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4.19 10:39

[이슈]


어떻게 해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가 될까


은종복



지금 한반도는 평화로운가 당장 총싸움을 하지 않으니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 말하기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다. 한반도 남과 북 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불안으로 떨고 있다


왜 그럴까. 북녘은 핵무기를 갖고 있고 남녘은 미국산 첨단 무기를 끝없이 사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무기 가 있어서 평화를 지켜준다고 말을 한다. 만약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었으면 미국이 그 나라를 쳐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 일면은 맞다. 그 생각은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미국 백성을 사랑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 이다. 북녘 정권이 핵무기로 미국 본토를 폭격해서 미국 사람들이 많이 죽는 것을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두려워할 까. 그럴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 본토에 북녘 핵무기가 떨어지면 한반도 북녘은 쑥대밭이 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북녘 핵무기가 잠깐의 평화를 보장해 줄 진 몰라도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순 없다. 마찬가지로 남녘을 미국산 첨단무 기로 도배를 하면 평화가 보장될까. 절대 아니다. 한반도 가까이 있는 일본, 중국, 러시아가 가만있을까. 그 나라들은 그것을 빌미로 더욱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키운다. 이렇게 한반도 남과 북에서 군사력을 키워서 힘들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불안을 안 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이다.

 

일본에 있는 평화활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나라가 있으면 군대가 있어야 하고 군대가 있으면 다른 나라에 분쟁이 일어나면 총을 들고 쏘게 되고 결국을 평화를 깨게 된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을 해보자. 평화를 지키려면 다른 나라에 분쟁이 있을 때 총 대신 먹을거리와 의약품을 들고 가고 그러면 군대가 필요 없고 군대가 없어도 되면 나라와 민족도 필요 없다.”

 

사실 러미스 생각을 현실에서 이루기는 힘들다. 하지만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남과 북이 끝없이 군대 힘 을 키우는 속에서는 절대 평화를 이룰 순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북녘이 먼저 미국 본토를 쳐들어가진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면 북녘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다. 결국 미국이 북녘을 공격할 수 있다. 그날은 전쟁을 일으켜서 더욱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할 때다. 지금처럼 남녘에서 미국 무기를 끝없이 사오고 미국 부자들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면 미국이 북 녘까지 자신들 물건을 팔 수 있는 곳이 되게 하려고 전 쟁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떨까. 남녘이 미국산 무기를 안 사오고 미국 물건이 덜 팔리고 북녘은 여전히 미국 말을 듣지 않을 때. 돈에 눈 먼 미국 사람들 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을 때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나는 한반도 남녘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총을 들고 나 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한반도 사람들이 전 쟁 반대를 외치며 미국 편을 들지 않는다면 미국은 전쟁 에서 이길 수 없을 뿐 더러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꿈이다. 전쟁이 나면 한반도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군대에 동원 된다. 평소에 평화를 외치던 사람들 도 전쟁에 휘말리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도 남과 북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 하 루는 인민군이 되고 다음 날은 국군이 되기도 했다.

 

남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전쟁을 통해서 하나가 되어 서는 안 된다. 그것은 될 수도 없고 되고 나서도 아픔이 너무 크다.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길은 단 하나다. 남북에 사는 사람들 가슴 속에 평화 씨앗이 자라게 하는 것이다. 북녘은 핵무기를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 남녘은 미국산 첨단무기를 더 이상 사오면 안 되고 미군은 모 두 돌아가야 한다. 결국 우리나라가 평화롭게 하나가 되려면 다른 나라들이 쳐들어와도 맨 몸으로 맞설 수 있는 평화정신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를 보라. 물론 그 나라는 인구가 500만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지만 50년 넘게 군대 없이도 잘 살고 있다.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네는 다른 나라에서 쳐들어올까봐 무섭지 않냐고.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군대가 필요 없다.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싸울 것이다. 총이나 대포가 없어도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쳐들어온 나라 사람들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코스타리카에는 군대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는 지금 남북이 갈라져 있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살에 버티기 힘들다.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야 한다. 군대 없는 나라.

 

어린이 글을 쓰다가 지난 2007년에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은 내가 가장 따르는 사람이다. 그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이 땅에 애국자가 없으면 좋겠다고. 지금은 거짓 애국자가 넘쳐난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이름으로 한반도 곳곳을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그 뒤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다. 제주 강정미군기지, 평택미군기지는 얼마 전에 만들었다. 미군 기지를 만드는 일에는 이전의 보수적인 정권이나 지금의 정권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평화공부를 해야 한다. 한반도가 평화롭게 하나 되는 길은 남과 북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미국이 북녘을 쳐들어가도 남녘 사람들이 미국을 도와 북녘 동포들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절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꿈이다. 꿈을 현실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코스타리카 백성들처럼 군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작은 것부터 하자. 내 생각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일제강점기에는 하루 8시간을 일하자고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그때는 그랬다.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농사꾼들에게 한 달에 50만 원씩 주자. 다음으로는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를 못 찾는 젊은이들에게 한 달에 50만 원씩 주자. 문재인 정부에서도 고고도미사일방어망을 만들려고 군사비를 22조 넘게 늘렸다. 그 돈이면 위에 말한 기본소득을 할 수 있다.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서 못 하는 거다. 남녘 사회가 바뀌어야 북녘도 바뀌고 통일은 앞당겨진다.


마지막으로 남녘 사회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나라가 되려면 다음 세 가지가 없어져야 한다. 일등주의, 학력중심주의, 경제성장지상주의다. 많이 배우지 않은 사람도 가난하지만 서로 도우면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날이 와야 통일이 온다.

 

2018326일 월요일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은종복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25년 동안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을 꾸리고 있다. 내 꿈은 두 가지.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을 맞는 것,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8

[한반도 평화읽기]



담대한 구상과 유리그릇 :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정창현


연속적인 정상회담에 합의

 

조만간 남쪽 예술단이 방북해 공연한다. 공연 제목은 봄이 온다이다. 제목처럼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지나가고 평화의 봄이 찾아오고 있다.


남과 북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세를 대화·협상 국면으로 반전시켰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방한한 김여정 특사(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는 청와대를 예방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한 달쯤 뒤인 35일 남쪽의 대북특사단이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1시간의 짧은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남과 북은 4월 말 판문점 우리 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주제로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남측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남북 정상 간의 핫라인 설치도 합의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속적인 노력과 북측의 호응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기회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북특사단을 통해 북미정상회담도 제안했다. 대북특사단의 북한 방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특별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전례 없는 북미정상회담에 함께하면 두 정상이 역사적인 돌파구(historic breakthrough)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전했고, 공개되지 않은 특별메시지에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신뢰구축의 일환으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리스크(위험)가 있다는 참모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즉석에서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북한이 제시한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 비핵화 회담 의지 표명에 일단 신뢰를 보낸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간 접촉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도 상당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제한적 대북 예방공격 검토 등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나돌던 지난해 말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흐름이다. 신년사에서 99(북한 정권수립 70주년)의 대규모 행사를 위한 평화적 환경조성을 언급한 북한이 예상보다 전향적으로, 속전속결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기 1년 안에 남북대화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 올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행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정전협정 65년 만에 종전선언나오나

 

남북, 북미정상회담 합의로 한반도 정세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4월과 5월 한반도에서는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의 압박과 개입을 골자로 하는 대북정책, 전략국가론에 입각한 북한의 포괄적 세계전략이 부딪히는 정상외교의 장이 펼쳐진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중국, 일본과 정상회담을 통해 공조다지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롭게 외교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북한도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상무조(태스크포스팀)를 조직해 남북, 북미정상회담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26일 마침내 김정은 위원장이 첫 정상외교에 나서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했다.

 

평창올림픽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청와대(2018년 작성)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진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남측의 대북 특사단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청와대(2018년 작성)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진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구체적인 성과로는 종전선언이 거론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언급하며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남··3국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문제를 놓고 역사적 담판을 짓는 데 필요하다면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과 셋이서 직접 머리를 맞대자는 얘기다. 성사가 된다면 한반도 문제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자리가 될 수 있고, 종전선언에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담대한 구상이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남북정상회담에서 의견 조율 후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도록 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2+2회담방식이다.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미정상회담···중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정상외교를 통해 종전선언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를 위한 6자회담과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남···중의 4자회담을 병행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울과 평양에 남북연락사무소가 개설되고, 뒤이어 평양과 워싱턴에도 북미연락사무소가 개설될 수 있다. 세부적인 사안으로 한미연합훈련의 유연성 확보, 동북아 군사적 균형자 역할로의 주한미군의 지위 변화 등이 모색되고, 남북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포괄적인 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 북미정상회담은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선순환 구도를 핵심으로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의 정책시험대이자 실현과정이다. 단계별로 회담결과를 예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상황을 돌파하면서 평화만들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도 언급한 것처럼 지금의 대화국면은 과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과도 같다. 현재로선 전초전 격인 4월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5월 북미정상회담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최종적인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와 국면을 거쳐 최대 난제인 검증과 체제보장문제가 타결되어야 한다. 정상회담에서 큰 틀의 합의가 있더라도 실무회담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예상되지만 남이나 북이나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고 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본 원고는 2018327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정창현현대사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현대사전문기자와 <민족21> 편집주간을 역임했으며, 국가기록원과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7

[시선 | 평화의 마중물]



로힝야 난민촌에서 묻는다. “평화가 무엇인가?”


송강


당신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이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 맴돈다. 예수의 산상수훈, 간디의 비폭력 저항, 마틴 루터 킹의 꿈, 갈퉁의 적극적 평화 등등. 그러나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의 파편들 아래로 지극히 단순한 대답이 침전된다. 나에게 평화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평화이고 자기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을 다시금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평화 운동이 아닐까?

 

나는 이 평화에 대한 진실을 로힝야 족의 현실 속에서 더 실감하고 있다. 미얀마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방글라데시로 여러 차례에 걸쳐 추방당했다. 이렇게 강제로 쫓겨난 로힝야 족의 수가 70만 명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6천 여명이 학살당하고 2만 여명의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는 끔찍한 참화를 겪었다. 국경을 이루는 나프강과 인도양을 배로 건너다 배가 파선하거나 침몰하여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자 실제 정치에서도 실권자가 된 아웅산 수치여사나 자비를 가르치는 미얀마 불자들도 동정이나 연민을 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군부독재의 탄압에 저항했던 미얀마의 민주 투사들조차도 로힝야족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1824년 영국이 미얀마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을 때 당시 인도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을 데려와 앞잡이로 부렸기 때문에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로힝야족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방인들이요 쫓아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로힝야족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미 7~8세기에 자신들이 살고 있던 라카인 주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고 이미 당시부터 이슬람지도자 술탄이 라카인 지역을 통치했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현재 로힝야족이 당하고 있는 대량학살과 강간, 강제 추방과 인종차별은 비인도적인 만행으로 국제 사회의 규탄과 응징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개척자1)들의 로힝야족 현지 조사팀의 일원으로 작년 말부터 이번 달까지 두 차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촌에 파견되었었다. 난민촌이 시작되는 쿠트팔롱에 들어섰던 첫날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난민 천막들의 행렬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위에 검은 비닐을 덮은 허술한 천막집에서 여러 세대의 대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치 독일이나 전쟁 포로들의 집단 수용소 같아 보였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접경지역의 로힝야 난민촌은 약 10여 군데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비좁은 땅 덩어리에 작게는 4~5만에서 10만 명이상 되는 난민들이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 속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살고 있다. 각각의 난민촌 안에는 다시 A, B, C, D순으로 나뉘어진 블록들이 있는데 한 블록 안에는 대강 100가정이 모여 산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각 블록에는 마지라는 봉사자가 있는데 실상 이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협조하는 감시자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는 탄압을 피해 미얀마를 탈출한 로힝야족을 불쌍한 난민들이라고 여기지만 방글라데시 군인들은 이들을 자기 나라에 불법 침입한 범죄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로힝야 난민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날품팔이 이외에 취업 허가를 받을 수도 없다. 바닥에 기초를 놓고 영구적으로 살아갈 집을 짓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로힝야 족에게 있어서 현재의 난민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막장과도 같다


수많은 눈에 잘 띄는 큰길가에는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들이 로힝야를 위해 돕고 있는 000”, “로힝야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000”, “인도주의의 챔피언 000” 등등 요란스럽게 자기 활동을 선전해 대지만 정작 로힝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앞길을 헤쳐 나가도록 보이지 않게 묵묵히 돕고 있는 단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 종족의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로힝야족 청년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로힝야 난민촌

 

개척자들이 난민촌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난민촌의 어린이들이 배고프고 아프고 지쳐서 슬픈 기색으로 힘없이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겠지만 실상은 병들어 누워 있는 소수의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처럼 스스로 별별 희한한 놀이를 만들어 친구들과 명랑하게 뛰어 논다. 어디서 그런 창의력과 에너지가 생기는지 경이롭고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가 난민촌 마을을 찾아가 돗자리를 펴고 크레용과 종이를 놓아두면 아이들은 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종이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 자기 자녀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어서 부모들과 이웃들이 기웃거린다. 찰흙을 갖고 어떤 모양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난민촌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아이들과 함께 집을 방문해 보면 아이들의 아빠가 죽었거나 가족 가운데 장애인이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만성질환 환자가 있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난민촌의 어두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UN이나 국제 구호단체들의 일반적인 난민 지원 활동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들은 이런 취약한 난민들을 찾아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친구가 되고 있다.

 

돗자리학교

 

난민촌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들

 

남을 도와주면서도 욕을 먹기가 쉽다. 다른 사람은 도움을 받는데 자신은 도움을 못 받게 되면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도움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난민촌의 한 블록에 만도 수백, 수천 명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데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지원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과 세심한 분배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여러 난민촌에서 활동하면서 적은 돈으로 아무도 불만이 생기지 않게 도움을 주고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이웃 난민들에게 조차 감사와 환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약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돕는 것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미얀마 군인들의 학살로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여인들이 많다. 이 여인들은 이슬람 관습에 따라 홀로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어서 거의 어두운 천막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감옥 안의 감옥에 갇힌 셈이다. 매달 두 번씩 배급 받는 양식을 받으러 갈 수가 없어서 받는 양식의 일부를 수고비 대신 주어서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강제 추방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병들어 누워 있어도 돌볼 사람이 없다. 시설이 잘 갖춰진 일반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난민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지옥 같은 현실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다른 난민촌에 비해 비교적 많은 천막 병원들이 설치되어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MSF)나 적신월사(무슬림국가의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적인 민간단체들 뿐 아니라 많은 이슬람 단체들의 의료지원 활동도 눈에 띈다. 가히 민간 의료 시민단체들이 봉사 경쟁을 하는 각축장과도 같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난민촌 병원들이 감기나 배탈정도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1차 진료소라는 게 문제다. 당뇨나 고혈압, 관절염과 같은 만성 질환의 환자들이나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못된다. 난민촌에는 이렇게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장기적인 의료지원이 필요한 환자들이 방치되어 있다.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 우리를 돕고 있는 한 로힝야 족 친구는 만삭이 된 아내와 작은 나무배를 타고 피란하면서 3일 밤 3일 낮을 배 안에서 지내야 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출렁이는 배 위에서 아내가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난민촌에 새롭게 정착하면서 아기는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아기를 방글라데시의 모래 언덕에 묻어야 했다.


로힝야 난민캠프에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여인들이 있다. 바로 미얀마 군인들에 의해 강간피해를 당한 여인들이다. 국제 기관들은 그 숫자가 2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피해 여성들 가운데는 결국 임신하게 되어 아비 없는 아이들을 출산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기되거나 아무도 돌보려 들지 않는 불행한 고아가 되어버린다.


특히 이런 성폭행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려 들기 보다는 저주하고 수치스러워 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더 극심하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더 가혹한 2차 피해를 당한다. 성폭행을 당한 어린 소녀들이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경우 쉽게 인근 콕스 바자르나 수도 다카 혹은 인도의 콜카타 등지에 성매매를 위해 팔려 나가게 된다. 무슬림 사회에서 매매춘은 당연히 불법이다. 그러나 관광지인 콕스 바자르의 후락한 골목들 안에는 성매매를 위한 허름한 모텔들이 늘어서 있고 이 매음굴에서 로힝야족의 어린 소녀들을 쉽게 소개 받을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로힝야족 통행금지 구역까지 팔려 나온 데에는 10군데 넘는 방글라데시 군인과 경찰의 검문소에서 군경들과 인신매매단 사이의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트팔롱 난민촌의 평화학교

 

난민들을 함께 돕고자 하는 로힝야 청년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로힝야 난민촌에도 이런 약자들을 돕는 일을 시샘하거나 불만을 갖고 방해하려 드는 이웃들은 없다. 남을 돕는데도 오히려 환영하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기 보다는 로힝야 청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로힝야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부족 가운데 이런 연약한 지체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로힝야 난민들이 그런 회합을 하거나 단체를 결성하게 되면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체포되거나 수감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이나 강제추방과 같은 가혹한 불이익을 무릅쓰고 라도 동족을 돕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는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척자들은 이런 청년들과 함께 이들이 쫓겨난 자신들의 고향 라카인 주까지 다시 돌아가는 멀고 험한 길을 동행할 것이다. 자기 땅이 있고 자기 집이 있었던 그곳, 자기 부모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마셔왔던 샘물을 다시 찾아가기까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길이 평화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5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노예제도, 인간이 인간에게 빼앗은 인권


김소울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건 신생 국가 아메리카.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완전하게 반하는 뜨거운 감자가 있었으니, 바로 노예제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땅의 주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고, 그들을 노예로 완전하게 부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자 서양인들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노예사냥꾼을 이용하여 흑인을 납치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의 부제는 <폭풍우가 밀려오자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바다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납치되어 배에 실려 팔려가던 노예들이 바다에서 겪은 실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783년 노예들은 족쇄가 채워져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비좁은 배의 바닥에 누워 몇 개월 동안의 항해를 견뎌야 했다. 최대한 많은 노예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실에 노예들을 눕혔고, 노예들은 물건처럼 온 몸이 고정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며 항해가 어려워지고 음식이 부족해지자 상인들은 다치거나 병드는 등 살아있는 이들마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만다. 이 항해 도중 1/3 이상이 사망하였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1840)

 

노예제도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1672년 영국의 찰스 2세는 왕립회사에 노예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 회사는 이후 약 90년간 백만 명이 넘는 노예를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게 되는데, 이 노예무역은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였고 17C-19C 거래된 흑인 노예들의 수는 1,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과거에는 단 맛을 내는 식품 재료는 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코란과 함께 서쪽으로 꿀보다 달콤한 설탕이 전해지게 된다. 11세기 말 설탕이 유럽에 상륙하자 유럽인들은 순식간에 설탕의 강력한 단 맛을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설탕의 원료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경작지를 위해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엄청난 인원이 노예무역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노예로 팔려간 이들은 끌려간 땅에 사탕수수 모종을 심고, 수확하였으며, 그것을 빻아 설탕을 만들어 냈다. 1800년경 당시 영국인 250명의 연간 설탕 소비량이 1톤에 달한 것으로 집계될 만큼 그들의 설탕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으며 1톤의 설탕은 흑인노예 한명이 평생을 바쳐 수확해 내는 양이었다. 설탕에 가장 탐닉했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들을 팔기 위해 보낸 선박의 수는 2,704척이다. 이러는 가운데 200-400만 명의 노예가 항해 중 사망하게 된다.


 프랑수와 오귀스트 비아르, 노예무역(1833)

 

비아르가 그린 <노예무역>이라는 그림 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납치해 온 흑인 족장이 백인 상인과 흥정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백인 귀족은 편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빈번하게 일어났던 노예무역, 그리고 흑인노예를 그저 경매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백인들의 끔찍했던 과거를 기록한 작품이다. 노예는 서양인들에게 화물이나 말과 같이 거래해야 할 물건에 불과했고, 그런 노예에게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흑인 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 당시 전 세계가 양모 대신 면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면화 재배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꼭 필요했다. 면화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채찍질을 했고, 도망가다가 붙잡히면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뺏는 일까지 일삼았다. 그러던 중, 1873년 버지니아 주에서 냇 터너라는 흑인 노예가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살해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흑인노예 10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착한 흑인 노예 톰이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내용을 읽은 미국인들은 노예제도의 잔혹함에 대해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예제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가던 18614,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는 길고 소모적이며 비극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9, 링컨 대통령은 중대한 노예 해방령을 내렸다. 그는 남부 연합의 일부를 이루는 주에 사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고 북부에서도 노예제를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못했으며, 노예제 해방령은 부분적으로 밖에 실시되지 못하였다.

 

1864년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링컨은 완전한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수정을 제시했으며, 1865년 초 의회를 통해 수정안을 강행한 후, 링컨 대통령은 암살당하게 된다. 헌법을 완전하게 수정하기 전 까지 법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했던 미국은 1865년 헌법수정안을 선포하고 미국과 그 영토 내 노예제도를 헌법상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미국의 주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했고, 1995년이 되어서야 미시시피주를 마지막으로 미국의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비준하게 된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2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너도밤나무골에서 봄인사 드립니다. 이제 4월이니 한국에도 봄이 찾아왔겠지요. 아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미세먼지 때문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봄비가 내려 모두 씻어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봄소식을 전해놓고서 오늘은 눈 소식을 먼저 이야기 할까 합니다. 작년 12월에 보낸 편지에서 눈 소식을 잠깐 전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눈이 내리고 얼마 안 있어서 다 녹아 버렸습니다. 도버 해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닷바람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눈이 제대로 왔습니다. 밤새 내린 눈이 차곡차곡 쌓여서 아침이 되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눈이 쌓였다.” 그냥 눈이 왔다가 아니라 쌓였다였습니다. 덕분에 공동체는 평일인데도 눈 축제의 날을 선포하고 아이들과 어른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언덕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신나게 썰매를 탔습니다. 처음에는 각자 타는 썰매에 앉아 내려가다가 누가 커다란 장판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여럿이 앉아서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싣고 내려갈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 무려 25명이 함께 타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침나절에 썰매를 타고,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미식축구를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에 따뜻한 물엿을 풀어 만든 눈 엿을 먹으며 함께 웃어봤습니다.

 

 

좀처럼 날씨가 영하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영국 남동부에서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눈에서 뒹굴 날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눈 놀이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언덕 가에 노란색 수선화가 아이들 웃음 짓는 모양으로 피어나는 봄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공을 차고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동네 개와 함께 달리기 경주를 하며 놉니다. 그렇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런던 북부의 한 학교에서 열린 용서 컨퍼런스에 초대받아 다녀온 마을 식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 수선화가 핀 언덕 아래에서 봄 청소를 하는 마을 청년들 <출처: bruderhof.com/ko>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언제 한 번 편지에서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비폭력 갈등 해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브레이킹더사이클이라는 프로그램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저희 마을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 부부가 런던 북부에 있는 한 학교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학교는 용서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강사로 참여한 분 중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온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컨퍼런스에서 아이들에게 게임을 가르쳐준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숲에 모여서 한 곳에 어떤 물건을 숨겨 두고, 여럿이 함께 찾기 시작해서 먼저 찾아온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재빨리 물건을 찾아서 출발 장소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놀이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안 해요.” 이제는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아무튼 게임은 시작됐고, 아이들은 숨겨놓은 물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먼저 찾겠다고 달려가는 아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 대신 서로 숙닥숙닥 의논을 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물건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아이가 좋은 생각을 냈는지 아이들이 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은 물건을 찾는 데 성공했고, 소식을 들은 다른 아이들도 모두 물건을 찾은 쪽으로 달려갔고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출발점으로 함께 돌아왔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분투요! 친구가 있으니까 제가 있지요.” 맞습니다. 아이들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아프리카의 전통 사상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자라온 것입니다. 이 사상을 남아프리카 말로는 우분투라고 하는데 남아프리카의 평화 운동, 그리고 이어진 자발적 과거사 청산의 정신적 뿌리가 된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이런 공동체적 생각의 뿌리가 있었기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1918-2013)는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보복적 정의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한 과거사 청산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데스몬트 투투 대주교는 인간은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우분투의 핵심입니다라고 했고, 그렇게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흑인과 백인 사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국경을 초월하고 사람들 마음에 보편적으로 녹아있는 우분투 사상, 즉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마음을 서로 살리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봄소식과 함께 그런 노래 하나를 소개하며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의 조운 휘트니와 알렉스 크레이머 부부가 1940년대에 지은 노래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No Man’s is an Island)’입니다. 언젠가 어깨동무 식구들과 함께 흥얼거리며 노래할 날을 꿈꿔 봅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No Man’s is an Island)’


(후렴)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 홀로 서 있게 할 수는 없어.

다른 이의 기쁨은 나의 기쁨

나의 기쁨은 다른 이의 기쁨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

그러니 나는 모두를 형제로, 친구로 여기고 의지하겠어.

 

1.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시작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 노래 소리는 내 가슴을 울리네.

2. 그 사람들이 부르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노래는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그 기쁨은 누구도 파괴할 수 없어.

3. 이 땅은 유혈사태와 슬픔, 비애,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곧 사람들이 다시 함께 노래할 날이 오리라.

 

노래듣기(클릭하시면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201841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께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 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0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1빠 선생’ 이야기 


심은보



저녁밥을 먹는데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기어이 1빠 선생.... 저녁밥을 먹다 말고 후다닥 파출소로 달려갔다. 가보니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아 무언인가 적고 있고 1빠 선생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다. 고딩 두 녀석과 맞짱을 뜬 모양이다. 고등학생 코에 핏자국 선명한 화장지까지 꽂혀 있는 걸 보니...이것 참...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1빠 선생은 우리 반 민이 녀석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앞 이야기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녀석을 따라 올해 6학년 1반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과 만난 첫 날 함께 정한 우리 반 이름은 심과 함께’. 반 이름을 정하고, 첫 날부터 뭘 할 때마다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우리 민이 녀석에게 나는 ‘1빠 선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라는 낱말을 교실 속에서 쓰는 일이 참 불편하면서도 녀석에게는 뭔가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녀석은 줄을 설 때도 1, 발표를 할 때도 1, 밥을 먹을 때도 1. 그런 특별함을 부여받게 되었다. 수업 시간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려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도 첫 날은 참 잘 해내려고 애 쓰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더구나 작년까지 먹었던 약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 지내는 모습이 참 기특했었다.

 

그렇게 주말이 넘어가고 교실에선 여전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친구 건들고 저 친구 건들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지만 커다란 문제없이 며칠 잘 지냈을까.

 

어느 날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OO 녀석과 싸움이 한판 진하게 붙은 모양. 급하게 뛰어나가 OO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흥분해 있는 1빠 선생의 두 팔을 강하게 잡았다. 녀석 이름을 부르며 손에 힘을 빼고 선생님을 보라고 몇 차례 이야기를 했다. 니가 그렇게 하고 나면 선생님이 니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겠노라고 힘을 풀라고 했다. 한참 씩씩대던 녀석이 조금 뒤 수그러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억울한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 1학년 동생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OO이가 1학년 동생에게 저런 놈이랑 놀지마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래서 화가 나서 밀었는데 교문 벽에 OO이가 부딪혔다고. 듣고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날만도 했다. 녀석의 억울한 마음을 읽어주고 오늘 하려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1년 동안 화가 나더라도 그 동안 쉽사리 넘어섰던 선들을 넘지 않고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방법도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이 상황마다 너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주겠노라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날 갈등은 사과를 할 부분은 하고, 사과를 받을 부분은 받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 생겨나는 갈등들 속에서는 위험한 상황이 자꾸만 나타났다. 특히 어느 주말을 지내고 온 녀석의 모습은 그 전 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멍 자국도 보이고. 집에서 일이 좀 있었던 듯 했다. 아버지에게 맞은 모양.

 

그 한 주 내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자 친구 한 녀석에게 자꾸만 다가가서 심각한 정도로 괴롭히는 모습을 보이고, 순간 욱해서 아무 관련 없는 친구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동생들을 때리기도 하고 전보다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에겐 자꾸만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고 결국엔 자꾸만 넘지 말아야할 선들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다. 교실 안 뿐만 아니라 교실 밖을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녀석을 멀쩡한 상태에서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 속에선 순식간에 흥분하여 돌변해버렸다.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물건을 부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대상을 가리지도 않았다. 담임인 내게도,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도. 그 동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지만 녀석의 경우엔 교육의 영역을 넘어서 치료의 영역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본인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고 어른들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의 행동 패턴들. 과잉행동을 넘어 분노 조절에 대해선 어느 정도 다른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인데 올핸 설날이후에 약까지 끊어버렸다고 했다. 아빠와 통화를 하며 우선 병원 진료를 이어가 줄 것을 부탁드렸다. 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찾아나가려고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상담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의 도움을 얻어 상담 및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녀석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녀석의 흥분 상태를 잠재워줄 무언가였다.

 

아빠와 한참 통화를 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면 그냥 신고하라는 말과 함께 약값도 아까워서 더 이상 약을 먹이는 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은 부모로서 최소한의 역할만 하겠노라고 했다. 한참을 통화하며 눈물이 절로 흘렀다.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이니 아빠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설득하는 사이 녀석이 친구들 속에서 하는 행동 패턴은 더욱 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 속에서 녀석의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녀석의 살기 위한 몸부림을 마주하며 사실 교육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겨우 아버지를 설득하여 4월이 훌쩍 넘어서야 녀석과 함께 병원엘 다녀왔다. 약도 받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너무 많은 상황이 교실 안팎에서 일어나버린 뒤였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으로 치달아버렸다. 마주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상황들을 너무도 많이 마주하게 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아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였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학교에서는 1년째 무사히 살아내고 있긴 하지만 현재 이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 많은 문제들과 마주하면 안 될 듯 하여 이번 주에 급하게 등교를 중지해 놓은 상황이다. 녀석의 가정엔 상담 선생님이 함께 정기적으로 하려고 하고 있다. 그 첫 날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한 시간도 안 된 틈에 집 앞 공원에서 고등학생들과 그런 시비가 붙어 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 것이고 말이다.

 

녀석 생각에, 녀석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며칠 밤을 못자며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딱히 학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교육의 영역과 치유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이 필요한 까닭이다. 치료의 영역까지 학교가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녀석 문제로 벌써 두 차례 반모임을 했다. 우리 학부모님들 모두 녀석의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워 때론 눈물도 짓고, 때론 함께 도울 방법을 모색 해보고. 하지만 마땅치 않은 우리들의 한계에 절망도 했다. 참으로 답답한 현재 상황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지역 사회는, 국가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다섯 번째 학교까지 강제전학으로 녀석이 학교를 돌고 돌 동안 녀석을 관리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전혀 갖추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책임을 학교로 던져놓은 것 빼놓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또 다른 학교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문제 해결을 지원해야 할 터인데... 녀석이 이렇게 어른이 된다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것인가. 그 모습이 눈에 빤히 보이는 녀석의 삶은 어떻게 할 것인지, 또 이후에 치를 사회적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온통 내 머릿속엔 녀석 생각이라 나의 일상이 이래저래 꼬여 버렸지만 나는 녀석이 우리학교에서 졸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도울 생각이다. 우리 지역에서 참으로 유명한 우리 '1빠 선생'을 이렇게 계속해서 방치할 것인지를 묻고 그 대안을 요구하고 만들어 가는 일에도 함께 해야겠다.


오늘은 부디 녀석이 무사히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할 터인데...




심은보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4.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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