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10.18 21:22

[시선 | 평화의 마중물]


그란샤크 학교 이야기

 

송강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북쪽 약 40킬로 지점에 그란샤크라는 척박한 지역이 있다. 이곳은 카불 강 건너편 수키 지역과 나뉘어져 있고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곤 해서 그에 따른 지역 주민들의 희생과 피해가 막심했다. 러시아의 침공 때도 그랬고, 탈레반과 북부 동맹군과의 내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마을을 방문했던 2002년 이른 봄, 폐허가 된 가옥들과 버려진 불발탄들, 흙무더기에서 쉽게 눈에 띄는 해골과 인간의 뼈들이 거듭된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이 곳 흙먼지의 뜨거운 열풍이 들이치는 광야 한 복판에 슬픈 운명의 학교가 다 허물어진 채 놓여있었다.

 

비운의 학교

 

이 그란샤크 학교는 이미 40년 전 러시아가 아프간을 침공하기 이전에 지어졌다. 건물의 모든 벽은 아프간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육중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그 두께가 50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튼튼하고 강한 건축물이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둑에 위치해 있어서 강변의 푸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건너편 수키 지역에는 비록 나무는 한 그루 없지만 우람한 바위산들이 늘어서 있어 그 위용에 압도당할 것 만 같다. 바로 그 산자락 한 언덕 위에는 아프간 내전 때 탈레반 전사들이 이 마을을 포격 했던 녹슨 탱크가 그 포신을 그란샤크 마을 방향으로 겨눈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이 마을을 처음 방문했었던 2003년 봄, 이 학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 만치 파괴되어 있었고 학교 운동장과 주변들이 지뢰밭이 되어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나 빈집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거나 나무 밑 그늘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고 강한 모래 바람이 불면 높은 담벼락 밑에서 바람을 피해가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할 학교 운동장에서 지뢰를 밟아 자기의 다리들을 잃어버렸다. 나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이런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반드시 지뢰를 제거하고 이 학교를 재건하여 학생들을 다시금 자신들의 배움터로 돌려보내리라고 결심했다. 용기는 때로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현실의 강요일 수도 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교 운동장의 지뢰를 제거하고 무너진 학교를 다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을 주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튼 마을의 중요한 숙원 하나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에 몹시 반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가진 돈이 하나도 없는데 이런 당돌한 약속을 하다니 내가 이 낯선 모슬렘 국가에 와서 국제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당장 그 자리에서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수년 내에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지뢰밭 안에 놓인 학교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와 동정을 자아냈고 각처에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개척자들1)은 학교 지뢰제거와 재건을 위한 모금뿐 아니라 학교를 짓는 일에도 직접 참여했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어린 시절 지뢰밭이 된 학교 운동장에서 다리를 잃은 청년

 

전쟁의 결과는 건물의 파괴뿐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결과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심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단된 손이나 발이 다시 회복되지 않듯이 다시 치유되거나 재생될 수 없는 상처인 경우도 있다. 전쟁을 한 번 겪은 사람들은 그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다시는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 중에서 태어나서 전쟁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인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전쟁은 일상이 되고 폭력과 살상에 놀라거나 경계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변덕스러워 지고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이들에게 교육은 무의미하고도 불확실한 투자처럼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마을 어른들이 학교 건축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해서 기뻐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들이 학교 건축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다음세대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과 투자 때문이 아니라 그 건축 과정에서 혹 자신들에게 돌아갈 지도 모를 금전 몇 푼의 이익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마음이 씁쓸해 지곤 했다. 우리 개척자들은 자기 자녀들의 교육에 희망과 기대를 저버린 사람들과 더불어 학교를 재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경험했다. 일꾼들에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면 집에서 총을 들고 와 총질을 해대기도 했다.

 

내가 아프간에서 실감한 것은 분쟁은 어린 아이들이나 여인들도 사납고 거칠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쉽게 때리고 어린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힘으로 맞서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런 폭력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에게 총은 위대한 우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총구에서 모든 권위와 질서가 나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는 이 그란샤크의 이런 거친 어린이들이 훗날 평화를 위한 불굴의 사도들이 될 날을 꿈꾸며 학교를 재건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전에는 우리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던 주민들이 친구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전에는 만나기만 하면 바체시, 바체시하며 무언가를 달라고 조르던 사내아이들이 자기 호주머니에 토마토 등을 가져와 부끄러운 듯이 살짝 보여줄 때 우리가 거꾸로 바체시라고 하면 즐거운 표정으로 깔깔 웃으며 나눠 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

 

처음에는 지뢰 때문에 이 학교를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지뢰가 다 제거되자 그 학교 안에 들어가 그 내부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귀퉁이들이 무너져 검은 칠판들에 그려진 학생들의 좌절과 희망이 담긴 낙서들을 볼 수 있었다. 또 그 심한 포격에도 아직 무너져 내리지 않은 돌 벽을 쓰다듬으면서 인간에게 슬픈 운명이 닥치듯 이 아름다운 작은 학교가 겪은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 근처의 모든 집들은 진흙집들인데 비해 이 학교는 카불 강변 전망 좋은 위치에 돌로 튼튼하게 지어져서 전쟁이 나기만 하면 언제나 군인들의 요새가 되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기듯이 이 학교는 전쟁이 일어 날 때마다 자신이 품어야 할 어린 학생들을 잃어버리고 사납고 무례한 군인들의 총포에 짓밟혀야만 했다.

 

아프간 평화캠프


개척자들의 아프간 캠프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물을 길어오고 새벽 묵상을 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는 여러 마을에서 평화학교를 열었다. 오후에는 뜨거운 햇볕아래서 무너진 그란샤크 학교를 재건하기 위한 노동을 했다. 학교 안팎에 가득 쌓인 진흙과 무너진 돌무더기를 치워야 했고 수년 묵은 건조한 똥들이 진흙과 뒤 섞여 미세한 먼지가 되어 폐부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이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화장실도 고쳤다. 이 화석처럼 딱딱한 똥들을 직접 손으로 집어 함께 모아 처리하는 여자 청년들의 모습을 마을 젊은이들은 무너진 벽에 걸터앉아 묵묵히 쳐다 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문화도, 종교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이 나라에 들어와 그들 중의 하나처럼 몸 부쳐지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을 가르치고 무너진 학교를 재건하는 모습을 그들의 눈동자에 분명하게 그려준 것만은 사실이다.



학교를 다시 재건하기 위한 노동

 


평화캠프 참가자들이 학교 재건을 위해 노동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프간 청년들

 

우리는 새롭게 지어진 학교를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여학생들에게 헌정했다. 학교가 새로이 개교하는 날 어린 여학생들이 당당히 행진하여 남학생들 앞자리에 앉았다. 머리에 스카프를 한 어린 여학생들이 난생 처음 학교라는 곳을 들어와 어리둥절하면서도 희열에 차있던 모습이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날, 서러웠던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그란샤크 마을에 평화의 새 봄이 오는 것 같았다.



평화 캠프에 참가한 어린 학생들

 

천 년의 원한


20077월 분당샘물교회의 청년 23명이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라는 마을에서 피랍되고 배형규, 심성민 두 청년들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먼 나라의 전쟁이 어느새 우리나라의 일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개척자들의 아프가니스탄 평화학교도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중단되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모슬렘은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이슬람포비아(이슬람에 대한 두려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도 오래다. 그러나 정작 아프가니스탄에서 내가 만난 어린 아이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모슬렘들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모슬렘들을 처참하게 학살한 십자군전쟁의 쓰디쓴 기억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고 있다. 어쩌면 그 종교 전쟁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천 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모슬렘들의 마음속에 악마처럼 그려진 그리스도인 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몹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그리스도인이에요?” 처음에는 왜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는지 어리둥절했었다. 그란샤크 마을의 아이들에게는 낯선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자신들을 위해 지뢰를 제거하고 그 위에 무너진 학교를 다시 지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게다. 어느 날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땀과 흙먼지로 뒤덥힌 옷을 입은 채 차가운 카불 강물에 뛰어들어 목욕을 한 후 아직도 흰 눈이 쌓인 흰두쿠시의 영봉들이 붉은 노을로 빨갛게 물 드는 장관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저 만치서 어떤 소녀가 화급히 달려와 앞치마 자락 안에 숨겨온 작은 수박덩어리를 손에 쥐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버렸다.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당혹스런 일이 었다. 나는 이 소녀의 지극히 어린 아이다운 감사의 표현을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사이에는 천 년의 원한이 장벽처럼 막혀있지만 이 아프간 소녀의 용감한 행동은 우리에게 어느 날엔가는 이 장벽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예표가 아닐까?

 


다시 재건된 학교의 석벽에 새겨진 헌정사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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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평화의 마중물]


검은 바다


송강호


20041226일 아침 8시 수마트라섬 서쪽 바다 해저에서 리히터 지진 9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였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825분경 높이 10미터 이상의 높은 해일이 아체 지역에 밀려왔다. 5분 사이에 20만 명의 아체 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사상초유의 대재난이 닥친 것이다. 개척자들1)은 즉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활동가들을 재난 지역에 파견하였다. 내가 아체를 찾아간 것은 20053월이었다. 쓰나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이미 파견된 우리 동료들의 활동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아체 주민들로부터 검은 바다가 밀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쓰나미가 들이닥쳤을 때 거대한 검은 파도가 세 차례 산처럼 밀려왔는데 심해의 검은색의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가족들의 눈앞에서 서서히 죽어갔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검은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난민들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서 아체의 한 섬에서 지냈었는데 가끔은 바닷가에 나와 해변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들을 바라보면서 그 날 밀려왔다던 그 검은 바다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주석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전쟁재난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개척자들이 아체에 가려고 했었던 원래 이유는 쓰나미 때문이 아니었다. 아체는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예전처럼 독립된 이슬람 국가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수카르노와 자바 중심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 당하였다. 그 후 강고한 아체인들은 오랜 세월 독립투쟁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의 반정부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고 이 끔찍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아체 국경을 통제했다. 외국인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후미진 곳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들이 아체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물건을 빼앗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아체 사방에는 인도네시아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자랑스런 국기가 아니라 처량하고 슬픈 것이었다. 아마도 4.3 때 제주도민들이 우리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과 탄압을 겪고 오히려 너도 나도 해병대에 자원했던 것과도 같은 심리일 것이다.


아체에 온 이래로 난 쓰나미 피해자들과 함께 난민촌에서 살았다. 때로는 뿡에(Punge)라는 마을의 난민 천막에서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슬림멈(Seulimeum)이라는 난민촌에서 지내기도 했다. 뿡에는 반다 아체의 바닷가에서 가까운 마을이라서 쓰나미가 왔을 때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었다. 어렵사리 파도에 떠밀리던 중 나무 위에 올라갔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간혹 살아남아서 부모가 없는 옛 집터에 천막들을 쳐 놓고 살아가고 있었다. 고아가 된 청소년들이 역시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자신들의 천막 안에 들여 재우고 같이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함께 먹기도 했다. 공고를 다녔었던 한 젊은이가 실력 발휘를 해서 높은 전신주에 올라가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 천막들에 전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이들은 이렇게 부모들과 친구들을 잃은 자기 마을에 다시 돌아와 폐허 위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천막들 사이에는 쓰나미 때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공동묘지(Guburan)가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우물을 길어 먹고 목욕도 했다. 밤에는 기분이 나빠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우물을 공포영화의 제목을 따와서 “링(ring)”이라고 불렀다. 대소변은 좀 떨어져있는 이슬람 사원 부속 화장실을 사용한다. 이곳 사원의 이슬람 사제(이맘)도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사진으로 볼 때 폐허뿐인 이 천막촌에서도 비록 불편은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쓰나미로 폐허가 된 반다 아체 [사진제공:USAID]


아체 섬의 주민들이 피난해 있었던 슬림멈 난민촌의 상황도 비슷했다. 내가 지냈던 24인용 군용 천막은 네 가족이 함께 귀퉁이를 나뉘어 사용할 만큼 널찍했다. 천막 안에서 사생활은 없었다. 낮에는 찌는 듯이 더워서 남자들은 밖에 있는 그늘에 함께 모여 소일을 했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외출을 삼가는 이슬람의 관습 때문에 무덥고 어두운 천막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밤에는 쥐들이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들조차 없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배급 받는 쌀도 있고 또 어부들인 고로 고기도 잡아와서 사는 이들 속에 나는 얹혀 살았다. 주중에는 이 난민들과 같이 그들의 섬에 들어가 그들의 집을 함께 지었다. 높은 해일이 들이 닥친 이곳 마을들 중에는 주민들의 반 이상이 몇 분 사이에 목숨을 잃은 곳도 여럿이다. 파도에 밀려온 양철 지붕으로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는 목이 잘린 사람들도 있었다. 우기에는 차가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무들을 줄에 묶은 후 바닷물 위에 띄워서 해변을 따라 끌고 와서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바닷속은 날카로운 산호들과 바위들이 많은데다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발에 상처가 생기곤 했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으로 지어놓은 집이 넘어지기도 했다. 음식은 밥과 물고기, 간혹 문어를 잡아 요리했다. 채소나 과일이 없었다. 어촌 사람이라 그런지 매일 물고기만 먹는데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배를 타면 환자들이 많았다. 쓰나미로 그나마 있던 진료소들이 모두 부서져서 반다 아체에 있는 병원까지 가야만 했다. 나와 늘 함께 지내는 아누아르(Anuar)라는 사람도 별 대수롭지 않은 배앓이로 아내를 잃었다. 그와 함께 비가 오면 빗물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지진 나듯 집안이 흔들거리는 천막으로 덮은 판잣집에서 지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눈 뜬 장님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로 집을 짓는다고 내다버리는 모든 살림도구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들이다. 라디오, 선풍기, 그릇들, TV, 냉장고, 옷과 이불 그 어느 것 하나 버려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쓰나미로 생긴 고아들과 홀로 남은 노인들을 위해 지은 집 

: 루모 므파캇(함께 결정하는 집이란 뜻) [사진제공: 개척자들]


루모 므파캇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배우는 어린 아이들 [사진제공: 개척자들]


개척자들은 아체에서 작은 평화도서관을 세우고 있다. [사진제공: 개척자들]


아체 발링카랑의 평화도서관 사서 셀리 [사진제공: 개척자들]



“내게 강 같은 평화”는 없다.


하루는 반다 아체(Banda Aceh)에 와서 구호 활동을 하고있던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흩어져 활동하다 갑자기 만나게 되니 누가 설교를 할 것인지 찬송가는 무엇을 부를 것인지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 때 비교적 최근에 온 한 자원 봉사자가 그러면 우리가 다 아는 쉬운 복음 성가 하나를 같이 부르자며 “I’ve got peace like a river (내게 강 같은 평화)”는 모두 알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때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사역하시던 한 늙은 선교사님이 몹시 주저하시며 이 노래는 아체에서 부르기가 마땅치 않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비만 내리면 홍수로 수난을 겪는 이곳 사람들에게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또 쓰나미로 가족들과 집과 모든 소유를 잃고 심지어는 신체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이 어떻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또 화산과 지진으로 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에게 “내게 산같은 믿음”이란 가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익숙하고 친근한 이 노래를 이곳 아체에서는 함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평생을 보내며 반다 아체에서 희생자 가족들을 돕고 있던 한 노년의 미국 메노나이트 선교사의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부를 수 없는 찬송을 자기 흥에 겨워 불러왔고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없는 신앙을 자기도취적으로 믿어왔다. 우리의 몸에 밴 익숙해진 생활 방식과 믿는 방식 모두가 타인에게는 모난 돌처럼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에겐 남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체의 한 섬에서 난민들의 집을 지으면서 진정으로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바다는 자신을 고립시키는 장벽이 아니다. 정글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글을 슈퍼마켓처럼 여기고 있다는 한 선교사의 말처럼 이들에게 푸른 바다는 온갖 물고기들과 전복, 해삼, 조개, 새우, 게, 오징어, 문어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창고요 번화한 시장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운 풍랑과 싸우고 상어들에게 물려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는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우리를 둘러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자포자기야 말로 우리의 의식과 생각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버리고 우리를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그 검은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송강호ㅣ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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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평화의 마중물]


아이티 대지진 현장에서


송강호


2010111일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사망자만 인구의 십 분의 일인 3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더미 아래 깔려 압사당한 상황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을 찾아내고 시신들을 꺼내는 처참한 장면이 보도되면서 전 세계는 이 미증유의 대재난에 안타까움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3명의 개척자들1) 요원과 함께 이 재앙의 복구와 난민 구호활동을 위해 수도 포트프랭스에서 약 20~30km정도 떨어진 레오간 지역에 파견되었다.

 

주석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아이티의 지진 [사진제공=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대재난이 벌어지면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인 동기에서 이들을 도우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건 사고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려 들고 그 해석에 따라 자신의 활동에 동력을 불어넣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중에는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있다. 이들은 2004년 말 아체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도 그러했고 2006년 파키스탄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그러했다. 이들은 이 모든 지진이나 해일들이 강고한 이슬람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랍 이슬람의 고통에 대한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의 아집과 편견은 지나칠 정도여서 2001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걸프 전쟁까지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아랍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축하할 만한 사건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아이티 대지진 때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 해석은 더 악의적이고 냉혹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 팻 로버트슨 목사는 아이티의 대재앙이 그들이 악마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아이티에 가서야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의 말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고 고통에 빠진 아이티 국민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부두교: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


나는 아이티에서 기독교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부두교는 아프리카의 토속 종교다. 이 종교가 기독교를 만나면서 기독교와 합성된 기괴한 짬뽕종교가 되었다. 아이티에서 시골 마을에 가면 가장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는 검은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염소의 해골이나 녹슨 체인 같은 것들로 장식되어 있어 음산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런 십자가 근처에는 예배당 같은 건물이 있어서 이곳이 가톨릭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건물 입구에는 한 손에는 예수를 안고 다른 손에는 미국의 달러 뭉치들이 가득한 돈자루를 들고 있는 여인상이 그려져 있다. 부두교판 성모 마리아다. 세속적인 욕망의 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충격적이다. 예배처소 안 중앙은 둥근 기둥이 차지하고 있고 그 기둥을 감싸고 있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기둥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상징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또 다른 벽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는 미카엘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미진 제단의 담배들과 많은 바늘들이 꼽혀있는 인형의 모습으로 보아 증오와 복수를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소임을 짐작하게 한다. 부두교는 악마를 숭상한다. 이들은 증오와 복수를 성취시켜주는 신을 믿는다. 적어도 부두교도들에게는 증오가 사랑보다 진하고 저주와 복수가 축복보다 더 강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이런 악마 숭배로 몰아간 자들은 누구일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빛과 생명을 표상으로 내세우지만 서구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끝없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아이티 원주민들을 멸종시켰고 그 빈자리에 부릴 노예가 필요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쇠사슬로 묶어 이 멀고도 낯선 아메리카의 한 섬에 가두어놓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이 악랄하고 잔인한 빛의 천사들을 자기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아이티의 흑인 노예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 악마의 힘으로 독립전쟁을 벌였고 1804년 아이티는 역사상 최초로 노예들의 반란에 의해 독립과 해방을 쟁취한 나라가 되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험담과 저주를 늘어놓는 것이다. 나는 이 소위 악마 숭배자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도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인정 많고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서 싸울 줄 알며, 자연을 사랑하고 남을 도울 줄 아는 착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기독교의 대표로 그 땅을 지배했었던 불란서의 제국주의자들이야 말로 탐욕과 살인과 착취를 일삼던 악마의 화신들이었다.

 

아이들의 도시(Cite Timon)


매우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이티 난민 구호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주민들의 마음속에 강고하게 자리 잡은 노예근성이었다. 개척자들은 주민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도 안 한다는 입장이다. 자기 집을 복구하려는 데 주인이 두 손 놓고 바라만 볼 리가 있겠냐마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재난 피해지역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 국제구호단체가 지어준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셔버리는 경우까지도 있다. 아이티에서 가장 힘든 일은 마을 주민들이 자기 땅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파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족의 재난을 폭리 취득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천막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개척자들의 구호활동 매뉴얼에 따라 난민들의 천막을 두 개 얻어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난민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일부터 했다. 처음에 한 일은 화장실을 짓는 일이었다. 난민촌 주민들이 모여 함께 지었다. 너무 절실했던 탓이다. 마을회관을 지어 난민촌 주민들의 소통 공간을 만들려고 했으나 땅을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주민들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 주민회관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다, 자기 집도 못 짓는 데 무슨 마을회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난민촌 주민들의 결집이 각 개인이나 가족의 안식처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왜냐하면 이 난민촌 모두를 날려버릴 한 외국 합작회사의 난민촌 토지 점유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업의 난민촌 주민들의 토지 강탈이나 쓰레기 처리업체의 난민촌 쓰레기 무단 방류 등 별별 갈등과 충돌 현장에서 가진 것 없는 난민들과 함께 힘 있는 가진 자들과 싸워야했다. 난민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덤프트럭에 모래를 퍼와 무작정 난민천막에 부어 모래더미에 파묻히기도 했고 쓰레기차의 운전자를 가로 막고 서다 수박만한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당해 서너 발 치 뒤로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그날 밤 난민들이 모두 몰려와 이 쓰레기차를 포위한 채 다시 쓰레기를 트럭에 담아 돌려보낸 것은 내게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에게 난민 구호는 그들이 겪는 수치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모래를 붓는 덤프트럭 [사진제공=개척자들]

 

개척자들이 그나마 무엇인가 물질적으로 난민들을 도운 것이 있다면 영양실조에 빠진 어린 아이들에게 기름진 밥과 영양가 있는 고기를 제공한 것일 거다. 각 가정에 돈이나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보다는 직접 요리를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먹여주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그럴 수 있는 인력이나 장비를 동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 난민촌에 살면서 보니 각 가정에 어린이들이 많아서 좀 더 자란 청소년들이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잘 돌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이 어린이 보호를 위해 플라스틱으로 된 간이 울타리와 천막 두 개를 설치했다가 단체는 활동을 마치고 떠났고 시설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자 난민들은 너도 나도 울타리를 잘라서 자기 집 염소 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어린 아이들을 불러서 마을 사람들이 절취해간 울타리들을 다시 거둬 오도록 했고 다시금 원래의 보호마당을 복구했다. 그리고 이 보호마당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어린이들의 도시(Cite Timon)라는 놀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도시의 식품 시장 [사진제공=개척자들]

 

아이들의 도시의 어린이 엄마들 [사진제공=개척자들]

 

아이들의 도시의 어린이 경찰 [사진제공=개척자들]

 

어린이들의 도시는 놀이를 통해서 영양이 부족한 어린이들에게 영양을 보충하는 것과 민주주의의 훈련을 하는 종합적인 활동이었다. 매주 금요일에 이 보호마당에는 어린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어린이들의 도시의 시장과 경찰을 스스로 뽑았고 15살 이상의 여자 어린이들은 마마(엄마)가 되어 10명 이상의 더 어린 아이들을 가족으로 구성했다. 이 어린 마마들은 자기 집에서 취사를 위한 화로를 가져와야 하고 모든 어린이들은 자기 그릇과 숟가락과 포크를 가져와야 했다. 우리는 보호마당 안에 식자재를 파는 시장을 만들고 마마들에게 마을 화폐를 나누어 주어 그 화폐로 자기들의 고기와 구미에 맞는 음식 재료를 구입하게 하였다. 마을 화폐는 표식을 해놓은 코카콜라 병뚜껑이었다. 나중에는 이상한 병뚜껑이 나돌았다. 아이들이 만든 위조화폐였다. 린이 경찰들이 범인들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서도 여자 아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진짜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즐겁게 요리를 했고 어린 아이들은 그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식사시간에는 어린 아이들의 가족들이 모두 둘러 앉아 평소에 먹지 못했던 영양과 맛이 풍부한 식사를 했다. 이 어린 엄마들은 자기들끼리 더 단단한 우정과 결속을 하게 되었고 자기들끼리 동아리처럼 활동도 했다.

 

어린이들의 도시는 재난 현장에서 난민들이 스스로 어떻게 창조적으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지를 우리 자신이 배울 수 있었던 의미심장한 경험이었다. 도움은 마중물처럼 그들 안에 있는 힘을 길어 올리는 정도여야 한다. 마중물은 너무 적어도 안되고 너무 많을 필요도 없다. 난민들이 계속 구호물품에 의존하도록 길들여진다면 그런 구호는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셈이다. 2005년 쓰나미가 난 아체에서 주민들이 해 준 이야기가 귓가에 쟁쟁하다. “처음에는 바다에서 쓰나미가 몰려와 사람이 죽고 집들이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국제구호단체들이 몰려와 마을 공동체를 파괴시켰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겪은 더 무서운 쓰나미였습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6.1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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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7

[시선 | 평화의 마중물]



로힝야 난민촌에서 묻는다. “평화가 무엇인가?”


송강


당신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이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 맴돈다. 예수의 산상수훈, 간디의 비폭력 저항, 마틴 루터 킹의 꿈, 갈퉁의 적극적 평화 등등. 그러나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의 파편들 아래로 지극히 단순한 대답이 침전된다. 나에게 평화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평화이고 자기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을 다시금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평화 운동이 아닐까?

 

나는 이 평화에 대한 진실을 로힝야 족의 현실 속에서 더 실감하고 있다. 미얀마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방글라데시로 여러 차례에 걸쳐 추방당했다. 이렇게 강제로 쫓겨난 로힝야 족의 수가 70만 명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6천 여명이 학살당하고 2만 여명의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는 끔찍한 참화를 겪었다. 국경을 이루는 나프강과 인도양을 배로 건너다 배가 파선하거나 침몰하여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자 실제 정치에서도 실권자가 된 아웅산 수치여사나 자비를 가르치는 미얀마 불자들도 동정이나 연민을 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군부독재의 탄압에 저항했던 미얀마의 민주 투사들조차도 로힝야족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1824년 영국이 미얀마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을 때 당시 인도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을 데려와 앞잡이로 부렸기 때문에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로힝야족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방인들이요 쫓아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로힝야족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미 7~8세기에 자신들이 살고 있던 라카인 주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고 이미 당시부터 이슬람지도자 술탄이 라카인 지역을 통치했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현재 로힝야족이 당하고 있는 대량학살과 강간, 강제 추방과 인종차별은 비인도적인 만행으로 국제 사회의 규탄과 응징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개척자1)들의 로힝야족 현지 조사팀의 일원으로 작년 말부터 이번 달까지 두 차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촌에 파견되었었다. 난민촌이 시작되는 쿠트팔롱에 들어섰던 첫날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난민 천막들의 행렬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위에 검은 비닐을 덮은 허술한 천막집에서 여러 세대의 대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치 독일이나 전쟁 포로들의 집단 수용소 같아 보였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접경지역의 로힝야 난민촌은 약 10여 군데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비좁은 땅 덩어리에 작게는 4~5만에서 10만 명이상 되는 난민들이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 속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살고 있다. 각각의 난민촌 안에는 다시 A, B, C, D순으로 나뉘어진 블록들이 있는데 한 블록 안에는 대강 100가정이 모여 산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각 블록에는 마지라는 봉사자가 있는데 실상 이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협조하는 감시자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는 탄압을 피해 미얀마를 탈출한 로힝야족을 불쌍한 난민들이라고 여기지만 방글라데시 군인들은 이들을 자기 나라에 불법 침입한 범죄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로힝야 난민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날품팔이 이외에 취업 허가를 받을 수도 없다. 바닥에 기초를 놓고 영구적으로 살아갈 집을 짓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로힝야 족에게 있어서 현재의 난민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막장과도 같다


수많은 눈에 잘 띄는 큰길가에는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들이 로힝야를 위해 돕고 있는 000”, “로힝야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000”, “인도주의의 챔피언 000” 등등 요란스럽게 자기 활동을 선전해 대지만 정작 로힝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앞길을 헤쳐 나가도록 보이지 않게 묵묵히 돕고 있는 단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 종족의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로힝야족 청년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로힝야 난민촌

 

개척자들이 난민촌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난민촌의 어린이들이 배고프고 아프고 지쳐서 슬픈 기색으로 힘없이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겠지만 실상은 병들어 누워 있는 소수의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처럼 스스로 별별 희한한 놀이를 만들어 친구들과 명랑하게 뛰어 논다. 어디서 그런 창의력과 에너지가 생기는지 경이롭고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가 난민촌 마을을 찾아가 돗자리를 펴고 크레용과 종이를 놓아두면 아이들은 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종이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 자기 자녀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어서 부모들과 이웃들이 기웃거린다. 찰흙을 갖고 어떤 모양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난민촌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아이들과 함께 집을 방문해 보면 아이들의 아빠가 죽었거나 가족 가운데 장애인이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만성질환 환자가 있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난민촌의 어두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UN이나 국제 구호단체들의 일반적인 난민 지원 활동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들은 이런 취약한 난민들을 찾아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친구가 되고 있다.

 

돗자리학교

 

난민촌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들

 

남을 도와주면서도 욕을 먹기가 쉽다. 다른 사람은 도움을 받는데 자신은 도움을 못 받게 되면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도움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난민촌의 한 블록에 만도 수백, 수천 명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데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지원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과 세심한 분배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여러 난민촌에서 활동하면서 적은 돈으로 아무도 불만이 생기지 않게 도움을 주고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이웃 난민들에게 조차 감사와 환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약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돕는 것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미얀마 군인들의 학살로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여인들이 많다. 이 여인들은 이슬람 관습에 따라 홀로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어서 거의 어두운 천막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감옥 안의 감옥에 갇힌 셈이다. 매달 두 번씩 배급 받는 양식을 받으러 갈 수가 없어서 받는 양식의 일부를 수고비 대신 주어서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강제 추방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병들어 누워 있어도 돌볼 사람이 없다. 시설이 잘 갖춰진 일반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난민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지옥 같은 현실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다른 난민촌에 비해 비교적 많은 천막 병원들이 설치되어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MSF)나 적신월사(무슬림국가의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적인 민간단체들 뿐 아니라 많은 이슬람 단체들의 의료지원 활동도 눈에 띈다. 가히 민간 의료 시민단체들이 봉사 경쟁을 하는 각축장과도 같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난민촌 병원들이 감기나 배탈정도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1차 진료소라는 게 문제다. 당뇨나 고혈압, 관절염과 같은 만성 질환의 환자들이나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못된다. 난민촌에는 이렇게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장기적인 의료지원이 필요한 환자들이 방치되어 있다.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 우리를 돕고 있는 한 로힝야 족 친구는 만삭이 된 아내와 작은 나무배를 타고 피란하면서 3일 밤 3일 낮을 배 안에서 지내야 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출렁이는 배 위에서 아내가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난민촌에 새롭게 정착하면서 아기는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아기를 방글라데시의 모래 언덕에 묻어야 했다.


로힝야 난민캠프에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여인들이 있다. 바로 미얀마 군인들에 의해 강간피해를 당한 여인들이다. 국제 기관들은 그 숫자가 2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피해 여성들 가운데는 결국 임신하게 되어 아비 없는 아이들을 출산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기되거나 아무도 돌보려 들지 않는 불행한 고아가 되어버린다.


특히 이런 성폭행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려 들기 보다는 저주하고 수치스러워 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더 극심하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더 가혹한 2차 피해를 당한다. 성폭행을 당한 어린 소녀들이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경우 쉽게 인근 콕스 바자르나 수도 다카 혹은 인도의 콜카타 등지에 성매매를 위해 팔려 나가게 된다. 무슬림 사회에서 매매춘은 당연히 불법이다. 그러나 관광지인 콕스 바자르의 후락한 골목들 안에는 성매매를 위한 허름한 모텔들이 늘어서 있고 이 매음굴에서 로힝야족의 어린 소녀들을 쉽게 소개 받을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로힝야족 통행금지 구역까지 팔려 나온 데에는 10군데 넘는 방글라데시 군인과 경찰의 검문소에서 군경들과 인신매매단 사이의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트팔롱 난민촌의 평화학교

 

난민들을 함께 돕고자 하는 로힝야 청년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로힝야 난민촌에도 이런 약자들을 돕는 일을 시샘하거나 불만을 갖고 방해하려 드는 이웃들은 없다. 남을 돕는데도 오히려 환영하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기 보다는 로힝야 청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로힝야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부족 가운데 이런 연약한 지체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로힝야 난민들이 그런 회합을 하거나 단체를 결성하게 되면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체포되거나 수감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이나 강제추방과 같은 가혹한 불이익을 무릅쓰고 라도 동족을 돕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는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척자들은 이런 청년들과 함께 이들이 쫓겨난 자신들의 고향 라카인 주까지 다시 돌아가는 멀고 험한 길을 동행할 것이다. 자기 땅이 있고 자기 집이 있었던 그곳, 자기 부모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마셔왔던 샘물을 다시 찾아가기까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길이 평화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4.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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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평화의 마중물 ]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송강호


제주도는 아름다운 관광지다. 일년의 거의 반은 눈이 덮인 한라산의 위엄을 볼 수 있고 산 자락은 바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산이 좋아서 들어오고 또 바다가 좋아서 찾아오는 섬이다. 전에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중국관광객들이 폭주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내리는 제주 공항의 활주로 아스팔트 밑에는 아직도 신원을 알 수 없는 4.3 사건 당시의 시신들이 고스란히 묻힌 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사실 상 국립공원인 한라산 전체가 학살지였으며 서귀포의 관광지 정방폭포를 비롯한 제주 바닷가 곳곳이 학살터였다. 학살지역을 피하면 제주도에 관광객들이 발디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주도민들에게는 낫지 않은 아픈 상처요 잊혀지지 않는 슬픈 기억이다. 2016년 바로 이곳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정부와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해군 기지에 어느 날엔가 서부터는 미군 군함들과 잠수함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죽 쒀서 개준다더니 우리 나라가 비싼 돈 들여 군사기지를 만들어 실제 유용하게 이용하는 나라는 정작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실제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태평양 전체를 자기집 안마당인 양 활보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아시아의 신흥 초 강대국 중국이 등장하여 태평양의 서쪽은 자기들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게 몹시 마땅치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2차대전에서 자신과 싸워 패망한 일본에게서 오키나와를 빼앗아 군사기지를 세웠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이 끊임없이 기지철수를 요구하고 있어서 불편하던 차에 강정해군기지건설, 이게 웬 떡인가? 최대의 적수 중국의 코앞에 있는 제주도에 미국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해군기지를 그것도 자기나라 돈 하나도 들이지 않고 새로 지어 준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처음에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는 이유가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우회하여 남쪽으로도 공격할 수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대비하여 지리적으로 최남단인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중국의 어선들이 떼로 달려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무장한 해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중국 어선이 아무리 난폭하다한들 이 민간 어선들을 퇴치하기 위해 미사일을 장착한 이지스함이나 어뢰로 무장한 잠수함까지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이도 이치에 닿지 않았다. 그러자 아덴만이나 말래카 해협의 해적들로부터 우리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대양해군이 필요하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우리의 유조선이나 상선이 중국에 의해 공격 당할 수 있다고 겁박하였다. 그러나 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군사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해적 퇴치는 우리 군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럴 경우 심각한 외교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상선을 중국이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중국과 무력 충돌을 일으켜서는 절대 안 된다.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런 횡설수설 이면에는 군인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은밀히 얽혀져있었다. 결국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대 중국 전략 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해군기지건설로 앞으로 초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을 자초한 것 일수도 있다. 저주스런 재앙을 불러오는 위험한 시설인 것이다.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 묻힌 구럼비 바위는 기도와 명상의 터였다. [사진제공: 강정 해군기지반대 대책위]


강정의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운동은 육지 뿐 아니라 바다 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 강정 해상팀]


내가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런 재앙의 불을 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공사중단을 요구했고 해상 공사의 위법성을 증언하였다. 그 결과로 업무방해라는 죄목으로 세 차례나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지금도 재판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불행을 가져온 제주도에 애정이 더 깊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옥중에서 제주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제주도를 위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제주도는 군사기지 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 군인도 전쟁도 군대도 없는, 군사훈련도 전쟁 연습도 없는 평화로운 섬이 되어야 더 아름답고 더 가치 있는 소중한 섬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제주 해군기지를 세계의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평화 대학으로 전환시키자. 매장해 버린 아름답고 거룩한 구럼비 바위의 시멘트 콘크리트를 거둬내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자. 해군 본부는 대학 본부가 되고 군 관사는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도록, 복합 문화센터는 학생회관이 되도록. 굳게 닫힌 군대의 철문이 하루 속히 활짝 열리고 높은 돌벽이 허물어져 평화의 공원으로 개장되도록. 지금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볼 수 조차 없는 중덕 바다에 다시 돌고래 떼들이 몰려와 파도를 차 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강정 앞바다에서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라고 지금도 해군기지를 돌며 기도 드린다


2013년 1월 27일 평화운동가들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지 8주년이 되는 날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선언하였다.

[사진제공: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이미 해군 기지가 지어졌는데 어떻게 이를 다시 되물릴 수 있겠느냐고 시름 섞인 푸념을 한다. 그러나 들어온 길이 있으면 나갈 길도 있는 법이다. 해군기지가 나가면 강정 앞바다를 버리고 떠나가 버린 돌고래들이 상서로운 기운을 몰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제주도의 선주민들이 진심으로 해군기지뿐 아니라 모든 군사기지를 원치 않고 또 군사 기지가 없어지는 것을 원하고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제주도는 더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쳐 외치고 분연히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4.3의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모두 정신적인 외상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으로 가족 중에 한 두 명 이상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고 모든 가족들이 나서지 말라고 눈을 흘기는데 누가 용기 있게 나서서 소리 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제주 도민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귀가 열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제주도를 피곤할 때 쉬고 심심할 때 놀고 오는 한반도 변두리의 부속섬 정도로 여긴다. 군인들은 본토를 지키기 위한 변두리의 국경 초소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몸이 다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제주도가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예인선이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시아 바다의 지정학적 중심지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지난해 한반도는 촛불의 불길로 격동하는 한 해를 보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지난 해의 촛불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담겨있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날을 위해 한라산 남쪽 끝자락에서 군사기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불씨를 지키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이 통일의 횃불이 점화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번져갈 것을 희망하고 상상한다.



송강호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2.1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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