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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4_2 정영철_남과 북, 처음으로 마주하다 : 7.4 남북공동성명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5.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남과 북, 처음으로 마주하다 : 7.4 남북공동성명


정영철


197274일 오전 10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내외신 기자 107명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평양에 다녀왔습니다로 시작된 기자회견은 남북 분단의 70년사에 아로새겨질 거대한 전환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북한의 평양에서도 박성철 부수상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었으니, 남북한 모두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1950-60년대의 치열한 냉전이 점차 약화되더니,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열어젖힌 데탕트는 남북관계에도 심각한 변화를 강제하였다. 서로의 실체마저 부정하던 남북이 70년대 초, 이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배경과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당시 발표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은 어떻게 탄생되었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통일의 원칙으로 이야기되는 자주, 평화적 방법, 그리고 민족대단결에 의한 통일은 이미 40여 년 전에 남북이 합의한 것이었다. 비록 한반도에서의 짧은 해빙이 끝나고 긴 냉전의 터널이 다시금 시작되었지만, 이 당시의 순간만큼은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자 하는 남북의 의지가 충만했던 시기였다.


▲ 19727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7.4 남북공동성명의 탄생은 당시 국제적인 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열하면서 적대와 갈등을 지속하는 냉전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냉전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결과 전략핵무기 제한 회담의 시작으로 냉전 속의 평화를 모색하였고, 키신저의 비밀 중국 방문으로 시작된 미-중 화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서 미국이 발을 빼려하고 있었고, 미국의 달러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금 태환1971년 정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괌 독트린(일명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개입을 축소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들의 손으로 지켜가야 함을 표명하였다.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하던 주한미군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실제로 1971년 약 2만 여명의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국제정세의 변화는 미-중의 접근이었다. 1971년의 핑퐁외교로 상징되는 미-중간의 관계 개선은 그해 7월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의 비밀 중국 방문으로 급진전되었고, 이후 1972년 닉슨의 베이징 방문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중의 접근은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 그리고 역시나 소련과의 갈등과 충돌을 경험한 중국의 대소 견제가 접점을 형성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베트남 전쟁과 경제위기 등으로 균열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와 1964년 핵실험 성공 이후, 소련을 견제하면서 국제적인 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중국의 의도가 결합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중의 접근은 각기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직접대결하고 있던 남북 모두에게 심각한 압력이었고, 변화에 대한 적응의 도전을 안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더 큰 충격을 경험한 것은 남한이었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던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변화, 특히 주한미군의 철수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심각한 안보위기를 가져다주었다. 마침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김대중 후보에 고전한 박정희로서는 안정적인 권력의 지속 역시 고민거리였으며, 1960년대의 고도성장이 지체되고 있던 경제 상황도 유리하지 않았다. 1971년의 대선에서 가장 큰 쟁점의 하나는 다름 아닌 통일문제였으며,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박정희의 공화당을 압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의 접근과 한반도에서의 대화의 압력, 국제적인 데탕트의 분위기의 고조 등은 더 이상 과거처럼 북한 실체를 불인정하고, 대화를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탄생에는 이처럼 복잡한 대내외적 상황이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객관적인 배경만으로 사건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위기의 고조, 대화에의 압력 등은 박정희 정권으로 하여금 남북문제를 수단화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대표적으로 19708.15에 발표된 평화통일 구상 선언은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새로운 대북정책의 신호탄이었다. 비록 ‘8.15 선언이 분단 현상의 유지와 두 개 한국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어찌 보면 통일의 대의에서 한참 비켜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북한의 실체 부정을 부정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을 천명한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이 누려왔던 유엔 프리미엄을 스스로 벗어버리고 북한과의 공존과 대화없는 대결에서 대화있는 대결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이는 북한을 협상의 상대자로 인정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남북관계를 제도화하겠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때 제기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이후 남한 정부의 대북 접근의 기본적 원칙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라 할 것이다.


두 개의 한국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던 북한은 미-중 화해와 이어지는 데탕트, 주한미군 철수의 움직임에 따라 역시 변화된 대남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일련의 군사적 충돌은 최대한 억제되고, 남한을 향하여 평화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남북이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접근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었고, 때마침 미-중 접근의 과정에서 중국은 북한에, 그리고 미국은 남한에 상대방과의 대화를 종용하고 있었다. -중의 입장에서 미중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주변 여건, 특히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적 평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1971812일 남한의 적십자사 총재인 최두선은 북한의 적십자사 앞으로 적십자 회담을 공개 제안하였다. 그러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북한의 적십자사는 손성필 위원장 명의로 회담 제의를 수락하면서, 남한이 애초에 제안했던 10월 중 제네바에서의 예비회담이 아닌 9월 중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였다. 마침내 예비회담 개최를 위한 첫 파견원 접촉이 820일 정오에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남북의 분단과 전쟁 이래 최초로 남북이 서로 제의한 회담을 위한 첫 접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년 가까이 예비회담이 진행된 후인, 19726월에서야 비로소 본회담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남북의 입장차가 해소된 결과가 아리나 남북이 내부적으로 ‘7.4 남북공성명을 앞두고 본회담에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인도적 회담이었던 적십자 회담도 현실정치와 관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십자 본회담은 19728월 평양에서 제1차 회담이 열린 후, 19737월 평양에서의 제7차 회담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해빙의 분위기에서 지속되었던 적십자 회담은 73년 남북이 다시금 냉전의 대결상태로 회귀하자, 그 운명을 다했던 것이다. 이산가족의 염원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추석 성묘사업 등 수 많은 상호간의 제안만이 오고 갔을 뿐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 못한 채 적십자 회담은 종결되었다. 어쩌면 이 시기 남북은 인도주의마저도 오히려 정치적인 사고로 일관했던 것에서는 공통적이었고, 명분의 우위를 추구하기 위한 또 다른 체제 경쟁의 하나로 사고했다고 볼 수 있다.


▲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972년 8월 29일, 평양 문수리 국제회의장)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백서 『이산가족 70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십자 회담은 남북 최초의 회담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를 계기로 남북의 정치회담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의 그 이면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의 첫 출발이 되었다. 적십자 예비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에 남북은 비공개 정치접촉을 시작하였다정홍진-김덕현 비밀접촉은 197111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침내 52일 이후락 정보부장의 방북이 성사되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미국 정부 및 CIA에 통보되었다. 또한, 이후락의 비밀방북에는 소위 특수지역출장인허원을 제출하고, 대통령이 이를 승인하는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이후락은 방북을 하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윗저고리 주머니에 청산가리를 숨겨가는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청산가리에 얽힌 일화 중 김일성 당시 수상을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악수를 청하자 이후락은 바로 악수를 하지 못했다. 이유는 청산가리가 손바닥에 달라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떼어낸 후에야 이후락은 김일성과 악수를 할 수 있었다. 남북의 대결이 만들어 놓은 웃지 못 할 한 장면이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평양에서 자신의 상대역인 김영주, 그리고 박성철을 비롯한 북한의 고위간부는 물론 김일성과 두 차례에 걸쳐 만남을 가졌다. 이 김일성과의 만남에서 훗날 ‘7.4 남북공동성명의 모태가 되는 자주, 평화, 그리고 민족대단결의 기본원칙에 대해 합의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후락의 방북 당시, 김영주는 지속적으로 박정희-김일성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후락은 원칙적인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시기상조를 들어 이를 계속 회피하였다.


이후락의 방북을 계기로 그의 상대역인 김영주의 비밀 방남도 계획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영주는 식물신경불화증이란 휘귀병을 알고 있는 관계로 그를 대신하여 박성철 부수상이 비밀방남을 하게 되었다. 박성철의 방남은 그해 529일부터 61일에 이루어졌다. 박성철의 방남 기간 중 이후락과의 두 차례 회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한 차례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통일의 3대원칙, 조절위원회 설치에 대하여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서는 여건의 미성숙을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이 거부하였다. 왜 박정희는 정상회담을 거부하였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당시 북한과의 경쟁에서 아직은 압도하지 못하고 있던 현실, 그리고 남북대화를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고하였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상호간 비밀방문을 통해 남북공동성명은 원칙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문안조정 과정과 접촉을 통해 마침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로 합의하였고, 그날이 되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의 분단 이후, 최초의 합의였고 통일의 대원칙이 공개적으로 천명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공동성명의 공개적인 발표에 대해 박정희는 애초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공개에 대한 찬성, 북한의 공개 요구 등에 밀려 결국에는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이름의 합의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남한 사회는 통일에 대한 열의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북한의 선전에 놀아난 것이라는 의구심, 그리고 공동성명을 깍아내리는 발언이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여론은 통일의 기운으로 끓어올랐고, 이제 곧 통일 될 듯 한 착각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 만큼 억눌려왔던 통일의 열기와 분단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의 고통이 컸던 것이다. 지금과 달리 분단과 통일을 하나의 일상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리고 단 한 번도 만남과 접촉이 없었던 남과 북이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니, 그 내막은 알 수가 없었어도 북받치는 감정만은 대단했던 것이다.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공동성명에 찬성과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공동성명의 발표 이후, 박정희는 국민은 지나친 낙관과 속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야한다고 하며, “모든 면에서 내부체제를 더욱 굳게 다져 이제 막 시작된 남북 간의 대화를 굳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일 유신체제를 선포하던 때의 논리가 이미 등장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더욱이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음에도 그 동안 사형이 연기되었던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의 김규남 전 국회의원이 713일에, 그 이틀 뒤에는 통혁당의 김질락, 그리고 28일에는 통혁당의 정태묵, 캠브리지대 유학생 박노수 등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이제 막 출범하는 시기에 반공의 광풍을 재현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에게 공동성명은 공동성명일 뿐, 단지 그 동안의 대화없는 대결대화있는 대결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신체제등장의 비밀 하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서명 주체의 문제이다. 공동성명의 서명은 서로의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로 되어있다. 이후락과 김영주의 소속과 직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직까지 서로의 실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의 반영이자, 정식 국호를 사용할 경우 두 개의 국가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와 김일성 모두 자신의 정통성과 상대방에 대한 괴뢰 정부적 사고를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이 이유일 것이다. 남북의 합의서에 상대방의 국호와 직위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에 와서야 가능했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은 이후락과 김영주를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 조절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에 걸쳐 진행된 조절위원회는 19738월에 북한의 중단 성명 발표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지만, 실제의 이유는 1973년 박정희의 ‘6.23 선언때문이었다. 두 개의 한국을 공식화하고, 유엔에의 동시 가입을 주장한 ‘6.23 선언은 북한의 하나의 유엔 가입과 분단 고착화 반대의 입장과 충돌하면서 공동성명의 정신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으로 비판되었다. 이렇게 하여 온 내외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던 공동성명과 그의 이행을 위한 조절위원회는 파탄이 나고 한반도는 다시금 대화없는 대결의 냉전으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남북한 최초의 합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합의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그 큰 울림을 내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공동성명의 정신, 통일의 3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북이 비록 자주에 대한 엇갈린 해석을 내리고 있지만,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서, 전 민족이 대단결하는 통일을 이루자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합의를 이뤄놓고도 남북대화가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정치적으로는 유신을 통해 권력의 영구화를 노렸던 박정희의 속셈, 대외적인 안보 위기에 대한 남북대화의 정략적 수단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남북관계에서의 민의 배제와 소수에 의한 정보의 독점과 국내 정치적 활용을 들 수 있다. , 공동성명의 탄생과 그 전후의 과정은 철저히 비밀과 소수에 의한 합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토론과 합의 등은 생략되었다. 물론, 공동성명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비밀과 비공개 등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성명이 공개되고, 대중들의 통일의 열기가 단지 열기만으로 끝났던 것은 이 논의의 장에 참여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은 전 민족적인 과제이며 따라서 전 민족의 의사와 참여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문제이다. 과거 동-서독의 통일 과정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가 봉쇄되었고, 결국 일방적 통일-통합의 과정으로 귀착된 경험도 역시 유사하다 할 것이다.


오늘날 공동성명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통일은 결코 소수의 정치가들에 의해 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소수에 의한, 소수의 독점과 정책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는 명확하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비이성적인 대북정책의 이면에는 결국 정보의 독점, 민이 배제된 배타적 정책 결정 등의 민주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격언이 다시 한 번 증명되고 있다. 또 다시 강조하는 바는 통일은 결코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지도 않지만,’ ‘소수의 결탁으로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공동성명은 박정희에 의해 통일은 가고, 유신만 남은통한의 역사로 남지 않았는가.

 


참고한 글

김연철, ‘7·4 남북공동성명의 재해석,’ 역사비평20125.

김지형, 데탕트와 남북관계(서울: 선인, 2008).

김형기, 남북관계 변천사(서울: 연세대출판부, 2010).

남광규, ‘남북대화의 국내적 활용과 ‘7·4남북공동성명도출,’ 평화학연구173(2016).

노중선, 남북대화 백서(서울: 한울, 2000).

마상윤, ‘안보와 민주주의, 그리고 박정희의 길,’ 국제정치논총434(2003).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파주: 창비, 2012).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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