대한 영광), Gold(황금 약탈)로 요약되는 3G정책 결과 1514년 겨우 22,000명의 토착 원주민들이 생존하였고, 1542년에는 단지 200명의 원주민들만이 살아남았다. 그 이후 토착 원주민은 멸종되었다.


원주민의 땅이지만 식민지가 된 신대륙에서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새롭게 발견된 담배와 같이 귀한 물건들의 교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초기 정복자들은 이 땅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식민지의 교역을 통해 부자가 되어 다시 유럽에서 살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이주정책이 필요했고, 아메리카에 정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토지 50에이커(61,000평)을 제공하는 인두권 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그리하여 초기에 아메리카대륙에 뛰어든 스페인에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뒤따라 식민정책에 합류하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1772)


벤자민 웨스트가 그린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당시 신대륙에 모여든 사람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국의 귀족이었던 윌리엄 펜은 1681년에 펜실베니아에 있는 식민지 땅을 받게 된다. 펜은 영국과 식민 아메리카 등지에서 일어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의 한 부류인 퀘이커(Quarkers) 교인이었다. 퀘이커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교회조직을 부정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성격을 띄고있었다. 이 때문에 성공회와 퀘이커교는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다. 펜은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아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은 후, 그곳을 ‘펜실베니아’라 명명하고, 퀘이커 교인들처럼 박해 받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하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토착 원주민들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우애의 도시라는 의미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원주민들과 윌리엄 펜이 서로 만나 협정을 맺고 선물을 교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우애적이던 영국인들과 원주민들의 관계는 1718년 펜의 사망과 함께 깨지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는 이 그림을 펜의 사망 54년 이후에 그리게 되는데, 그림에서는 후에 일어났던 원주민에 대한 학살 장면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인물들은 윌리엄 펜과 그의 친구들이고, 오른쪽에는 펜실베니아의 토착 원주민들이 보인다. 벤자민 웨스트는 왼편의 인물 뒤에는 석조건물과 배, 그리고 무엇인가를 나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의 인물 뒤에는 나무와 풀, 그리고 벌거벗은 원주민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18세기말 서양 사회를 지배했던 문명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당연시 여기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왼쪽 아래에는 서양식 의복을 말끔하게 입은 인물들이, 오른쪽 아래에는 젖을 먹이고 있는 원주민 여성, 그리고 나무판에 아이를 묶어 놓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뒤편에 서있는 서양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는 반면 원주민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활이 들려 있는데, 이는 결국 서양인들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것이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약 100년이 지난 후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던 영국정부가 다양한 명목으로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식민지인들은 1775년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신대륙에서 시작된 서양인들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들이 일구어 낸 자유의 나라 미국. 그 그늘 아래에는 그들의 자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희생된 수 많은 원주민들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원주민들의 피로 물든 역사 위에 일궈낸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 벤자민 웨스트의 그림 속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