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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5_3 정경화_미래에서 온 비폭력 저항의 화신, 간디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5. 9.

[시선 | 평화를 이야기하는 철학자들]


미래에서 온 비폭력 저항의 화신, 간디


정경화


평화주의자하면 우리는 간디를 떠올린다. 1948년 급진주의 흰두교도에 의해 암살되어 7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간디는 독립운동가, 사회개혁가, 종교지도자로서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다.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의 독립을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일으키고,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으며, 인도 내 이슬람교와 흰두교의 화합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간디가 인도의 독립과 사회개혁에 헌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구라자트 지역 자이나공동체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간디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법학을 수학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간디는 법정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변론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선천적으로 심약한 성품을 타고났다. 그러던 중 변호사인 형의 대리인 자격으로 인도 주재 영국 관리인 올리반트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하는데, 런던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올리반트가 간디를 모욕하며 폭력적으로 경찰서 밖으로 쫓아낸다. 이 사건 후 간디는 인도인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를 절대 묵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얼마 뒤 남아프리카로 이주하게 된 간디는 본격적으로 저항운동가로 나서게 되는 일을 겪는다.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겪는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로 이동하기 위해 올라탄 기차에서 간디는 일등석 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화물칸으로 이동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를 거부한 간디는 결국 기차에서 강제로 쫓겨났고, 이 일을 계기로 인도인들을 조직하여 나탈 인도의회(Natal Indian Congress)’를 설립한다. 이 모임의 투쟁을 통해 인도인들의 일등석 탑승이 허용되고, 그 동안 과하게 부과되었던 인두세(매년 성인 한 사람당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세금)를 낮추는 성과를 낸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본토로 돌아온 후에도 모든 차별과 억압을 끊기 위한 일에 온전히 헌신하게 된다.


간디는 저항운동가로서 당연히 그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고 격정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가장 소박하고 고요한 삶을 살아간다. 간디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변호사로서의 수입을 저항운동가들의 공동체 건설을 위해 내놓고, 가족과 함께 인도인 집단 거주지로 이주하여 검약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얼마나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지는 간디 암살 당시 소장품이 말해주는데, 명주옷을 감싸는 외투 두벌, 손목시계 하나, 안경, 세권의 책, 나무 밥그릇 두개와 숟가락, 나무샌들 한 켤레와 지팡이가 전부였다. 그의 절제된 생활이 암시하듯이 간디가 택한 저항의 방식은 비폭력 저항이다. 불복종, 서신 항의, 단식, 행진, 투옥 등, 가장 투쟁적이면서도 고요한 저항을 간디는 이어나갔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1930년에 있었던 소금행진(Dandi Salt March)’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소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금지하고 영국에서 수입된 소금에 대한 세금을 갈취하고 있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간디는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소금을 생산했던 해안가 지방을 잇는 370킬로미터를 26일간 걷는다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의 바탕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간디의 철학이 담겨있다.

 

비폭력은 우리 인류의 법칙이며 폭력은 야만스런 짐승의 법칙이다. 영혼은 짐승들 속에서는 활동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물리적인 힘의 법칙만 알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더 높은 법칙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인류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 사랑의 법칙이다. 만일 폭력과 증오가 인간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멸종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오직 비폭력을 통해서만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증오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간디에게 있어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때는 사랑을 할 때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비인간성을 용납할 수 없을뿐더러, 설령 폭력이 폭력을 막기 위해 행하여졌을지라도 이는 또 다른 폭력의 씨앗을 남겨두는 것이다. 완전한 폭력의 근절을 위해서는 비폭력으로써 폭력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억압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간디의 투쟁에서 사랑은 두 가지 방향으로 향하는데, 첫째는 투쟁의 근거가 되는 고통 받는 자에 대한 공감이고, 둘째는 투쟁의 대상에 대한 존중이다. 먼저 존중에 대한 간디의 생각은 모든 비폭력 투쟁의 목표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격퇴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간디는 폭력과 억압을 일삼던 투쟁의 대상에 대해서도 인간적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들을 적대시하기보다는 함께 합의를 이루어낼 대화상대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투쟁의 힘은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난다. 간디는 지도자로서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의심이 들 때면 항상 다음과 같은 방법을 시도해보라. 당신이 그동안 본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회상하고, 당신이 의도한 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 사람이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이 그로 하여금 삶과 운명을 다스리게 만들어주는가? 달리 말하면, 그것이 굶주리고 영적으로 지친 수천만 우리 동포들이 자치의 길로 갈 수 있게 만드는가?”

 

간디가 인도 독립 후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운동 중 하나가 인도사회의 고질적 사회악인 불가촉천민 차별 폐지 투쟁이었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신분계급 카스트의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주거지와 거리통행에도 제한을 받는 등, 각종 사회적 차별과 가난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다. 간디는 이들을 위한 투쟁을 하며 영국의 식민지 정부와 인도의 정부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식민지 정부를 악마적이라고 비난한다면, 우리 역시 불가촉천민 형제들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뱃가죽으로 땅을 기게 했고, 코로 땅바닥을 문지르게 했으며, 분노에 찬 시뻘건 눈으로 그들을 기차 칸으로부터 밀어냈다. 우리들은 불가촉천민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불가촉천민의 제국이 되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덧씌워진 슬픔과 고통과 모욕을 나누며, 나 자신과 그들의 비참한 조건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운동의 지도자로서 다방면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었음은 매우 유명하다. 특권계층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감복시켜 자신의 저항운동에 동참시키는가 하면, 물레를 돌리는 것과 같은 기발한 저항의 전략을 구사하고, 뛰어난 갈등 중재 능력으로 극렬히 대립하는 당사자들의 합의를 결국 이끌어냈다. 유머감각까지 뛰어나, 간디가 평상복 차림으로 영국의 왕을 예방한 것에 대해 영국 언론인들이 당혹감을 표시했을 때, 간디는 국왕 폐하의 복장만으로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충분했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대응한다. 한편 간디의 지도자로서의 다양한 능력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간디가 저항의 즉각적 성과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추후 민중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당장의 억압, 착취, 차별,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의와 평화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이 사회경제적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자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한 간디는 마을공동체를 되살리는 것에 힘을 쏟는다. 남아프리카에서 비폭력 저항에 동참하는 운동가를 위해 공동체인 톨스토이 농장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도에서도 아쉬람이라 불리는 공동체를 설립한다. 간디가 참파란 지역 농민의 지대 반환운동을 지도하여 결국 영국 지주들이 지역에서 철수하는 성과를 냈을 때에도 지역공동체의 자치가 탄탄해지도록 농부들에 대한 교육을 실행하였다간디가 세계의 미래라는 갈퉁의 말은 간디라는 위대한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간디는 전 세계에서 하나의 미래이다. 그 미래는 여러 나라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통해 봐야만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역의 사회적 변화와 자치인데, 간디가 살던 마을은 지방의 자치도시로 잘 알려진 곳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미래 세계의 표지석이 될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집이며, 가정이다. 간디는 그 길을 보여주었고, 그리고 그 길이 바로 그 자체로서 인류의 목표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 요한 갈퉁(스웨덴 평화학자)

 

억압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민중에 의한 비폭력 저항이 어떻게 가능한지, 평화로운 세상을 어떻게 일굴 수 있는지를 우리는 간디의 일생을 통해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간디가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꿈꾸는 평화로운 세상은 헛된 꿈이 아니라 분명 실현 가능한 미래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정경화 | 대학에서 때때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세상에 정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녹록하지 않아 늘 궁시렁대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 만드는데 일조하고픈 소망은 꼭 쥐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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