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7.10.30 15:15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통통이 이야기

 

심은보





나는 ‘MR.심슨과 행복한 아이들’의 반에서 스무 명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우리 교실 앞 벽면에는 ‘이 곳에 귀하지 않은 삶은 없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첫 날 아이들과 함께 글자를 나눠 모자이크로 만들어 교실 앞에 붙여 두었다.   



교사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유난히 힘들고 아픈 친구들과 한 교실에서 많이 생활해왔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날 한 선생님이 전하는 이 글귀를 만나며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들어 일기장에 적어 두었더랬다.  



교육이란 '너는 특별하단다'를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니라 '너는 소중하단다'를 이야기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에게 특별하기를 강요하는 대한민국 사회, 그 속에서 받는 특별하지 않는 아이들의 피로는 어찌 해야 할까? 특별하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상품성을 부여하기 위해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영재라 불리는 아이들도 영재가 아닌 아이들을 학원을 통해 영재인양 찍어내고. 자신이 특별한 척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생존해내야 하는 아이들의 처지는...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삶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그 절망감은.... 아이들에게 '너는 특별해'라고 이야기 하는 어른들의 말은 참으로 큰 폭력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너는 특별하지 않단다. 하지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너무 소중하고 귀한 존재란다. 내 몸, 내 생각과 느낌, 어느 것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게 없어. 내 옆에 있는 친구도 마찬가지야. 그 친구의 몸, 생각과 느낌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단다. 이 귀한 사람들끼리 한 곳에 모여 생활하는 만큼 서로의 귀함을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함께 부대끼며 서로 다른 귀함을 나누고 서로 힘을 모아 성장해 가는 곳이 학교란 곳이란다.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너는 특별해야 돼. 너만 특별해야 돼."라고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 (2013. 3. 17)



올해도 역시 다양한 빛깔의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 중 유난히 강한 빛깔을 지녔던 통통이는 우리 반 아이가 되었다. 아니, 통통이 녀석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내가 이 반을 맡았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덩치가 큰 우리 통통이. 녀석은 작년에 다른 학교에서 상처를 받고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커다란 덩치 탓에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고, 또 큰 덩치 탓에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도 억울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과 날마다 갈등의 연속이었으며 또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도 무척 심했다. 학기초 아이들은 ‘통통이가요~’, ‘통통이 때문에~’로 시작되는 말을 수시로 하곤 했다. 부모님들의 불편함과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그와 비슷한 강도로 통통이와 통통이 어머니의 피해의식과 불만 역시 만만치 않아서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를 불안함을 안고 새 학기를 시작했더랬다. 나의 고민은 수시로 발생하는 문제 상황 아래 숨어있는 이들의 익숙한 불편함을 깰 수 있는 고리를 찾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만난 첫 날. ‘이 곳에 귀하지 않은 삶은 없다’라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건네 주며 우리 모두 나의 특별함을 드러내며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는 행동을 하기보다는 나의 귀함을 지켜갈 수 있도록, 동시에 너의 귀함도 지켜줄 수 있도록 행동하며 살아나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더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던졌다. 


첫 날 두 친구가 새로 전학을 왔다. 이 친구들에게 다른 친구들을 소개도 할 겸 하여 조용히 실뭉치를 준비했더랬다. 실뭉치 끝을 잡고 ‘나는 OOO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후 다음 친구에게 실뭉치를 건네면, 건네 받은 친구는 ‘나는 OOO과 연결된 ㅁㅁㅁ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후 또 다른 친구에게 건네 주면 마지막 친구는 결국 열 여덟 친구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으로 활동을 엮었다. 활동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누군가의 문제와 불편함들은 내 문제가 아닌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두가 내 문제라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내게 어떤 문제가 있거나 불편함이 있을 때 옆에 있는 친구들이 그 문제와 불편함에 대해 함께 고민해줄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는 왜 이렇게 한 교실에서 모여 공부하고 있는지 이야기 나눴다. 



첫 한 달 참으로 많은 갈등들이 벌어졌다. 통통이가 어떤 문제 상황을 만들면 아이들은 통통이 탓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통통이 때문이라고 힘을 보탰다. 작년부터 만들어 온 아이들 사이의 익숙함들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통통이 때문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이상한 소리들을 크게 내서 수업을 방해하곤 하였다. 수업 시간에도 통통이에 대한 아이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 아이들의 시선들은 고스란히 어른들의 시선으로 옮겨가며 통통이에 대한 편견과 불편함이 얼키설키 통통이를 바라보는 시선들로 녀석을 전방위로 포위하고 있었다. 



몇 일을 지켜보았을까. 갈등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그 상황을 아이들과 이야기 나눠가며 풀어갔다. 그러면서 유심히 무엇이 문제일까 하는 관찰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정도면 되었다 싶어 어느 한 시간을 택해 아이들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통통이에게 오늘 이 시간 통통이와 친구들 사이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솔직하게 나눴으면 좋겠다고 동의를 구했다. 선생님을 믿고 함께 조금 불편한 이야기들일지라도 나눠봤으면 좋겠다고. 



다행히 동의를 해줬고, 먼저 특정한 상황에서 통통이가 하는 말과 행동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도록 했다. 그 사이 통통이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또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듣다보니 통통이의 말과 행동에는 억울함이 많이 묻어 있었다. 현상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부분의 책임이 통통이에게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앞 부분에는 통통이가 가진 억울함을 어느 누구도 들어줘본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통통이에게 너의 억울함들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언제라도 충분히 들어줄 거야. 니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친구들에게 네가 끼친 불편함들에 대한 부분은 너의 책임이 클 수 밖에 없는 거야. 억울하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어."



그 이야기들을 나누는 한 시간이 너무 컸었던 모양이다. 이후 갈등 상황이 발생했던 몇 차례 녀석의 억울함을 읽어주는 동시에 그 억울함이 표출된 행동이 주는 불편함을 구분하여 짚어가는 형태로 이야기 나눠갔다.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울면서 대응하던 모습이 어느새 사라졌다. 수업 시간의 방해 행동도 그렇고, 문제 상황을 만나는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중간놀이 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별 문제없이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며 뛰어논다. 언제나 옆을 맴돌며 갈등을 일으키곤 하던 통통이는 어느 새 친구들 속에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제 자리와 역할을 되찾아 주는 일 역시 우리 학교가 해야 할 노릇이지 않을까. 친구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통이는 9월 우리 학급 자치활동 시의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언제나 수업을 방해하고 선생님께 혼나야했던 자리에서 이제는 조금 서툴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학급 회의를 진행하는 자리에 서 있다. 물론 여전히 우리가 여러 문제들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허나, 그 문제들과 마주하는 일에 통통이도, 우리 아이들도, 나도 모두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 그 모든 것이 우리가 멈춰서서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부거리가 되었다.



요사이 여러 갈등 문제를 둘러싸고 학교 안에서 시스템화되어 펼쳐지는 모양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안타깝다. 학교 폭력이라는 용어도 그렇지만, 그걸 해결한다는 명분하에 절차와 매뉴얼, 시스템을 학교 안으로 들이밀고 난 다음 학교 안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이상스럽게도 교육을 해야 할 학교란 공간에서 교육을 소외시키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느낌이다. 갈등과 문제상황을 끊임없이 만나가며 그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 나가야 할 아이들에게 꼭 배우고 성장해야할 배움거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학교에 대해 언제나 불안하고 불편했던 통통이 어머니도 이제는 여유가 좀 생기셨다. 1학기를 마무리하고 고맙다고 하셨다. 내게도 통통이와 한 교실에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도 또 우리반 다른 친구들에게 참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오늘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 





심은보 ㅣ 일곱 해 된 경기도 혁신학교 평택 죽백초등학교에 여섯 해 째 행복한 배움터 만들기에 애쓰고 있다. 학교에서 맡은 일은 희망을 일궈가는 우리 선생님 한 분 한 분 응원하며 함께 가고자 뜻과 마음 모아가는 죽백초 희망부장이다. 아이들 속에선 심슨으로 살고 있으며 좌충우돌 모두에게 의미있는 나날 가꿔가기 위해 4학년 아이들과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며 길을 찾아가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0.30 15:07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평화를 위해 촛불을 밝힙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다시 한번 영국 너도밤나무 숲에서 인사드립니다.

지난 8월 초, 한국에서 잠시 뵈어서 참 반가웠습니다. 어깨동무 사무국 식구들이 크리스토프 할아버지 추모식에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2주동안 책 발간식과 추모 모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특히 뜻 깊었던 것은 한국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고 건설하고 계신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겁니다. 추모식은 서울 인수동의 마주 이야기라는 마을찻집에서 열렸는데요, 사실 마주 이야기 찻집 지기님들은 밝은누리라는 운동의 청년분들이 창업을 한 곳입니다.

1991년 몇 명의 청년들이 모여 한국이 처한 아픔을 함께하고, 희망을 살아내고자 하는 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현재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 서석마을에서 청년들과 가족들이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유기농 마을 밥상 같은 마을 식당을 운영하고, 생태건축법을 배워 집을 짓고, 공동육아에서부터 생동중학교, 대학 교양 과정인 삼일학림에 이르기까지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 서로를 살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잠시나마 이곳에서 사는 청년들을 만나며 얼마나 많은 한국의 청년이 더욱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며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삶을 일구어가고 있는지 실감했고, 그 실험을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미소는 한 여름의 피로를 덜어주었습니다.




▲ 8월 7일 서울 인수동에서 열린 크리스토프 아놀드 추모식 및 

<희망이 보이는 자리> 발간식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             

사진 <복음과 상황> 이범진 기자



추모식 때 짧은 강연을 해 주신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님을 기억하시죠? 한국 전쟁 때 아버지를 북한군에게 잃고, 동생도 전쟁터에 나간 뒤로 영영 소식을 듣지 못하는 아픔을 겪은 분입니다. 피난 시절 해군에 입대에 미군 해군에서 훈련을 받다가 만난 친구를 통해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귀국해서는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던 서광선 선생님은 1991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북한의 대표단들과 평화에 관해 토론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원수의 아들’인 북한 그리스도교 연합 강량욱 목사의 통역을 맡아주게 됐습니다. 



북한 인사의 통역을 해 주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했는데 북한의 기독교계 인사들을 돕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광선 선생님은 그날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가슴에 와 닿은 말을 기억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원수를 도와주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끝내 선생님은 통역을 허락했는데 뜻밖에 그 일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서광선 선생님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 증오에서 벗어났습니다.”라는 말씀을 하고 멈춘 순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청중이 크게 손뼉을 치던 순간을 기억하시죠? 



한국을 2주동안 방문하고 돌아온지 3주가 넘었지만 여전히 저희 부부는 그때의 만남을 다시 생각하고, 그때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준 분들 한 분 한 분을 떠올리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이 이어지고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이 강경한 발언을 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숨도 못 쉴 정도로 팽팽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8월 초 한국에서 만난 분들이 저희에게 일러주신 것은 ‘평화로운 미래를 향한 확신을 품고 지금 하는 작은 일을 그대로 하라.’ 였습니다. ‘두려움에 지지 말고, 화해와 용서가 답이니 포기하지 말라’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도 어린 세 아들과 함께 저녁마다 촛불을 밝히고 평화를 위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왠지 마음에 힘이 생기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영국인 친구들에게 남북문제에 폭력이 답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 저녁에 열린 공동체 모임에서 제가 이런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걱정을 나누었더니 모임 후에 한 할아버지가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한국의 얘기를 해 줘서 고마워. 내가 어렸을 때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라 한밤중에 대피하는 일이 많았어.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우리 가족이 사는 3층에서 지하실까지 뛰어 내려가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고. 하지만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제공해 주셨어. 뭐 큰 말씀을 하신 건 아니었어. 나에게 늘 미소지으면서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함께 기도해 주셨어. 그렇게 부모님이 함께한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도 이겼던 것 같아.” 



이렇게 저희는 아이들과 함께 한국과 세계 곳곳의 평화를 기원하며 촛불을 밝히겠습니다. 그리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저희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한국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 가사를 한국말로 번역해서 보내 드립니다. 이 노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인터넷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QCN893hzueQ




내 마음속의 작은 빛(This Little Light of Mine)


내 마음속의 작은 빛 

이 빛을 빛나게 할 거야(3번 반복)


어디를 가든지

이 빛을 빛나게 할 거야(3번 반복)


밤이 새도록

이 빛을 빛나게 할 거야(3번 반복)


한국에까지(원하는 나라 또는 사람 이름을 넣을 수 있음)

이 빛을 빛나게 할 거야(3번 반복)




2017년 9월 7일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게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0.30 14:48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나폴레옹 전쟁이 남긴 유산

 


김소울



프랑스의 군인이자 제 1통령, 황제를 역임했던 나폴레옹1세(Napoleon I)는 군지도자라는 명성 때문에 히틀러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12년의 권력행사 후 산더미 같은 해골을 만들어 냈다면, 나폴레옹은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소년 나폴레옹은 16세의 나이에 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교가 되고, 1793년 툴롱에서 천재적인 전략으로 영국군을 몰아냄으로써 무기력한 프랑스 혁명군의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1795년에는 프랑스 국민공회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정치권력에도 가까워 졌고, 그 즈음하여 음악가 베토벤은 “나폴레옹은 오합지졸 군대를 단 며칠만에 최정예 부대로 변화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이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쿠데타를 장악할 때마다 “공화국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왕권을 몰아낸 나폴레옹이 선택한 것은 황제가 되는 일이었다. 1804년 12월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탄생한다.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은 신고전주의 작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d)에 의해 그려졌으며, 정치적 선전목적으로 좋은 효과를 본 나폴레옹은 이후 다비드에게 유사한 그림들을 몇 장 더 주문하게 된다.





▲ 쟈크 루이 다비드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1800)




황제 즉위 후 본격적 정복전쟁을 시작한 나폴레옹은 유럽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지만, 영국과의 1805년 트라팔가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터너(William Turner)가 그린 <트라팔가 전투>는 조지 4세가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트라팔가 해전을 다룬 작품으로 그림 속에는 영국 해군함 HMS빅토리가 보이고 있다.  





▲ 윌리엄 터너 <트라팔가 전투> (1824)


 


빅토리호가 1805년 포츠머스를 떠나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와 마주하자, 지휘관 넬슨은 신호를 보내게 된다. “영국은 모든 이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전투는 몇 시간 후 승리하였지만, 지휘관 넬슨은 전투 중 적의 총에 맞게 되고, 잠시 후 승전 소식을 들은 후 배 위에서 사망하게 된다.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을 나폴레옹 전쟁시대 해전의 결정판으로 보고 있다.



나폴레옹은 패전 이후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와 라틴아메리카를 통해서 대륙에 들어가지 못한 손실들을 보충하였고, 오히려 해상봉쇄령을 통해 유럽 전역을 압박하게 된다. 이로써 영국보다 유럽대륙이 더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되고, 나폴레옹의 전략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 대륙봉쇄령을 무시한 러시아에 원정을 계획하였지만 몰락하고 만다.



나폴레옹은 몰락했지만 그가 유럽에 남긴 영향력은 엄청났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프랑스 혁명 이념을 전 유럽에 전파했다. 민족주의는 민족 독립과 통일을 주요 가치로 가지는 사상이며, 자유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이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자유와 평등을 이루고 권리를 확대하려고 한 사상이다. 이는 유럽 각국에서 봉건제와 신분제가 폐지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아이캣 미술치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0.30 14:38

[시선 | 세상과 만나는 인문학]


어린왕자가 전하는 길들임의 구도 여행기

 

송태효


▲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와 만난 어린 왕자.

스탠리 도넌의 「어린왕자(The Little Prince)」 (1974)


『어린 왕자』는 어린이와 어른 두 사람의 예기치 않은 만남과 이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여행기이다. 이 이야기는 이중의 여행 구조를 지닌다. 길들임과 책임이라는 인간관계의 진실을 찾아낸 어린 왕자의 구도 여행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자신 속에서 잠들어버린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비행사의 추억 여행이다. 


비행사의 잊힌 분신이기도 한 어린 왕자는 사랑의 멘토 여우와의 낯선 만남을 통해 길들임이라는 보석 같은 지혜를 깨닫고 소행성 B612로 돌아간다. 화자인 비행사는 하늘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자신의 자가용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륙하였으나 사막에 불시착하여 어린 왕자를 만나 그의 여행담을 들으며 그 기원과 신비를 풀고 일상으로 귀환하게 된다.



사실 어린 왕자는 누구나 그러하듯 순수하기만 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까탈스럽게 구는 장미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새로운 친구를 찾아 이웃 별을 유람한다. 우스꽝스러운 왕, 허영장이, 술 아저씨, 사업가, 지리학자를 만나 실망하나 다행히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로등지기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과 정직한 대화를 나눌 수 없어 “어른들은 정말 희한해”라는 말을 반복하며 헤어지고 만다.



지리학자의 추천으로 방문한 지구 사막에 떨어져 처음 만난 것은 징그럽고 다리도 없는 흉측한 뱀이었다. 하지만 뱀은 곧 어린 왕자의 순수함을 알아보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며 다시 찾아오라고 충고한다. 사막의 꽃은 어린 왕자에게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 제자리를 맴돌며 고통스러워한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모래와 바위와 눈길을 헤치고 마주한 정원에는 무려 오천 송이의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이 세상에 단 한 송이뿐인 꽃을 갖고 있어 자부심이 대단했던 어린 왕자는 그만 자신이 남겨두고 온 장미 한 송이와 세 개의 화산으로는 위대한 왕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풀밭에 누워 눈물을 흘리고 만다.



▲ 오천송이 장미꽃을 보고 풀밭에 엎드려 우는 초라한 어린 왕자



길들임과 우정



거창하고 심오한 것을 찾아내어 위대한 왕자(grand prince)가 되고자 했던 어린 왕자(little prince)가 여우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관계 맺음으로 하나의 사건이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장미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고, 한 송이 장미나 물 한 모금에서 내가 찾고 있는 것을 구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친구도 사귀고 싶고 알아볼 것도 많다며 떠나가려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위대한 진실을 알려준다. 자신을 길들여야만 친구가 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길들인 것뿐이라고. 



여우: “제발…날 길들여 줘!”


어린 왕자: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찾아볼 친구도 많고 알아볼 것도 많아.”


여우: “길들이는 것들만 알 수 있다니까. 사람들은 이제 뭘 알려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 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는 거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어린 왕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여우 : “정말 참을 줄 알아야 해.”



▲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해질거야"




원래 ‘길들이다’는 ‘어떤 일에 익숙해지다.’ 혹은 ‘행동하는 방법이나 생활 습관을 지도하여 올바르게 나가도록 하다.’라는 뜻을 의미하는데, 이 말은 예전부터 우리도 일상적으로 사용해 온 말이다. 세조의 불경 언해본에 “부처는 길들이는 사람이오.”, “그 마음을 질드려 큰 지혜를 가르치시니” 등 그 용례가 자주 나온다.



이렇듯 ‘길들이다’라는 말은―오늘날 순응적인 인간의 태도를 의미하는 야유의 이미지도 지니게 되었지만―원래 우리말에서는 자연 상태의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을 순화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지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프랑스어 ‘길들이다 apprivoiser’(to tame)는 어원적으로는 친해짐(familiariser)을 말하며 동물을 ‘길들이다’ 혹은 ‘서로 친구가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생텍쥐페리 역시 길들임을 마음속 순수한 심성을 찾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여 우리의 ‘질드리다’와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다.  



『어린 왕자』의 화두로 우뚝 선 길들임이란 사실 관계 맺음으로서의 우정의 또 다른 표현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가 깨우쳐준 사랑과 우정이라는 길들임의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순수한 아이가 되어 과거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기적이고 호기심 많은 아이가 자신을 기다리는 장미를 찾아 B612로 떠나는 순수한 아이로 돌아간 것이다. 



▲ 300번째 언어인 아랍어 방언 하사냐어(Hassanya)로 번역된 『어린 왕자』





길들임, 진정한 평화의 길



『어린 왕자』는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서 3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2억 부 이상 출간된 세계 시민의 교과서이다. 그뿐 아니라 만화와 소설, 아동문학, TV, 영화, 애니메이션, 연극, 오페라, 뮤지컬, 이미지 패러디, 마리오네트, 샹송, 창작 연주, 퍼포먼스, 패션, 광고, 인문 치유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어린 왕자』의 길들임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다. 프랑스 알자스의 어린 왕자 공원, 브라질 파라나의 ‘페투에노 프린시페’(어린 왕자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병원, 일본 하코네의 ‘어린 왕자 박물관’, 경기도 가평의 ‘쁘띠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서 어린 왕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 어떤 문화 콘텐츠가 이토록 세계의 시민들을 하나의 마음으로 함께하게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국경 없는 공연 예술 문화의 공간을 창조해냄으로써 어린아이와 어른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전하는 『어린 왕자』. 국가 간 평화를 의례적인 조약과 제도 확립으로 담보할 수 없듯이 제도와 공공질서 확립만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 없다. 평화의 뿌리는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고,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길들임에 있다. 어린 왕자가 뱀과 여우 그리고 비행사와 길들여저 친구가 되듯이 말이다. 어린 왕자의 길들임은 우정과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관계 맺음이며, 관계 맺음은 책임 질 줄 아는 것이며, 책임지는 것은 진정 인내를 조건으로 한다. 숫자와 타이틀 경쟁에 멍든 어른들이여 인내심을 갖고 어린 시절의 나에 길들어보자.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평화주의자 레옹 베르트의 어린 시절에 헌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도에만 길들어가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뿐이다.





송태효 ㅣ 불문학 박사로 현재 '어린왕자인문학당대표와 '성남시지역발전자문위원회교육체육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저서로는 영화는 예술인가어둠의 방-시와 영화 속 그림자 이야기등이 있고역서로는 생텍쥐베리 사람들의 땅어린 왕자』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0.30 14:21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 관계사]



휴전선을 밟고 : 제2차 남북정상회담

 


정영철



1945년의 38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진 후, 남북을 통틀어서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밟은 적이 있을까?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넘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북이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바로,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비행기도 아닌, 그리고 자동차 속에서도 아닌 직접 걸어서 이 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남의 최고 통치자-군 최고책임자가 직접 이 선을 넘어, 평양으로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제2차 정상회담은 시작되었다. 2000년 제1차 정상회담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길 위에 한반도의 평화와 협력의 더 큰 길을 내기 위해 제2차 정상회담의 길은 그렇게 열렸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적대와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손을 잡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이후부터 남북관계는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한국 대 터키)이 열리는 날 서해에서는 남북의 함정이 충돌하는 제2차 서해교전이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북미간의 대립이 강화되고, 한반도에 다시금 전쟁의 위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이 출범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북한과의 대립은 2002년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에 기반한 핵무기 제조 의혹 등으로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 2차 핵위기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북한과 미국의 핵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1994년 북미가 합의한 제네바 합의는 끝내 파기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으로 맞섰고, 2003년 1월에는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북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북미간의 대립만 격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그간의 대북정책을 놓고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이 공표되면서 ‘남남갈등’만이 아니라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에도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길에서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에 대한 편의를 봐준 혐의가 특검의 대상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특검은 남북간 화해의 노력과 이를 위해 노력한 수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특검으로 인해 소떼 방북의 역사적인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검찰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끝내 정몽헌 회장은 검찰 수사 와중에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북간의 갈등도 작지 않았다. 2004년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관련 갈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2004년 7월에는 남북간 당국자 대화가 중단되었다. 때마침 동남아를 경유하여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남북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여기에 북미간 갈등이 6자회담으로 어느 정도 봉합되는가 했지만, 결국 2005년 2월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성명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긴장국면으로 흘러갔다. 2004년 하반기부터 2005년 상반기까지는 민간차원의 대화와 협력은 지속되었지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회담은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2005년 6월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의 협력을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대해 뭔가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금까지 기능주의적 접근에 따라 평화-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거나, 남북간에 합의와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상황에서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안보 문제는 남북의 합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침 2005년 ‘9.19 공동선언’에 따라 북미간 핵 갈등 해결의 전기가 어느 정도 마련되고 - 이는 곧바로 BDA 사태로 인해 위기로 바뀌었다 - 2006년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반도의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밝히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6자회담에서 BDA 사태로 좌초 위기에 빠졌던 9.19 공동성명을 되살리는 베이징 ‘2.13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제시한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한반도 평화 - 비핵화를 포함한 - 그리고 경제협력의 더 높은 수준으로의 발전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북한과 시도하게 되었다.    


 

마침내 2007년 8월 5일 남북간에 정상회담이 비공개적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8일에는 8월 28일 제2차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청와대는 2차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동시에 견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고, “양 정상이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함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남북경협 및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ㆍ질적으로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상생의 화해ㆍ협력 기조가 지속되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주요 의제로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제기하였고, 실제 2차 정상회담은 그런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다. 



제2차 정상회담을 위한 평양행을 선택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육로로 방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일 청와대를 출발하여,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통과하여, 개성-평양 고속도를 따라 평양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의 최고책임자-군최고통수권자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 MDL 통과장면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시간은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 5분이었다. 사실, 군사분계선이라고 하지만, 표식이 없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무형의 경계일 뿐이다. 과거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당시가 1948년 4월, 그때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나서야 이제는 38선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남의 정치지도자가 넘어서게 된 셈이다. 남의 최고지도자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는 의미는 더 이상 한반도가 전쟁이 아닌 평화, 갈등이 아닌 협력의 시대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선을 넘기 직전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국민 여러분, 오늘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날이라서 가슴이 무척 설레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 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발전이 정지돼 왔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잘 다녀오겠습니다. 

군사분계선 걸어서 통과하기 전 2007. 10. 2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노무현 대통령 일행은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접을 받았고, 이후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역사적인 ‘10.4 정상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하였다. ‘10.4 선언’에는 ‘6.15 공동선언’에서는 언급되지 못했던 평화의 문제 특히, 한반도의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한 종전선언의 문제, 나아가 평화체제의 문제까지 언급되고 합의되었다. 또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개성공단을 뛰어넘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의 문제가 다방면에 걸쳐 합의되었다. 이 외에도 그간 남북 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해해상에서의 남북 충돌을 방지하고, 오히려 ‘갈등의 바다’를 ‘협력의 바다’로 만들어 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창설에 합의하였다.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합의였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평화체제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남북의 협력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예고하는 합의문이었다. 땅에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을 넘었지만, 그 효과는 남북의 모든 장벽을 넘어뜨릴 수도 있는 합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10.4 정상선언’은 합의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좌초할 운명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남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 즉,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면서 ‘10.4 정상선언’을 이끌어갈 만한 추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 ‘10.4 선언’의 합의 내용은 남북의 협력체제가 전제되지 않는 한 하나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제는 북과 미국이 핵심 축을 이루는 문제였고, 이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했다. 또한, 남북의 경제협력 사업 역시 남북의 정치적 협력이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남북의 정치 및 군사적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남측의 동력이 상실되면서 아무것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남북관계는 6.15 공동선언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고, 서해상에서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또한, 군사분계선 상에서의 상호 비방과 총격도 벌어지면서 한반도는 다시금 갈등과 대립의 장벽이 높아져갔다. 



2007년의 제2차 정상회담은 남의 최고통치자가 군사분계선을 직접 걸어서 넘어가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리고 그 합의 내용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현실적으로 정상회담의 추진과 성사가 너무 늦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추진되어야 할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이른 시기에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합의되고, 실행되어야 했다. 둘째, 지극히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진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더 이상의 관계 개선의 추동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강경정책에 부응하는 ‘한미동맹’체제가 강화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사그라질 듯 보였던 냉전의 대립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휴전선을 밟고 밟아, 선을 지우고 길을 내기 위한 노력은 아쉽게도 원했던 것만큼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선을 밟고 밟아, 길을 내기 위한 커다란 발걸음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고, 앞으로 언제든 그 길을 다시금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교훈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남이든 북이든 정책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우리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원칙과 내용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청와대, 제2차 정상회담 발표문

2007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50년 금단의 선을 걸어서 넘다(서울: 호미, 2009)

김연철『한반도평화경제공동체구상』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7)

노무현 재단, 『NLL의 진실과 노무현의 전략』 (서울: 전자책나무, 2013)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0.30 14:07

[이슈 | 여전한 먹구름]


여전한 먹구름

 

김명준







어느 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선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세월이. 


2002년 3월 말의 오사카였다. 봄이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을 무렵이었으나 겨울의 방해였는지 저녁무렵의 오사카 하늘의 검은 먹구름은 비를 뿌리고 있었다. 다음날의 조선학교 졸업식.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 (약칭 오사카 동중, 東大阪朝鮮中級学校) 였다. 


무슨 신대륙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내 심장은 뛰고 있었다. 치마저고리가 눈에 들어왔고 그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린 여학생이 동무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눈물 흘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달리 색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선생님도 눈물을 흘렸다. 모든 말들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분명히 또박또박 우리말이었다. 남도 북도 아닌 그들의 우리말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지만, 그리고 나의 ‘재일조선인’과 ‘우리학교’에 대한 시선도 더 깊어졌지만,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하늘은 검고 매일같이 비만 뿌리고 있다. 일본의 하늘은 적어도 재일조선인에게는 한번도 맑은 적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는 비가 아니라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9월 13일 수요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카스미가세키역 1번출구 앞은 1500여명의 조선학생과 동포들이 내지르는 한숨과 비탄으로 가득했다.  2014년 부터 3년 동안 진행되었던 ‘무상화 재판’의 1심 판결이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로 ‘패소’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슬픔이 도를 지나쳐 다리의 힘을 잃고 주저 앉은 어머니가 보였고, 눈물 범벅이 되어 하늘만 쳐다보는 동포 학생들이 있었다. 


2010년 4월 자민당 50년 독재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일본 민주당은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법’을 시행했다. ‘고등학교에 준하는 교육을 받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는 훌륭한 취지였다.  일본 교육법 상 ‘각종학교’에 속하는 외국인 학교 또한 이 법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내 최다의 외국인학교인 ‘조선학교’ 도 물론 수혜 대상이었다. 학부모, 학생들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주당은 공공연히 ‘정치 외교적 문제와 관계없다’ 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일본의 언론과 정부 각료의 ‘납치문제’ , ‘북한 때리기’에 혜택이나 온정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던 동포들이었으니 새 정부의 이런 조치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환희의 나날은 잠시였을 뿐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오직 조선고급학교(전국 조선학교 64개교 중 10개교) 만이 이 대상에 제외된 것이다. 


물론 이유는 ‘정치외교적인 문제’ 였다. 북과 관계가 있다는 것, 조총련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 등이다. 법적 제도적 ‘차별’을 공공연히 시행하지 못하고 ‘심사대상’으로 둔다는 식의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민주당 정부. 2011년의 대지진과 연이은 실정으로 자민당에게 다시 정권을 내주었던 것이 2012년이었다.  제2차 아베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아베정권은 그 정체를 드러내는 첫 작업으로 ‘무상화에서 조선학교를 영구제외’할 것을 선택했다. ‘고교무상화법’의 ‘규정’까지 마음대로 뜯어고치면서 ‘조선학교’를 공식적이고 영구적으로 확고불변하게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2010년 무상화에서의 제외 이후로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사이에 어머니들은 UN으로 달려가 호소했고, UN사회권규약 위원회의 시정권고, 인종차별철폐 위원회의 시정권고가 있었지만 일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수업과 클럽활동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가 홍보 전단지를 뿌리고 서명을 받았다. 그 거리에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조직화, 격렬화 되어가던 ‘혐오주의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들과 한 뿌리인 우익 지자체 지사들은 조선학교에 지급해야 할 ‘교육보조금’을 끊어버렸다. 교사들의 월급은 끊어지고 고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학부모의 부담은 늘어만 갔다.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있을 때 학생들이 용기를 냈다. 


2013년 1월 부터 전국 5개 조선고급학교 학생 250여명이 스스로 원고가 되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오사카, 히로시마, 아이치, 큐슈, 도쿄의 조선학교 학생들이었다. 각 지역마다 일본의 유력한 인권변호사들이 변호인단을 꾸렸다. 투쟁은 재판정에서만이 아니라 ‘무상화 연락회’라는 일본인 지원단체가 중심이 되어 ‘집회’, ‘호소’, ‘선전’ 등으로 이어졌다. 화요일 마다 오사카 부청 앞에서 수요일마다 도쿄의 지하철 역 앞에서 금요일 마다 문과성 앞에서 집회와 항의를 이어갔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지난 7월 19일. 



히로시마에서 첫 선고공판이 열렸다. 원고인 조선학생 측의 ‘패소’. 

7월 28일, 열흘을 지나 오사카에서 또다른 판결이 나왔다. 이번에는 ‘원고측의 전면 승소’였다. 오사카 동포들 뿐만 아니라 전체 동포들이 환호했고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했다. 일본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9월 13일. 도쿄의 학생들은 ‘패소’했다. 재판장은 ‘원고측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재판비용은 원고측이 부담한다’라는 두 마디를 남긴채 인사도 받지 않고 황급히 재판장에서 사라졌다. 102쪽이나 된다는 판결문의 요지 조차 읽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판결문의 어디에도 피고인 국가가 주장하는 ‘정치외교적 판단이 아니다’ 라는 것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고교무상화의 대상이 되면 학생 1인당 년간 12만엔~24만엔의 취학지원금을 받게 되어있다. 정부의 지원이 일체 없으며, 지자체의 지원조차 끊어진 조선학교는 해당 취학지원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부족한 학생 수(10개 고교 1500여명) 때문에 교원 월급은 커녕 학교 운영도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의 판결은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무상화법의 본래 취지를 무시하고 ‘규정’까지 고쳐가며 조선학교를 정치적, 외교적 문제를 이유로 차별하고 있는 일본 행정부를 사법부가 견제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정당화시켜주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내년인 2018년 초에는 아이치와 큐슈의 무상화 재판 선고가 열릴 것이다. 또 2018년 말이나 2019년 초에는 오사카와 히로시마 그리고 도쿄 재판의 고등, 최고 재판소의 판결 또한 나올 것이다. 1948년 4월 24일, 오사카의 16살 김태일 소년이 일본경찰의 조선학교 폐쇄령에 맞선 집회에서 진압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른바 한신교육투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 해에 조선인들은 계엄령이라는 엄준한 상황 속에서도 학교를 끝끝내 지켜냈다. 그러나 다음해는 1949년 1월 방심한 틈을 타 일본정부는 조선학교를 폐쇄해 버렸다.  그 때로부터 정확히 70년이 지난 지금,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일본의 민족교육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2010년 당시 조선고급생이었던 어떤 학생이 그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당시 원고였던 학생이 이제 변호사가 되어 어쩌면 자신의 사건을 변호사 자격으로 바라보게 될지 모르는 ‘슬픈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런 사태를 그저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는 그들 ‘재일동포’들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일본의 하늘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검은 비구름이다.




김명준 ㅣ 영화 '우리학교' 감독,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7.10.30 13:33

피스레터7 out-최종 게시용.pdf




● 여전한 먹구름 | 김명준


● 휴전선을 밟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 | 정영철


● 어린 왕자가 전하는 길들임의 구도 여행기 | 송태효


● 나폴레옹 전쟁이 남긴 유산 | 김소울


● 평화를 위해 촛불을 밝힙니다 | 원마루


● 통통이 이야기 | 심은보 






'피스레터(PDF)'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스레터 9호(통권11호)  (0) 2018.02.19
피스레터 8호(통권10호)  (0) 2017.12.20
피스레터 7호(통권9호)  (0) 2017.10.30
피스레터 6호(통권8호)  (0) 2017.08.01
피스레터 합본호(통권1호-7호)  (0) 2017.08.01
피스레터 5호(통권7호)  (0) 2017.07.26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 심포지엄 ‘평화교육은 우리를 바꿀 수 있을까?’



일시 : 2017년 11월 15일(수) 14시 - 18시

장소 :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망원역 1번출구)

주최 :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서울교육대학교 통일교육연구소

후원 : 통일부



2017년, 남과 북의 상황은 아직도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어린이들은 평화로운 만남과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는 지난해에 이어 평화교육심포지엄을 개최합니다. 이번 행사는 우리와 같은 분단의 아픔과 갈등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평화교육 실천가, 각 계의 전문가들이 평화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다양한 평화교육의 방식을 통해 우리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The relation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are still frozen in 2017.

Will it be possible that children in two Koreas dream a peaceful future where they can meet together?

The Peace Education Center of Okedongmu Children in Korea(OKCK) holds Peace Education Symposium following last year.

Experts from various fields including peace education activists from Northern Ireland, which also suffers from the tragedy of national division and tries to overcome the conflict, will take part in the event and conduct in-depth discussions.

The symposium will become a venue where people share their thoughts on how can various peace educations make a difference in the society.

We cordially invite you to participate in this event.



참가 안내 Participation Guide

• 행사는 동시통역으로 진행됩니다.

• 참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온라인 사전등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문의 | 어린이어깨동무 사무국 02-743-7941/2  nschild@okfriend.org


• Simultaneous interpretation will be provided.

• Pre-Online Registration is required in order to participate.



코리밀라 Corrymeela

신구교 대립이 격화된 1970년대 설립되어 피난처의 역할과 열린 공동체를 추구해온 북아일랜드의 평화교육기관이다. 코리밀라의 대표인 콜린 크렉은 지역 청소년 활동가로 시작해, 코리밀라 대표에 이르기까지, 지난 40여년간 유럽, 아프리카, 중동, 미국, 등지에서 평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활동가를 훈련시켜 온 북아일랜드 출신 평화 교육 활동가이다. 


퍼펫우먼 Puppet Woman

2012년 북아일랜드에서 설립되었으며 인형극을 활용한 평화교육 프로그램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이 단체 대표인 이본 네일러는 교사활동과 더불어 인형극을 활용한 평화교육 프로그램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왔다. 교사 은퇴 이후에도 코리밀라,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평화학 대학원, 북아일랜드 통합교육협의회 등에서 평화교육 관련 주요 직책을 맡아 왔다.





‘Can Peace Education Make a Difference?’

 

 

Organised by: Okedongmu Children in Korea; Centre for Unification Educa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Sponsored by: Ministry of Unification, Republic of Korea

Date: 15 November 2017

Venue: Changbi Seokyo Building

Programme 


14:00-15:50

Opening Remark

Prof. Gi-Beom Lee, Chairman of the Board, Okedongmu Children

Session 1

Chair: Prof. Yun-sang Gu, Sookmyung Women's University

Presenters: Mr. Colin Craig, Corrymeela

The calm after the storm: The challenge of post-conflict peacebuilding Prof. Soon-Won Kang, Hanshin University

What can we learn from peace education in Northern Ireland?

 

Chair: Dr. Dong-Jin Kim, Trinity College Dublin

Panel discussion: Prof. Woo-Young Le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Prof. Young-Cheol Chung, Seogang University

15:50-16:10

Break

16:10-18:00

Session 2

Chair: Mr. Jong-Ho Park, Teacher, Sindorim High School

Presenters: Ms. Yvonne Naylor, Puppet Woman

Peace Education and Good Relations Practice- Some Case Studies employing Puppets

Mr. Eun-Seok Yang, Teacher, Susong Primary School

Developing content for peace education

Mr. Kwan-Ui Choi, Semyung Primary School Dodgeball for peace education

 

Panel discussion: Ms. Jinhwa Chung, Kangshin Middle School

Prof. Chul-Kee Yoon,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