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총서2017.12.14 17:15

보도자료-평화의시선으로분단을보다.pdf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정영철 소장이 피스레터에 연재한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를 수정·보강한

남북관계 20장면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보다


왜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성찰해야 하는가?

38선의 탄생부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삐라’를 둘러싼 논쟁까지

일관되게 평화’의 시선으로 재조명한 남북관계 20장면




그동안 북한 역사와 남북관계를 꾸준히 연구해 온 정영철 교수와 정창현 교수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집필한 남북관계사 교양서이다. 분단의 형성과 남북갈등, 대화와 교류 등 분단 70년사에서 남북관계의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 20개의 사건을 뽑아 흥미롭게 서술하였다.

특히 분단, 38선의 탄생부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삐라를 둘러싼 논쟁까지, 그리고 우리가 지향하는 바의 평화통일의 꿈까지 총 20개의 장면을 통해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전쟁과 적대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되며, 화해와 협력, 신뢰와 공동 번영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평화의 시선으로 남북관계를 재조명하였다.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성찰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일관되게 평화의 시선으로 과거 분단과 갈등, 협력관계를 성찰하고 있다냉전시대 우리는 북한을 동족의 반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와 생사를 걸고 대립하고 있는 소멸시켜야 할 적대집단이라는 상반된 대북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북인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우리에게 오늘의 북한은 경계대상동반자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러한 이중적인 현실인식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적대성을 감소시키고 동포애를 증진시켜 북한을 공존과 동반자관계로 이끌어 가는 지혜와 노력이다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은 성급한 통일은 남과 북, 모두에게 엄청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평화적으로 남북합의에 의한 통일 추구가 필요한 이유다. 더구나 요즘처럼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은 무엇보다도 평화적 환경의 조성이 절실하다


지난 70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어 있다. 동북아의 평화 없이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없으며, 한반도의 평화 없이 동북아의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그렇기 때문에 지난 70년의 남북관계를 평화의 시선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새로운 출발은 처음부터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 신뢰와 공동 번영의 길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우리에게 과거 남북관계를 성찰하면서 교훈을 얻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그 중심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평화의 가치통일의 꿈이 필요하다.

 

이 책은 젊은 세대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도록 여러 이미지와 도표 등을 포함해 가급적 쉽게 서술하였다2000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통일을 모색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남북 간에는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등 다양한 협력사업이 진행되었다. 다양한 민간단체들의 인도적 지원 활동이 있었고,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남북의 행사를 같이하기도 하였다.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의 공존과 공영의 성과물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중대한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북의 도로와 철도를 연결시키고, 한반도를 넘어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꿈을 꾸게 하였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금강산과 개성공단은 결국 문을 닫았고, 남북은 과거 냉전 시절의 적대적 관계로 돌아갔다. 젊은 세대들에게 평화통일은 새로운 꿈을 창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과 동떨어진 너무나 추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이제 새롭게 열어나갈 남북관계는 젊은 세대에게 부담이나 성가신 일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어야 한다. 남북의 젊은 세대가 한반도에서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할 수 있는 꿈이 필요한 시점이다. ‘평화로운 남북관계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새로운 미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꿀수록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반도의 분단이 남겨놓은 반쪽짜리 꿈이 아니라 온전한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철길과 땅 길의 연결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 신뢰와 연대를 의미한다. 나아가 한반도가 중심이 되어 동북아 국가, 세계인 모두에게 평화와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 된다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과거 불행했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보고 젊은 세대가 새롭게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사고하고, 모색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있는 그대로의 남북관계사이해

 

이 책에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자 새로운 남북관계를 모색하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남북관계를 남과 북이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유리하게 서술하기도 하고, 한국의 경우 정권이 바뀜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남북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우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남북관계를 되돌아보고, 이에 기초해 미래의 남북관계를 사고해야 한다이것이 이 책에서 그 동안 논쟁이 되어 온 대북 인도적 지원문제, NLL문제, 삐라 살포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

 

이 책은 본격적인 역사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남북관계의 중요 장면을 간추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끄집어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20개의 장면에는 안타까운 적대의 역사도 있고, 희망에 부풀었던 꿈만 같던 역사도 있다. 남북관계의 웃고, 울었던 역사를 되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자 했다. 남북관계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현재의 모습은 우리가 지나온 남북관계를 성찰하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0.30 14:21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 관계사]



휴전선을 밟고 : 제2차 남북정상회담

 


정영철



1945년의 38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진 후, 남북을 통틀어서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밟은 적이 있을까?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넘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북이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바로,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비행기도 아닌, 그리고 자동차 속에서도 아닌 직접 걸어서 이 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남의 최고 통치자-군 최고책임자가 직접 이 선을 넘어, 평양으로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제2차 정상회담은 시작되었다. 2000년 제1차 정상회담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길 위에 한반도의 평화와 협력의 더 큰 길을 내기 위해 제2차 정상회담의 길은 그렇게 열렸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적대와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손을 잡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이후부터 남북관계는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한국 대 터키)이 열리는 날 서해에서는 남북의 함정이 충돌하는 제2차 서해교전이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북미간의 대립이 강화되고, 한반도에 다시금 전쟁의 위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이 출범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북한과의 대립은 2002년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에 기반한 핵무기 제조 의혹 등으로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 2차 핵위기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북한과 미국의 핵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1994년 북미가 합의한 제네바 합의는 끝내 파기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으로 맞섰고, 2003년 1월에는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북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북미간의 대립만 격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그간의 대북정책을 놓고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이 공표되면서 ‘남남갈등’만이 아니라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에도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길에서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에 대한 편의를 봐준 혐의가 특검의 대상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특검은 남북간 화해의 노력과 이를 위해 노력한 수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특검으로 인해 소떼 방북의 역사적인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검찰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끝내 정몽헌 회장은 검찰 수사 와중에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북간의 갈등도 작지 않았다. 2004년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관련 갈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2004년 7월에는 남북간 당국자 대화가 중단되었다. 때마침 동남아를 경유하여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남북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여기에 북미간 갈등이 6자회담으로 어느 정도 봉합되는가 했지만, 결국 2005년 2월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성명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긴장국면으로 흘러갔다. 2004년 하반기부터 2005년 상반기까지는 민간차원의 대화와 협력은 지속되었지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회담은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2005년 6월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의 협력을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대해 뭔가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금까지 기능주의적 접근에 따라 평화-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거나, 남북간에 합의와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상황에서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안보 문제는 남북의 합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침 2005년 ‘9.19 공동선언’에 따라 북미간 핵 갈등 해결의 전기가 어느 정도 마련되고 - 이는 곧바로 BDA 사태로 인해 위기로 바뀌었다 - 2006년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반도의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밝히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6자회담에서 BDA 사태로 좌초 위기에 빠졌던 9.19 공동성명을 되살리는 베이징 ‘2.13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제시한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한반도 평화 - 비핵화를 포함한 - 그리고 경제협력의 더 높은 수준으로의 발전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북한과 시도하게 되었다.    


 

마침내 2007년 8월 5일 남북간에 정상회담이 비공개적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8일에는 8월 28일 제2차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청와대는 2차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동시에 견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고, “양 정상이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함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남북경협 및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ㆍ질적으로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상생의 화해ㆍ협력 기조가 지속되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주요 의제로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제기하였고, 실제 2차 정상회담은 그런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다. 



제2차 정상회담을 위한 평양행을 선택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육로로 방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일 청와대를 출발하여,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통과하여, 개성-평양 고속도를 따라 평양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의 최고책임자-군최고통수권자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 MDL 통과장면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시간은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 5분이었다. 사실, 군사분계선이라고 하지만, 표식이 없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무형의 경계일 뿐이다. 과거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당시가 1948년 4월, 그때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나서야 이제는 38선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남의 정치지도자가 넘어서게 된 셈이다. 남의 최고지도자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는 의미는 더 이상 한반도가 전쟁이 아닌 평화, 갈등이 아닌 협력의 시대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선을 넘기 직전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국민 여러분, 오늘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날이라서 가슴이 무척 설레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 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발전이 정지돼 왔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잘 다녀오겠습니다. 

군사분계선 걸어서 통과하기 전 2007. 10. 2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노무현 대통령 일행은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접을 받았고, 이후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역사적인 ‘10.4 정상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하였다. ‘10.4 선언’에는 ‘6.15 공동선언’에서는 언급되지 못했던 평화의 문제 특히, 한반도의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한 종전선언의 문제, 나아가 평화체제의 문제까지 언급되고 합의되었다. 또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개성공단을 뛰어넘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의 문제가 다방면에 걸쳐 합의되었다. 이 외에도 그간 남북 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해해상에서의 남북 충돌을 방지하고, 오히려 ‘갈등의 바다’를 ‘협력의 바다’로 만들어 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창설에 합의하였다.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합의였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평화체제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남북의 협력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예고하는 합의문이었다. 땅에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을 넘었지만, 그 효과는 남북의 모든 장벽을 넘어뜨릴 수도 있는 합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10.4 정상선언’은 합의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좌초할 운명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남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 즉,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면서 ‘10.4 정상선언’을 이끌어갈 만한 추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 ‘10.4 선언’의 합의 내용은 남북의 협력체제가 전제되지 않는 한 하나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제는 북과 미국이 핵심 축을 이루는 문제였고, 이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했다. 또한, 남북의 경제협력 사업 역시 남북의 정치적 협력이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남북의 정치 및 군사적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남측의 동력이 상실되면서 아무것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남북관계는 6.15 공동선언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고, 서해상에서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또한, 군사분계선 상에서의 상호 비방과 총격도 벌어지면서 한반도는 다시금 갈등과 대립의 장벽이 높아져갔다. 



2007년의 제2차 정상회담은 남의 최고통치자가 군사분계선을 직접 걸어서 넘어가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리고 그 합의 내용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현실적으로 정상회담의 추진과 성사가 너무 늦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추진되어야 할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이른 시기에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합의되고, 실행되어야 했다. 둘째, 지극히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진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더 이상의 관계 개선의 추동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강경정책에 부응하는 ‘한미동맹’체제가 강화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사그라질 듯 보였던 냉전의 대립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휴전선을 밟고 밟아, 선을 지우고 길을 내기 위한 노력은 아쉽게도 원했던 것만큼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선을 밟고 밟아, 길을 내기 위한 커다란 발걸음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고, 앞으로 언제든 그 길을 다시금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교훈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남이든 북이든 정책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우리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원칙과 내용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청와대, 제2차 정상회담 발표문

2007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50년 금단의 선을 걸어서 넘다(서울: 호미, 2009)

김연철『한반도평화경제공동체구상』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7)

노무현 재단, 『NLL의 진실과 노무현의 전략』 (서울: 전자책나무, 2013)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8.01 14:02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서울과 평양의 환호, 세계의 부러움: 2000년 정상회담


정영철


한 사람은 비행기 트랩 위에서, 또 한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2000613일 오전 1037, 역사의 한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바로 그날 2000613일은 한반도 분단사에 새로운 역사가 쓰인 날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동안 전쟁과 적대, 갈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소멸을 주장했던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평양의 하늘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던 희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바로 2000년 정상회담이었다.

 

우리처럼 오랜 세월 분단을 경험했던 동-서독도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정상회담을 통해 동-서독의 화해와 협력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비록 불행의 땅으로 변했지만 예멘 역시 남북 예멘의 정상회담을 통해 전쟁의 방지와 통일을 위한 숱한 회담을 전개했었다. 지금도 지중해의 조그만 섬나라인 분단된 키프로스에서 남북 키프로스의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상호 필요에 의해 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변국들의 중재와 압력에 의해 열리기도 한다. 예멘의 경우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중재가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으며, 키프로스는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00년 정상회담은 어찌 보면 1970년대부터 남다르게 한반도 문제를 고민해온 김대중의 필생의 역점 사업이었을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김대중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예비군제 폐지와 대체, 4대국교차승인론 등 굵직한 한반도 관련 공약을 내세우며 박정희를 압박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면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자신의 통일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정상회담은 아마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고, 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1998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그는 199811월부터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이로부터 약 17개월간에 걸친 막후접촉과 상호 밀사 및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마침내 2000410일 정상회담을 발표하게 된다. 이 당시 남북한의 막후 라인은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후일 국정원장)과 북한의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김보현과 북의 전금진(우리에겐 전금철로 잘 알려져 있는 북의 아태부위원장) 라인도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도 다양한 시그널을 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003월의 베를린 선언이었다. 베를린 선언은 경협의 확대’, ‘남북의 화해·협력’,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당국자 대화를 핵심 골자로 하는 대북 제안이었다. 이 베를린 선언이 나오기 이전, 북은 이미 우리에게 경협에 대한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북의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공식화시킨 것이 베를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남북정상회담

본 저작물은 '국정홍보처'에서 '2000'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김대중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상회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이었다.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났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평양에서의 모습은 파격 그 이상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정일위원장의 공항 영접, 북의 군인들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던 모습, 두 정상이 같은 승용차를 타고 환호하던 평양 시민들을 만나면서 퍼레이드를 벌인 점 등등.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 광경에서는 서울에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까지 눈물을 보일 정도의 감격이었고, 모든 기자들이 박수를 치며 이에 환호하기도 하였다. 외신 기자들 역시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였고, 이 순간만큼은 우리를 가장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다. 그간 북을 싸워 없애야 할 적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상대임을 인정하였고, 남북이 더 많은 만남과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실제 정상회담 이후로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경유하여 멀리 에돌아 평양을 가야하는 현실을 비판하였고, 결국 서울과 평양 간에 직항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함으로써 남북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김정일위원장 팬클럽까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정상회담이 가져다 준 남북 일상의 변화였다.

 

역시 가장 큰 변화는 국민들의 북에 대한 인식이었다. 적이 아니라 동포로, 협력을 통해 같이 공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할 통일의 다른 한 주체로 북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약 30만 명의 군중이 두 정상의 만남에 길거리 환영을 보여주었다면,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도 자발적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따뜻하게 환대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2000년은 서울과 평양이 세계 주요 외교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급박하게 서울을 찾았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평양과 서울을 동시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두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국 역시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베이징을 찾아 중국지도자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라면 북과 미국이 상호 특사를 주고받으면서 수교 협상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점이다. 그해 10월 조명록 특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역시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북과 미국은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여 수교까지 염두에 둔 합의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200010월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는 조명록 특사 (출처:통일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0001023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공연을 관람하던 중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출처:통일뉴스)

 

장 중요하게는 지금까지 남북이 서로를 향해 적대와 갈등의 패러다임으로 보던 것을 뒤집어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이다. ‘안보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아닌 공존과 평화화해와 협력이 더 인기 있는 구호가 되었고정치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 청사진을 발표하였다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당국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남북의 교류와 협력에 나서게 되었다제주도에서는 감귤을 북에 보냈고경기도에서는 휴전선 인근의 방역 사업에 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경상남도는 통일 딸기사업을 통해 지자체간의 새로운 협력모델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기업들은 개성공단을 넘어 북과의 더 넓은 경제 합작을 위한 진지한 모색을 하였고시민단체는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기찬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이 있은 후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그 사이에 남북은 그야말로 많은 일들을 벌렸고때로는 웃고때로는 울고때로는 싸우면서 서로를 이해하였다초기에는 참으로 많은 실랑이가 있었다호칭 때문에 얼굴을 붉혀야 했고남에 내려온 북의 응원단은 구겨진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에 분노하였다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그렇게 서로를 배워 가는 시간이었다이런 점에서 보자면정상회담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움이 아닐까통일은 아주 거창하게 보자면막막한 미래의 일이지만우리의 주변에서부터 만남을 이어간다면 소소한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이해하고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일상의 평화와 일상의 통일을 꿈꾸게 해준 것이 바로 정상회담이었던 것이다.

 

-미 공동코뮤니케: 코뮤니케는 일명 공식발표 혹은 공동성명서로 해석된다. 2000 -미 공동코뮤니케는 역사적으로 북미관계의 일대전환을 의미하는 공식발표였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북은 조명록 당시 총정치국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조명록 특사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북미관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그 결과 양국은 2000 10 12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게 된다.  -미 공동코뮤니케의 핵심 내용은 두 나라의 적대관계 청산과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의 협력, 양국 관계의 정상화였다. 또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북이 클리턴 대통령의 방북을 요청하고, 이를 위해 당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이를 준비하기 위해 방북하기로 한 점이다. 실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0 19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미 공동코뮤니케는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합의로서 의미를 갖지만, 이후 미국의 정치정세가 급변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 2000년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게 패하면서 북미 관계는 이후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정창현, 남북정상회담 600(서울: 김영사, 2000)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2(서울: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5)

임동원, 피스메이커(서울: 중앙북스, 2008)

임채완, 전형권, “6.15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및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한국동북아논총17(2000)

2000년 한·러 공동성명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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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7.06.19 14:30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 1,001마리의 소떼가 휴전선을 넘다


정영철


19986월은 한반도의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된다. 집념의 기업인이라 불리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20세기의 가장 멋진 퍼포먼스를 펼쳤다. 바로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서산농장의 소떼 500마리가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넘어가는 장면이었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20세기의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 이름 했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과거 미국과 중국을 이어주었던 핑퐁외교에 빗대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외교라 이름 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500마리의 소떼가 판문점을 넘는 그 광경은 감동과 아름다움이었다. 서로가 총을 겨누고,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을 일삼던 바로 그곳에서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소떼가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500마리의 소떼가 지나간 길은 그로부터 4개월 후 다시금 501마리의 소떼가 또 지나가면서 총 1,001마리의 소떼몰이 방북이라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1998년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있었고,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악화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새롭게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더욱이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남북관계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로서 햇볕정책을 내놓고 있었다그러나 남북관계는 생각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이전 정부 시절 악화된 남북관계와 더불어 1994제네바 합의로 위기를 넘긴 북미관계 역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19988월에는 금창리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오히려 북한과 미국이 공방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북한이 대포동 1라 불리는 로켓 발사를 감행함으로써 북미관계까지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주영 회장은 소떼 방북이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였을까?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금강산 근처의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이다. 6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앞으로 땅만 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소 판돈 70원을 가지고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세 번의 가출 끝에 서울에 정착한 그는 훗날 현대그룹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을 세우게 된다. 이때 그가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소 판돈 70원이 결국 소떼 1,001마리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사실, 정주영은 북한으로부터 세 번의 초청을 받게 된다. 1987년과 88년에 초청을 받은 그는,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방북을 승인받지 못하였다. 이후, 마침내 1989년에서야 세 번째 초청 만에 방북 길에 오르게 된다. 그가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첫째로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종의 실향민이었다. 그의 고향 강원도 통천은 금강산 자락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겨울이면 눈이 1m 이상 쌓이는 곳이었다. 서산농장의 소떼를 바라보는 정주영에게 그 장면은 마치 자신의 고향을 느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 이외에 그의 소떼 방북에는 기업가로서의 모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 대한 투자를 통해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경제적 이익을 선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중 특히 금강산 개발은 이곳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꾸림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고 기업가적인 입장에서는 향후의 다가올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북한에 대한 모험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9년 첫 방북에서 그는 금강산 개발에 대해 북한과의 공동 개발 협정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제 곧 닥쳐올 북핵 문제와 김영삼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 악화라는 국면을 만나면서 아무런 진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딱 8년 후인 1997년 북한의 광명성경제협력연합회장명의의 초청장을 다시금 받게 된다. 방북을 앞둔 그는 서산농장에서 오랜 동안의 고민 끝에 거대한 퍼포먼스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 방북하는 것이었다.


▲ 1998년 6월 16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하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 Ⓒ민중의소리


흔히 소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역사적 감정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아니 동물이라기보다는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동반자였다. 돈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겠다는 생각을 거부한 정주영에게 소는 자신의 개인사에 비춰보더라도, 그리고 민족적 정서에 비춰보더라고 가장 적합하였다. 소떼 방북에 나서던 날 그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서울로 찾아들 때 무작정 이 길을 통해 달려왔었지요. 이제 소떼들을 몰고 고향을 방문하니 매우 감격스러워요. 황소걸음이라도 통일의 날이 다가오길 바랍니다.”고 소회를 밝혔다. 북한도 그의 소떼 방북에 대해 정 회장 일행이 따뜻한 동포애의 지성을 담아 마련한 소들을 가지고 왔다. 북측 관계 일꾼들이 정 회장 일행을 판문점에서 혈육의 정으로 따뜻하게 영접할 것이다고 중앙통신을 통해 전했다.


마침내 1998616일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45대와 함께 정주영 회장은 판문점을 통과해서 북한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사료를 실은 트럭과 승용차 10대 등 소떼 방북은 1km 나 행렬이 이어질 정도의 광경을 연출했다. “소는 한 뼘의 농토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셨던 아버님께 바치고 싶은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라고 했던 그가 소 판돈 70원을 500마리의 소떼로, 그 후 4달 이후에는 또 다시 501마리의 소떼로 갚았던 것이다.


소떼 방북은 전 세계적인 이벤트였고, 남북에게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남북관계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두 번의 소떼 방북이 있고 난 후, 그해 1118일 마침내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관광객 889, 승무원 480, 안내원 50, 그리고 오락 담당 9명을 태운 28,000톤급 금강산 크루즈 여객선 현대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였다.


▲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객 800명을 태우고 첫 출항하는 '현대 금강호' Ⓒ현대아산


소떼의 방북은 이벤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곧이어 닥친 대자연재해 등으로 심각한 식량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경제가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른 상황에서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소떼의 방북은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에게는 엄청난 지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당시 소떼 방북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때마침 출범했던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정부 시절의 성과와 함께 심각한 오류를 교훈으로 삼아 대북정책에서의 정경분리를 추진하였다. 정경분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를 떠나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겠다는 것은 기업인에게 새로운 도전을 북돋게 했다. 특히, 현대의 입장에서는 지금껏 북한과의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근본적인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89년 금강산 관광에 대해 개발 약속까지 하고서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1997년 북한의 정주영 회장 초청은 금강산 관광 등 현대의 대북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결과 1998년 소떼 방북,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의 합의(6), 마침내 금강산 첫 관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주영의 소떼가 연출했던 1km가 넘는 행렬의 장엄했던 광경도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소떼가 한 번 지나간 길을 그 후 10여 년 동안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고갔다. 북한을 관광하기 위해서,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 남한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과 유니버시아드 게임 등을 응원하기 위해서,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부지런히도 오고갔다. 길은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지런히 밟고 지나갈 때에야 만들어진다. 소떼가 꾹꾹 눌러놓았던 그 길을 따라 10여 년 동안 부지런히 오가면서 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떼 방북으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휴전선과 판문점은 다시금 누구도 오도가도 못하는 적막한 공간으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살벌한 대결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금강산의 발길도 끊겼고, 개성공단의 철도와 도로도 끊겼다. 한 동안 총성이 멈추었던 휴전선의 하늘에 총성이 울리기도 하였고, 지뢰를 밟은 어린 병사들의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남북이 만들어놓은 길에 어느새 잡초만 자라나 무성한 풀밭을 이루고 있다.


소떼 방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회장은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고 난 그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2001년 만해상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에는 DMZ 평화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소떼 방북은 2000년 정상회담으로, 그리고 2007년의 또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세계인이 이를 전위 예술이라고 칭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단의 숙명을 뛰어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이 있고, 민간이 할 일이 있으며, 기업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때로는 정부가 앞서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민간이, 때로는 기업이 앞서갈 수도 있다. 분명 소떼 방북은 기업이 앞서서 분단의 휴전선을 헤집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정부가, 민간이 그 뒤의 철조망을 걷어내었다. 이렇게 통일과 평화의 길은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힘을 합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모든 것을 독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정부의 독점은 곧 분단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단의 정치를 넘기 위해서는 정부, 민간, 기업이 힘을 모아야 한다. 1998년의 소떼 방북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당시 소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지금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 풍성한 소떼가 되었는지, 혹은 관리 부실로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배고픔에 한 점 고기 덩어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다. 당시 소떼를 싣고 떠났던 트럭이 지금도 북한 땅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한다. 소떼의 향취를 간직한 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마 당시의 소떼는 그 등위에 평화와 통일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당시의 소떼가 짊어졌던 짐이 다시 우리의 어깨위에 놓여있지 않을까? 남북 모두 소떼만도 못하다는소리는 듣지 말아야겠다.

 


참고한 글

권영욱,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서울: 아라크네, 2013)

전도근, 신화를 만든 정주영 리더십(서울: 북오션, 2010)

아시아경제신문, 재계 100 - 미래경영 3.0 : 창업주 DNA서 찾는다(서울: FK미디어, 2010)

파이낸셜뉴스 산업부, 집념과 도전의 역사 100(서울: 아테네, 2004)

김인수, 시대정신과 대통령 리더십(서울: 신원문화사, 2003)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5.09 04:27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이산의 아픔, 분단의 비극


정영철


1983630일은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만한 날이었다. KBS 텔레비전에서 한국전쟁 33주년을 맞아 편성한 특별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전파를 타고 첫 방송된 날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자 전국의 생사를 모르던 이산가족들이 KBS로 몰려와 너도나도 가족을 찾기 위해 출연 신청을 하였다. 하여 원래 75분으로 기획되었던 프로그램은 그 해 1114일 새벽 4시에 10,189번째 상봉자가 만날 때까지 전체 기간 138일간의 역사적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여의도 만남의 광장에는 애끓는 사연을 담은 가로 60cm, 세로 40cm의 벽보가 41,636장이나 게시되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벽보를 하루 종일 지켜보면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지켰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인천, 광주, 대구, 전주, 대전, 청주, 춘천, 강릉 등 전국 곳곳과 멀리는 미국, 유럽, 일본, 호주, 뉴질랜드, 사할린에까지 이어진 이산가족 찾기의 외침은 분단과 전쟁이 남기고 간 이산의 고통이 얼마나 삶의 깊은 곳에까지 뻗쳐있는지를 보여준 산 교육장이었다. 더욱이 휴전선 이남에 생존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지만, 남북으로 갈라져 생사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의 또 다른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만을 던져주며 우리 모두의 상처를 맨살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사실,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이 이때에야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방송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기를 시작한 것은 19731027, KBS 1라디오 <오후의 교차로>에서였다. 이 당시에는 토요일 오후에만 주 1회씩 방송하였다. 하여 별다른 효과도 없었고, 실제로 이 방송을 통해 상봉을 한 가족도 없었다. 이후, 197414일 매일 방송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시작 22일째인 1974126일 첫 상봉자가 나타났다. 1960년대 정착된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부족하긴 했지만 집집마다 TV수상기가 보급되면서 방송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상황에서 방송을 통한 이산가족 찾기는 그 위력을 더할 수 있었다. 사회적 관심, 미디어 기술과 대중화 등이 어우러져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 KBS 본관 건물과 벽 등에 빼곡히 붙여져 있는 벽보 KBS 아카이브


남과 북의 분단이 가족을 갈라놓고, 인륜의 정을 끊어놓아 바로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거나 잠시 몇 분 동안만 서로 얼굴을 대면할 것을 허락받는 일도 있었다. 196410월은 동경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해로 기록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단과 전쟁 이후, 첫 이산가족 상봉을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바로 북한을 대표하는 육상선수 신금단 부녀의 상봉이었다. 1951년 잠깐 집을 나가 3일간만 숨어있다 오겠다고 한 아버지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12살이었던 딸은 세계 신기록을 세운 육상선수가 되어 올림픽에 참가하러 동경에 왔다. 동경에 있던 재일동포들의 후원과 지원 속에서 아버지와 딸은 잠깐 만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하여 109일 오후, 동경의 조선회관에서 아버지와 딸은 얼싸 안은 채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는 만남을 가졌다. 7분이었다. 그리고 떠나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아버지는 다시 달리고 달려 동경의 우에노역에서 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 3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들 부녀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 신문재씨는 1983년 이산가족의 아픔과 감동이 메아리쳤던 그 해에 사진 속의 딸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다.


남북 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이루어졌다. 1984년 망원동 수해에 대해 북한이 수해지원을 제안하자 이를 전두환 정권이 수락하면서 극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 남북관계는 1983버마 랑군 테러와 이어지는 부산 앞바다에서의 다대포 간첩선 사건 등이 터지면서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의 적십자사의 제안에 대해 예상을 벗어나서 우리 적십자사가 수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84년부터 19855월까지 남북 적십자간에 9차례의 본회담을 거치면서 <남북한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서울 평양 교환방문>이 합의되었고, 마침내 920-23일까지 역사적인 첫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이루어진 첫 이산가족 상봉은 총 65가족, 157명이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다.


서울과 평양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은 그야말로 눈물 바다였다.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에 담긴 상봉 장면은 아버지의 두 뺨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기자들도, 안내원도, 음식을 나르는 호텔 종업원들도 함께 울었다.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진기자들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 아니었겠는가? 이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이산가족이 눈물과 그리움으로 졸도하여 죽기까지 했는데, 현장의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


▲ 1985년 서울∙평양 교환방문과 이산가족 상봉을 전하는 경향신문 (1985년 9월 20일) 경향신문


그런데 딱 여기까지였다. 남북은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둘러싼 갈등과 대결만을 지속했다. 이산가족이 다시금 만나기까지는 이로부터 15년이란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바로 2000년 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매해 1-3차례씩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던 상봉이 2002년부터는 금강산에서 열리게 되었다. 2008년부터는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이르게 되자 드문드문 열리게 되었고, 2009, 2010, 2014, 그리고 2015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1985년의 교환방문을 합해 지금까지 총 21차례 23,676명이 상봉을 하였다.


이처럼 1년에 수차례씩 이산가족 상봉이 이어지자, 금강산에 이산가족 상봉 면회소를 건설하고 20099월부터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뿐인가? 직접 대면 상봉은 못하더라도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게끔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바로 화상상봉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서 원하는 가족의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였다. 화상상봉은 대면상봉이 여러 가지 절차와 한정된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2005년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화상을 통한 상봉이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총 7차례에 걸쳐 557가족, 3,748명이 화상으로나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리든 간에 국민들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게 된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연과 이 세상 모든 소설가들이 모여서 상상을 하더라도 지어낼 수 없는 기막힌 이야기들, 막상 만났을 때의 그 갖가지 모습은 아무도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짧다. 이산가족은 참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눈물을 흘린다.

그뿐인가? 이산가족 상봉을 경험한 사람들은 상봉 이후에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린다.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은 중국을 통해 몰래 만나거나 심지어는 아예 탈북을 시켜서 남으로 데려 오기도 한다. 또 이산가족 상봉은 서로의 체제 이질성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수령님과 최고지도자의 은덕으로 여기는 북의 가족들 태도에 실망하기도 하고, 경제적 여유와 미국 유학 등을 자랑으로 하는 남의 가족들 태도에 분노하기도 한다. 이산가족 상봉 순간은 체제(사상과 정치)의 문제가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장에서는 서로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기야 그동안 흘러온 가족들의 생사와 경험만을 말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현재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 남과 북이 교류와 협력을 지속하는 시기에는 이산가족 상봉은 하나의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남과 북이 다시금 대립체제를 지속하면서 이산가족에게는 아예 조그만 문 마저도 닫아버렸다. ‘인도주의 분단정치의 가장 큰 희생자들인 셈이다.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되어 있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20169) 130,080명이다. 그러나 이중 65,134명이 돌아가셨다. 남아있는 64,569명 중에서도 70대 이상의 고령층이 54,249명으로 전체 8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오늘 하루하루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왔던 것처럼 1년에 1-2차례 약 1,500명 남짓한 분들이 만난다면 36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이들 대다수는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남과 북이 인도주의 분단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방식에서 더 많이, 더 자주 만나는 방식, 아니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방식까지 고민해야 한다. 분단을 현실로 인정하더라도 이산가족의 교류만은 분단시키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과거 동·서독의 경험은 참고할만한 유용한 교훈을 주고 있다.


·서독은 일찍부터 동·서독 간 이동을 허용해왔다. 이산가족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 속에서도 소포, 송금 등을 허용했고, 동독은 54-57년까지 매년 250만 명의 연금수혜자들이 서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60년대에는 서독이 동독에 막대한 차관(장기융자)를 제공하면서, 이산가족 교류에 대한 동독의 호응을 유발시켰고 그 결과 114주간의 서독 방문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후 점차 방문대상자를 확대하였고, 1년에 60일로 체류기간 또한 연장하였다. 특히, 동독은 연금수령자들에게는 서독으로의 이주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이 결과 통일 전까지 약 60만 명의 동독 연금수령자들이 서독으로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독 정부는 이산가족 교류와 결합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체류비와 이주비, 혹은 동독 지역에 남아있는 어린이의 부양비까지 제공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서독은 유럽이라는 주변 환경의 영향, 그리고 역사와 문화의 차이, ·서독간의 전쟁이 부재했다는 우리와 엄연히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이산가족의 교류와 관련되어 서독 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는 등, ‘경제-인적교류 교환이라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동·서독은 인도주의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요구를 전면에 내걸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산가족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도적 교류를 중심으로 정부와 민간이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일찍부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상호간의 협의를 시작했고, 합의를 이루었다는 점은 분명 우리가 새겨보아야 할 지점이다.


실제 동·서독 경험도 그렇고, 우리의 역사도 그렇고 남북의 정치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이산가족 문제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해왔다. 결국 남북 정부가 만나고 어떻게 하든 인도주의를 의제로 올리고 정치적 방식으로 풀어감으로써 이산가족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로만 주장한 우리도, 이를 정치적 문제로 제기한 북도 결국은 인도주의 분단정치에 푹 절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오늘도 이산가족 한명 한명은 한 많은 가슴을 부여잡고 분단을 원망하며 세상을 떠나고 있다. 김귀옥이 적절히 표현했듯이, 이들은 빨갱이도 아니고, 반공전사도 아닌 단지 인간으로서 분단에 억눌린 가장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참고한 글

김귀옥,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서울: 역사비평사, 2004)

김귀옥, “이산가족의 범주화와 공동체 형성 방안,” 역사문제연구19(2008)

김병옥·김영희, “남북한과 통독 전 동서독의 이산가족교류 비교 연구,” 현대북한연구121(2009)

김연철, 냉전의 추억(서울: 후마니타스, 2009)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백서(서울: 대한적십자사, 2015)

신은미,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서울: 네잎클로바, 2015)

이수정, “인도주의 분단정치: 민주화 이전 한국사회 남북이산가족 문제,” 현대북한연구182(2015)

한국방송공사,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TV 특별생방송 138일간의 기록(서울: KBS, 1984)

KBS, 도록,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서울: KBS, 2015)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4.25 12:03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남과 북, 처음으로 마주하다 : 7.4 남북공동성명


정영철


197274일 오전 10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내외신 기자 107명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평양에 다녀왔습니다로 시작된 기자회견은 남북 분단의 70년사에 아로새겨질 거대한 전환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북한의 평양에서도 박성철 부수상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었으니, 남북한 모두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1950-60년대의 치열한 냉전이 점차 약화되더니,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열어젖힌 데탕트는 남북관계에도 심각한 변화를 강제하였다. 서로의 실체마저 부정하던 남북이 70년대 초, 이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배경과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당시 발표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은 어떻게 탄생되었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통일의 원칙으로 이야기되는 자주, 평화적 방법, 그리고 민족대단결에 의한 통일은 이미 40여 년 전에 남북이 합의한 것이었다. 비록 한반도에서의 짧은 해빙이 끝나고 긴 냉전의 터널이 다시금 시작되었지만, 이 당시의 순간만큼은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자 하는 남북의 의지가 충만했던 시기였다.


▲ 19727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7.4 남북공동성명의 탄생은 당시 국제적인 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열하면서 적대와 갈등을 지속하는 냉전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냉전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결과 전략핵무기 제한 회담의 시작으로 냉전 속의 평화를 모색하였고, 키신저의 비밀 중국 방문으로 시작된 미-중 화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서 미국이 발을 빼려하고 있었고, 미국의 달러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금 태환1971년 정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괌 독트린(일명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개입을 축소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들의 손으로 지켜가야 함을 표명하였다.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하던 주한미군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실제로 1971년 약 2만 여명의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국제정세의 변화는 미-중의 접근이었다. 1971년의 핑퐁외교로 상징되는 미-중간의 관계 개선은 그해 7월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의 비밀 중국 방문으로 급진전되었고, 이후 1972년 닉슨의 베이징 방문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중의 접근은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 그리고 역시나 소련과의 갈등과 충돌을 경험한 중국의 대소 견제가 접점을 형성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베트남 전쟁과 경제위기 등으로 균열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와 1964년 핵실험 성공 이후, 소련을 견제하면서 국제적인 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중국의 의도가 결합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중의 접근은 각기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직접대결하고 있던 남북 모두에게 심각한 압력이었고, 변화에 대한 적응의 도전을 안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더 큰 충격을 경험한 것은 남한이었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던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변화, 특히 주한미군의 철수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심각한 안보위기를 가져다주었다. 마침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김대중 후보에 고전한 박정희로서는 안정적인 권력의 지속 역시 고민거리였으며, 1960년대의 고도성장이 지체되고 있던 경제 상황도 유리하지 않았다. 1971년의 대선에서 가장 큰 쟁점의 하나는 다름 아닌 통일문제였으며,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박정희의 공화당을 압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의 접근과 한반도에서의 대화의 압력, 국제적인 데탕트의 분위기의 고조 등은 더 이상 과거처럼 북한 실체를 불인정하고, 대화를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탄생에는 이처럼 복잡한 대내외적 상황이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객관적인 배경만으로 사건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위기의 고조, 대화에의 압력 등은 박정희 정권으로 하여금 남북문제를 수단화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대표적으로 19708.15에 발표된 평화통일 구상 선언은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새로운 대북정책의 신호탄이었다. 비록 ‘8.15 선언이 분단 현상의 유지와 두 개 한국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어찌 보면 통일의 대의에서 한참 비켜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북한의 실체 부정을 부정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을 천명한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이 누려왔던 유엔 프리미엄을 스스로 벗어버리고 북한과의 공존과 대화없는 대결에서 대화있는 대결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이는 북한을 협상의 상대자로 인정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남북관계를 제도화하겠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때 제기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이후 남한 정부의 대북 접근의 기본적 원칙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라 할 것이다.


두 개의 한국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던 북한은 미-중 화해와 이어지는 데탕트, 주한미군 철수의 움직임에 따라 역시 변화된 대남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일련의 군사적 충돌은 최대한 억제되고, 남한을 향하여 평화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남북이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접근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었고, 때마침 미-중 접근의 과정에서 중국은 북한에, 그리고 미국은 남한에 상대방과의 대화를 종용하고 있었다. -중의 입장에서 미중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주변 여건, 특히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적 평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1971812일 남한의 적십자사 총재인 최두선은 북한의 적십자사 앞으로 적십자 회담을 공개 제안하였다. 그러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북한의 적십자사는 손성필 위원장 명의로 회담 제의를 수락하면서, 남한이 애초에 제안했던 10월 중 제네바에서의 예비회담이 아닌 9월 중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였다. 마침내 예비회담 개최를 위한 첫 파견원 접촉이 820일 정오에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남북의 분단과 전쟁 이래 최초로 남북이 서로 제의한 회담을 위한 첫 접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년 가까이 예비회담이 진행된 후인, 19726월에서야 비로소 본회담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남북의 입장차가 해소된 결과가 아리나 남북이 내부적으로 ‘7.4 남북공성명을 앞두고 본회담에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인도적 회담이었던 적십자 회담도 현실정치와 관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십자 본회담은 19728월 평양에서 제1차 회담이 열린 후, 19737월 평양에서의 제7차 회담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해빙의 분위기에서 지속되었던 적십자 회담은 73년 남북이 다시금 냉전의 대결상태로 회귀하자, 그 운명을 다했던 것이다. 이산가족의 염원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추석 성묘사업 등 수 많은 상호간의 제안만이 오고 갔을 뿐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 못한 채 적십자 회담은 종결되었다. 어쩌면 이 시기 남북은 인도주의마저도 오히려 정치적인 사고로 일관했던 것에서는 공통적이었고, 명분의 우위를 추구하기 위한 또 다른 체제 경쟁의 하나로 사고했다고 볼 수 있다.


▲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972년 8월 29일, 평양 문수리 국제회의장)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백서 『이산가족 70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십자 회담은 남북 최초의 회담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를 계기로 남북의 정치회담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의 그 이면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의 첫 출발이 되었다. 적십자 예비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에 남북은 비공개 정치접촉을 시작하였다정홍진-김덕현 비밀접촉은 197111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침내 52일 이후락 정보부장의 방북이 성사되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미국 정부 및 CIA에 통보되었다. 또한, 이후락의 비밀방북에는 소위 특수지역출장인허원을 제출하고, 대통령이 이를 승인하는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이후락은 방북을 하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윗저고리 주머니에 청산가리를 숨겨가는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청산가리에 얽힌 일화 중 김일성 당시 수상을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악수를 청하자 이후락은 바로 악수를 하지 못했다. 이유는 청산가리가 손바닥에 달라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떼어낸 후에야 이후락은 김일성과 악수를 할 수 있었다. 남북의 대결이 만들어 놓은 웃지 못 할 한 장면이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평양에서 자신의 상대역인 김영주, 그리고 박성철을 비롯한 북한의 고위간부는 물론 김일성과 두 차례에 걸쳐 만남을 가졌다. 이 김일성과의 만남에서 훗날 ‘7.4 남북공동성명의 모태가 되는 자주, 평화, 그리고 민족대단결의 기본원칙에 대해 합의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후락의 방북 당시, 김영주는 지속적으로 박정희-김일성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후락은 원칙적인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시기상조를 들어 이를 계속 회피하였다.


이후락의 방북을 계기로 그의 상대역인 김영주의 비밀 방남도 계획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영주는 식물신경불화증이란 휘귀병을 알고 있는 관계로 그를 대신하여 박성철 부수상이 비밀방남을 하게 되었다. 박성철의 방남은 그해 529일부터 61일에 이루어졌다. 박성철의 방남 기간 중 이후락과의 두 차례 회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한 차례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통일의 3대원칙, 조절위원회 설치에 대하여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서는 여건의 미성숙을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이 거부하였다. 왜 박정희는 정상회담을 거부하였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당시 북한과의 경쟁에서 아직은 압도하지 못하고 있던 현실, 그리고 남북대화를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고하였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상호간 비밀방문을 통해 남북공동성명은 원칙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문안조정 과정과 접촉을 통해 마침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로 합의하였고, 그날이 되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의 분단 이후, 최초의 합의였고 통일의 대원칙이 공개적으로 천명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공동성명의 공개적인 발표에 대해 박정희는 애초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공개에 대한 찬성, 북한의 공개 요구 등에 밀려 결국에는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이름의 합의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남한 사회는 통일에 대한 열의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북한의 선전에 놀아난 것이라는 의구심, 그리고 공동성명을 깍아내리는 발언이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여론은 통일의 기운으로 끓어올랐고, 이제 곧 통일 될 듯 한 착각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 만큼 억눌려왔던 통일의 열기와 분단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의 고통이 컸던 것이다. 지금과 달리 분단과 통일을 하나의 일상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리고 단 한 번도 만남과 접촉이 없었던 남과 북이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니, 그 내막은 알 수가 없었어도 북받치는 감정만은 대단했던 것이다.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공동성명에 찬성과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공동성명의 발표 이후, 박정희는 국민은 지나친 낙관과 속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야한다고 하며, “모든 면에서 내부체제를 더욱 굳게 다져 이제 막 시작된 남북 간의 대화를 굳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일 유신체제를 선포하던 때의 논리가 이미 등장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더욱이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음에도 그 동안 사형이 연기되었던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의 김규남 전 국회의원이 713일에, 그 이틀 뒤에는 통혁당의 김질락, 그리고 28일에는 통혁당의 정태묵, 캠브리지대 유학생 박노수 등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이제 막 출범하는 시기에 반공의 광풍을 재현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에게 공동성명은 공동성명일 뿐, 단지 그 동안의 대화없는 대결대화있는 대결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신체제등장의 비밀 하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서명 주체의 문제이다. 공동성명의 서명은 서로의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로 되어있다. 이후락과 김영주의 소속과 직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직까지 서로의 실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의 반영이자, 정식 국호를 사용할 경우 두 개의 국가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와 김일성 모두 자신의 정통성과 상대방에 대한 괴뢰 정부적 사고를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이 이유일 것이다. 남북의 합의서에 상대방의 국호와 직위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에 와서야 가능했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은 이후락과 김영주를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 조절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에 걸쳐 진행된 조절위원회는 19738월에 북한의 중단 성명 발표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지만, 실제의 이유는 1973년 박정희의 ‘6.23 선언때문이었다. 두 개의 한국을 공식화하고, 유엔에의 동시 가입을 주장한 ‘6.23 선언은 북한의 하나의 유엔 가입과 분단 고착화 반대의 입장과 충돌하면서 공동성명의 정신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으로 비판되었다. 이렇게 하여 온 내외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던 공동성명과 그의 이행을 위한 조절위원회는 파탄이 나고 한반도는 다시금 대화없는 대결의 냉전으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남북한 최초의 합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합의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그 큰 울림을 내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공동성명의 정신, 통일의 3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북이 비록 자주에 대한 엇갈린 해석을 내리고 있지만,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서, 전 민족이 대단결하는 통일을 이루자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합의를 이뤄놓고도 남북대화가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정치적으로는 유신을 통해 권력의 영구화를 노렸던 박정희의 속셈, 대외적인 안보 위기에 대한 남북대화의 정략적 수단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남북관계에서의 민의 배제와 소수에 의한 정보의 독점과 국내 정치적 활용을 들 수 있다. , 공동성명의 탄생과 그 전후의 과정은 철저히 비밀과 소수에 의한 합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토론과 합의 등은 생략되었다. 물론, 공동성명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비밀과 비공개 등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성명이 공개되고, 대중들의 통일의 열기가 단지 열기만으로 끝났던 것은 이 논의의 장에 참여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은 전 민족적인 과제이며 따라서 전 민족의 의사와 참여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문제이다. 과거 동-서독의 통일 과정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가 봉쇄되었고, 결국 일방적 통일-통합의 과정으로 귀착된 경험도 역시 유사하다 할 것이다.


오늘날 공동성명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통일은 결코 소수의 정치가들에 의해 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소수에 의한, 소수의 독점과 정책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는 명확하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비이성적인 대북정책의 이면에는 결국 정보의 독점, 민이 배제된 배타적 정책 결정 등의 민주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격언이 다시 한 번 증명되고 있다. 또 다시 강조하는 바는 통일은 결코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지도 않지만,’ ‘소수의 결탁으로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공동성명은 박정희에 의해 통일은 가고, 유신만 남은통한의 역사로 남지 않았는가.

 


참고한 글

김연철, ‘7·4 남북공동성명의 재해석,’ 역사비평20125.

김지형, 데탕트와 남북관계(서울: 선인, 2008).

김형기, 남북관계 변천사(서울: 연세대출판부, 2010).

남광규, ‘남북대화의 국내적 활용과 ‘7·4남북공동성명도출,’ 평화학연구173(2016).

노중선, 남북대화 백서(서울: 한울, 2000).

마상윤, ‘안보와 민주주의, 그리고 박정희의 길,’ 국제정치논총434(2003).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파주: 창비, 2012).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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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7.04.24 17:21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를 넘어 통일로


정영철


1960년의 4월은 핏빛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젊은 학생들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부정의한 정권에 맞섰고, 이승만 정부는 이를 총칼로 틀어막고자 했다.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 그리고 대학의 교수들까지 집단적인 항거에 나선 4.19 혁명은 결국 이승만 정권의 하야로 끝을 맺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최초의 역사적 장면이었다.


4.19의 열린공간은 남북의 분단 이후, 우리 역사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백가쟁명식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으로 제기되었던 통일논의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폐기되었지만, 유엔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대한민국 헌법에 따른 북한만의 총선거)의 정부 안, 둘째, 이 시기 가장 광범위한 대중들의 호응과 관심을 촉발시킨 혁신계 중심의 중립화 통일 방안(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마지막으로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이 제기한 남북협상론 등이다. 이 중 정부안을 제외하고는 중립화통일론이나 남북협상론은 모두 혁신계에 의해 제기되고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혁신계가 이 당시의 통일논의의 의제를 선점하고, 논의를 이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혁신계의 통일논의가 정국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고, 남북의 이질성이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만큼, 당시의 경제적 피폐와 고통이 분단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50년대 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들의 소원은 크게 3가지였다. 가난한 농민이 잘 사는 것, 자식이 잘 사는 것 그리고 통일이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통일은 실제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생활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학생들이 통일의 주역으로 나설 시기가 되었다.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그간의 학원민주화와 계몽운동 등의 틀에서 벗어나 통일논의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학생들 역시 일찍이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기 시작하였다. 1960924~25일에 고려대 정경대학생위원회 주최의 <민족통일에 관한 제 문제>를 주제로 한 전국대학생시국토론대회가 열려, 통일론에 대한 환기를 불러 일으켰고, 서울대에서는 11민족통일연맹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학생들의 통일논의가 혁신계와 달랐던 점은 혁신계가 주로 통일론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을 중심으로 했다면, 학생들은 논쟁에 앞서 실천의 문제로 통일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학생들은 통일에 대한 다양한 논의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통일의 주역으로 나서고자 했다.


▲ "민족자주통일"을 내세운 서울대생들의 4.19 1주년 시위. 쿠데타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침묵시위로 진행했다 

Ⓒ 4월 혁명회


▲ 1961년 5월 31일 열린 '남북학생회담' 지지 집회 Ⓒ 4월 혁명회


드디어 학생들의 통일에 대한 직접 행동이 개시되기 시작했다. 196153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은 남북학생회담결의문을 채택하고, 55일에는 전국 각 대학의 연맹체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결성준비대회를 갖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계기로 513일에 이에 대한 보다 구체화된 내용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남북학생 친선사절단, 기자, 체육단, 예술단 교환, 통일축제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안은 곧바로 정치권의 반응을 가져왔다. 장면 정부는 학생들의 제안을 분명하고도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저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혁신계는 남북학생회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이에 대한 집회를 조직하여 측면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혁신계를 중심으로 했던 통일론과 학생들의 실천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학생회담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혁명공약 제1(1)로 반공을 내건 박정희 정권은 반공다운 반공을 내세워, 혁신계와 학생들의 통일논의를 완전히 짓밟았다. 이로써 짧은 기간 만개했던 통일론과 실천운동은 긴 침묵의 터널을 맞이해야 했다.


우리 역사에서 4.19 시기는 분수령이었다. 아직 이렇다 할 공업화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남한이 이제 곧 공업화의 세례(?)를 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남북한의 이질성이 점차 간극을 넓혀가는 시점으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와 같이 60~70년대를 거치면서 남북의 이질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따라서 어느 한 체제로의 일방적인 통일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4.19 시기의 통일논의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분수령에서 통일을 통해 남북 분단의 굴곡을 뛰어넘고자 한 시도였고, 열망이었다. 또한, 당시의 모든 악의 밑바탕에 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생활의 문제로 자각하고 있을 때였다.


긴 역사적 흐름에서 4.19 이후의 통일논의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반공이데올로기의 강고한 장벽, 학생회담 제안 중에 김일성 정권 타도를 외치고 남북 학생들이 새 사회를 이끌어가자는 지난친 감성적 호소, 미국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채 성숙되지 못했던 조건 등으로 결국 미완의 혁명미완의 통일로 남고 말았다. 또한, 당시 학생들에게 남아있던 특권의식(엘리트주의 등) 과 아직 성장하지 못했던 노동자, 농민 세력과 시민사회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이들을 봉사의 대상으로 여겼던 사상의 한계를 드러냈다그럼에도 4.19 이후의 통일논의의 전개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비록 60년대와 70년대 유신의 긴 터널을 거치긴 했지만, 80년대 민주화 이후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터져 나올 수 있었던 역사적 유산을 남겼고, 민족자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전환과 대중과의 밀착과 이들의 조직화가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4.19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열린 공간은 필연적이라 할 만큼 통일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19 이후의 통일논의가 그러했다면, 87년 민주화 이후의 88년 대중적 통일운동의 태동이 그러했다. 1993년의 문민정부의 등장과 북한에 대한 동포적 인도주의 지원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도 그러하고, 1998년의 민주적 정권교체 이후 남북 정상회담 등을 통한 남북관계의 진전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곧 민주화의 성숙과 열린 공간의 창출이 분단에 따른 적대적 대립과 갈등보다는 통일과 평화를 지향함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민주와 통일 그리고 평화는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4.19를 넘어 통일로!1988년 이후,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전개되면서 터져나온 구호였다. 민주의 쟁취와 통일이 결코 둘로 나뉘어있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도 민주화와 통일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있다. 걸핏하면 터져나오는 반북종북이라는 이름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가장 좋은 소재로서 분단이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는 분열과 적대와 갈등을 뒤로하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진척시키는 가장 대중적 동력이 되고 있다. ‘4.19’의 유산은 결코 민주화에만 있지 않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4.19를 넘어 통일로는 분단의 질곡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민주화 역시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자, 지금 우리에게도 던져주는 심각한 역사의 과제라 할 것이다.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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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7.04.24 16:05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전쟁 후 첫 만남


정영철


중공군 포함 약 6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한국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불안한 정전상태이지만 전투행위는 중단되었고, 새로운 분단선인 휴전선이 그어졌다. 물론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공산군과 유엔군은 포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고, 나아가 정전협정에서 합의한 정치회담을 열기 위한 접촉을 시도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정전협정 460항에는 한국전쟁 이후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공산군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그리고 남한)은 정치회담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연스레 정치회담 개최에 대한 아무런 기약도 없었다.

1954년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가능했던 이유는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강대국의 관심은 이미 전쟁이 끝난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 전쟁이 진행 중인 인도차이나-베트남이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 등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네바 정치회담은 1954426일 시작되었고, 50여 일간의 지속되어 615일 막을 내렸다. 50일간의 회담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대표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곳이라는 정도뿐이다.


▲ 남북한은 제네바 회담의 최대의 희생자였다. 분단의 질서를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서로의 적대감만을 부추겼으며, 국제사회에서 힘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제네바 회담의 주된 의제는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의 문제였다. 이 두 문제에서 남북의 입장은 확연히 달랐다. 서로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남한은 초기 북한지역 만의 총선거를 주장했고,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장은 같은 유엔군 측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유엔군 측의 분열을 가져왔다. 유엔군 측 일원이었던 호주, 뉴질랜드, 태국 등은 남한의 통일방안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남북한의 총선거 안에 더 큰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유엔군 측의 분열에 직면하여 남한은 미국과의 상의 끝에 14개 항의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핵심은 중공군이 선거 이전에 철수해야 한다는 것과 남한의 헌법에 따라 인구비례 원칙에 근거하여,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4개 조항은 비록 초기의 북한 지역만의 선거에서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공산군 측은 물론 유엔군 측으로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14개 조항을 제시한 후에도 5452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되면서 스스로의 협상 가능성을 봉쇄해버렸다.


이에 반해 북한은 초기부터 모든 외국군의 철수, 남북의 대표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전조선위원회의 구성과 선거법 마련, 중립국감시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치르자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주장은 상대적으로 공산군 측의 일치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회담에 참여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남한은 물론 미국도 그리고 회담에 참여한 다른 국가들도 북한의 주장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결국 양측의 주장은 모두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로의 주장은 38선 만큼이나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양측 모두는 회담의 성과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 선전의 장이었던 것이다. 회담은 615일 막을 내렸다. 회담에 대한 아무런 합의문도 없었고, 앞으로 다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다. 결국 한반도의 분단은 서로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현상유지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로써 한국문제를 논의했던 마지막 국제회담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것으로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국제적인 회담의 의제로 부각되지 못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후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 국제회담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 끝은 분단체제의 지속이었다.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소련의 몰로토프(Molotov, Vyacheslav Mihaylovich) 외상은 남북한이 함께 사는 것을 터득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발언까지 하였고, 미국 역시 회담에서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한반도의 분단을 통해 중국과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한반도는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제네바 회담은 이러한 냉혹한 국제질서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분단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그런 것이었다.


남북한은 제네바 회담의 최대의 희생자였다. 분단의 질서를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서로의 적대감만을 부추겼으며, 국제 사회에서 힘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회담의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한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그 주인공은 미국, 소련, 특히 중국이었고 남북한은 단지 조연으로 출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한반도의 분단은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고, 분단체제는 당연한 국제질서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또 하나 제네바 회담의 주된 관심은 인도차이나였다. 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하면서 사실상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 회담을 통해 명예로운 철수를 고민하였고, 중국과의 협의를 통해 결국 17도선으로의 베트남 분단을 결정하였다. 이 역시 강대국 정치의 전횡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힘으로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패퇴시켰지만, 국제사회는 베트남의 분단을 결정한 것이다. 소련과 중국의 압력에 의해 17도선으로의 분단을 받아들인 북베트남은 훗날 치열한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었지만, 그 고통에 대한 대가는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했다.


제네바 회담은 두 개의 분단을 공식화한 국제회담이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존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했고, 베트남에서는 새로운 분단을 만들어내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현지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선이 그어지고, 그 선 안에서의 삶이 강요된 것이다. 이후, 베트남은 그들의 숙원대로 통일을 이루었지만, 한반도는 지금까지도 분단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제네바 회담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교훈은 국제사회의 선의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주민들이 힘을 합치지 않는 한 분단의 극복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분단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지속이 결정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미국과 중국 등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결국 남북한의 분단 극복의 의지와 단합된 힘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인 셈이다. 또 그럴 때만이 국제사회의 도움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참고한 글

김연철, “1954년 제네바 회담과 동북아 냉전질서,” 아세아연구541(2011).

최운상,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의의 국제법적 의의, 통일연구원 학술회의 총서, 2004.

김보영,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과 외국군 철수 의제,” 군사95(2015).

홍용표, “1954년 제네바 회의와 한국전쟁의 정치적 종결 모색,” 한국정치외교사학회281(2006).

권오중,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의 진행, 결과 그리고 의미: 한반도 6자회담의 원형,” 통일정책연구142(2005).

라종일, “제네바 정치회담: 회담의 정치,” 시민정치학회보, 1(1997).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4.24 11:03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 판문점


정영철


판문점, 어느 이름 없는 조그만 주막이 있던 마을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한 한국전쟁은 어느 누구도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였고, 더 이상의 손실을 원치 않던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서 휴전을 모색하였다. 2년여의 지리한 협상 끝에 타결된 정전협정은 단지 ‘당면의 전투-군사적 적대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전투는 중단되었지만, 전쟁은 중단되지 못한 기이한 형태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전투 중지에 서로 합의하고 서명했던 곳이 바로 판문점이다. 


판문점이 지금처럼 군사분계선으로 구분되어 공동경비구역이 아닌 ‘분할’경비구역으로 변한 것은 1976년 8월 18일의 일명 ‘도끼만행사건’(나무자르기 사건, tree cutting incident)부터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폴번안 작전 (Operation Paul Bunyan)을 벌여 문제가 되었던 미루나무를 잘라버리고, 판문점 역시 분할 경비구역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 녹색 테두리가 공동경비구역이고, 검정색이 군사분계선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이 설치되어있다. 총 7채의 건물 중 검정색은 유엔군 측이, 짙은 녹색은 북한 측이 관리한다. 


판문점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지리한 협상 장소였다. 정전협정에 의하면 양측은 정전협정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고, 휴전 직후부터 1991년 3월까지 총 159회의 정전위원회를 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1991년 3월 한국군의 황원탁 소장이 수석대표로 임명되자, 북한은 군사정전위를 거부하고 92년에는 아예 군사정전위 대표를 철수했다. 대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정전협정 상의 판문점 공동 회의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냉전이 도래한 후 첫 전쟁으로서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전쟁이자 동시에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처음으로 맞부딪힌 전쟁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가 참여한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그만큼 한국전쟁은 복합적이었고, 또 그만큼 서로가 승리는 하지 못해도 지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전쟁이었고, 그 만큼의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3년 1개월을 끝으로 판문점에서 멈추게 되었다. 


판문점에서 중지된 전쟁은 그러나 이후로도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몸살을 앓았다. 큰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판문점에서의 ‘작은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의 북한 특수부대가 통과한 지점도 판문점 근처 군사분계선이었고, 미루나무 사건은 아예 판문점 한복판에서 일어난 전쟁 일보 직전의 사건이었다. 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측 책임자였던 핸더슨 소령의 집단구타 사건과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JSA’의 배경이 되었던 김훈 중위의 의문의 죽음이 일어나기도 한 곳이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남북간의 충돌은 판문점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판문점은 남북을 연결하는 한 점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전후하여 남북의 밀사들이 오고가는 통로였고, 비록 불법적인 월경이었지만, 1989년 임수경-문규현의 판문점 통과가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크고 작은 판문점 통과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1998년 故 정주영 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역사적인 남북화해와 교류의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에는 제2차 정상회담을 위해 故 노무현 대통령이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밟고 북녘 땅을 밟았다. 이로써 판문점은 서로를 막아 나선 곳이 아니라 서로에게 문을 열고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는 통로가 된 것이다. 더욱이 판문점을 지척에 두고 매일같이 수백 명의 사람과 수백 대의 차량이 개성공단을 오고가기도 하였다. 원래 판문점이 길 가던 나그네에게 휴식을 제공하던 주막이 있던 휴식터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곳을 통해 남북이 오고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남북 교류가 중단되었던 2015년에도 세계 유명 여성 리더들이 판문점을 통해 남북을 오고가기도 했다. 이제 판문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조금 더 불편해졌을 뿐인 것이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판문점은 한국전쟁의 모든 역사를 말없이 간직하고 있다. 이제 이곳에서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평화를 기원해야 한다. 아니 이미 조금씩 열어젖힌 평화를 더 ‘큰 평화’로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전 세계인이 전쟁 때문에 판문점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한반도 평화의 상징으로 ‘판문점’을 바라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멈추고, 평화를 키워가는 곳으로 판문점이 ‘21세기 판문점’의 진짜 얼굴이어야 할 것이다.


판문점에 대해 읽어볼 책

JSA-판문점 이문항 | 소화 | 2001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이태호 | 눈빛 | 2013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