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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5_2 정영철_구국의 이름으로 : 유신의 광풍과 반공의 나라 만들기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5. 9.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구국의 이름으로 : 유신의 광풍과 반공의 나라 만들기


정영철


1972‘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온 나라가 통일의 열기로 들끓고 있던 시기, 박정희와 그 몇몇 측근들은 오랫동안 비밀리에 새로운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시기 박정희는 동맹국 미국에 대한 배신감, 안보 위기, 그리고 60년대의 고도 성장이 한풀 기세가 꺽이고, 부정부패로 인한 거대한 사회적 스캔들 등으로 안팎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71년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 밖의 고전을 겪게 되었고, 이는 자신의 영구집권에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7210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발동하였다. 일명 유신체제의 시작이었다. 이후, 11월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헌법을 확정하고는 1223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유신공화국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70년대, 유신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일반적으로 유신체제 등장의 원인을 박정희의 개인적인 집권욕, 그리고 외부의 심각한 안보 위기 등으로 설명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안으로는 도전세력의 성장, 외부적으로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안보 위기가 주요한 배경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서의 도전세력의 등장이 꼭 유신으로 귀결될 필요도 없었고, 외적 안보 위기는 상당 부분 과장되었거나 그 자체가 유신체제의 충분조건일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북한의 무력 침략에 대한 위협은 미국도 인정할 정도로 과장된 것이었다. 실제로 1969년부터 북한의 휴전선 지역에서의 도발 횟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1967829, 1968761, 1969134건으로 감소했고, 1970년에는 106, 197158, 그리고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1972년에는 1건 밖에 없었다. 이것이 전부일수는 없지만, 북한의 임박한 무력남침 등의 안보위기는 유신을 위한 명분이었지 사실이 아니었다. 물론, 위에서의 정치, 경제, 안보 등의 원인들이 필요조건이었을 수 있으나, 그 대응에는 박정희의 개인적인 집권욕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특히, 72년은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이 한 자리에 앉아 통일을 논의하고, 적십자 회담 본회담이 성사되어 남북의 대표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상황이었다. 세계 정세 역시 데탕트를 맞이하여 미소를 중심으로 한 대결의 구도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짧은 데탕트, 긴 냉전의 시절이었고, 이 한복판에 바로 유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 1972년 12월 27일.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열린 유신헌법공포식 Ⓒ뉴스타파


유신은 어떻게 이 땅을 유린했고, 또 지금까지의 긴 여운을 남겼을까? 특히, 이 시기 남북관계는 어떤 몸살을 앓았을까? 우리 역사의 가장 긴 암울했던 나날로 기록되는 유신체제는 한 마디로 모든 민주주의적 정당성이 사라지고,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개인의 절대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헌법이 아닌 헌법의 효력을 갖는 긴급조치로 국가가 운영되던 시기였고, 여기저기서 간첩들이 고문과 강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기였다. ‘만들어진 간첩은 재판을 받은 이후 곧바로 사형장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렇게 법의 이름으로 사법살인이 진행되던 시기가 바로 유신의 시절이었다.


다른 한편 유신은 잘 살아보세!’로 상징되는 새마을 운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반공과 안보가 민주주의를 짓누르고 사람들을 공포에 멍들게 했다면, 경제 성장의 일념이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움직이도록 했던 성장 제일주의의 시기가 유신의 시절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하고 시작되는 이른 아침의 새마을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면서, 아침잠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도록 한 시기가 바로 유신이었다. 유신 시대를 전후하여 학도호국단(1975), 고등학생 교련(1969), 예비군(1968), 민방위(1975) 등이 조직되어 전 국민이 동원체제의 한 구성원이 되어, 일사불란한 군대식 조직과 문화가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도 유신의 힘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되어 안보와 성장을 위한 최대의 동원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모든 비판과 저항은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민주적 기본절차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런 점에서 유신의 다른 이름은 민주주의 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사망은 곧 남북관계에서의 대결과 갈등의 격화를 의미한다. 어쩌면 유신은 철저히 통일을 잘 포장된 상품으로 하여 사람들을 유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기존의 남북관계에서 일정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박정희도 밝혔듯이, 이런 상황에서 유신은 남북대화를 명분으로 종래의 헌법이 남북대화 같은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고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결국 남북대화를 유신의 명분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는 박정희의 발언에서 분명히 확인되는데, 그는 유신을 선포하던 1017통일과 번영을 바라는 국민들은 이러한 비상조치를 지지할 것으로 믿으며, 그러나 만일 국민이 비상조치에 따른 헌법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주장했다. 결국 남북대화를 볼모로 유신체제를 수용하라고 국민들에게 겁박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신체제는 그 동안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던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유신헌법에 의해 조직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박정희 1인 독재권력의 시작이었다. 유신체제 하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반공주의와 성장 제일주의를 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총력안보와 국가 민족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성장은 잘 살아보세!’라는 감정적 구호에서 보듯이, 일반 국민들의 염원이자 동시에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압도하기 위한 힘의 구축을 의미하였고, 반공은 성장을 통해 힘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목적이자 수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노동자와 농민, 서민들의 정당한 권리는 반공과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짓밟혔고,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국가 감시기구의 권한은 높아만 갔다.


유신은 정권에 위해가 되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냈다. 북한과 연계된 무시무시한 조직을 만들어 처벌하는 등 사법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74년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과 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건이었다. 특히, 2차 인혁당 사건은 그야말로 사법적 살인이었다. 사실, 인혁당 사건은 이미 1964년 중앙정보가 발표하였으나 서울중앙지검이 혐의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흐지부지된 사건이었다. 그러다 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으로 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었고, 197548일 대법원에서 24명 중 8명에 사형판결이 확정되자 그 다음날 바로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에 대해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고, 엠네스티는 야만적 살인행위로 규탄하였다. 결국 인혁당 사건의 핵심은 결국 박정희에 반대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아예 뿌리를 뽑아, 미래의 저항 세력을 말살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 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독서하는 소녀상과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  매체비평 우리스스로매비우스


유신에의 저항은 곧 죽음이나 감옥행을 의미했다. 박정희에 맞서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고 싸웠던 장준하 선생은 19758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김대중은 일본에서 납치되어 현해탄의 물고기 밥이 될뻔하다 살아남았으며, 저명한 법학자였던 최종길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앞서 인혁당은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장으로 끌려갔으며, 감옥에 갇힌 양심수는 1970343명에서 19791,239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뿐인가, 모든 반유신 활동에 대해서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켜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유신에 맞서는 것은 감옥과 죽음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민주화를 위한 여정은 식을 줄 몰랐고, 유신이 종말을 고하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1979년의 남민전 사건과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등 끊이지 않고 민주화 운동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유신체제는 반공과 성장의 두 축으로 지탱되었다. ‘반공을 위한 성장과 성장을 위한 반공이 톱니 맞물리듯 돌아갔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많은 반공표어가 만들어졌다. 각급 학교에서는 반공포스터, 반공웅변 대회 등이 열렸고,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이 신화가 되어 각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등·하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하였다. 그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온 가족이 반공가족이 될 것을 요구하는 간첩잡는 아빠되고 신고하는 엄마되자!’라는 표어이다. 이 표어 속에서 아빠, 엄마는 간첩을 신고하고 때려잡는 반공주의 투사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에게 유신체제란 바로 그런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 남북관계는 어떠했을까? 1973년 조절위원회 위원장 회담이 끝내 파국을 맞은 상태에서도 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담은 지속되고 있었다. 유신체제가 성립되기 전 그를 먼저 통보받은 북한은 남북대화의 틀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유신에 대한 비판을 삼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명분을 통일남북대화에서 찾았고, 이를 북한에 전달한 남측 인사 역시 현재의 남북대화통일을 더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 유신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북한에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 새빨간 거짓이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이에 반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 금지가 여전히 유효한 상태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유신체제에서 북한은 타도의 대상이었지, 대화와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신체제에서 북한은 이미 1950년대에 뿌리내렸던 반공을 절대화하는 것이었고, ‘머리에 뿔 달린 괴물로서 북한이 사회화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유신체제에서 어린이들은 단지 선건설 혹은 선평화, 후통일의 소년병으로 양육될 뿐이었다. 결국 가까스로 이어져 오고 있던 남북의 대화는 1975년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적십자회담 역시 실무회의만 지루하게 이어졌고, 이마저도 1977년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유신체제에서 남북간의 대화는 불가능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말하였지만, 상대방의 괴멸을 목적으로 한 체제에서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 질리는 만무하였다. 특히, 유신체제가 일체의 반유신 활동을 범죄화한 상황에서 민주화 세력이 통일의 세력으로서 성장할 수 없었다. 시민사회는 얼어붙은 동토의 그것과 다를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 논의는 독점될 수밖에 없었고, 소수의 정략적 이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유신체제 자체가 이미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탄으로 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en.wikipedia.org


그럼에도 1970년대는 남북간의 관계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1973년의 ‘6.23 선언은 비록 두 개의 한국,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그 동안의 냉전 외교정책이었던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고, 북한을 실체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비록 유신체제가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체의 인정은 향후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존재임을 인정한 것과 같았다. 또 하나 이 시기 1972년 같은 시각, 남에서 유신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날, 북에서는 수령 김일성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국가주석제가 선포되었다. 어쩌면 남북이 비슷한 국가질서를 새로이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남북이 서로가 공생하고, 공모결탁하는 상호의존관계로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정의 상이함결과의 유사성을 일면적으로만 분석한 결과이다. 북에서의 국가주석제는 이미 1967년 형성된 수령제 정치체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북한 사회주의 발전의 과정에서 김일성의 지속적인 권력강화의 마무리 과정이었다. 반면 유신은 위기를 이용한, 그리고 북과의 대화를 이용한 명백한 정치적 공작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정치체제가 최고지도자 1인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한 이 시기의 남북의 모습을 닮은 듯그리고 닮지 않은 듯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 이면의 차이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유신의 명분이었던 남북대화는 오히려 유신체제 이후 더욱 위축되었고, 실제 1970년대 남한 정부가 의미있는 북과의 대화를 추진하지도 않았다. 이는 유신이 남북의 분단을 십분 활용한 정치적 공작이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결국, 유신체제는 1979‘1026에 그의 충직한 부하였던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파국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토록 강고했던 유신체제였지만, 박정희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이는 유신체제가 독재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었을 뿐, 그를 위한 정치경제문화적 토대는 허약하기 그지 없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함께 반공의 나라, 성장의 나라도 사라졌다. 그러나 유신체제 하에서 억압당했던 민주화세력은 또 다른 군사쿠데타를 맞이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성장하지 못한 민주화시민사회의 힘이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유신체제는 남북관계에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북한에 대한 왜곡된 실상은 물론이거니와 민주화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북한과의 대화와 통일에 대한 협상이 진지하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반공주의의 커다란 장벽이 한 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렀고, 사회 전반에 만연된 군사주의에 따른 평화의 문화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결국 민주화의 암흑은 통일과 평화의 암흑이기도 하였다. 민주화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통일논의는 반평화반통일의 세력에 의해 독점되고 언제든지 짓밟힐 수 있음을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도 그러하지 않은가? 민주, 평화, 통일은 언제나 같은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유신은 몰락했지만, 광주의 핏빛 항쟁과 또 다른 군사독재를 거쳐 그로부터 긴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서만 민주와 통일의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다.

 

 

참고한 글

김연철, 냉전의 추억(서울: 후마니타스, 2009).

김지형, “유신체제기 박정희의 남북관계 구상과 실제,” 역사와현실88(2013).

김행선, 박정희와 유신체제(서울: 선인, 2006).

남광규, “남북대화의 국내적활용과 ‘7.4 남북공동성명의 도출,”평화학연구173(2016).

학술단체협의회, 유신을 말하다(서울: 나름북스, 2013).

마상윤, “안보와 민주주의, 그리고 박정희의 길,” 국제정치논총434(2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과 반유신(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신종대, “유신체제 수입원인에 관한 재조명,”사회과학연구131(2005).

오창헌, 유신체제와 현대한국정치(서울: 오름, 2001).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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