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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_2 정영철_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를 넘어 통일로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4.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를 넘어 통일로


정영철


1960년의 4월은 핏빛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젊은 학생들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부정의한 정권에 맞섰고, 이승만 정부는 이를 총칼로 틀어막고자 했다.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 그리고 대학의 교수들까지 집단적인 항거에 나선 4.19 혁명은 결국 이승만 정권의 하야로 끝을 맺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최초의 역사적 장면이었다.


4.19의 열린공간은 남북의 분단 이후, 우리 역사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백가쟁명식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으로 제기되었던 통일논의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폐기되었지만, 유엔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대한민국 헌법에 따른 북한만의 총선거)의 정부 안, 둘째, 이 시기 가장 광범위한 대중들의 호응과 관심을 촉발시킨 혁신계 중심의 중립화 통일 방안(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마지막으로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이 제기한 남북협상론 등이다. 이 중 정부안을 제외하고는 중립화통일론이나 남북협상론은 모두 혁신계에 의해 제기되고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혁신계가 이 당시의 통일논의의 의제를 선점하고, 논의를 이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혁신계의 통일논의가 정국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고, 남북의 이질성이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만큼, 당시의 경제적 피폐와 고통이 분단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50년대 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들의 소원은 크게 3가지였다. 가난한 농민이 잘 사는 것, 자식이 잘 사는 것 그리고 통일이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통일은 실제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생활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학생들이 통일의 주역으로 나설 시기가 되었다.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그간의 학원민주화와 계몽운동 등의 틀에서 벗어나 통일논의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학생들 역시 일찍이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기 시작하였다. 1960924~25일에 고려대 정경대학생위원회 주최의 <민족통일에 관한 제 문제>를 주제로 한 전국대학생시국토론대회가 열려, 통일론에 대한 환기를 불러 일으켰고, 서울대에서는 11민족통일연맹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학생들의 통일논의가 혁신계와 달랐던 점은 혁신계가 주로 통일론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을 중심으로 했다면, 학생들은 논쟁에 앞서 실천의 문제로 통일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학생들은 통일에 대한 다양한 논의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통일의 주역으로 나서고자 했다.


▲ "민족자주통일"을 내세운 서울대생들의 4.19 1주년 시위. 쿠데타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침묵시위로 진행했다 

Ⓒ 4월 혁명회


▲ 1961년 5월 31일 열린 '남북학생회담' 지지 집회 Ⓒ 4월 혁명회


드디어 학생들의 통일에 대한 직접 행동이 개시되기 시작했다. 196153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은 남북학생회담결의문을 채택하고, 55일에는 전국 각 대학의 연맹체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결성준비대회를 갖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계기로 513일에 이에 대한 보다 구체화된 내용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남북학생 친선사절단, 기자, 체육단, 예술단 교환, 통일축제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안은 곧바로 정치권의 반응을 가져왔다. 장면 정부는 학생들의 제안을 분명하고도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저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혁신계는 남북학생회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이에 대한 집회를 조직하여 측면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혁신계를 중심으로 했던 통일론과 학생들의 실천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학생회담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혁명공약 제1(1)로 반공을 내건 박정희 정권은 반공다운 반공을 내세워, 혁신계와 학생들의 통일논의를 완전히 짓밟았다. 이로써 짧은 기간 만개했던 통일론과 실천운동은 긴 침묵의 터널을 맞이해야 했다.


우리 역사에서 4.19 시기는 분수령이었다. 아직 이렇다 할 공업화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남한이 이제 곧 공업화의 세례(?)를 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남북한의 이질성이 점차 간극을 넓혀가는 시점으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와 같이 60~70년대를 거치면서 남북의 이질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따라서 어느 한 체제로의 일방적인 통일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4.19 시기의 통일논의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분수령에서 통일을 통해 남북 분단의 굴곡을 뛰어넘고자 한 시도였고, 열망이었다. 또한, 당시의 모든 악의 밑바탕에 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생활의 문제로 자각하고 있을 때였다.


긴 역사적 흐름에서 4.19 이후의 통일논의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반공이데올로기의 강고한 장벽, 학생회담 제안 중에 김일성 정권 타도를 외치고 남북 학생들이 새 사회를 이끌어가자는 지난친 감성적 호소, 미국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채 성숙되지 못했던 조건 등으로 결국 미완의 혁명미완의 통일로 남고 말았다. 또한, 당시 학생들에게 남아있던 특권의식(엘리트주의 등) 과 아직 성장하지 못했던 노동자, 농민 세력과 시민사회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이들을 봉사의 대상으로 여겼던 사상의 한계를 드러냈다그럼에도 4.19 이후의 통일논의의 전개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비록 60년대와 70년대 유신의 긴 터널을 거치긴 했지만, 80년대 민주화 이후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터져 나올 수 있었던 역사적 유산을 남겼고, 민족자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전환과 대중과의 밀착과 이들의 조직화가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4.19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열린 공간은 필연적이라 할 만큼 통일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19 이후의 통일논의가 그러했다면, 87년 민주화 이후의 88년 대중적 통일운동의 태동이 그러했다. 1993년의 문민정부의 등장과 북한에 대한 동포적 인도주의 지원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도 그러하고, 1998년의 민주적 정권교체 이후 남북 정상회담 등을 통한 남북관계의 진전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곧 민주화의 성숙과 열린 공간의 창출이 분단에 따른 적대적 대립과 갈등보다는 통일과 평화를 지향함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민주와 통일 그리고 평화는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4.19를 넘어 통일로!1988년 이후,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전개되면서 터져나온 구호였다. 민주의 쟁취와 통일이 결코 둘로 나뉘어있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도 민주화와 통일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있다. 걸핏하면 터져나오는 반북종북이라는 이름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가장 좋은 소재로서 분단이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는 분열과 적대와 갈등을 뒤로하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진척시키는 가장 대중적 동력이 되고 있다. ‘4.19’의 유산은 결코 민주화에만 있지 않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4.19를 넘어 통일로는 분단의 질곡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민주화 역시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자, 지금 우리에게도 던져주는 심각한 역사의 과제라 할 것이다.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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