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8.20 00:23

[이슈]


'적군 묘지' 앞에서 생각하는 평화

 

박종호


지난 6월 29일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 콜로키움 ‘회복적 사회를 위한 평화교육’에 참석한 아일랜드 평화교육 실천가 데릭 윌슨(Derick Wilson)과 김동진 박사(트리니티 칼리지)를 2년 만에 반갑게 다시 만났다. 2017년 2월 아일랜드 평화교육 현장답사에서 만나고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으니 그 반가움은 컸다. 데릭 윌슨은 콜로키움에서 평화교육과 회복적인 사회, 이를 위한 교육자들의 실천에 대한 발표를 하였는데, 그야말로 아일랜드의 남북대립과 갈등의 한복판에서 회복적 실천을 위해 달려 온 자신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알맹이를 풀어놓았다.


‘회복적 실천은 삶의 방식이자 일하는 방식이다. 다른 이를 희생양으로 삼거나 비난하기보다 책임을 지는 것이다. 상대를 정당하게 대하고, 타인과 차이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그 차이를 축복하는 것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시간, 상상, 창조적인 에너지와 희망이 새로운 현실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받아 적은 말이다.


나와 너, 우리 학교, 사회, 그리고 이웃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고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다. 평화교육이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고, 또 먼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아울러 폭력에 대해서도 상대의 폭력은 부당하지만 자기 진영의 폭력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폭력에 대해 거부하고, 비폭력을 옹호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다.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말인줄 알면서도 또 얼마나 절박한 말인가.


다음 날인 6월 30일 이른 아침, 데릭 윌슨과 김동진 박사, 그리고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교육과정연구모임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초등·중고등학교 교사, 대학생, 어깨동무 활동가 20여명은 파주 ‘적군 묘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회복적 평화’를 떠올려 보기에 적절한 곳이라 여겨서 고른 곳이다. 자유로를 지나 문산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달리다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자장리부근에서 큰길가에 차를 세우고 일행은 모두 내렸다. 얼핏 지나치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워진 간판은 '북한군 중국군 묘지 안내도'이다. 적군 곧 한국전쟁에서 남쪽과 서로 적으로 맞선 상대, 북한군과 중국군의 무덤이다. 제1묘역, 제2묘역으로 표시된 입간판이 함께 서 있었다. '적군 묘지'로 알려져 있고, 군부대가 관리하는 곳인데, 직접 지키는 사람은 없다. 두 묘역 사이에는 농사를 짓는 밭이 있어서 실제로 일하는 분들이 무심하게 우리를 건너다보고 일을 하고 있기도 한다. "이곳은 6.25전쟁(1950.6.25.-1953.7.27.)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6.25전쟁 이후 수습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묘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월 묘역을 구성하였으며, 묘역은 6,099㎡로 1묘역과 2묘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잠깐 입간판의 내용을 읽은 뒤에 오른편 2묘역으로 먼저 가서 우리는 무덤 가운데 서서 작은 꽃다발을 놓고 묵념을 올렸다. 무덤마다 놓인 비석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어디에서 전사했는지 등의 기록이 적혀 있다. 한국 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가 함께 안장되어 있다가, 중국군 유해는 2014년 무렵에 송환되었다. 더러 ‘무명인’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젊은 넋이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이다.



다시 걸음을 돌려 처음 들어선 쪽으로 가서 1묘역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조금 더 잘 단장되어 있는 곳이다. 역시 함께 모여서 묵념을 하고, 준비해 간 구상 시인의 시 ‘적군 묘지 앞에서’를 정지영 선생님이 낭독하고, 또 다른 시 ‘휴전선’을 대학생이 낭독하고, 데릭 윌슨의 말씀도 들었다. 이런 고통스런 아픔의 현장을 찾아서 나누는 모습이 회복적 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이 될 것을 확신한다는 말을 하셨다.



1묘역의 말끔히 단장된 무덤을 돌아보다, 문득 무덤이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휴전선까지 불과 몇 십리, 비록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영혼이라도 고향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배려한 것이리라. 누구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위아래를 설득하고 그렇게 북쪽으로 배치하려고 애쓴 사람이 새삼 고맙다.


여기 이곳에 묻혀 있는 저 무덤 속 젊은이들이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 갈 날은 언제일까? 남과 북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 북한과 미국이 북쪽에 안장되어 있던 미국 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송환하는 뉴스를 보면서 더욱 우리 남과 북 모두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화해와 평화, 회복의 실천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거꾸로 확인하는 셈이다.


자신이 남에서 태어나, 북의 원산에서 자라고, 남쪽으로 내려 온 뒤, 한국 전쟁 때는 종군 기자로 참여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시를 남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남과 북 모두에 대해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며 아파한 시인 구상(1919-2004)이 쓴 ‘적군 묘지 앞에서’를 다시 읽어 보면서 답사의 소감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박종호ㅣ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현재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20 00:05

[시선-한반도 평화읽기]


한반도 평화체제와 군축


정욱식


대전환의 한반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가 그야말로 대전환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그 문이 활짝 열릴지, 반만 열린 상태로 남을지, 아니면 또다시 닫힐지는 예단키 어렵다. 전환의 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의 ‘선군’ 정치에서 ‘선경’ 정치로의 전환이다. 이는 길게는 2013년 3월 31일에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채택할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병진 노선은 김정은식의 ‘변증법적 국가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미완성 상태로 물려준 ‘앙탄일성’을 서둘러 추진해 “국가핵무력 건설 완성”을 선언한 것이 ‘정(正’)이었다면,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국면 전환이라는 ‘반(反)’을 만들어내고, 한미와의 적대 관계 청산 및 안보적 우려 해소, 그리고 경제발전을 향한 ‘합(合)’을 도모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북한은 2018년 4월 20일에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병진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면서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을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지향시키고 모든 힘을 총집중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또한 이러한 전략적 목표가 순조롭게 이행된다면 내년이나 후년에 “조미 대결에서 위대한 승리를 가져온 국가 핵무력의 역사적 소임은 끝났다. 이제 국가 핵무력의 완전한 폐기를 엄숙히 선언한다”고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는 한반도 핵 시대의 종언이다. 한반도 핵문제는 네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의 핵 시대’는 1945년 한반도 해방 및 분단부터 1990년대 초 미국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 독점 시대였다. ‘핵 시대 1.5’는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1992년부터 협상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2008년까지를 의미한다. ‘반전 드라마’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역동적인 시기였다. ‘제2의 핵 시대’는 협상이 단절된 2009년부터 2017년 북한이 ‘국가 핵무력 건설 완성’을 선언한 시기까지를 의미한다. 끝으로는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는 시기로 2018년부터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래까지이다. 한반도에서 핵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핵 없는 한반도”가 도래할 것인가의 여부가 판가름나는 시기이다.


셋째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다. ‘평화체제 없는 비핵화는 맹목이고 비핵화 없는 평화체제는 공허하다’고 할 때, 한반도의 핵시대의 종식은 평화체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일단 남북미 3자는 평화체제 입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의 수준에 발맞춰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의회 상원의 비준을 거치는 대북 안전보장 방안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북미 간의 70년 적대관계의 청산이다. 미국과의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는 북한의 오랜 열망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트럼프의 개인기와 북한을 적으로 남겨두고 싶어 하는 상당수 미국 주류 사이의 ‘갈등의 변주곡’을 품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인 현상 변경은 현상 유지를 통해 추구해왔던 미국의 굴절된 이익체계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무기 수출 위축이라는 ‘기대이익의 감소’와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중국을 염두에 둔 미사일방어체제(MD) 및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구해왔던 ‘전략의 차질’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의 정치적 급변사태, 즉 트럼프의 탄핵 여부가 한반도 문제의 최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그의 탄핵 시 대북 강경파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섯째는 남북관계의 전환이다. 분단 이후 남북관계는 부정과 절멸의 대상에서 체제 경쟁의 시대로, 체제 경쟁의 종식과 한국의 대북 포용과 흡수통일 시도가 오락가락한 시대를 거쳐왔다. 그런데 2018년부터는 남북연합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2국가 2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유럽연합과 흡사한 모델이 나올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평화체제와 군축


한반도 문제 해결의 성패는 군사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군비통제와 군축 논의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북한은 냉전 시대에는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통해, 그리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선군 정치’를 통해 체제 생존을 도모했고 이 사이에 북한은 거대한 병영 국가처럼 되고 말았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군사력도 비약적으로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보수정권은 군비통제 및 군축 자체에 부정적이었고, 개혁진보 정권은 때때로 보수 정권보다 더 강력한 군비증강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평화, 새로운 시작’의 관건은 70년 가까이 누적되어온 군사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그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4.27 판문점 선언’에는 군사 문제 해결의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다. 전문 첫머리에 담긴 ‘부전(不戰)의 약속’에서부터, 2조 한반도 군사적 긴장 완화에 담긴 “일체의 적대행위 전면 중단” 및 “비무장지대의 실직적인 평화지대”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의 평화수역” 만들기, 그리고 3조에 담긴 “불가침 합의” 및 “단계적 군축 실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합의 내용만 놓고 볼 때에는 ‘남북 평화협정’에 근접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단계적 군축”이 눈에 띈다. 그런데 “단계적 군축”은 문재인 정부가 준비해온 국방개혁 2.0과 정면으로 충돌할 소지가 크다. 국방개혁 2.0의 요체는 국방비를 대폭 늘려 대규모의 전력 증강을 꾀하겠다는 것이 핵심적인 요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듯 국방부는 대규모 국방비 증액 계획을 거의 그대로 유지키로 했다. 국방부는 2019년 국방예산으로 올해 대비 8.6% 증가된 46조 9천억 원을 요구하는 등 5년간 국방개혁에 필요한 예산을 약 270조 7000억원으로 추산했다. 별다른 변동 없이 이러한 계획이 추진되면 2023년 한국의 국방비는 60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고, 일본의 국방비마저 추월하게 될 것이다.


대규모 국방비 증액은 새롭게 시작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스스로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군비증강과 한반도 평화체제·비핵화 실현 노력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천문학적인 국방비 증액은 민생과 복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상기한 국방부의 국방비 증액 계획과 국방비 동결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가령 향후 5년간 올해 수준(43조 4000억원)으로 국방비를 동결하면 약 60조원의 누적액의 차이가 발생한다. 누적액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게 됨은 물론이다.


이렇게 절약한 국방 예산을 복지, 교육, 일자리 창출, 자영업 지원책, 미세먼지를 비롯한 환경 대책에 사용한다면, 국가안보의 내실을 기하면서도 인간안보도 튼튼하게 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아쉽게도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표방한 ‘포괄 안보’의 정신이 정작 국방개혁에서는 실종되고 만 것이다.


하여 문재인 정부는 두 가지를 자문해봐야 한다. 하나는 국방개혁 2.0이 과연 판문점 선언에 부합하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라는 우를 스스로 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외부의 위협 대비에 치중한 나머지 내부의 모순을 완화·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정욱식ㅣ고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과 북한학을 공부하고, 현재 평화네트워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반도문제에 대한 의사소통의 활성화와 올바른 여론형성을 도모하여, 물리적인 냉전구조 못지않게 고착화된 냉전적 의식구조를 극복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평화공동체 실현에 기여하고자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3:39

[시선 | 평화의 마중물]


검은 바다


송강호


20041226일 아침 8시 수마트라섬 서쪽 바다 해저에서 리히터 지진 9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였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825분경 높이 10미터 이상의 높은 해일이 아체 지역에 밀려왔다. 5분 사이에 20만 명의 아체 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사상초유의 대재난이 닥친 것이다. 개척자들1)은 즉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활동가들을 재난 지역에 파견하였다. 내가 아체를 찾아간 것은 20053월이었다. 쓰나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이미 파견된 우리 동료들의 활동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아체 주민들로부터 검은 바다가 밀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쓰나미가 들이닥쳤을 때 거대한 검은 파도가 세 차례 산처럼 밀려왔는데 심해의 검은색의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가족들의 눈앞에서 서서히 죽어갔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검은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난민들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서 아체의 한 섬에서 지냈었는데 가끔은 바닷가에 나와 해변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들을 바라보면서 그 날 밀려왔다던 그 검은 바다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주석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전쟁재난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개척자들이 아체에 가려고 했었던 원래 이유는 쓰나미 때문이 아니었다. 아체는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예전처럼 독립된 이슬람 국가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수카르노와 자바 중심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 당하였다. 그 후 강고한 아체인들은 오랜 세월 독립투쟁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의 반정부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고 이 끔찍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아체 국경을 통제했다. 외국인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후미진 곳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들이 아체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물건을 빼앗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아체 사방에는 인도네시아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자랑스런 국기가 아니라 처량하고 슬픈 것이었다. 아마도 4.3 때 제주도민들이 우리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과 탄압을 겪고 오히려 너도 나도 해병대에 자원했던 것과도 같은 심리일 것이다.


아체에 온 이래로 난 쓰나미 피해자들과 함께 난민촌에서 살았다. 때로는 뿡에(Punge)라는 마을의 난민 천막에서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슬림멈(Seulimeum)이라는 난민촌에서 지내기도 했다. 뿡에는 반다 아체의 바닷가에서 가까운 마을이라서 쓰나미가 왔을 때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었다. 어렵사리 파도에 떠밀리던 중 나무 위에 올라갔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간혹 살아남아서 부모가 없는 옛 집터에 천막들을 쳐 놓고 살아가고 있었다. 고아가 된 청소년들이 역시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자신들의 천막 안에 들여 재우고 같이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함께 먹기도 했다. 공고를 다녔었던 한 젊은이가 실력 발휘를 해서 높은 전신주에 올라가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 천막들에 전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이들은 이렇게 부모들과 친구들을 잃은 자기 마을에 다시 돌아와 폐허 위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천막들 사이에는 쓰나미 때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공동묘지(Guburan)가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우물을 길어 먹고 목욕도 했다. 밤에는 기분이 나빠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우물을 공포영화의 제목을 따와서 “링(ring)”이라고 불렀다. 대소변은 좀 떨어져있는 이슬람 사원 부속 화장실을 사용한다. 이곳 사원의 이슬람 사제(이맘)도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사진으로 볼 때 폐허뿐인 이 천막촌에서도 비록 불편은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쓰나미로 폐허가 된 반다 아체 [사진제공:USAID]


아체 섬의 주민들이 피난해 있었던 슬림멈 난민촌의 상황도 비슷했다. 내가 지냈던 24인용 군용 천막은 네 가족이 함께 귀퉁이를 나뉘어 사용할 만큼 널찍했다. 천막 안에서 사생활은 없었다. 낮에는 찌는 듯이 더워서 남자들은 밖에 있는 그늘에 함께 모여 소일을 했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외출을 삼가는 이슬람의 관습 때문에 무덥고 어두운 천막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밤에는 쥐들이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들조차 없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배급 받는 쌀도 있고 또 어부들인 고로 고기도 잡아와서 사는 이들 속에 나는 얹혀 살았다. 주중에는 이 난민들과 같이 그들의 섬에 들어가 그들의 집을 함께 지었다. 높은 해일이 들이 닥친 이곳 마을들 중에는 주민들의 반 이상이 몇 분 사이에 목숨을 잃은 곳도 여럿이다. 파도에 밀려온 양철 지붕으로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는 목이 잘린 사람들도 있었다. 우기에는 차가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무들을 줄에 묶은 후 바닷물 위에 띄워서 해변을 따라 끌고 와서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바닷속은 날카로운 산호들과 바위들이 많은데다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발에 상처가 생기곤 했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으로 지어놓은 집이 넘어지기도 했다. 음식은 밥과 물고기, 간혹 문어를 잡아 요리했다. 채소나 과일이 없었다. 어촌 사람이라 그런지 매일 물고기만 먹는데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배를 타면 환자들이 많았다. 쓰나미로 그나마 있던 진료소들이 모두 부서져서 반다 아체에 있는 병원까지 가야만 했다. 나와 늘 함께 지내는 아누아르(Anuar)라는 사람도 별 대수롭지 않은 배앓이로 아내를 잃었다. 그와 함께 비가 오면 빗물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지진 나듯 집안이 흔들거리는 천막으로 덮은 판잣집에서 지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눈 뜬 장님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로 집을 짓는다고 내다버리는 모든 살림도구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들이다. 라디오, 선풍기, 그릇들, TV, 냉장고, 옷과 이불 그 어느 것 하나 버려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쓰나미로 생긴 고아들과 홀로 남은 노인들을 위해 지은 집 

: 루모 므파캇(함께 결정하는 집이란 뜻) [사진제공: 개척자들]


루모 므파캇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배우는 어린 아이들 [사진제공: 개척자들]


개척자들은 아체에서 작은 평화도서관을 세우고 있다. [사진제공: 개척자들]


아체 발링카랑의 평화도서관 사서 셀리 [사진제공: 개척자들]



“내게 강 같은 평화”는 없다.


하루는 반다 아체(Banda Aceh)에 와서 구호 활동을 하고있던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흩어져 활동하다 갑자기 만나게 되니 누가 설교를 할 것인지 찬송가는 무엇을 부를 것인지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 때 비교적 최근에 온 한 자원 봉사자가 그러면 우리가 다 아는 쉬운 복음 성가 하나를 같이 부르자며 “I’ve got peace like a river (내게 강 같은 평화)”는 모두 알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때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사역하시던 한 늙은 선교사님이 몹시 주저하시며 이 노래는 아체에서 부르기가 마땅치 않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비만 내리면 홍수로 수난을 겪는 이곳 사람들에게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또 쓰나미로 가족들과 집과 모든 소유를 잃고 심지어는 신체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이 어떻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또 화산과 지진으로 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에게 “내게 산같은 믿음”이란 가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익숙하고 친근한 이 노래를 이곳 아체에서는 함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평생을 보내며 반다 아체에서 희생자 가족들을 돕고 있던 한 노년의 미국 메노나이트 선교사의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부를 수 없는 찬송을 자기 흥에 겨워 불러왔고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없는 신앙을 자기도취적으로 믿어왔다. 우리의 몸에 밴 익숙해진 생활 방식과 믿는 방식 모두가 타인에게는 모난 돌처럼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에겐 남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체의 한 섬에서 난민들의 집을 지으면서 진정으로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바다는 자신을 고립시키는 장벽이 아니다. 정글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글을 슈퍼마켓처럼 여기고 있다는 한 선교사의 말처럼 이들에게 푸른 바다는 온갖 물고기들과 전복, 해삼, 조개, 새우, 게, 오징어, 문어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창고요 번화한 시장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운 풍랑과 싸우고 상어들에게 물려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는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우리를 둘러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자포자기야 말로 우리의 의식과 생각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버리고 우리를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그 검은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송강호ㅣ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3:23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안녕, 친구야!


정진헌


"안녕, 친구야~!“


어깨동무의 오랜 전통으로,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첫 인사를 드립니다.


윤이상하우스는 베를린의 클라도우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 현대음악의 5대 거장 중 한 분으로 추앙받는 윤이상 선생님께서 1974년 완공된 때부터 1995년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던 자택인 윤이상하우스. 이 집에서 윤 선생님은 120여곡이라는 대부분의 작품을 탄생시키셨지요.


얼마 전, 괴팅엔대학교 러시아학 은퇴교수께 윤이상이란 분을 아시냐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안다고 한 그 분의 대답에 어떻게 아시냐 되물었더니, 매우 황당해 하시면서, "모차르트를 어떻게 아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어떻게 답하냐? 너무 유명한 분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냐?"라고 답하시더군요. 독일에서는 이렇게 음악의 거장 윤이상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고급문화(hochkultur)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는 오래된 제도와 문화적 전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거장이 사셨던 집에서 저는 제 직장인 베를린 자유대학교로 출퇴근합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윤이상평화재단의 베를린 지부장으로 윤이상하우스의 관리 및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생업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긴 합니다. 이 집은 오랜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빈 집이었으니까요. 올 1월 초, 저는 정말 가구도 없었던 이 빈집에 혼자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적막한 동네, 을씨년스럽고 오래 비어있던 거택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첫 며칠 동안은 솔직히 무섭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분명 출근하면서 모든 불을 껐다고 여겼는데, 돌아와 보면 연주홀이 있는 아래층에 늘 불이 켜져 있곤 했지요. 그렇게 며칠 몇 주를 지내며 익숙해지고,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고장 났던 난방도 고치고, 빈 방들에 가구를 들이고, 레지던스 펠로우들도 선발하여 식구를 늘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윤이상의 후예와 신진 음악인들로 성대한 개관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적지 않은 음악인들,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들의 지인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그 분의 삶과 음악에 대해 배우고 논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삶을 재구성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이 집이 말해주는 윤이상선생님의 감성과 마음을 더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편지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윤하우스가 제게 가장 먼저 들려주었던 윤이상 선생님의 그리움과 열망이라는 두 화두를 공유할까 합니다.


윤하우스에 방문객이 오시면, 저는 먼저 발코니로 모십니다. 그리고는 동남쪽으로 시선을 멀리 올려 크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 펼쳐진 커다란 호수를 보시라 합니다. 베를린 사람들이 흔히들 반제(Wansee)라 부르는 호수지만, 이쪽 편은 하펠강(Havel)입니다. 윤이상 선생님은 바다가 보이는 고향 통영을 늘 그리워하셨답니다. 그래서 통영의 풍광과 그나마 비슷해 보이는, 커다란 호숫가의 이 집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윤이상 선생께서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1967년 독일에서 불법 납치되셨다가, 세계 유명한 음악인들과 독일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힘입어 1969년 풀려나신 후 독일 정부의 권유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그리고 스스로도 돌아가지 않으셨던 망명객으로 사셨지요. 통영에서의 유년기 추억은 윤 선생님 작품의 가장 소중한 자양분이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창작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윤이상하우스 전경


그렇게 저 멀리 고향의 그리움을 강물에 실어 두셨다면, 발코니 아래 정원에는 그 분의 미래지향적 열망이 선명하게 놓여 있습니다. 바로 한반도 모양을 본 딴 연못이 그것입니다. 남북으로 나뉜 현재의 한반도가 아니라 금붕어들이 남북으로 헤엄쳐 다니는 통일된 한반도. 그것은 고인이 추구하신 민족적 정체성이자 미래에 놓인 진정한 고향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아스포라, 즉 고국을 등지고 타지에서 삶을 영위하는 민족 공동체나 개인들에 대한 연구에서 고국(homeland)의 이미지는 늘 과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적지 않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그 후세들에게 있어 고국은, 현재의 분단된 남이나 북 중 하나에만 국한될 수 없기도 합니다. 제도적으로는 한 국가만 선택해야 하지만, 국제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열망 또한 존재합니다. 그래서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니는 재일동포 청소년들도 자신들의 조국은 현재에 있지 않고, 분단이 해소된 미래의 통일된 한반도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개인들에게 있어 그들이 진정으로 돌아갈 고국은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에 위치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 사회문화적 노력, 즉 미래지향적 문화 만들기의 과정을 인도계 미국 사회문화인류학자인 아준 아파두라이의 제안을 빌려, 열망이라 부릅니다.


한반도 모양을 본 딴 연못


윤이상 선생님께 고향 통영에 대한 향수는 과거, 고인의 유년기 추억에 기인합니다. 반면에 그 분이 추구하신 민족적 정체성은 분단선이 거둬진 통일된 한반도라는 미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인의 향수(과거)와 열망(미래)은, 하펠강가에 자리 잡은 집터, 그리고 한반도 모양의 연못으로 각각 재현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이상 선생님에게 있어 현재라는 시간은, 어떠한 공간적 유형으로 구체화되었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윤이상하우스가 이역만리 독일, 그것도 분단과 탈분단을 경험한 베를린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 윤이상 선생님 살아생전 납치와 고문을 자행했던 남한의 군부독재 정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들이 지배하는 현재적 고국은 윤이상하우스 공간에서는 철저히 무시된 듯 보입니다. 한 마디로 그 정통성을 상실한 것이죠. 반면에, 윤이상 선생님은 유년기 추억과 분단이 해소된 미래를, 서양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작품들에 녹여 내셨던 것입니다.


본인의 철학과 이념, 고통과 애도의 감정 등을 음악적 언어로 승화시키셨던 역사적 장소로서의 윤이상하우스. 저는 이 하우스에서 지난 봄 남북 정상회담을 인터넷으로나마 목격했습니다. 동트는 새벽, 창밖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합창은 마치, 고인의 기쁨을 노래하듯,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처럼 들렸습니다. 고인의 역사 의식과 미래지향적 열망이 고스란히 담긴 대작의 향연처럼, 새벽녘 윤이상하우스는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역사적 순간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와 민족사의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의 체취가 남겨진 윤하우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끝까지 읽으신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도 뜨거운 폭염으로 지치고 힘들지만, 고 윤이상 선생님이 꿈 꾸셨던 미래의 조국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꼭 감상하시기를 권하며, 오늘은 이만 인사에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진헌ㅣ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1:02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끔찍한 현실을 추상적으로, 파울 클레


김소울


과거에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화폭에 담겨졌지만, 대부분의 전쟁화에서 화가는 전쟁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달랐다. 전쟁의 규모가 컸던 만큼, 화가들도 대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징집되었고,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이를 지켜보고 경험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이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감정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 클레는 세기말적인 불안감에 대한 감정을 나타낸 표현주의 화가로,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등과 함께 ‘청기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청기사파는 흩어지게 된다. 칸딘스키는 징병을 피해 고국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고, 동료였던 마르크와 마케는 군대에 징집되어 전장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클레는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비롯된 형태를 거부한 추상을 추구하게 된다.


파울 클레, 『명분으로서의 죽음』 (1915)


<명분으로서의 죽음>은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화가 마르크를 기린 작품으로 <시대의 메아리>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매체는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 그림을 사용했다. 이 그림을 클레의 동료화가 마르크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닌,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자살을 알리는 지면에 사용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는 작금의 사회에 매우 격분하게 된다.


<명분으로서의 죽음>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클레는 소집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1916년 7월 예비군 보병연대에 소속되었지만,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게 된다. 바이에른의 왕이 뮌헨의 예술가들을 전장에 직접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항공학교의 회계과 서기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게 된다. 창조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전쟁은 모순된 관계이자 함께할 수 없는 위치라고 생각한 클레는 복무기간동안 자신의 모순적 입장을 성찰하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끔찍한 경험을 지속하던 클레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문구를 쓰게 된다. “이 세상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 추상적이 되고, 세상이 행복할 때 예술은 지금-여기에서 생겨난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렸던 클레가 생각한 추상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대립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클레의 그림은 점점 ‘지금-여기’가 아닌 ‘추상’의 세계로 발전하였다.


파울 클레, 『지저귀는 기계』 (1922)


이 작품은 클레가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그린 <지저귀는 기계>라는 작품이다. 클레는 이 그림을 통해 기계문명에 대한 불편함과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하게 된다. 전쟁에서 만났던 비행기, 탱크, 총 등 다양한 기계들은 그에게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릴 것만 같은 인공 새가 앙상하게 철사와 같은 선 위에 앉아 있다. 잉크가 얼룩진 것 같은 푸른 회색빛의 배경은 녹슨 느낌마저 난다. 그가 독일의 화가라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궁핍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그는 가까운 친구들을 많이 잃게 되었고, 전쟁의 비극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전쟁 이후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이라 칭하며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100점 이상의 작품을 몰수했다. 1937년 미술에서의 모든 ‘퇴폐’를 청산한다는 목적으로 히틀러의 지시 하에 <퇴폐미술전>이 뮌헨에서 열렸다. 이 때 파울 클레의 작품도 7점 포함되게 된다. 전쟁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한 클레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독일이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 클레는 이후 스위스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몰입하였고, 죽기 전까지 9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파울 클레가 정의한 예술은 다음과 같았다. “예술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있는 끔찍한 현실을 오히려 어린 아이와 같은 추상화로 그려낸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아동화의 모방이라 여겨졌던 평가에서, 황폐해진 유럽에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예술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힘든 시기의 유럽인들에게 그의 그림은 아픈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잊지 않게 해주는 치유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럽던 시대에 완성된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 역시 피폐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0:50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빈틈을 잘 살피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심은보


이후 이야기가 많이들 궁금하셨을 우리 1빠 선생! 결국 녀석은 나에 의해서여섯 번째 학교로 가버렸다. ‘학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스스로 녀석의 담임을 맡았던 나에 의해서말이다. 참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마음을 썼고, 또 많은 이들이 응원을 했다. 나 또한 나의 온 삶을 통해 응원하며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담임이 치열하게 고민을 하고 있고, 부모님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그런 담임을 지원하고 있다는 이 아름다운 상황이 결과마저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목표는 녀석을 이 속에 잘 녹아들게 해서 졸업시키는 게 목표였지만, 중요한 것은 녀석과 함께 다른 아이들, 특히 상처를 많이 받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상황을 통해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보이질 않았고, 또 녀석에게 이 공간이 학습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보았을 때 변화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그 상황을 돌파할 녀석이 조금이라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하나라도 엿보였다면 아마도 모든 걸 다 걸었을 것이다. 치유를 넘어선 치료의 영역까지 학교가, 담임이 홀로 어찌할 순 없는 일이었다.

 

담임인 나의 신고를 통해 학폭 절차를 밟았고, 결국 녀석은 전학을 갔다. 학폭 절차는 녀석을 내치기보다는 다른 아이들과 공간을 분리해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행한 절차였다.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아팠지만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진된 몸의 기운 만큼 마음의 기운마저 소진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전학 이후 교육청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학교와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회의를 열었고, 또 교육청 위센터1)에서는 녀석을 위한 정기적인 상담 프로그램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관심과 지원이 지속되는 것과 함께 그저 업무적인 일처리에 그치지 않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리 될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우리 학교에서도 도움을 주셨던 상담 선생님께서도 정기적으로 녀석의 삶을 살피며 정기적으로 상담하는 일도 맡아 주셨다.

 

주석1) 위센터(Wee)는 학교, 교육청, 지역사회가 연계하여 학생들의 건강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지원하는 다중의 통합지원 서비스망을 말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두어 달 흘렀다. 그 사이 녀석은 세 차례 학교에 아침 일찍부터 갑작스레 찾아오곤 했다. 전학 간 학교가 녀석을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들 환대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테고, 또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곳을 떠나고 보니 학교가 주었던 따스함이, 또 자신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함께 놀아주었던 친구들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담임의 입장에선 녀석을 잘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반 친구들은 다시 분위기를 추스르고 잘 지내고 있다. 학기 말 즈음 몇 차례 집단 상담을 통해 나머지 학급 아이들에 대한 점검과 진단을 해보기도 했다. 2학기 시작할 즈음 두 차례 가량 더 진행하며 다시 새로운 학기를 열어갈 생각이다.

 

들려오는 이야기엔 ‘1빠 선생이 잘 지내고 있진 못하는 것 같다. 학교에선 겉돌고 있고 녀석이 바깥에서 일으키고 있는 사건들 이야기도 귀에 들려온다. 참으로 내게는 아프고 또 아픈 이야기들이다. 아니, 녀석은 우리 교육과 사회의 빈틈이 만들어 낸 참으로 안타깝고 아픈 모습이다. 우리 지역와 옆의 지역까지 녀석에 대해선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데도 이 학교 저 학교 돌리는 일 말고는 학교도, 지역 사회도 녀석을 돌보고 지원할 변변한 시스템하나 없는 우리 사회의 빈틈 말이다.

 

요사이 온 나라 곳곳에서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난도질하고 아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 짓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으나, 가해자인 아이들의 삶의 결을 바꿔 내거나 갈등의 교육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에는 별로 다가가고 있지 못하는 현실은 다시 한 번 살펴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우리네 학교를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민주적으로 바꾸는 일은 좀 더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 빈틈들로 인해 또 다시 겪게 되는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은 듯싶다. 우리 1빠 선생 역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꺼내놓았던 정책들이 오히려 녀석을 더욱 더 안 좋은 쪽으로 강화시켰고, 그를 돌볼 다른 장치들이 하나도 없는 빈틈들 속에서 녀석은 더욱 힘들어 하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요사이 뜨거웠던 평교사도 지원 가능한 내부형 교장 공모제 이야기도 그러하다. 서울의 두 학교가 내부형 교장 공모 심사를 놓고 어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네 해 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지라 그 빈틈들을 잘 알고 있다.

 

2013년이었을 게다. 학교 안에서 내부형 교장 공모를 추진하기 위해 의견을 모아 가는 데 지역 교감단들의 방해가 무시무시하게 심했다. 우리는 학교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승진해야 할 본인들의 자리 중 한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 무사히 내부형 공모제를 신청했고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정하는 두 학교 중 한 학교로 선택을 받아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에서 계속 발생했다. 지역 교감 중 한 사람이 후보로 들어왔고, 학교 심사 이후 지역 교육청 심사 과정에서 눈에 띄게 편파적인 심사가 이루어졌다. 결국 학교 심사 결과 1,2등 순위를 뒤집히도록 심사를 해서 도교육청으로 추천을 올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다행스럽게도 도교육청에서 다시 순서가 뒤집혀 우리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가 교장으로 4년을 함께 했다. 그 결과 학교는 나날이 더 민주적인 곳으로 거듭 변해 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보게 된 교육을 둘러싼 지역 승진 그룹들의 일사분란함과 그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가능할 수 있는 빈틈들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지역교육청에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사하는 그 과정이 그러했다. 이번에 서울 학교들의 경우에도 지역교육청 심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무사히 평교사형 내부형 공모 교장을 선출한 학교들도 아마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책이 펼쳐지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빈틈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지혜들을 모아가며 방법들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좀 더 평화롭고, 민주적인 학교에서 아이들이 삶을 통해 배우며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자란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민주적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기운은 언제나 틈새에서, 사이에서, 경계에서 새어 나오는 법이다. 어쩌면 지금 이 곳 저 곳에서 보여지는 틈들에서 세상을 더욱 더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역사를 쓸 수 있는 기운들을 찾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이번 교장공모 과정에서 시끌벅적하게 우리가 마주하게 된 이 틈들을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데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1빠 선생의 앞날에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두 손 모아 빌며 이야기를 마무리 할까 한다.

 



심은보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8.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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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  '적군묘지' 앞에서 생각하는 평화


정욱식  |  한반도 평화체제와 군축


송강호  |  검은 바다


정진헌  |  안녕, 친구야!


김소울  |  끔찍한 현실을 추상적으로, 파울 클레


심은보  |  빈틈을 잘 살피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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