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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1_2 정영철_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 판문점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4.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 판문점


정영철


판문점, 어느 이름 없는 조그만 주막이 있던 마을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한 한국전쟁은 어느 누구도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였고, 더 이상의 손실을 원치 않던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서 휴전을 모색하였다. 2년여의 지리한 협상 끝에 타결된 정전협정은 단지 ‘당면의 전투-군사적 적대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전투는 중단되었지만, 전쟁은 중단되지 못한 기이한 형태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전투 중지에 서로 합의하고 서명했던 곳이 바로 판문점이다. 


판문점이 지금처럼 군사분계선으로 구분되어 공동경비구역이 아닌 ‘분할’경비구역으로 변한 것은 1976년 8월 18일의 일명 ‘도끼만행사건’(나무자르기 사건, tree cutting incident)부터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폴번안 작전 (Operation Paul Bunyan)을 벌여 문제가 되었던 미루나무를 잘라버리고, 판문점 역시 분할 경비구역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 녹색 테두리가 공동경비구역이고, 검정색이 군사분계선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이 설치되어있다. 총 7채의 건물 중 검정색은 유엔군 측이, 짙은 녹색은 북한 측이 관리한다. 


판문점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지리한 협상 장소였다. 정전협정에 의하면 양측은 정전협정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고, 휴전 직후부터 1991년 3월까지 총 159회의 정전위원회를 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1991년 3월 한국군의 황원탁 소장이 수석대표로 임명되자, 북한은 군사정전위를 거부하고 92년에는 아예 군사정전위 대표를 철수했다. 대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정전협정 상의 판문점 공동 회의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냉전이 도래한 후 첫 전쟁으로서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전쟁이자 동시에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처음으로 맞부딪힌 전쟁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가 참여한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그만큼 한국전쟁은 복합적이었고, 또 그만큼 서로가 승리는 하지 못해도 지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전쟁이었고, 그 만큼의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3년 1개월을 끝으로 판문점에서 멈추게 되었다. 


판문점에서 중지된 전쟁은 그러나 이후로도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몸살을 앓았다. 큰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판문점에서의 ‘작은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의 북한 특수부대가 통과한 지점도 판문점 근처 군사분계선이었고, 미루나무 사건은 아예 판문점 한복판에서 일어난 전쟁 일보 직전의 사건이었다. 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측 책임자였던 핸더슨 소령의 집단구타 사건과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JSA’의 배경이 되었던 김훈 중위의 의문의 죽음이 일어나기도 한 곳이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남북간의 충돌은 판문점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판문점은 남북을 연결하는 한 점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전후하여 남북의 밀사들이 오고가는 통로였고, 비록 불법적인 월경이었지만, 1989년 임수경-문규현의 판문점 통과가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크고 작은 판문점 통과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1998년 故 정주영 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역사적인 남북화해와 교류의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에는 제2차 정상회담을 위해 故 노무현 대통령이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밟고 북녘 땅을 밟았다. 이로써 판문점은 서로를 막아 나선 곳이 아니라 서로에게 문을 열고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는 통로가 된 것이다. 더욱이 판문점을 지척에 두고 매일같이 수백 명의 사람과 수백 대의 차량이 개성공단을 오고가기도 하였다. 원래 판문점이 길 가던 나그네에게 휴식을 제공하던 주막이 있던 휴식터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곳을 통해 남북이 오고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남북 교류가 중단되었던 2015년에도 세계 유명 여성 리더들이 판문점을 통해 남북을 오고가기도 했다. 이제 판문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조금 더 불편해졌을 뿐인 것이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판문점은 한국전쟁의 모든 역사를 말없이 간직하고 있다. 이제 이곳에서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평화를 기원해야 한다. 아니 이미 조금씩 열어젖힌 평화를 더 ‘큰 평화’로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전 세계인이 전쟁 때문에 판문점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한반도 평화의 상징으로 ‘판문점’을 바라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멈추고, 평화를 키워가는 곳으로 판문점이 ‘21세기 판문점’의 진짜 얼굴이어야 할 것이다.


판문점에 대해 읽어볼 책

JSA-판문점 이문항 | 소화 | 2001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이태호 | 눈빛 | 2013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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