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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6_2 정영철_이산의 아픔, 분단의 비극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5. 9.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이산의 아픔, 분단의 비극


정영철


1983630일은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만한 날이었다. KBS 텔레비전에서 한국전쟁 33주년을 맞아 편성한 특별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전파를 타고 첫 방송된 날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자 전국의 생사를 모르던 이산가족들이 KBS로 몰려와 너도나도 가족을 찾기 위해 출연 신청을 하였다. 하여 원래 75분으로 기획되었던 프로그램은 그 해 1114일 새벽 4시에 10,189번째 상봉자가 만날 때까지 전체 기간 138일간의 역사적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여의도 만남의 광장에는 애끓는 사연을 담은 가로 60cm, 세로 40cm의 벽보가 41,636장이나 게시되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벽보를 하루 종일 지켜보면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지켰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인천, 광주, 대구, 전주, 대전, 청주, 춘천, 강릉 등 전국 곳곳과 멀리는 미국, 유럽, 일본, 호주, 뉴질랜드, 사할린에까지 이어진 이산가족 찾기의 외침은 분단과 전쟁이 남기고 간 이산의 고통이 얼마나 삶의 깊은 곳에까지 뻗쳐있는지를 보여준 산 교육장이었다. 더욱이 휴전선 이남에 생존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지만, 남북으로 갈라져 생사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의 또 다른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만을 던져주며 우리 모두의 상처를 맨살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사실,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이 이때에야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방송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기를 시작한 것은 19731027, KBS 1라디오 <오후의 교차로>에서였다. 이 당시에는 토요일 오후에만 주 1회씩 방송하였다. 하여 별다른 효과도 없었고, 실제로 이 방송을 통해 상봉을 한 가족도 없었다. 이후, 197414일 매일 방송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시작 22일째인 1974126일 첫 상봉자가 나타났다. 1960년대 정착된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부족하긴 했지만 집집마다 TV수상기가 보급되면서 방송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상황에서 방송을 통한 이산가족 찾기는 그 위력을 더할 수 있었다. 사회적 관심, 미디어 기술과 대중화 등이 어우러져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 KBS 본관 건물과 벽 등에 빼곡히 붙여져 있는 벽보 KBS 아카이브


남과 북의 분단이 가족을 갈라놓고, 인륜의 정을 끊어놓아 바로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거나 잠시 몇 분 동안만 서로 얼굴을 대면할 것을 허락받는 일도 있었다. 196410월은 동경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해로 기록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단과 전쟁 이후, 첫 이산가족 상봉을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바로 북한을 대표하는 육상선수 신금단 부녀의 상봉이었다. 1951년 잠깐 집을 나가 3일간만 숨어있다 오겠다고 한 아버지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12살이었던 딸은 세계 신기록을 세운 육상선수가 되어 올림픽에 참가하러 동경에 왔다. 동경에 있던 재일동포들의 후원과 지원 속에서 아버지와 딸은 잠깐 만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하여 109일 오후, 동경의 조선회관에서 아버지와 딸은 얼싸 안은 채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는 만남을 가졌다. 7분이었다. 그리고 떠나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아버지는 다시 달리고 달려 동경의 우에노역에서 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 3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들 부녀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 신문재씨는 1983년 이산가족의 아픔과 감동이 메아리쳤던 그 해에 사진 속의 딸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다.


남북 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이루어졌다. 1984년 망원동 수해에 대해 북한이 수해지원을 제안하자 이를 전두환 정권이 수락하면서 극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 남북관계는 1983버마 랑군 테러와 이어지는 부산 앞바다에서의 다대포 간첩선 사건 등이 터지면서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의 적십자사의 제안에 대해 예상을 벗어나서 우리 적십자사가 수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84년부터 19855월까지 남북 적십자간에 9차례의 본회담을 거치면서 <남북한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서울 평양 교환방문>이 합의되었고, 마침내 920-23일까지 역사적인 첫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이루어진 첫 이산가족 상봉은 총 65가족, 157명이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다.


서울과 평양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은 그야말로 눈물 바다였다.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에 담긴 상봉 장면은 아버지의 두 뺨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기자들도, 안내원도, 음식을 나르는 호텔 종업원들도 함께 울었다.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진기자들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 아니었겠는가? 이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이산가족이 눈물과 그리움으로 졸도하여 죽기까지 했는데, 현장의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


▲ 1985년 서울∙평양 교환방문과 이산가족 상봉을 전하는 경향신문 (1985년 9월 20일) 경향신문


그런데 딱 여기까지였다. 남북은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둘러싼 갈등과 대결만을 지속했다. 이산가족이 다시금 만나기까지는 이로부터 15년이란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바로 2000년 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매해 1-3차례씩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던 상봉이 2002년부터는 금강산에서 열리게 되었다. 2008년부터는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이르게 되자 드문드문 열리게 되었고, 2009, 2010, 2014, 그리고 2015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1985년의 교환방문을 합해 지금까지 총 21차례 23,676명이 상봉을 하였다.


이처럼 1년에 수차례씩 이산가족 상봉이 이어지자, 금강산에 이산가족 상봉 면회소를 건설하고 20099월부터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뿐인가? 직접 대면 상봉은 못하더라도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게끔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바로 화상상봉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서 원하는 가족의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였다. 화상상봉은 대면상봉이 여러 가지 절차와 한정된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2005년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화상을 통한 상봉이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총 7차례에 걸쳐 557가족, 3,748명이 화상으로나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리든 간에 국민들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게 된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연과 이 세상 모든 소설가들이 모여서 상상을 하더라도 지어낼 수 없는 기막힌 이야기들, 막상 만났을 때의 그 갖가지 모습은 아무도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짧다. 이산가족은 참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눈물을 흘린다.

그뿐인가? 이산가족 상봉을 경험한 사람들은 상봉 이후에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린다.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은 중국을 통해 몰래 만나거나 심지어는 아예 탈북을 시켜서 남으로 데려 오기도 한다. 또 이산가족 상봉은 서로의 체제 이질성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수령님과 최고지도자의 은덕으로 여기는 북의 가족들 태도에 실망하기도 하고, 경제적 여유와 미국 유학 등을 자랑으로 하는 남의 가족들 태도에 분노하기도 한다. 이산가족 상봉 순간은 체제(사상과 정치)의 문제가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장에서는 서로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기야 그동안 흘러온 가족들의 생사와 경험만을 말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현재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 남과 북이 교류와 협력을 지속하는 시기에는 이산가족 상봉은 하나의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남과 북이 다시금 대립체제를 지속하면서 이산가족에게는 아예 조그만 문 마저도 닫아버렸다. ‘인도주의 분단정치의 가장 큰 희생자들인 셈이다.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되어 있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20169) 130,080명이다. 그러나 이중 65,134명이 돌아가셨다. 남아있는 64,569명 중에서도 70대 이상의 고령층이 54,249명으로 전체 8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오늘 하루하루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왔던 것처럼 1년에 1-2차례 약 1,500명 남짓한 분들이 만난다면 36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이들 대다수는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남과 북이 인도주의 분단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방식에서 더 많이, 더 자주 만나는 방식, 아니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방식까지 고민해야 한다. 분단을 현실로 인정하더라도 이산가족의 교류만은 분단시키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과거 동·서독의 경험은 참고할만한 유용한 교훈을 주고 있다.


·서독은 일찍부터 동·서독 간 이동을 허용해왔다. 이산가족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 속에서도 소포, 송금 등을 허용했고, 동독은 54-57년까지 매년 250만 명의 연금수혜자들이 서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60년대에는 서독이 동독에 막대한 차관(장기융자)를 제공하면서, 이산가족 교류에 대한 동독의 호응을 유발시켰고 그 결과 114주간의 서독 방문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후 점차 방문대상자를 확대하였고, 1년에 60일로 체류기간 또한 연장하였다. 특히, 동독은 연금수령자들에게는 서독으로의 이주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이 결과 통일 전까지 약 60만 명의 동독 연금수령자들이 서독으로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독 정부는 이산가족 교류와 결합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체류비와 이주비, 혹은 동독 지역에 남아있는 어린이의 부양비까지 제공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서독은 유럽이라는 주변 환경의 영향, 그리고 역사와 문화의 차이, ·서독간의 전쟁이 부재했다는 우리와 엄연히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이산가족의 교류와 관련되어 서독 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는 등, ‘경제-인적교류 교환이라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동·서독은 인도주의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요구를 전면에 내걸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산가족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도적 교류를 중심으로 정부와 민간이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일찍부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상호간의 협의를 시작했고, 합의를 이루었다는 점은 분명 우리가 새겨보아야 할 지점이다.


실제 동·서독 경험도 그렇고, 우리의 역사도 그렇고 남북의 정치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이산가족 문제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해왔다. 결국 남북 정부가 만나고 어떻게 하든 인도주의를 의제로 올리고 정치적 방식으로 풀어감으로써 이산가족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로만 주장한 우리도, 이를 정치적 문제로 제기한 북도 결국은 인도주의 분단정치에 푹 절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오늘도 이산가족 한명 한명은 한 많은 가슴을 부여잡고 분단을 원망하며 세상을 떠나고 있다. 김귀옥이 적절히 표현했듯이, 이들은 빨갱이도 아니고, 반공전사도 아닌 단지 인간으로서 분단에 억눌린 가장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참고한 글

김귀옥,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서울: 역사비평사, 2004)

김귀옥, “이산가족의 범주화와 공동체 형성 방안,” 역사문제연구19(2008)

김병옥·김영희, “남북한과 통독 전 동서독의 이산가족교류 비교 연구,” 현대북한연구121(2009)

김연철, 냉전의 추억(서울: 후마니타스, 2009)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백서(서울: 대한적십자사, 2015)

신은미,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서울: 네잎클로바, 2015)

이수정, “인도주의 분단정치: 민주화 이전 한국사회 남북이산가족 문제,” 현대북한연구182(2015)

한국방송공사,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TV 특별생방송 138일간의 기록(서울: KBS, 1984)

KBS, 도록,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서울: KBS, 2015)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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