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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_4 김동진_평화는 무엇일까?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4.

[시선 아일랜드에서 쓰는 평화학 이야기]


평화는 무엇일까?


김동진


평화는 무엇일까? 어떤 단어이든 쓰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시대 전략가에게 평화는 전쟁, 혹은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유사시 방어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평화일까? 무기와 물자를 쌓아 놓고 군사훈련을 해야만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어떤 한편이 잘못한 것이 명백한 불의한 상황, 혹은 사회 부정의의 경우는 어떠한가? 때로 평화주의자들은 불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용기 없는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세일러문의 외침처럼 결연히 일어나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데, 불의를 보면서도 참는다면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 대해 평화학자들은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혹은 불의를 보면서도 참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평화학자들에게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갈등과 불의를 평화적 행동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간디를 들 수 있다간디는 유약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철저히 현실적인 전략가였다. 간디는 영국의 불의를 드러내는 평화적 대응이야말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소금을 택했다. 소금 사티아그라하는 인도 해변에서 나는 소금에 세금을 부과하는 영국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드러내기 위한 간디의 전략적 구상이었다. 그는 인도의 해변을 평화의 극장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여 도달한 해변에서 소금을 집어 드는 행동을 통해, 간디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로 하여금 영국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인도에서 나는 소금이 왜 영국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외신들은 영국이 소금으로 인해 인도를 잃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간디는 이런 평화적 행동이 폭력적 행동보다 훨씬 더 강인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무기에 의존하는 사람은 사실 속으로는 비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평화적 행동은 감옥에 갇히거나 때로 자신의 몸을 희생할 만큼의 용기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말하는 평화는 간디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절대 폭력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화적 수단으로만 가능하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갈등의 원인을 전쟁준비와 무력과시로 눌러 놓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곪은 갈등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사회 부정의를 참게만 한다면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일 뿐만 아니라, 폭력적 저항 또는 분쟁의 원인이 된다. 갈퉁은 이를 소극적 평화라 부른다. 소극적 평화는 곧 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갈퉁은 용기 있는 평화적 행동으로 사회 정의를 달성하고,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야 말로 평화를 유지시키는 가장 효과적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의 이웃 나라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투표 결과 후폭풍이 거세다.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의 주민 대다수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국경 검문소의 부활이다.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 국민 상당수가 바라는 것은 난민과 이주민의 통제이다. 남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은 단순히 아일랜드와 영국의 국경이 아니라 이제 유럽연합 국가와 비유럽연합 국가사이의 국경이 되게 생겼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의한 검문소 철폐는 무효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넘어 오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며, 유럽연합은 유럽연합대로 자신들을 배신하고 떠난 영국과의 국경선을 확실히 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북아일랜드 내부에 미치는 영향이다. 1960년대 북아일랜드에서 억압과 차별을 받던 이들의 평화적 인권운동을 영국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곧 아일랜드 민족해방군의 이름으로 폭력적 테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런 폭력적 테러에 대한 반발하는 이들은 얼스터 의용군의 이름으로 상대 집단에 대한 폭력적 보복을 시작했다. 이후 1990년대 이렇게 반복된 폭력에 지친 이들이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1998년 성금요일 합의와 같은 평화 프로세스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평화 프로세스는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평화적 대화와 합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배신자로 몰아가는 이들, 끝까지 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에 맞서 평화적 수단을 선택한 용기 있는 정치인들과 일반 시민들이 평화적 합의를 가능하게 했다. 합의 이후의 상황도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아픔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앙금도 여전하다. 물리적 폭력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주요 정당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여전히 북아일랜드의 갈등 상황을 활용하고 있다이런 상황 속에서 만일 국경 검문소가 부활한다면, 혹시 다시 악몽과 같은 폭력 사태가 재발하는 것은 아닐지 주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한 번 평화적 대화의 성과를 경험한 아일랜드 사회에서, 아무리 남과 북 사이에 검문소가 부활한다고 해도 다시 전면적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일랜드를 둘러 싼 유럽의 지정학적 변화가 아일랜드 사람들의 평화적 교류를 막는 장벽이 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던 사람들이 다시 전쟁을 걱정해야만 하는 미래는 상상만 해도 안타깝다. 하지만 평화 프로세스가 멈춰 선 한반도의 경험에서 아일랜드를 바라볼 때,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용기 있게 평화를 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일랜드와 한반도에서 평화를 선택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준비하고 평화를 살아가는 오늘과 내일을 계속 그려본다.

 

 

김동진 | 한신대에서 신학을, 시드니대학에서 평화학을,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국제평화학 겸임교수로 평화학을 강의하면서,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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