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10.19 00:58

[특집]


다시 백두산에서 평화를 맞이하다

 

이기범

 

나는 지난 9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대통령 특별수행원으로 참가했다. 두 정상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여 남북 협력과 비핵화를 더 진전시킬 것을 다짐했다.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는 언론에서 많이 다루었으므로 나는 회담 일정에 참가한 몇 가지 느낌을 나누고 싶다.



 ▲ 5.1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 연설을 듣고 있는 평양시민들

 



▲ 문재인 대통령 내외에게 꽃을 전달하기 위해 서있는 어린이들

 

문재인 대통령이 15만 명에 이르는 북녘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방북에 앞서 나름대로 대부분의 일정을 예측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항에서 영접하리라는 것, ‘깜짝 행사로 꼽힌 백두산 등정도 마지막 날에 진행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이 끝나고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소개할 때 그저 인사로 그칠 줄 알았다. 김위원장이 다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뜨겁고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소개하자 더 큰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문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머리에서부터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충격과 감동 그리고 대형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에 압도되어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분단 이후 최초이자 최대로 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현장에 내가 있다는 사실만이 너무 또렷했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의 연설에 어느 정도의 후유증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도 연설을 진행했다. 두 정상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공유하고 있고, 연설을 통하여 그 의지를 남과 북 그리고 세계에 알리려는 뜻도 공유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북녘 인민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갔을까? 그 현장에 평양 사람들만이 아니라 공연에 참여하느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아래쪽에 북녘 사람들의 자리가 있어서 그이들의 표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이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감동이 벅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이들의 환호와 박수는 진심과 기대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들렸다. 남북 관계와 남녘에 대한 이미지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 변화가 그이들의 의식에 혼란을 일으키든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든 커다란 파도로 일어났으리라. 문 대통령의 연설은 7분에 불과한 짧은 장면이었지만 정치 행위를 넘어선 문화적 사건이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의 파장은 한반도와 세계로 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현장에 있는 내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의 한 장면

 

그 다음날 백두산 방문을 위해 어두컴컴한 5시경 호텔에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천지를 볼 수 있겠나 하는 걱정을 나누며 공항으로 가는 길에 환송인파를 만났다. 새로 조성된 려명거리 쯤에서부터 꽃술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하는 사람들이 비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어제 밤의 사건을 꿈처럼 떠올리며 마음 어드메에 둘지 갈피를 잡으려는 여명(黎明)의 시각에 나타난 사람들의 무리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대통령은 모르겠으되 내가 그런 환송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 답방에 대하여 내가 아직 서울에서 환영받을 만큼 일을 많이 못했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그럼 그 많은 인민들의 환호는 신들, 앞으로 평화를 위한 일을 많이 하라는 외침으로 들어야 하나? 여하튼 그때에는 적어도 세시쯤부터 빗속에 서있었을 그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진심으로 화답했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선팅이 된 버스 창이었지만 사위가 아직 어두워서 실내등을 켜고 손을 흔드는 우리를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새벽 그 시각에 우리는 한 마음이 되었을까?

 

남녘의 어떤 사람들은 평양의 환영과 환송 인파가 강제로 동원되었다고 꼬집는다. 북녘 관계자들은 직장 단위로 동원되었지만 스스로 나온 사람들도 많다고 말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오롯이 강제로 동원되었는가는 살펴봐야 한다. 이미 두 번이나 만난 두 정상이 함께 평양 시내를 누비는 대단한 구경거리이니 누군들 궁금하여 거리로 나서지 않겠는가? 거의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남녘 대통령을 보면서 어찌 감동이 없겠는가? 남녘에서도 사람들을 행사에 동원하고 있고 과거에는 국가행사에 대규모로 동원했다. 나도 고등학생이었던 19748월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에 동원되어 광화문거리에서 아침 8시부터 대기했다. 막상 장례식은 11시쯤에나 시작되어 뙤약볕에서 땀깨나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즈음에 고교생들은 전국체전 같은 행사에 매스게임(집단체조)과 카드섹션(배경대)을 하라고 자주 강제로 동원되었다. 지금은 강제 동원은 사라졌고 대부분 자발적인 참여로 행사가 이루어진다. 언젠가는 북녘에서도 동원이 필요 없게 되고 사라질게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강제동원의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 떼면서 비난하기보다는 수고하는 북녘 인민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온당한 태도가 아닌가 한다.

 



.첫 날 평양대극장의 북측 공연종목

 

남북이 대화하고 협력하려면 역지사지의 태도와 상호주의적인 인식이 필요한데 우리는 여전히 그런 것에 인색하다. 앞의 사진은 회담 첫째 날 평양대극장의 북측 공연 종목이다. ‘뒤 늦은 후회’, ‘아침이슬’, ‘차집의 고독등 남쪽 노래를 북측 배우(북에서는 가수도 배우라고 부름)들이 북측 노래보다 더 많이 불렀다. 집단체조 공연 중 특별장 평화, 번영의 새 시대에서도 계몽기 가요(일제시대 때 노래)부터 최근 노래까지 남쪽 노래를 많이 불렀다. 지난 4월 남측이 평양에서 공연할 때는 가수 서현이 북측 노래로 푸른 버드나무딱 한 곡을 불렀다. 얼마 전에 어떤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평양 정상회담 때 왜 평양에 태극기가 없었냐고 물어보았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인공기를 휘날릴 수 있겠냐고 반문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한 언론계 후배로부터 잘 아는 언론사 기자가 자기 회사 지국을 평양에 만들어야겠다라고 해서, “북측의 <로동신문> 지국도 서울에 만들어야 겠네라고 했더니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북측은 회담기간 동안 우리 일행이 호텔 방 티비에서 남녘의 네 개 방송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때 그와 동등하게 조선중앙티비를 방영할 수 있을까?

 


한반도기로 장식된 평양대극장


 


옥류관 냉

 

간만에 북녘에 다녀 온 나에게 젊은 사람들은 옥류관 냉면 먹은 소감을 물었고, 더 나이든 사람들은 백두산 방문 소감을 물었다. 이번에는 공식 오찬이라 냉면에 앞서 여러 음식이 나왔지만 나는 냉면 200그램을 먹고 쟁반 200그램을 더 먹었다. 과식은 언제나 즐겁다. 남녘의 유명한 셰프가 북녘 자료를 인용하며 옥류관 냉면이 검어진 이유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메밀이 부족하여 전분을 섞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글을 썼다. 식량 사정이 어렵더라도 옥류관 조차 메밀이 부족했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기에 이번에 옥류관 복무원(종업원)에게 검어진 이유를 물으니 영양가를 높이기 위하여 메밀을 덜 깎아서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어느 말이 옳은가는 각자 판단하시기 바란다.




백두산 천지에서



마지막 일정, 백두산 방문에서 천지 물에 회담의 감상을 후련하게 담아냈다. 2004 6월 처음으로 백두산에 올라 어린이어깨동무 일행들과 함께 남북 어린이들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어깨동무할 그날이 곧 오도록 모두 노력하자고 약속했었다. 14년이 지나서야 백두산을 다시 찾았다. 그 약속은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아쉬움과 뉘우침이 크다. 그래도 평화와 번영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어 안심하려고 한다.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정상회담에 참가하였으니 남북 당국 모두 민간협력에 더 힘을 쏟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믿는다. 다시 백두산에 서서 한반도의 평화를 맞이한다.


 


사진으로 전하는 ‘2018 양 이야기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공연중인 어린이들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자수반 어린이들. 박원순 서울시장도 보인다.



 

▲ 평양교원대학 학생들의 수업 시연

 



▲ 평양어깨동무학용품공장. 숙소 바로 옆인데도 가보지 못하여 아쉬었다.




▲ 순안공항 이륙 전 공군1호기 앞에서

 


이기범어린이어깨동무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사무총장으로 10년 동안 일했고 지금은 이사장을 맡고 있다. 남북의 어린이들이 교류하며 한반도 평화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함께 가기를 소망한다. 최근, 지난 20년간의 어린이어깨동무 활동을 담은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를 발간했다. 숙명여대에서 교육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평화총서2018.09.13 15:59


"사람이 만난다, 남북이 웃는다"

이기범 교수가 북에 콩우유공장, 연필공장, 어린이병원을 만들며 겪은 방북이야기. 

스무해 넘게 천 명 넘는 사람들과 북녘을 방문하면서 땅의 경계와 마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생생한 기록을 만나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20 00:23

[이슈]


'적군 묘지' 앞에서 생각하는 평화

 

박종호


지난 6월 29일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 콜로키움 ‘회복적 사회를 위한 평화교육’에 참석한 아일랜드 평화교육 실천가 데릭 윌슨(Derick Wilson)과 김동진 박사(트리니티 칼리지)를 2년 만에 반갑게 다시 만났다. 2017년 2월 아일랜드 평화교육 현장답사에서 만나고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으니 그 반가움은 컸다. 데릭 윌슨은 콜로키움에서 평화교육과 회복적인 사회, 이를 위한 교육자들의 실천에 대한 발표를 하였는데, 그야말로 아일랜드의 남북대립과 갈등의 한복판에서 회복적 실천을 위해 달려 온 자신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알맹이를 풀어놓았다.


‘회복적 실천은 삶의 방식이자 일하는 방식이다. 다른 이를 희생양으로 삼거나 비난하기보다 책임을 지는 것이다. 상대를 정당하게 대하고, 타인과 차이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그 차이를 축복하는 것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시간, 상상, 창조적인 에너지와 희망이 새로운 현실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받아 적은 말이다.


나와 너, 우리 학교, 사회, 그리고 이웃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고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다. 평화교육이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고, 또 먼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아울러 폭력에 대해서도 상대의 폭력은 부당하지만 자기 진영의 폭력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폭력에 대해 거부하고, 비폭력을 옹호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다.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말인줄 알면서도 또 얼마나 절박한 말인가.


다음 날인 6월 30일 이른 아침, 데릭 윌슨과 김동진 박사, 그리고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교육과정연구모임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초등·중고등학교 교사, 대학생, 어깨동무 활동가 20여명은 파주 ‘적군 묘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회복적 평화’를 떠올려 보기에 적절한 곳이라 여겨서 고른 곳이다. 자유로를 지나 문산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달리다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자장리부근에서 큰길가에 차를 세우고 일행은 모두 내렸다. 얼핏 지나치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워진 간판은 '북한군 중국군 묘지 안내도'이다. 적군 곧 한국전쟁에서 남쪽과 서로 적으로 맞선 상대, 북한군과 중국군의 무덤이다. 제1묘역, 제2묘역으로 표시된 입간판이 함께 서 있었다. '적군 묘지'로 알려져 있고, 군부대가 관리하는 곳인데, 직접 지키는 사람은 없다. 두 묘역 사이에는 농사를 짓는 밭이 있어서 실제로 일하는 분들이 무심하게 우리를 건너다보고 일을 하고 있기도 한다. "이곳은 6.25전쟁(1950.6.25.-1953.7.27.)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6.25전쟁 이후 수습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묘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월 묘역을 구성하였으며, 묘역은 6,099㎡로 1묘역과 2묘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잠깐 입간판의 내용을 읽은 뒤에 오른편 2묘역으로 먼저 가서 우리는 무덤 가운데 서서 작은 꽃다발을 놓고 묵념을 올렸다. 무덤마다 놓인 비석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어디에서 전사했는지 등의 기록이 적혀 있다. 한국 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가 함께 안장되어 있다가, 중국군 유해는 2014년 무렵에 송환되었다. 더러 ‘무명인’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젊은 넋이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이다.



다시 걸음을 돌려 처음 들어선 쪽으로 가서 1묘역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조금 더 잘 단장되어 있는 곳이다. 역시 함께 모여서 묵념을 하고, 준비해 간 구상 시인의 시 ‘적군 묘지 앞에서’를 정지영 선생님이 낭독하고, 또 다른 시 ‘휴전선’을 대학생이 낭독하고, 데릭 윌슨의 말씀도 들었다. 이런 고통스런 아픔의 현장을 찾아서 나누는 모습이 회복적 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이 될 것을 확신한다는 말을 하셨다.



1묘역의 말끔히 단장된 무덤을 돌아보다, 문득 무덤이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휴전선까지 불과 몇 십리, 비록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영혼이라도 고향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배려한 것이리라. 누구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위아래를 설득하고 그렇게 북쪽으로 배치하려고 애쓴 사람이 새삼 고맙다.


여기 이곳에 묻혀 있는 저 무덤 속 젊은이들이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 갈 날은 언제일까? 남과 북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 북한과 미국이 북쪽에 안장되어 있던 미국 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송환하는 뉴스를 보면서 더욱 우리 남과 북 모두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화해와 평화, 회복의 실천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거꾸로 확인하는 셈이다.


자신이 남에서 태어나, 북의 원산에서 자라고, 남쪽으로 내려 온 뒤, 한국 전쟁 때는 종군 기자로 참여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시를 남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남과 북 모두에 대해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며 아파한 시인 구상(1919-2004)이 쓴 ‘적군 묘지 앞에서’를 다시 읽어 보면서 답사의 소감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박종호ㅣ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현재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0:50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빈틈을 잘 살피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심은보


이후 이야기가 많이들 궁금하셨을 우리 1빠 선생! 결국 녀석은 나에 의해서여섯 번째 학교로 가버렸다. ‘학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스스로 녀석의 담임을 맡았던 나에 의해서말이다. 참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마음을 썼고, 또 많은 이들이 응원을 했다. 나 또한 나의 온 삶을 통해 응원하며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담임이 치열하게 고민을 하고 있고, 부모님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그런 담임을 지원하고 있다는 이 아름다운 상황이 결과마저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목표는 녀석을 이 속에 잘 녹아들게 해서 졸업시키는 게 목표였지만, 중요한 것은 녀석과 함께 다른 아이들, 특히 상처를 많이 받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상황을 통해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보이질 않았고, 또 녀석에게 이 공간이 학습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보았을 때 변화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그 상황을 돌파할 녀석이 조금이라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하나라도 엿보였다면 아마도 모든 걸 다 걸었을 것이다. 치유를 넘어선 치료의 영역까지 학교가, 담임이 홀로 어찌할 순 없는 일이었다.

 

담임인 나의 신고를 통해 학폭 절차를 밟았고, 결국 녀석은 전학을 갔다. 학폭 절차는 녀석을 내치기보다는 다른 아이들과 공간을 분리해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행한 절차였다.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아팠지만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진된 몸의 기운 만큼 마음의 기운마저 소진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전학 이후 교육청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학교와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회의를 열었고, 또 교육청 위센터1)에서는 녀석을 위한 정기적인 상담 프로그램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관심과 지원이 지속되는 것과 함께 그저 업무적인 일처리에 그치지 않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리 될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우리 학교에서도 도움을 주셨던 상담 선생님께서도 정기적으로 녀석의 삶을 살피며 정기적으로 상담하는 일도 맡아 주셨다.

 

주석1) 위센터(Wee)는 학교, 교육청, 지역사회가 연계하여 학생들의 건강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지원하는 다중의 통합지원 서비스망을 말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두어 달 흘렀다. 그 사이 녀석은 세 차례 학교에 아침 일찍부터 갑작스레 찾아오곤 했다. 전학 간 학교가 녀석을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들 환대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테고, 또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곳을 떠나고 보니 학교가 주었던 따스함이, 또 자신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함께 놀아주었던 친구들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담임의 입장에선 녀석을 잘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반 친구들은 다시 분위기를 추스르고 잘 지내고 있다. 학기 말 즈음 몇 차례 집단 상담을 통해 나머지 학급 아이들에 대한 점검과 진단을 해보기도 했다. 2학기 시작할 즈음 두 차례 가량 더 진행하며 다시 새로운 학기를 열어갈 생각이다.

 

들려오는 이야기엔 ‘1빠 선생이 잘 지내고 있진 못하는 것 같다. 학교에선 겉돌고 있고 녀석이 바깥에서 일으키고 있는 사건들 이야기도 귀에 들려온다. 참으로 내게는 아프고 또 아픈 이야기들이다. 아니, 녀석은 우리 교육과 사회의 빈틈이 만들어 낸 참으로 안타깝고 아픈 모습이다. 우리 지역와 옆의 지역까지 녀석에 대해선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데도 이 학교 저 학교 돌리는 일 말고는 학교도, 지역 사회도 녀석을 돌보고 지원할 변변한 시스템하나 없는 우리 사회의 빈틈 말이다.

 

요사이 온 나라 곳곳에서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난도질하고 아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 짓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으나, 가해자인 아이들의 삶의 결을 바꿔 내거나 갈등의 교육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에는 별로 다가가고 있지 못하는 현실은 다시 한 번 살펴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우리네 학교를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민주적으로 바꾸는 일은 좀 더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 빈틈들로 인해 또 다시 겪게 되는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은 듯싶다. 우리 1빠 선생 역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꺼내놓았던 정책들이 오히려 녀석을 더욱 더 안 좋은 쪽으로 강화시켰고, 그를 돌볼 다른 장치들이 하나도 없는 빈틈들 속에서 녀석은 더욱 힘들어 하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요사이 뜨거웠던 평교사도 지원 가능한 내부형 교장 공모제 이야기도 그러하다. 서울의 두 학교가 내부형 교장 공모 심사를 놓고 어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네 해 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지라 그 빈틈들을 잘 알고 있다.

 

2013년이었을 게다. 학교 안에서 내부형 교장 공모를 추진하기 위해 의견을 모아 가는 데 지역 교감단들의 방해가 무시무시하게 심했다. 우리는 학교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승진해야 할 본인들의 자리 중 한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 무사히 내부형 공모제를 신청했고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정하는 두 학교 중 한 학교로 선택을 받아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에서 계속 발생했다. 지역 교감 중 한 사람이 후보로 들어왔고, 학교 심사 이후 지역 교육청 심사 과정에서 눈에 띄게 편파적인 심사가 이루어졌다. 결국 학교 심사 결과 1,2등 순위를 뒤집히도록 심사를 해서 도교육청으로 추천을 올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다행스럽게도 도교육청에서 다시 순서가 뒤집혀 우리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가 교장으로 4년을 함께 했다. 그 결과 학교는 나날이 더 민주적인 곳으로 거듭 변해 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보게 된 교육을 둘러싼 지역 승진 그룹들의 일사분란함과 그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가능할 수 있는 빈틈들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지역교육청에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사하는 그 과정이 그러했다. 이번에 서울 학교들의 경우에도 지역교육청 심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무사히 평교사형 내부형 공모 교장을 선출한 학교들도 아마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책이 펼쳐지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빈틈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지혜들을 모아가며 방법들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좀 더 평화롭고, 민주적인 학교에서 아이들이 삶을 통해 배우며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자란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민주적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기운은 언제나 틈새에서, 사이에서, 경계에서 새어 나오는 법이다. 어쩌면 지금 이 곳 저 곳에서 보여지는 틈들에서 세상을 더욱 더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역사를 쓸 수 있는 기운들을 찾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이번 교장공모 과정에서 시끌벅적하게 우리가 마주하게 된 이 틈들을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데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1빠 선생의 앞날에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두 손 모아 빌며 이야기를 마무리 할까 한다.

 



심은보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6.19 22:59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결국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심은보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한 녀석이 자리를 매주 월요일마다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휙 던졌다. 그 동안 우리 반은 달마다 자리를 바꾸어 앉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의 맞장구가 있었고, 결국 그 제안은 월요일 아침이면 하는 우리반 회의에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자리를 바꾸는 횟수를 늘리겠다는 원칙이 강했던 것일까. 왜 그러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나쁜지에 대한 검토도 없이 두세 가지 방법을 발표하더니 바로 표결에 돌입하는 녀석들. 잘 되었다 싶었다. 이참에 다수결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결정 사항에 따라 월요일인 그 날 바로 자리를 바꾸었다. 자리를 바꾸는 방법은 내 마음대로... 여기저기 투덜투덜 거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참을 지켜보다 아이들에게 회의란 것이 무엇이어야 할까 하는 이야기부터 꺼내놓았다.

 

회의를 하라고 했더니 각각에 대한 검토 없이 다수결로 무엇인가를 순식간에 결정해버리고 말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먼저 짚고, 결국 합의를 해놓은 게 언제 자리를 바꿀 것인가를 빼고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회의가 올바로 진행되려면 각각의 방법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이 있은 후에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 또 해당 시기마다 자리를 바꾸었을 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며 자리를 정할 것인가 하는 방법까지도 의논했어야 맞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덧붙여 우리가 회의를 한다는 것은 다수결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삶 속에서 회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국 아이들은 회의를 다시 진행하겠노라고 했고, 어설프고 불편했지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결론은 주마다 자리를 바꾸는 것으로 하고 자리를 정하는 방법도 결정했다. 더 나아가 자리 바꾸는 주기가 짧아지면 예상되는 문제에 대한 보완책도 정해 놓고서 마무리를 지었다.

 

아이들의 회의는 차츰 습관적인 다수결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요사이 진행되고 있는 목공수업의 과정에서 아이들의 변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학교 5,6학년 아이들은 해마다 목공수업을 한다. 무엇인가 조그만 물건을 만들어 가곤 하는 목공체험이 아니라 함께 사용할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꾸미는 그야말로 목공수업을 진행한다. 작년 5,6학년은 목공수업을 통해 소리마루라고 하는 놀이터를 하나 만들었고, 현재는 전체 학생들이 즐겁게 뛰어 노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는 중앙현관을 꾸며보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두 주간은 아이들과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각자 모눈종이에 디자인을 해보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 처음에는 책상과 책장, 의자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생각이 두 주 째는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큐브 형태의 방을 만들자는 이야기부터 책장을 계단 삼아 올라갈 수 있는 다람쥐통 형태의 독서방, 전교생의 소원을 매달 수 있는 소원나무, 신발걸이 등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이야기들을 칠판에 적어 놓고 먼저 모둠별로 무엇을 만들면 좋을 것인가 하는 것을 두 가지 정도씩 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선 전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결정하는 시간. 모둠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꺼내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모둠 안에서 차근차근 의견들이 정리되어 가기 시작했고, 모둠별 의견을 듣고 토론을 통해 하나로 모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다른 의견들 속에서도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들의 의견을 또 꺼내 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합리적이다 생각하면 수긍을 하기도 했고, 때론 다른 생각들에 맞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설득하고자 애 쓰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이야기를 할만도 한데 어느 누구도 다수결을 꺼내들지 않고 모든 친구들이 합의할 때까지 회의를 이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도 신기한 모습이었지만 목공 선생님께서 놀라워하셨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긴 시간의 아이디어 회의 끝에 전교생의 소원을 매단 소원 나무를 만들고, 그 아래에는 어두운 중앙 현관을 간접 조명으로 밝혀줄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는 치즈형태의 의자(안에는 오렌지색 조명을 포함)를 만들자는 의견으로 결정되었다.

 

지난주까지의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어제부턴 공방에 가서 목공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업은 두 모둠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한 모둠은 치즈등상자를 만들고, 또 한 모둠은 소원나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모둠은 10명의 친구들이 작업을 하고, 또 한 모둠은 11명의 친구들이 작업을 했다. 함께 하기에는 모둠마다 속한 사람의 수가 많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한명도 소외됨 없이, 커다란 갈등도 없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으며 모든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치즈등상자를 만드는 모둠 아이들 모습 속에서는 치수를 재어가며 못 박을 자리를 정하는 과정부터 구멍을 뚫고 나사를 박아 조립하는 과정까지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모든 친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가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소원나무를 만드는 모둠 아이들은 이후 활용까지 고민하며 나무줄기와 나뭇가지의 배치를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과 함께 나무의 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방법을 의논하는 모습, 또 도와가며 구멍을 뚫고 마무리까지 해내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후 녀석들이 만든 것들은 학교에 들어서면 만나게 될 중앙현관의 한 쪽 벽면을 수놓게 될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거칠고 투박할지 모르지만 학교 공간에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학교 민주주의도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때론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지라도 아이들의 자리를 조금 더 넓혀 주는 것, 조금은 더디 가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가는 것... 그런 것 말이다.

 

학교에서 민주주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거창한 프로그램 이야기나 교장, 교감을 비롯한 관리자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부분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운다는 건 결국은 살아가는 일이니 민주주의를 아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민주적으로 살아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겪어 본 아이들이 또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 갈 테니 말이다.

 

어느 날 오후 지금은 중3에 올라가서 생활하고 있는 OO이의 아버지로부터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아침에 OO이와 학교에 가는데, OO이가 죽백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왜냐니까 토론으로 수업하는 게 좋은 거라는 것을 지금은 알겠다고 하더군요. 좋은 오후 되세요.”


심은보 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5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노예제도, 인간이 인간에게 빼앗은 인권


김소울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건 신생 국가 아메리카.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완전하게 반하는 뜨거운 감자가 있었으니, 바로 노예제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땅의 주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고, 그들을 노예로 완전하게 부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자 서양인들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노예사냥꾼을 이용하여 흑인을 납치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의 부제는 <폭풍우가 밀려오자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바다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납치되어 배에 실려 팔려가던 노예들이 바다에서 겪은 실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783년 노예들은 족쇄가 채워져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비좁은 배의 바닥에 누워 몇 개월 동안의 항해를 견뎌야 했다. 최대한 많은 노예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실에 노예들을 눕혔고, 노예들은 물건처럼 온 몸이 고정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며 항해가 어려워지고 음식이 부족해지자 상인들은 다치거나 병드는 등 살아있는 이들마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만다. 이 항해 도중 1/3 이상이 사망하였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1840)

 

노예제도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1672년 영국의 찰스 2세는 왕립회사에 노예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 회사는 이후 약 90년간 백만 명이 넘는 노예를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게 되는데, 이 노예무역은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였고 17C-19C 거래된 흑인 노예들의 수는 1,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과거에는 단 맛을 내는 식품 재료는 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코란과 함께 서쪽으로 꿀보다 달콤한 설탕이 전해지게 된다. 11세기 말 설탕이 유럽에 상륙하자 유럽인들은 순식간에 설탕의 강력한 단 맛을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설탕의 원료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경작지를 위해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엄청난 인원이 노예무역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노예로 팔려간 이들은 끌려간 땅에 사탕수수 모종을 심고, 수확하였으며, 그것을 빻아 설탕을 만들어 냈다. 1800년경 당시 영국인 250명의 연간 설탕 소비량이 1톤에 달한 것으로 집계될 만큼 그들의 설탕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으며 1톤의 설탕은 흑인노예 한명이 평생을 바쳐 수확해 내는 양이었다. 설탕에 가장 탐닉했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들을 팔기 위해 보낸 선박의 수는 2,704척이다. 이러는 가운데 200-400만 명의 노예가 항해 중 사망하게 된다.


 프랑수와 오귀스트 비아르, 노예무역(1833)

 

비아르가 그린 <노예무역>이라는 그림 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납치해 온 흑인 족장이 백인 상인과 흥정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백인 귀족은 편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빈번하게 일어났던 노예무역, 그리고 흑인노예를 그저 경매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백인들의 끔찍했던 과거를 기록한 작품이다. 노예는 서양인들에게 화물이나 말과 같이 거래해야 할 물건에 불과했고, 그런 노예에게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흑인 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 당시 전 세계가 양모 대신 면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면화 재배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꼭 필요했다. 면화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채찍질을 했고, 도망가다가 붙잡히면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뺏는 일까지 일삼았다. 그러던 중, 1873년 버지니아 주에서 냇 터너라는 흑인 노예가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살해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흑인노예 10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착한 흑인 노예 톰이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내용을 읽은 미국인들은 노예제도의 잔혹함에 대해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예제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가던 18614,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는 길고 소모적이며 비극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9, 링컨 대통령은 중대한 노예 해방령을 내렸다. 그는 남부 연합의 일부를 이루는 주에 사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고 북부에서도 노예제를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못했으며, 노예제 해방령은 부분적으로 밖에 실시되지 못하였다.

 

1864년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링컨은 완전한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수정을 제시했으며, 1865년 초 의회를 통해 수정안을 강행한 후, 링컨 대통령은 암살당하게 된다. 헌법을 완전하게 수정하기 전 까지 법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했던 미국은 1865년 헌법수정안을 선포하고 미국과 그 영토 내 노예제도를 헌법상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미국의 주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했고, 1995년이 되어서야 미시시피주를 마지막으로 미국의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비준하게 된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0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1빠 선생’ 이야기 


심은보



저녁밥을 먹는데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기어이 1빠 선생.... 저녁밥을 먹다 말고 후다닥 파출소로 달려갔다. 가보니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아 무언인가 적고 있고 1빠 선생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다. 고딩 두 녀석과 맞짱을 뜬 모양이다. 고등학생 코에 핏자국 선명한 화장지까지 꽂혀 있는 걸 보니...이것 참...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1빠 선생은 우리 반 민이 녀석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앞 이야기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녀석을 따라 올해 6학년 1반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과 만난 첫 날 함께 정한 우리 반 이름은 심과 함께’. 반 이름을 정하고, 첫 날부터 뭘 할 때마다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우리 민이 녀석에게 나는 ‘1빠 선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라는 낱말을 교실 속에서 쓰는 일이 참 불편하면서도 녀석에게는 뭔가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녀석은 줄을 설 때도 1, 발표를 할 때도 1, 밥을 먹을 때도 1. 그런 특별함을 부여받게 되었다. 수업 시간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려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도 첫 날은 참 잘 해내려고 애 쓰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더구나 작년까지 먹었던 약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 지내는 모습이 참 기특했었다.

 

그렇게 주말이 넘어가고 교실에선 여전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친구 건들고 저 친구 건들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지만 커다란 문제없이 며칠 잘 지냈을까.

 

어느 날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OO 녀석과 싸움이 한판 진하게 붙은 모양. 급하게 뛰어나가 OO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흥분해 있는 1빠 선생의 두 팔을 강하게 잡았다. 녀석 이름을 부르며 손에 힘을 빼고 선생님을 보라고 몇 차례 이야기를 했다. 니가 그렇게 하고 나면 선생님이 니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겠노라고 힘을 풀라고 했다. 한참 씩씩대던 녀석이 조금 뒤 수그러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억울한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 1학년 동생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OO이가 1학년 동생에게 저런 놈이랑 놀지마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래서 화가 나서 밀었는데 교문 벽에 OO이가 부딪혔다고. 듣고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날만도 했다. 녀석의 억울한 마음을 읽어주고 오늘 하려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1년 동안 화가 나더라도 그 동안 쉽사리 넘어섰던 선들을 넘지 않고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방법도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이 상황마다 너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주겠노라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날 갈등은 사과를 할 부분은 하고, 사과를 받을 부분은 받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 생겨나는 갈등들 속에서는 위험한 상황이 자꾸만 나타났다. 특히 어느 주말을 지내고 온 녀석의 모습은 그 전 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멍 자국도 보이고. 집에서 일이 좀 있었던 듯 했다. 아버지에게 맞은 모양.

 

그 한 주 내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자 친구 한 녀석에게 자꾸만 다가가서 심각한 정도로 괴롭히는 모습을 보이고, 순간 욱해서 아무 관련 없는 친구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동생들을 때리기도 하고 전보다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에겐 자꾸만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고 결국엔 자꾸만 넘지 말아야할 선들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다. 교실 안 뿐만 아니라 교실 밖을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녀석을 멀쩡한 상태에서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 속에선 순식간에 흥분하여 돌변해버렸다.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물건을 부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대상을 가리지도 않았다. 담임인 내게도,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도. 그 동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지만 녀석의 경우엔 교육의 영역을 넘어서 치료의 영역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본인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고 어른들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의 행동 패턴들. 과잉행동을 넘어 분노 조절에 대해선 어느 정도 다른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인데 올핸 설날이후에 약까지 끊어버렸다고 했다. 아빠와 통화를 하며 우선 병원 진료를 이어가 줄 것을 부탁드렸다. 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찾아나가려고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상담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의 도움을 얻어 상담 및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녀석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녀석의 흥분 상태를 잠재워줄 무언가였다.

 

아빠와 한참 통화를 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면 그냥 신고하라는 말과 함께 약값도 아까워서 더 이상 약을 먹이는 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은 부모로서 최소한의 역할만 하겠노라고 했다. 한참을 통화하며 눈물이 절로 흘렀다.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이니 아빠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설득하는 사이 녀석이 친구들 속에서 하는 행동 패턴은 더욱 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 속에서 녀석의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녀석의 살기 위한 몸부림을 마주하며 사실 교육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겨우 아버지를 설득하여 4월이 훌쩍 넘어서야 녀석과 함께 병원엘 다녀왔다. 약도 받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너무 많은 상황이 교실 안팎에서 일어나버린 뒤였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으로 치달아버렸다. 마주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상황들을 너무도 많이 마주하게 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아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였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학교에서는 1년째 무사히 살아내고 있긴 하지만 현재 이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 많은 문제들과 마주하면 안 될 듯 하여 이번 주에 급하게 등교를 중지해 놓은 상황이다. 녀석의 가정엔 상담 선생님이 함께 정기적으로 하려고 하고 있다. 그 첫 날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한 시간도 안 된 틈에 집 앞 공원에서 고등학생들과 그런 시비가 붙어 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 것이고 말이다.

 

녀석 생각에, 녀석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며칠 밤을 못자며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딱히 학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교육의 영역과 치유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이 필요한 까닭이다. 치료의 영역까지 학교가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녀석 문제로 벌써 두 차례 반모임을 했다. 우리 학부모님들 모두 녀석의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워 때론 눈물도 짓고, 때론 함께 도울 방법을 모색 해보고. 하지만 마땅치 않은 우리들의 한계에 절망도 했다. 참으로 답답한 현재 상황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지역 사회는, 국가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다섯 번째 학교까지 강제전학으로 녀석이 학교를 돌고 돌 동안 녀석을 관리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전혀 갖추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책임을 학교로 던져놓은 것 빼놓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또 다른 학교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문제 해결을 지원해야 할 터인데... 녀석이 이렇게 어른이 된다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것인가. 그 모습이 눈에 빤히 보이는 녀석의 삶은 어떻게 할 것인지, 또 이후에 치를 사회적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온통 내 머릿속엔 녀석 생각이라 나의 일상이 이래저래 꼬여 버렸지만 나는 녀석이 우리학교에서 졸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도울 생각이다. 우리 지역에서 참으로 유명한 우리 '1빠 선생'을 이렇게 계속해서 방치할 것인지를 묻고 그 대안을 요구하고 만들어 가는 일에도 함께 해야겠다.


오늘은 부디 녀석이 무사히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할 터인데...




심은보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이슈]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정영철


기원전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도시 올림피아에서는 서로 다른 (그리스)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4년에 한 번씩 모여 평화의 제전을 열었다고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국가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올림픽의 기원으로 이야기되는 ‘올림피아 제전’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근대적인 형태로 부활하게 되었다.


올림픽의 출발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우스’ 신 앞에서 제전을 벌이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이번 평창올림픽은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에서 남북이 공동입장, 단일팀, 공동응원, 축하공연, 여기에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실, 불과 50여일 전만 하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남북간에 벌어졌으니, 역시 남북관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함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보다 냉정할 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이제 막 한 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북의 김여정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임을 밝히면서 친서를 전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순간 남북간에 넘어야 할 한 고개는 넘었지만, 넘어야 할 더 큰 고갯길이 우리 앞을 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했던 것처럼, ‘여건’을 만들어야 할 과제가 놓여있다. 그 ‘여건’이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결국은 북미의 문제이고, 우리와 미국의 문제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북에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우리 역시 미국과의 대화와 설득에 더 큰 힘을 쏟겠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로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하고, 일본의 반발을 잠재워야 하며, 평창의 분위기를 이어나가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북도 역시 중국, 러시아와의 다각도 협력의 강화, 관계의 재편 등을 시도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 방러도 모색할 것이다. 또한, 미국을 향해서도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는 온전히 남북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미국이다. 이번에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의 태도와 발언에서 보이듯이, 북과의 접촉과 대화는 아예 멀리하고 탈북자 면담과 천안함 기념관 방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더니, 아예 ‘최대폭의 제재’를 실시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펜스 부통령의 발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북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핵화와 별개로 남북관계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쩌면 ‘내정간섭’에 가까운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남북이 만나서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데에 미국이 간섭할 권리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북의 핵과 미사일 시험 도발 – 제재와 압박 – 더 큰 도발 – 더 큰 제재’의 악순환이었다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환영과 환대 – 평화의 노력 – 더 큰 환영과 환대 –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 큰 평화 노력’속에는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넘어서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장하는 한미동맹은 평화를 위한 동맹이지, 전쟁을 위한 동맹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의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미국의 행위는 동맹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을 벌여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면,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더 큰 평화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합쳐져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평화를 말하고, 통일의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평화의 제전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평창올림픽이 그러한 평화의 제전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북이 손잡고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고, 함께 땀을 흘리며 ‘Corea’를 외쳤고, 남북의 응원단만이 아닌 해외의 동포들까지 함께 하는 응원단이 만들어져 평화를 노래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올림픽 이후까지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부터 ‘더 큰 평화 노력’이 요구된다.


2016-17년 촛불이 한반도 남단을 환하게 밝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남북이 함께 한반도 전체를 환하게 밝힐 ‘평화의 촛불’을 밝힐 시간이다.


자, 또 한 번 평화를 위한 촛불을 밝혀보자!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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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평화의 마중물 ]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송강호


제주도는 아름다운 관광지다. 일년의 거의 반은 눈이 덮인 한라산의 위엄을 볼 수 있고 산 자락은 바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산이 좋아서 들어오고 또 바다가 좋아서 찾아오는 섬이다. 전에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중국관광객들이 폭주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내리는 제주 공항의 활주로 아스팔트 밑에는 아직도 신원을 알 수 없는 4.3 사건 당시의 시신들이 고스란히 묻힌 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사실 상 국립공원인 한라산 전체가 학살지였으며 서귀포의 관광지 정방폭포를 비롯한 제주 바닷가 곳곳이 학살터였다. 학살지역을 피하면 제주도에 관광객들이 발디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주도민들에게는 낫지 않은 아픈 상처요 잊혀지지 않는 슬픈 기억이다. 2016년 바로 이곳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정부와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해군 기지에 어느 날엔가 서부터는 미군 군함들과 잠수함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죽 쒀서 개준다더니 우리 나라가 비싼 돈 들여 군사기지를 만들어 실제 유용하게 이용하는 나라는 정작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실제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태평양 전체를 자기집 안마당인 양 활보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아시아의 신흥 초 강대국 중국이 등장하여 태평양의 서쪽은 자기들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게 몹시 마땅치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2차대전에서 자신과 싸워 패망한 일본에게서 오키나와를 빼앗아 군사기지를 세웠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이 끊임없이 기지철수를 요구하고 있어서 불편하던 차에 강정해군기지건설, 이게 웬 떡인가? 최대의 적수 중국의 코앞에 있는 제주도에 미국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해군기지를 그것도 자기나라 돈 하나도 들이지 않고 새로 지어 준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처음에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는 이유가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우회하여 남쪽으로도 공격할 수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대비하여 지리적으로 최남단인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중국의 어선들이 떼로 달려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무장한 해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중국 어선이 아무리 난폭하다한들 이 민간 어선들을 퇴치하기 위해 미사일을 장착한 이지스함이나 어뢰로 무장한 잠수함까지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이도 이치에 닿지 않았다. 그러자 아덴만이나 말래카 해협의 해적들로부터 우리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대양해군이 필요하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우리의 유조선이나 상선이 중국에 의해 공격 당할 수 있다고 겁박하였다. 그러나 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군사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해적 퇴치는 우리 군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럴 경우 심각한 외교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상선을 중국이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중국과 무력 충돌을 일으켜서는 절대 안 된다.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런 횡설수설 이면에는 군인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은밀히 얽혀져있었다. 결국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대 중국 전략 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해군기지건설로 앞으로 초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을 자초한 것 일수도 있다. 저주스런 재앙을 불러오는 위험한 시설인 것이다.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 묻힌 구럼비 바위는 기도와 명상의 터였다. [사진제공: 강정 해군기지반대 대책위]


강정의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운동은 육지 뿐 아니라 바다 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 강정 해상팀]


내가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런 재앙의 불을 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공사중단을 요구했고 해상 공사의 위법성을 증언하였다. 그 결과로 업무방해라는 죄목으로 세 차례나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지금도 재판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불행을 가져온 제주도에 애정이 더 깊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옥중에서 제주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제주도를 위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제주도는 군사기지 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 군인도 전쟁도 군대도 없는, 군사훈련도 전쟁 연습도 없는 평화로운 섬이 되어야 더 아름답고 더 가치 있는 소중한 섬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제주 해군기지를 세계의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평화 대학으로 전환시키자. 매장해 버린 아름답고 거룩한 구럼비 바위의 시멘트 콘크리트를 거둬내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자. 해군 본부는 대학 본부가 되고 군 관사는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도록, 복합 문화센터는 학생회관이 되도록. 굳게 닫힌 군대의 철문이 하루 속히 활짝 열리고 높은 돌벽이 허물어져 평화의 공원으로 개장되도록. 지금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볼 수 조차 없는 중덕 바다에 다시 돌고래 떼들이 몰려와 파도를 차 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강정 앞바다에서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라고 지금도 해군기지를 돌며 기도 드린다


2013년 1월 27일 평화운동가들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지 8주년이 되는 날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선언하였다.

[사진제공: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이미 해군 기지가 지어졌는데 어떻게 이를 다시 되물릴 수 있겠느냐고 시름 섞인 푸념을 한다. 그러나 들어온 길이 있으면 나갈 길도 있는 법이다. 해군기지가 나가면 강정 앞바다를 버리고 떠나가 버린 돌고래들이 상서로운 기운을 몰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제주도의 선주민들이 진심으로 해군기지뿐 아니라 모든 군사기지를 원치 않고 또 군사 기지가 없어지는 것을 원하고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제주도는 더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쳐 외치고 분연히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4.3의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모두 정신적인 외상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으로 가족 중에 한 두 명 이상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고 모든 가족들이 나서지 말라고 눈을 흘기는데 누가 용기 있게 나서서 소리 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제주 도민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귀가 열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제주도를 피곤할 때 쉬고 심심할 때 놀고 오는 한반도 변두리의 부속섬 정도로 여긴다. 군인들은 본토를 지키기 위한 변두리의 국경 초소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몸이 다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제주도가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예인선이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시아 바다의 지정학적 중심지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지난해 한반도는 촛불의 불길로 격동하는 한 해를 보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지난 해의 촛불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담겨있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날을 위해 한라산 남쪽 끝자락에서 군사기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불씨를 지키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이 통일의 횃불이 점화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번져갈 것을 희망하고 상상한다.



송강호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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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세상과 만나는 인문학]


어린 왕자와 영화인들


송태효


시네아스트 생텍스 
평화주의를 실천한 행동주의 소설가 생텍스의 시네아 스트로서의 삶은 영화사에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 소설가로 성공한 생텍스는 프랑스 유명 감독 레몽 베르 나르 (Raymond Bernard)가 연출한 「안느 -마리 (Anne–Marie)」 (1935) 의 시나리오를 쓰고 피에르 비용 (Poerre Billon) 의 『남방 우편기 (Courrier du Sud)』 (1936) 를 각색 하고 헌팅도 도왔다 .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1940 년 드 골의 런던 망명 정부와 페탱의 비시 프랑스 자치 정부의 위선에 항의하며 조국을 떠나던 생텍스는 피에르 비용에 게 「이고르 (Igor)」 시놉시스를 맡기며 귀국 후 공동 제작 을 제안한다 . 하지만 1944 년 7 월 31 일 동료들의 만류에 도 불구하고 아직 길들지 않는 신종 비행기로 자원 출정 한 마흔네 살의 전투 조종사 생텍스가 지중해에 추락하 며 이 제안도 물거품이 되었다 . 

뉴욕 망명 생활 중에도 생텍스는 모국어 감각 상실을 우려하여 영어 사용을 자제하며 세계의 프랑스인들에게 위 안과 용기를 주는 프랑스의 목소리를 전했다 . 생텍스는 1941 년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초청으로 할리우드를 방문한다 . 그는 기성 화단의 구태 성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새롭게 영화의 길을 선택하여 『게임의 규칙 (Règle du Jeu)을 발표하나 영화의 풍자 대 상인 부르주아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 하 지만 정작 망명지로 택한 미국에서 상영된 그의 작품들 은 관객을 열광시켰다 . 이방인 감독으로 추앙받던 르누 아르가 생텍스의 영화적 재능을 인정하고 『어린 왕자』의 전편인 『사람들의 땅』을 영화화하고자 원작자를 영화의 메카로 모신 것이다 . 

원작의 정신을 이미지로 재탄생시키는 르누아르의 천재적인 발상에 탄복한 생텍스는 자신의 기획안을 녹음한 레코드를 제작하여 르누아르에게 선물하며 서로의 우 정을 나눈다 . 갈리마르 출판사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우정어린 편지와 레코드 내용을 정리한 글을 한데 모아 1999년 『친애하는 르누아르에게 (Cher Renoir)』를 출간하였다. 당시 조종사들의 고난과 동지애를 통해 꺼져가는 양심의 불꽃들을 살리고 서로 소통시키려는 영화적 시도로서 르누아르가 자기 생애 최대의 걸작으로 여긴 이 영화의 제작은 아쉽게도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다 . 하지만 다행히도 데이비드 셀즈닉 제작,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야간 비행 (Vol de Nuit)」 (1933, MGM) 은 오늘날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하다. 야간비행 시청하기



『어린 왕자 』의 영화화 역사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으로 프랑스 최고의 거장 르누아르와 함께 영화사를 풍미한 미국 명감독 오슨 웰스는 위대한 독일 소설가 카프카의 원작을 각색한 「소송(Procès)」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전신인 오르세 역에서 촬영할 정도로 유럽 문화에 정통한 시네아스트였다 . 그 역시 『사람들의 땅 』을 각색하며 그 희열을 친구들에게 쏟아냈고 이어서 『어린 왕자 』의 영화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린 왕자 』를 영화화하려는 그의 제안은 월트 디즈 니사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시민 케인 』에서 오슨 웰스는 이미 어린 왕자의 모험기 형식의 선례를 보여주고 있 다. 그 유명한 ‘로즈버드 ’ 수수께끼를 따라 케인의 어린 시절을 추적해가는 과정은 마치 『어린 왕자 』의 비행사가 어린 왕자의 기원을 풀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지며 그의 죽음을 맞는 것과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 


노골적으로 자신이 어린 왕자임을 천명한 배우도 출현하였으니 할리우드 신화 속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우상으로 남은 영화배우 겸 카레이서 제임스 딘이다 . 제임 스 딘은 열 살 무렵 생텍스를 직접 만났다고 친구에게 자랑한 적도 있다. 『어린 왕자 』의 영화화라는 위대한 꿈을 지닌 제임스 딘이었지만 그 꿈은 자신의 애마 포르셰(Porsche 550 Spyder)를 몰고 가던 1955년 10월 8일 SR 46 도로에서 처참히 부서져 버렸다. 동료 윌리엄 베 스트 (William Bast)가 제임스 딘의 무덤에 새긴 어린 왕자의 한 마디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라는 묘비명이 그의 어린 왕자 사랑을 전한다 . 제임스 딘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어린 왕자』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셜램(Cholame)의 제임스 딘 메모리얼 파크 소재 묘비명. 윗부분에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라고 에칭으로 새긴 구절이 보인다.


드디어 1967년 『어린 왕자 』가 장편 영화로 탄생하게 되니 파라마운트가 제작한 리투아니아 출신 아루나 스 제브리누아스(Arūnas Žebriūnas)감독의 「어린 왕자 (Malenki Prints)」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독특한 분장의 캐릭터들 대화로 구성된 판타지로 오늘날 창작물의 수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무대 연출과 구성으로 높 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시청하기


리투아니아 출신 아루나스 제브리누아스 감독의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영화로 옮기려는 시도 가운데 길들임의 주제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잘 살려낸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감독 스탠리 도넌 (Stanley Donen)의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1974) 이다 . 올드 무비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사랑은 비를 타고로 한국 시네필들에게 잘 알려진 스텐리 도넌의 「어린 왕자」는 생동감 넘치는 현대적 애니메이션 , 시대를 앞서는 안무와 음악 , 뱀 역의 발레 댄서 가수 밥 포시(Robert Louis Bob Fosse), 조종사 역의 리처드 컬리(Richard Kelly), 어린 왕자 역의 스티븐 워너(Steven Warner), 여우 역의 진 와일더 (Gene Wilder) 등의 명배우 캐스팅으로 세상의 찬사를 크게 받았다. 특히 원작의 주요 대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어린 왕자와 뱀 그리고 여우의 우정에 근거한 스토리텔링은 원작자 생텍쥐페리 자신도 흡족해했으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실사를 합성하여 성인과 아동이 함께 보며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즐길 수 있게 편집된 명작이다. 특히 여우와 뱀을 연기하는 두 명배우의 노래와 춤이 인상적인데 뱀 역을 맡은 밥 포시의 문 워크를 마이클 잭슨이 그대로 복원하여 크게 성공하기도 하였다 . 

스탠리 도넌의 「어린 왕자」(1974)의 오프닝 크레딧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원조 밥 포시의 안무. 스탠리 도넌의 「어린 왕자」(1974) 



현대적 감수성으로 부활한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 」 
『어린 왕자』의 감동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부활시키려는 시도도 계속되어 왔다. 이 가운데 『어린 왕자』를 읽고 크게 감동한 드림웍스의 「쿵푸 팬더 」감독 마크 오스본 이 원작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8년간의 노력 끝에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재탄생시켰다. 2015년 제68회 칸 국제영화제는 이 작품을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하여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하였다 . 

어린 왕자와 여우와 소녀, 

마크 오스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2015) 


비행사와 어린왕자, 마크 오스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2015)


생텍스는 일찍이 글과 영상을 통해 세계 시민들 모두에게 전쟁의 공포를 알리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진정한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로서 미국의 참전을 요구하였다. 그의 요구대로 미국이 유럽 전선에 일찍 참전하였다면 독일의 항복도 그만큼 빨랐을 것이고 생텍스는 일찍 조국으로 돌아가 시네아스트로서의 꿈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주의 공군과 해군의 공격을 받고서야 참전하게 된다. 우리의 광복도 그만큼 지연된 것이다 . 프랑스 공화국 법령에 의거 하여 1963년 파리의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된 어린 왕자 생텍스 그리고 그를 사랑한 인디애나의 어린 왕자 제임스 딘의 영혼에 평화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 '아트인라이프 ' 출간 < 월간 태백 > 에 12 회 연재한 동일한 제목의 기사 내용을 반으로 줄이고 <피스레터 > 의 기획 의도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송태효  불문학 박사로 현재 '어린왕자인문학당' 대표와 제주불교문화대학 불교인문학 교수, '성남시지역발전자문위원회' 교육체육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는 예술인가, 어둠의 방-시와 영화 속 그림자 이야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생텍쥐베리 사람들의 땅, 어린 왕자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