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이슈]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정영철


기원전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도시 올림피아에서는 서로 다른 (그리스)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4년에 한 번씩 모여 평화의 제전을 열었다고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국가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올림픽의 기원으로 이야기되는 ‘올림피아 제전’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근대적인 형태로 부활하게 되었다.


올림픽의 출발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우스’ 신 앞에서 제전을 벌이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이번 평창올림픽은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에서 남북이 공동입장, 단일팀, 공동응원, 축하공연, 여기에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실, 불과 50여일 전만 하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남북간에 벌어졌으니, 역시 남북관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함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보다 냉정할 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이제 막 한 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북의 김여정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임을 밝히면서 친서를 전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순간 남북간에 넘어야 할 한 고개는 넘었지만, 넘어야 할 더 큰 고갯길이 우리 앞을 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했던 것처럼, ‘여건’을 만들어야 할 과제가 놓여있다. 그 ‘여건’이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결국은 북미의 문제이고, 우리와 미국의 문제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북에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우리 역시 미국과의 대화와 설득에 더 큰 힘을 쏟겠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로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하고, 일본의 반발을 잠재워야 하며, 평창의 분위기를 이어나가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북도 역시 중국, 러시아와의 다각도 협력의 강화, 관계의 재편 등을 시도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 방러도 모색할 것이다. 또한, 미국을 향해서도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는 온전히 남북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미국이다. 이번에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의 태도와 발언에서 보이듯이, 북과의 접촉과 대화는 아예 멀리하고 탈북자 면담과 천안함 기념관 방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더니, 아예 ‘최대폭의 제재’를 실시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펜스 부통령의 발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북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핵화와 별개로 남북관계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쩌면 ‘내정간섭’에 가까운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남북이 만나서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데에 미국이 간섭할 권리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북의 핵과 미사일 시험 도발 – 제재와 압박 – 더 큰 도발 – 더 큰 제재’의 악순환이었다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환영과 환대 – 평화의 노력 – 더 큰 환영과 환대 –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 큰 평화 노력’속에는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넘어서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장하는 한미동맹은 평화를 위한 동맹이지, 전쟁을 위한 동맹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의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미국의 행위는 동맹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을 벌여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면,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더 큰 평화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합쳐져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평화를 말하고, 통일의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평화의 제전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평창올림픽이 그러한 평화의 제전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북이 손잡고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고, 함께 땀을 흘리며 ‘Corea’를 외쳤고, 남북의 응원단만이 아닌 해외의 동포들까지 함께 하는 응원단이 만들어져 평화를 노래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올림픽 이후까지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부터 ‘더 큰 평화 노력’이 요구된다.


2016-17년 촛불이 한반도 남단을 환하게 밝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남북이 함께 한반도 전체를 환하게 밝힐 ‘평화의 촛불’을 밝힐 시간이다.


자, 또 한 번 평화를 위한 촛불을 밝혀보자!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2.19 14:27

피스레터11 웹용out line.pdf




정영철 |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송강호 |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송태효 | 어린 왕자와 영화인들


김소울 | 아메리카 대륙, 승자만을 위한 자유의 나라


원마루 | 영국에서 아리랑을 불러봅니다


심은보 | 좌충우돌 민이 녀석 이야기




'피스레터(PDF)'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스레터 11호(통권13호)  (0) 2018.06.19
피스레터 10호(통권12호)  (0) 2018.04.19
피스레터 9호(통권11호)  (0) 2018.02.19
피스레터 8호(통권10호)  (0) 2017.12.20
피스레터 7호(통권9호)  (0) 2017.10.30
피스레터 6호(통권8호)  (0) 2017.08.01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2.20 03:10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 관계사]


하늘길, 바닷길, 땅길 열어 평화로! 통일로! : 우리는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정영철


우리에게 분단-통일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가 있다. 분단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통일은 곧 가족과의 만남이자 고향의 회복일 것이다. 분단 때문에 총을 들고 적과 마주했던 사람들에게 통일은 곧 평화와 화해를 의미할 것이다. 분단으로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통일은 곧 새로운 번영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우리 세대에게 분단, 그리고 통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분단으로 억눌린 삶의 자유와 평화를 의미할 것이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미래의 설계일 것이며, 평화로운 한반도에서의 희망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바로 ‘꿈’일 것이다. 우리는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막연하게 ‘통일’이라는 꿈이 아니라 분단이 만들어놓은 불안, 걱정, 억압, 전쟁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와 번영과 공존과 화해와 협력을 꿈꾸는 것이어야 한다. 


분단이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을 의미한다면, 통일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연대를 의미한다. 2007년 정상회담은 이러한 꿈을 한 발 더 진전시킬 수 있었던 기회였다. 정치-경제적인 합의를 넘어 그 이듬해 열렸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이 공동으로 응원단을 만들어 부산-서울에서 개성-평양을 거쳐 신의주를 넘어 베이징까지 철도를 운영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분단 이후 단절되었던 철길을 놓고, 도로를 놓기로 했다. 이제야 ‘갇힌 나라’가 아니라 대륙으로, 바다로 ‘열린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2000년 정상회담 때부터 남북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구상했고, 2007년 정상회담에서는 그것을 더욱 구체화시켜 TCR(Trans China Railroad, 중국횡단열차)과 TSR(Trans Siberian Railroad)을 연결하여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현실화하기로 합의했다.    



마침내 2007년 5월 17일 경의선 구간 중 남북이 끊어진 지점에서 철도가 연결되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1, 2차 장관급회담에서 합의되었던 경의선 철도 연결 사업이 진행되었고, 북의 핵실험 등으로 미뤄졌다가 북의 개성과 남의 문산을 잇는 27.3km 구간에 대한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5월 17일 경의선 연결 철도 시범 운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2007년 10월 정상회담을 계기로 철도 운행을 정기화하기로 합의하면서 북의 봉동과 남의 문산을 잇는 철도가 12월 11일 개통되어 정례적으로 운행하게 되었다. 이 철도는 개성공단을 오가는 철길로 주 1회씩 정기적으로 운항하였지만, 결국 2008년 12월부터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는 현재 끊어져 있는 경의선, 경원선, 동해선 등을 연결하면 곧바로 대륙과 연결된다. 남북이 힘을 합쳐 끊어진 구간을 복구하고 북의 철도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한다면 언제라도 연결할 수 있다. 끊어진 구간이라야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경의선 구간을 제외하면 경원선 약 25km, 그리고 동해선 약 110km이다. 만약 금강산까지 철도를 새로 놓는다면 약 100km의 구간이 추가될 수 있다. 


철도와 도로의 연결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부터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철도와 도로의 연결이 멀리 돌아가던 길을 단축시켜서 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경제적 이득만이 아니라 여전히 해체되지 않고 있는 동북아 지역의 냉전을 해체하고, 군사적으로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을 제고하는 핵심적인 사업의 하나이다. 특히, 이 철도와 도로를 통해 사람이 다니고, 화물이 다니고, 시베리아의 천연자원이 유통된다면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북방의 영토를 개척하는 의미를 지닐 것이고, 동북아 지역의 협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색 국면이 지속되면서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머나먼 일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끊어진 철로 한편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낡은 기차는 철길이 아니라 남북의 정치–분단의 정치–로 인해 정차하고 있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철길과 도로의 연결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시간만큼 더 큰 분단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우리의 꿈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소련(러시아)도 가고, 달나라도 가는데 평양만 갈 수 없는 데서 오는 우리의 미래 희망의 쪼그라듦이다.


부산 어귀 한 곳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를 거치고 시베리아를 지나서 유럽 한복판으로 달려가는 상상을 해보자. 우리 학생들이 배낭을 메고, 어깨동무하면서 평양을 내려, 신의주를 내려, 만주를 내려, 시베리아를 내려, 유럽을 내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바다로는 오대양육대주를 누비고 있으면서, 대륙으로는 왜 이런 상상을 하지 못하는가 생각해보자. 그 한복판에 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을 넘어, 하늘길, 땅길, 바닷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미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비록 실행은 되고 있지 않지만, 남북이 주춤거릴 때 중국이 중국 단둥과 북의 신의주, 평양, 개성을 연결하는 고속철도를 놓겠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분단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한다. 남북이 힘을 합쳐 해야 한다. 분단의 정치에서 벗어나, 민족의 미래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이유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이런 꿈들이 모여 현실이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지금의 꿈이 한낱 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꿈이 아닌 평화의 꿈, 통일의 꿈을 꾸어야 할 때다. 

피스레터에 지금껏 다양한 주제로 연재했지만, 이제 연재를 끝내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평화로! 통일로!


<참고한 글>

통일노력 60년 발간위원회,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통일로』, 서울:다해, 2005. 

전상봉, 『통일, 우리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서울:시대의 창, 2007.


<사진출처>

정영철・정창현, 『어린이어깨동무 교양시리즈1 - 남북관계사 20장면: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보다』, 서울:유니스토리, 2017.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7.12.20 02:08

피스레터8 out-최종 게시용.pdf





이본 네일러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정영철 | ​ 하늘길, 바닷길, 땅길 열어 평화로! 통일로! : 우리는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송태효 | 어린 왕자의 미술세계  ​

김소울 | 아픔의 역사를 그림에 담은 스페인 화가-고야 ​

원마루 | 아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

심은보 | 학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피스레터(PDF)'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스레터 10호(통권12호)  (0) 2018.04.19
피스레터 9호(통권11호)  (0) 2018.02.19
피스레터 8호(통권10호)  (0) 2017.12.20
피스레터 7호(통권9호)  (0) 2017.10.30
피스레터 6호(통권8호)  (0) 2017.08.01
피스레터 합본호(통권1호-7호)  (0) 2017.08.01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심포지엄2017.12.15 18:36



#. 2017년 11월 15일 오전 10시


분주한 마음으로 도착한 창비50주년홀. 분명히 일주일전에 평화교육 심포지엄 '평화교육은 우리를 바꿀 것인가' 준비를 위한 모든 체크를 마쳤으나.. 준비하는 손길이 바쁘기만 한 그 때!


올해 초, 아일랜드에서 만났던 콜린 크랙과 이본 네일러가 도착했다. 기자 간담회를 위해 행사시간보다 한참 먼저 도착은 두 명은 긴~ 비행의 여독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듯 피곤해보였으나 특유의 밝은 표정과 미소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커피 한 모금의 여유도 잊은 채 열정적으로 기자 간담회에 임하는 먼 길 오신 손님들의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자세히 만나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19269.html



#. 한반도의 멀리있는 쌍둥이, 아일랜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오기 시작하는데 느낌이 심상치 않다. 흥행성공! 심지어 너무나 열심히 공부를 한다. 우리사회가 평화와 평화교육에 목말라하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한반도와 같은 분단과 분쟁의 지역 북아일랜드에서 평생 평화운동을 해온 콜린 크랙의 진심어린 경험과 인형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도록 돕는 이본 네일러의 이야기는 참석자들의 눈과 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또한 아일랜드 활동가들의 발표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적 배경과 활동내용, 거기에서 나타난 성과와 한계,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까지 정리해주신 강순원교수님의 발표에 청중들은 엄지척!! 이렇다보니 참가자들의 집중도는 입시생을 방불케 했을 정도!! 


 





#. 이 땅에서의 노력, 교실에서 일구는 평화  


아일랜드의 경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현장 선생님들의 발표 또한 많은 참가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최관의 선생님의 '피구놀이에서 배우는 평화'는 어린이들과 더 깊게 호흡하는 것을 배워가는 과정이었고, 양은석 선생님의 다양한 평화교육 콘텐츠에 대한 발표는 참가자들의 손을 바쁘게 했다. 열심히 받아 적고, 응용하고자 하는 열정 만발! 


이 시간은 아일랜드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만나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콘텐츠가 만나 희망을 일구는 시간이기도 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평화총서2017.12.14 17:15

보도자료-평화의시선으로분단을보다.pdf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정영철 소장이 피스레터에 연재한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를 수정·보강한

남북관계 20장면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보다


왜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성찰해야 하는가?

38선의 탄생부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삐라’를 둘러싼 논쟁까지

일관되게 평화’의 시선으로 재조명한 남북관계 20장면




그동안 북한 역사와 남북관계를 꾸준히 연구해 온 정영철 교수와 정창현 교수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집필한 남북관계사 교양서이다. 분단의 형성과 남북갈등, 대화와 교류 등 분단 70년사에서 남북관계의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 20개의 사건을 뽑아 흥미롭게 서술하였다.

특히 분단, 38선의 탄생부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삐라를 둘러싼 논쟁까지, 그리고 우리가 지향하는 바의 평화통일의 꿈까지 총 20개의 장면을 통해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전쟁과 적대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되며, 화해와 협력, 신뢰와 공동 번영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평화의 시선으로 남북관계를 재조명하였다.

 


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성찰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일관되게 평화의 시선으로 과거 분단과 갈등, 협력관계를 성찰하고 있다냉전시대 우리는 북한을 동족의 반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와 생사를 걸고 대립하고 있는 소멸시켜야 할 적대집단이라는 상반된 대북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북인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우리에게 오늘의 북한은 경계대상동반자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러한 이중적인 현실인식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적대성을 감소시키고 동포애를 증진시켜 북한을 공존과 동반자관계로 이끌어 가는 지혜와 노력이다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은 성급한 통일은 남과 북, 모두에게 엄청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평화적으로 남북합의에 의한 통일 추구가 필요한 이유다. 더구나 요즘처럼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은 무엇보다도 평화적 환경의 조성이 절실하다


지난 70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어 있다. 동북아의 평화 없이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없으며, 한반도의 평화 없이 동북아의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그렇기 때문에 지난 70년의 남북관계를 평화의 시선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새로운 출발은 처음부터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 신뢰와 공동 번영의 길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우리에게 과거 남북관계를 성찰하면서 교훈을 얻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그 중심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평화의 가치통일의 꿈이 필요하다.

 

이 책은 젊은 세대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도록 여러 이미지와 도표 등을 포함해 가급적 쉽게 서술하였다2000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통일을 모색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남북 간에는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등 다양한 협력사업이 진행되었다. 다양한 민간단체들의 인도적 지원 활동이 있었고,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남북의 행사를 같이하기도 하였다.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의 공존과 공영의 성과물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중대한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북의 도로와 철도를 연결시키고, 한반도를 넘어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꿈을 꾸게 하였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금강산과 개성공단은 결국 문을 닫았고, 남북은 과거 냉전 시절의 적대적 관계로 돌아갔다. 젊은 세대들에게 평화통일은 새로운 꿈을 창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과 동떨어진 너무나 추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이제 새롭게 열어나갈 남북관계는 젊은 세대에게 부담이나 성가신 일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어야 한다. 남북의 젊은 세대가 한반도에서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할 수 있는 꿈이 필요한 시점이다. ‘평화로운 남북관계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새로운 미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꿀수록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반도의 분단이 남겨놓은 반쪽짜리 꿈이 아니라 온전한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철길과 땅 길의 연결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 신뢰와 연대를 의미한다. 나아가 한반도가 중심이 되어 동북아 국가, 세계인 모두에게 평화와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 된다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과거 불행했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보고 젊은 세대가 새롭게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사고하고, 모색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있는 그대로의 남북관계사이해

 

이 책에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자 새로운 남북관계를 모색하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남북관계를 남과 북이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유리하게 서술하기도 하고, 한국의 경우 정권이 바뀜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남북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우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남북관계를 되돌아보고, 이에 기초해 미래의 남북관계를 사고해야 한다이것이 이 책에서 그 동안 논쟁이 되어 온 대북 인도적 지원문제, NLL문제, 삐라 살포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

 

이 책은 본격적인 역사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남북관계의 중요 장면을 간추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끄집어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20개의 장면에는 안타까운 적대의 역사도 있고, 희망에 부풀었던 꿈만 같던 역사도 있다. 남북관계의 웃고, 울었던 역사를 되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자 했다. 남북관계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현재의 모습은 우리가 지나온 남북관계를 성찰하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심포지엄2017.12.14 16:30

어린이어깨동무_평화교육심포지엄_내지편집v4.compressed.pdf


-폭풍 이후의 잔잔함 : 분쟁 이후 평화구축의 과제 (콜린 크랙)

-북아일랜드의 평화교육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강순원)

-평화교육과 좋은 관계 맺기 : 인형극을 활용한 사례 연구 (이본 네일러)

-평화지향적 통일교육 콘텐츠 개발 (양은석)

-피구놀이에서 배우는 평화 (최관의)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심포지엄2017.12.14 14:33
피스레터(글)2017.10.30 14:21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 관계사]



휴전선을 밟고 : 제2차 남북정상회담

 


정영철



1945년의 38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진 후, 남북을 통틀어서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밟은 적이 있을까?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넘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북이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바로,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비행기도 아닌, 그리고 자동차 속에서도 아닌 직접 걸어서 이 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남의 최고 통치자-군 최고책임자가 직접 이 선을 넘어, 평양으로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제2차 정상회담은 시작되었다. 2000년 제1차 정상회담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길 위에 한반도의 평화와 협력의 더 큰 길을 내기 위해 제2차 정상회담의 길은 그렇게 열렸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적대와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손을 잡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이후부터 남북관계는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한국 대 터키)이 열리는 날 서해에서는 남북의 함정이 충돌하는 제2차 서해교전이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북미간의 대립이 강화되고, 한반도에 다시금 전쟁의 위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이 출범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북한과의 대립은 2002년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에 기반한 핵무기 제조 의혹 등으로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 2차 핵위기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북한과 미국의 핵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1994년 북미가 합의한 제네바 합의는 끝내 파기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으로 맞섰고, 2003년 1월에는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북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북미간의 대립만 격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그간의 대북정책을 놓고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이 공표되면서 ‘남남갈등’만이 아니라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에도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길에서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에 대한 편의를 봐준 혐의가 특검의 대상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특검은 남북간 화해의 노력과 이를 위해 노력한 수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특검으로 인해 소떼 방북의 역사적인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검찰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끝내 정몽헌 회장은 검찰 수사 와중에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북간의 갈등도 작지 않았다. 2004년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관련 갈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2004년 7월에는 남북간 당국자 대화가 중단되었다. 때마침 동남아를 경유하여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남북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여기에 북미간 갈등이 6자회담으로 어느 정도 봉합되는가 했지만, 결국 2005년 2월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성명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긴장국면으로 흘러갔다. 2004년 하반기부터 2005년 상반기까지는 민간차원의 대화와 협력은 지속되었지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회담은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2005년 6월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의 협력을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대해 뭔가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금까지 기능주의적 접근에 따라 평화-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거나, 남북간에 합의와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상황에서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안보 문제는 남북의 합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침 2005년 ‘9.19 공동선언’에 따라 북미간 핵 갈등 해결의 전기가 어느 정도 마련되고 - 이는 곧바로 BDA 사태로 인해 위기로 바뀌었다 - 2006년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반도의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밝히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6자회담에서 BDA 사태로 좌초 위기에 빠졌던 9.19 공동성명을 되살리는 베이징 ‘2.13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제시한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한반도 평화 - 비핵화를 포함한 - 그리고 경제협력의 더 높은 수준으로의 발전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북한과 시도하게 되었다.    


 

마침내 2007년 8월 5일 남북간에 정상회담이 비공개적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8일에는 8월 28일 제2차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청와대는 2차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동시에 견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고, “양 정상이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함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남북경협 및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ㆍ질적으로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상생의 화해ㆍ협력 기조가 지속되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주요 의제로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제기하였고, 실제 2차 정상회담은 그런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다. 



제2차 정상회담을 위한 평양행을 선택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육로로 방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일 청와대를 출발하여,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통과하여, 개성-평양 고속도를 따라 평양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의 최고책임자-군최고통수권자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 MDL 통과장면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시간은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 5분이었다. 사실, 군사분계선이라고 하지만, 표식이 없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무형의 경계일 뿐이다. 과거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당시가 1948년 4월, 그때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나서야 이제는 38선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남의 정치지도자가 넘어서게 된 셈이다. 남의 최고지도자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는 의미는 더 이상 한반도가 전쟁이 아닌 평화, 갈등이 아닌 협력의 시대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선을 넘기 직전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국민 여러분, 오늘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날이라서 가슴이 무척 설레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 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발전이 정지돼 왔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잘 다녀오겠습니다. 

군사분계선 걸어서 통과하기 전 2007. 10. 2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노무현 대통령 일행은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접을 받았고, 이후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역사적인 ‘10.4 정상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하였다. ‘10.4 선언’에는 ‘6.15 공동선언’에서는 언급되지 못했던 평화의 문제 특히, 한반도의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한 종전선언의 문제, 나아가 평화체제의 문제까지 언급되고 합의되었다. 또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개성공단을 뛰어넘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의 문제가 다방면에 걸쳐 합의되었다. 이 외에도 그간 남북 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해해상에서의 남북 충돌을 방지하고, 오히려 ‘갈등의 바다’를 ‘협력의 바다’로 만들어 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창설에 합의하였다.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합의였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평화체제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남북의 협력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예고하는 합의문이었다. 땅에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을 넘었지만, 그 효과는 남북의 모든 장벽을 넘어뜨릴 수도 있는 합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10.4 정상선언’은 합의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좌초할 운명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남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 즉,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면서 ‘10.4 정상선언’을 이끌어갈 만한 추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 ‘10.4 선언’의 합의 내용은 남북의 협력체제가 전제되지 않는 한 하나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제는 북과 미국이 핵심 축을 이루는 문제였고, 이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했다. 또한, 남북의 경제협력 사업 역시 남북의 정치적 협력이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남북의 정치 및 군사적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남측의 동력이 상실되면서 아무것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남북관계는 6.15 공동선언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고, 서해상에서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또한, 군사분계선 상에서의 상호 비방과 총격도 벌어지면서 한반도는 다시금 갈등과 대립의 장벽이 높아져갔다. 



2007년의 제2차 정상회담은 남의 최고통치자가 군사분계선을 직접 걸어서 넘어가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리고 그 합의 내용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현실적으로 정상회담의 추진과 성사가 너무 늦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추진되어야 할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이른 시기에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합의되고, 실행되어야 했다. 둘째, 지극히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진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더 이상의 관계 개선의 추동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강경정책에 부응하는 ‘한미동맹’체제가 강화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사그라질 듯 보였던 냉전의 대립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휴전선을 밟고 밟아, 선을 지우고 길을 내기 위한 노력은 아쉽게도 원했던 것만큼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선을 밟고 밟아, 길을 내기 위한 커다란 발걸음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고, 앞으로 언제든 그 길을 다시금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교훈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남이든 북이든 정책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우리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원칙과 내용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청와대, 제2차 정상회담 발표문

2007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50년 금단의 선을 걸어서 넘다(서울: 호미, 2009)

김연철『한반도평화경제공동체구상』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7)

노무현 재단, 『NLL의 진실과 노무현의 전략』 (서울: 전자책나무, 2013)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8.01 14:02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서울과 평양의 환호, 세계의 부러움: 2000년 정상회담


정영철


한 사람은 비행기 트랩 위에서, 또 한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2000613일 오전 1037, 역사의 한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바로 그날 2000613일은 한반도 분단사에 새로운 역사가 쓰인 날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동안 전쟁과 적대, 갈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소멸을 주장했던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평양의 하늘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던 희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바로 2000년 정상회담이었다.

 

우리처럼 오랜 세월 분단을 경험했던 동-서독도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정상회담을 통해 동-서독의 화해와 협력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비록 불행의 땅으로 변했지만 예멘 역시 남북 예멘의 정상회담을 통해 전쟁의 방지와 통일을 위한 숱한 회담을 전개했었다. 지금도 지중해의 조그만 섬나라인 분단된 키프로스에서 남북 키프로스의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상호 필요에 의해 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변국들의 중재와 압력에 의해 열리기도 한다. 예멘의 경우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중재가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으며, 키프로스는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00년 정상회담은 어찌 보면 1970년대부터 남다르게 한반도 문제를 고민해온 김대중의 필생의 역점 사업이었을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김대중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예비군제 폐지와 대체, 4대국교차승인론 등 굵직한 한반도 관련 공약을 내세우며 박정희를 압박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면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자신의 통일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정상회담은 아마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고, 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1998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그는 199811월부터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이로부터 약 17개월간에 걸친 막후접촉과 상호 밀사 및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마침내 2000410일 정상회담을 발표하게 된다. 이 당시 남북한의 막후 라인은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후일 국정원장)과 북한의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김보현과 북의 전금진(우리에겐 전금철로 잘 알려져 있는 북의 아태부위원장) 라인도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도 다양한 시그널을 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003월의 베를린 선언이었다. 베를린 선언은 경협의 확대’, ‘남북의 화해·협력’,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당국자 대화를 핵심 골자로 하는 대북 제안이었다. 이 베를린 선언이 나오기 이전, 북은 이미 우리에게 경협에 대한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북의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공식화시킨 것이 베를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남북정상회담

본 저작물은 '국정홍보처'에서 '2000'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김대중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상회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이었다.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났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평양에서의 모습은 파격 그 이상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정일위원장의 공항 영접, 북의 군인들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던 모습, 두 정상이 같은 승용차를 타고 환호하던 평양 시민들을 만나면서 퍼레이드를 벌인 점 등등.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 광경에서는 서울에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까지 눈물을 보일 정도의 감격이었고, 모든 기자들이 박수를 치며 이에 환호하기도 하였다. 외신 기자들 역시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였고, 이 순간만큼은 우리를 가장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다. 그간 북을 싸워 없애야 할 적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상대임을 인정하였고, 남북이 더 많은 만남과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실제 정상회담 이후로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경유하여 멀리 에돌아 평양을 가야하는 현실을 비판하였고, 결국 서울과 평양 간에 직항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함으로써 남북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김정일위원장 팬클럽까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정상회담이 가져다 준 남북 일상의 변화였다.

 

역시 가장 큰 변화는 국민들의 북에 대한 인식이었다. 적이 아니라 동포로, 협력을 통해 같이 공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할 통일의 다른 한 주체로 북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약 30만 명의 군중이 두 정상의 만남에 길거리 환영을 보여주었다면,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도 자발적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따뜻하게 환대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2000년은 서울과 평양이 세계 주요 외교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급박하게 서울을 찾았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평양과 서울을 동시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두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국 역시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베이징을 찾아 중국지도자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라면 북과 미국이 상호 특사를 주고받으면서 수교 협상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점이다. 그해 10월 조명록 특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역시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북과 미국은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여 수교까지 염두에 둔 합의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200010월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는 조명록 특사 (출처:통일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0001023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공연을 관람하던 중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출처:통일뉴스)

 

장 중요하게는 지금까지 남북이 서로를 향해 적대와 갈등의 패러다임으로 보던 것을 뒤집어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이다. ‘안보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아닌 공존과 평화화해와 협력이 더 인기 있는 구호가 되었고정치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 청사진을 발표하였다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당국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남북의 교류와 협력에 나서게 되었다제주도에서는 감귤을 북에 보냈고경기도에서는 휴전선 인근의 방역 사업에 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경상남도는 통일 딸기사업을 통해 지자체간의 새로운 협력모델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기업들은 개성공단을 넘어 북과의 더 넓은 경제 합작을 위한 진지한 모색을 하였고시민단체는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기찬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이 있은 후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그 사이에 남북은 그야말로 많은 일들을 벌렸고때로는 웃고때로는 울고때로는 싸우면서 서로를 이해하였다초기에는 참으로 많은 실랑이가 있었다호칭 때문에 얼굴을 붉혀야 했고남에 내려온 북의 응원단은 구겨진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에 분노하였다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그렇게 서로를 배워 가는 시간이었다이런 점에서 보자면정상회담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움이 아닐까통일은 아주 거창하게 보자면막막한 미래의 일이지만우리의 주변에서부터 만남을 이어간다면 소소한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이해하고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일상의 평화와 일상의 통일을 꿈꾸게 해준 것이 바로 정상회담이었던 것이다.

 

-미 공동코뮤니케: 코뮤니케는 일명 공식발표 혹은 공동성명서로 해석된다. 2000 -미 공동코뮤니케는 역사적으로 북미관계의 일대전환을 의미하는 공식발표였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북은 조명록 당시 총정치국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조명록 특사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북미관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그 결과 양국은 2000 10 12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게 된다.  -미 공동코뮤니케의 핵심 내용은 두 나라의 적대관계 청산과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의 협력, 양국 관계의 정상화였다. 또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북이 클리턴 대통령의 방북을 요청하고, 이를 위해 당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이를 준비하기 위해 방북하기로 한 점이다. 실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0 19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미 공동코뮤니케는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합의로서 의미를 갖지만, 이후 미국의 정치정세가 급변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 2000년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게 패하면서 북미 관계는 이후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정창현, 남북정상회담 600(서울: 김영사, 2000)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2(서울: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5)

임동원, 피스메이커(서울: 중앙북스, 2008)

임채완, 전형권, “6.15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및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한국동북아논총17(2000)

2000년 한·러 공동성명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