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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5_4 김동진_화해의 딜레마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5. 9.

[시선 아일랜드에서 쓰는 평화학 이야기]


화해의 딜레마


김동진


최근 화제가 된 아메리카 퍼스트브렉시트라는 구호는 국가 이익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잘 보여 준다. 미국과 영국이 가진 국내 문제가 얼마나 국제 문제와 시공간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보다, 단순하게 자국의 이익만 최대로 구하게 되면 미국과 영국의 위대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홍보가 성과를 거둔 것이다. 냉정한 국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기 국가, 그리고 자기 집단의 이익이라는 현실적 설득 논리, ‘자유 미국이슬람 근본주의’, ‘영국의 민주주권유럽연합의 독재적 통합이라는 과장된 선악 구호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정을 자극했다. 만화영화 세일러 문에 나오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는 대사에서처럼, 주인공과 우리 편을 위협하는 악역은 용서하거나 연민을 느낄 가치가 없다. 세계화 과정 속에 고통 받는 상대의 입장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 그리고 식민정책과 같은 역사적 배경은 단순함 속에 묻혀 버린다.


1999년 봄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청소년들에게 무기가 아니라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을 가르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감동적 연설을 남겼다. 그런데 같은 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했다. 코소보 인종청소에 대한 대응이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강력한 군사적 개입을 지지했다. 나토의 폭격은 인권을 위한 폭격이라 묘사되었다. 동일한 사람이 같은 시기에 발생한 국내 청소년 총기사건과 국제 분쟁에 대해 상반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 나토의 공습으로 인해 어린이를 포함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는 미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선생님이 학생들의 싸움을 보면서, 폭력을 부추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단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기 원한다. 적국과의 대화보다는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모습의 지도자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구도 속에서 상대의 입장 및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이해하려는 화해의 시도는 자기 집단에 대한 배신이자 부정의한 일로 간주된다.


▲ 웃음꽃 형제(Chuckle Brothers)_이언 페이슬리(왼쪽)와 마틴 맥기네스(오른쪽). 

과거 협상 과정에서 서로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도 불편해 하던 두 사람은 

공동정권 수립 이후 '웃음꽃 형제'(Chuckle Brothers)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돈독한 관계를 자랑했다. www.irishcentral.com


최근 북아일랜드에서는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반(First Minister)인 민주연합당 아이린 포스터의 신재생에너지 정책과 관련된 스캔들로 인해 민주연합당과 신페인당 공동정권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부수반(Deputy First Minister)이지만 사실상 동일권력을 가진 신페인당 마틴 맥기네스는 아이린 포스터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부수반직 사임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3월 중으로 조기 선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거에는 폭력 사태로 공동정권이 붕괴 되었다면, 이제는 정책 차원에서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인해 공동정권이 깨졌다는 점에서, 어떤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그래도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많이 진전된 것이 아닌가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어 놓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번 사태가 브렉시트 투표 결과로 인해 불안정해진 북아일랜드 갈등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영국 정체성이 강한 민주연합당 사람들은 아일랜드 정체성이 강한 신페인당 사람들이 여전히 아일랜드 남북통일을 꿈꾸고 있다며, 이번 사태도 결국 민주연합당을 약화시켜 북아일랜드가 영국을 떠나 남아일랜드와 통일하도록 하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신페인당 사람들은 아이린 포스터를 비롯해 오만한 민주연합당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이런 식으로 간다면 평화 프로세스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마틴 맥기네스가 돌연 건강 문제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마틴 맥기네스는 아일랜드 민족해방군 IRA 출신 정치인으로 상당한 강경파였으나, 민주연합당의 당수이자 평화 프로세스를 반대하던 이언 페이슬리와 함께 공동정권을 수립하면서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꽃을 피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여기던 두 강경파 갈등 지도자가 공동정권을 수립한 사건은 북아일랜드를 비롯해 전 세계에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과거 협상 과정에서 서로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도 불편해 하던 두 사람은 공동정권 수립 이후 웃음꽃 형제’(Chuckle Brothers)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돈독한 관계를 자랑했다. 이언 페이슬리의 정계 은퇴 이후 피터 로빈슨에 이어 새로 당수가 된 아이린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간 공동정권의 수반으로 활동해온 마틴 맥기네스의 은퇴는 많은 북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주연합당 소속 의원이자 이언 페이슬리의 아들인 이언 페이슬리 주니어 의원은 마틴 맥기네스의 건강을 염려하며,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평화 프로세스를 일구었던 마틴 맥기네스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북아일랜드의 평화 프로세스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아일랜드 통일 문제는 여전히 갈등의 원인으로 남아 있다. 아일랜드 통일을 원하는 집단과 영국에 남기를 원하는 집단은 여전히 서로의 의도를 믿지 못하고 있다. IRA의 테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와 영국의 지배로 차별을 겪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도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브렉시트 이후 북아일랜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불안도 상당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 마틴 맥기네스의 은퇴로 인해 웃음꽃 형제의 웃음이 간간히 뉴스에 다시 보도되고 있다. 어떻게 두 사람이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될 수 있었을까? 주변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서로 다른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결국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상대 집단에도 알고 보면 꽤 좋은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잘못을 물어야 하는가?


개인적 갈등뿐만 아니라 국제적 갈등에서도 무력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정의의 대상에 조금 차이가 있다. 개인적 관계와 달리 집단이나 국가적 수준의 갈등에서 정의의 대상은 상대 집단의 개인이 아니라 집단 전체이다.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단순히 그 집단 가운데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단순 구도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을 통한 정의는 복수의 악순환만을 가져오게 된다. 어떤 집단의 지도자는 갈등 현실을 빌미로 자신의 지배와 통제를 강화한다. 그런데 이런 구도에서 지배이익을 얻는 것은 상대집단의 누군가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집단에도 그런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정의는 상대 집단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투쟁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대 집단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의 비폭력 화해를 통해 단순한 구도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갈등 구도의 단순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집단 간의 갈등, 국가 간의 갈등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간의 화해는 때로 정의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는 관계는 아니지만, 고통 받는 서로를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화해 작업이 필요한 이유이다.

 

  

김동진 | 한신대에서 신학을, 시드니대학에서 평화학을,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국제평화학 겸임교수로 평화학을 강의하면서,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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