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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_2 정영철_전쟁 후 첫 만남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4.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전쟁 후 첫 만남


정영철


중공군 포함 약 6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한국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불안한 정전상태이지만 전투행위는 중단되었고, 새로운 분단선인 휴전선이 그어졌다. 물론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공산군과 유엔군은 포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고, 나아가 정전협정에서 합의한 정치회담을 열기 위한 접촉을 시도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정전협정 460항에는 한국전쟁 이후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공산군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그리고 남한)은 정치회담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연스레 정치회담 개최에 대한 아무런 기약도 없었다.

1954년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가능했던 이유는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강대국의 관심은 이미 전쟁이 끝난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 전쟁이 진행 중인 인도차이나-베트남이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 등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네바 정치회담은 1954426일 시작되었고, 50여 일간의 지속되어 615일 막을 내렸다. 50일간의 회담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대표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곳이라는 정도뿐이다.


▲ 남북한은 제네바 회담의 최대의 희생자였다. 분단의 질서를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서로의 적대감만을 부추겼으며, 국제사회에서 힘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제네바 회담의 주된 의제는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의 문제였다. 이 두 문제에서 남북의 입장은 확연히 달랐다. 서로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남한은 초기 북한지역 만의 총선거를 주장했고,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장은 같은 유엔군 측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유엔군 측의 분열을 가져왔다. 유엔군 측 일원이었던 호주, 뉴질랜드, 태국 등은 남한의 통일방안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남북한의 총선거 안에 더 큰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유엔군 측의 분열에 직면하여 남한은 미국과의 상의 끝에 14개 항의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핵심은 중공군이 선거 이전에 철수해야 한다는 것과 남한의 헌법에 따라 인구비례 원칙에 근거하여,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4개 조항은 비록 초기의 북한 지역만의 선거에서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공산군 측은 물론 유엔군 측으로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14개 조항을 제시한 후에도 5452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되면서 스스로의 협상 가능성을 봉쇄해버렸다.


이에 반해 북한은 초기부터 모든 외국군의 철수, 남북의 대표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전조선위원회의 구성과 선거법 마련, 중립국감시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치르자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주장은 상대적으로 공산군 측의 일치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회담에 참여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남한은 물론 미국도 그리고 회담에 참여한 다른 국가들도 북한의 주장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결국 양측의 주장은 모두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로의 주장은 38선 만큼이나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양측 모두는 회담의 성과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 선전의 장이었던 것이다. 회담은 615일 막을 내렸다. 회담에 대한 아무런 합의문도 없었고, 앞으로 다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다. 결국 한반도의 분단은 서로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현상유지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로써 한국문제를 논의했던 마지막 국제회담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것으로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국제적인 회담의 의제로 부각되지 못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후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 국제회담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 끝은 분단체제의 지속이었다.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소련의 몰로토프(Molotov, Vyacheslav Mihaylovich) 외상은 남북한이 함께 사는 것을 터득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발언까지 하였고, 미국 역시 회담에서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한반도의 분단을 통해 중국과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한반도는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제네바 회담은 이러한 냉혹한 국제질서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분단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그런 것이었다.


남북한은 제네바 회담의 최대의 희생자였다. 분단의 질서를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서로의 적대감만을 부추겼으며, 국제 사회에서 힘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회담의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한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그 주인공은 미국, 소련, 특히 중국이었고 남북한은 단지 조연으로 출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한반도의 분단은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고, 분단체제는 당연한 국제질서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또 하나 제네바 회담의 주된 관심은 인도차이나였다. 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하면서 사실상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 회담을 통해 명예로운 철수를 고민하였고, 중국과의 협의를 통해 결국 17도선으로의 베트남 분단을 결정하였다. 이 역시 강대국 정치의 전횡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힘으로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패퇴시켰지만, 국제사회는 베트남의 분단을 결정한 것이다. 소련과 중국의 압력에 의해 17도선으로의 분단을 받아들인 북베트남은 훗날 치열한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었지만, 그 고통에 대한 대가는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했다.


제네바 회담은 두 개의 분단을 공식화한 국제회담이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존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했고, 베트남에서는 새로운 분단을 만들어내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현지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선이 그어지고, 그 선 안에서의 삶이 강요된 것이다. 이후, 베트남은 그들의 숙원대로 통일을 이루었지만, 한반도는 지금까지도 분단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제네바 회담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교훈은 국제사회의 선의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주민들이 힘을 합치지 않는 한 분단의 극복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분단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지속이 결정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미국과 중국 등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결국 남북한의 분단 극복의 의지와 단합된 힘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인 셈이다. 또 그럴 때만이 국제사회의 도움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참고한 글

김연철, “1954년 제네바 회담과 동북아 냉전질서,” 아세아연구541(2011).

최운상,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의의 국제법적 의의, 통일연구원 학술회의 총서, 2004.

김보영,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과 외국군 철수 의제,” 군사95(2015).

홍용표, “1954년 제네바 회의와 한국전쟁의 정치적 종결 모색,” 한국정치외교사학회281(2006).

권오중,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의 진행, 결과 그리고 의미: 한반도 6자회담의 원형,” 통일정책연구142(2005).

라종일, “제네바 정치회담: 회담의 정치,” 시민정치학회보, 1(1997).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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