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윌슨 초청강연 '회복적 사회를 위한 평화교육'에 초대합니다!!




- 강연 : 데릭 윌슨(북아일랜드 얼스터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 / 코리밀라 대표 역임, 현 프로그램개발 공동위워장)

- 사회 : 김동진(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IRC 마리퀴리 펠로우)

- 토론 :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 / 윤철기(서울교육대학교 교수)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6.19 23:31

[시선 | 평화의 마중물]


아이티 대지진 현장에서


송강호


2010111일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사망자만 인구의 십 분의 일인 3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더미 아래 깔려 압사당한 상황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을 찾아내고 시신들을 꺼내는 처참한 장면이 보도되면서 전 세계는 이 미증유의 대재난에 안타까움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3명의 개척자들1) 요원과 함께 이 재앙의 복구와 난민 구호활동을 위해 수도 포트프랭스에서 약 20~30km정도 떨어진 레오간 지역에 파견되었다.

 

주석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아이티의 지진 [사진제공=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대재난이 벌어지면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인 동기에서 이들을 도우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건 사고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려 들고 그 해석에 따라 자신의 활동에 동력을 불어넣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중에는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있다. 이들은 2004년 말 아체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도 그러했고 2006년 파키스탄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그러했다. 이들은 이 모든 지진이나 해일들이 강고한 이슬람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랍 이슬람의 고통에 대한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의 아집과 편견은 지나칠 정도여서 2001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걸프 전쟁까지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아랍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축하할 만한 사건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아이티 대지진 때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 해석은 더 악의적이고 냉혹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 팻 로버트슨 목사는 아이티의 대재앙이 그들이 악마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아이티에 가서야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의 말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고 고통에 빠진 아이티 국민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부두교: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


나는 아이티에서 기독교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부두교는 아프리카의 토속 종교다. 이 종교가 기독교를 만나면서 기독교와 합성된 기괴한 짬뽕종교가 되었다. 아이티에서 시골 마을에 가면 가장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는 검은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염소의 해골이나 녹슨 체인 같은 것들로 장식되어 있어 음산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런 십자가 근처에는 예배당 같은 건물이 있어서 이곳이 가톨릭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건물 입구에는 한 손에는 예수를 안고 다른 손에는 미국의 달러 뭉치들이 가득한 돈자루를 들고 있는 여인상이 그려져 있다. 부두교판 성모 마리아다. 세속적인 욕망의 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충격적이다. 예배처소 안 중앙은 둥근 기둥이 차지하고 있고 그 기둥을 감싸고 있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기둥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상징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또 다른 벽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는 미카엘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미진 제단의 담배들과 많은 바늘들이 꼽혀있는 인형의 모습으로 보아 증오와 복수를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소임을 짐작하게 한다. 부두교는 악마를 숭상한다. 이들은 증오와 복수를 성취시켜주는 신을 믿는다. 적어도 부두교도들에게는 증오가 사랑보다 진하고 저주와 복수가 축복보다 더 강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이런 악마 숭배로 몰아간 자들은 누구일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빛과 생명을 표상으로 내세우지만 서구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끝없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아이티 원주민들을 멸종시켰고 그 빈자리에 부릴 노예가 필요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쇠사슬로 묶어 이 멀고도 낯선 아메리카의 한 섬에 가두어놓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이 악랄하고 잔인한 빛의 천사들을 자기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아이티의 흑인 노예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 악마의 힘으로 독립전쟁을 벌였고 1804년 아이티는 역사상 최초로 노예들의 반란에 의해 독립과 해방을 쟁취한 나라가 되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험담과 저주를 늘어놓는 것이다. 나는 이 소위 악마 숭배자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도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인정 많고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서 싸울 줄 알며, 자연을 사랑하고 남을 도울 줄 아는 착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기독교의 대표로 그 땅을 지배했었던 불란서의 제국주의자들이야 말로 탐욕과 살인과 착취를 일삼던 악마의 화신들이었다.

 

아이들의 도시(Cite Timon)


매우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이티 난민 구호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주민들의 마음속에 강고하게 자리 잡은 노예근성이었다. 개척자들은 주민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도 안 한다는 입장이다. 자기 집을 복구하려는 데 주인이 두 손 놓고 바라만 볼 리가 있겠냐마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재난 피해지역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 국제구호단체가 지어준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셔버리는 경우까지도 있다. 아이티에서 가장 힘든 일은 마을 주민들이 자기 땅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파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족의 재난을 폭리 취득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천막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개척자들의 구호활동 매뉴얼에 따라 난민들의 천막을 두 개 얻어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난민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일부터 했다. 처음에 한 일은 화장실을 짓는 일이었다. 난민촌 주민들이 모여 함께 지었다. 너무 절실했던 탓이다. 마을회관을 지어 난민촌 주민들의 소통 공간을 만들려고 했으나 땅을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주민들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 주민회관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다, 자기 집도 못 짓는 데 무슨 마을회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난민촌 주민들의 결집이 각 개인이나 가족의 안식처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왜냐하면 이 난민촌 모두를 날려버릴 한 외국 합작회사의 난민촌 토지 점유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업의 난민촌 주민들의 토지 강탈이나 쓰레기 처리업체의 난민촌 쓰레기 무단 방류 등 별별 갈등과 충돌 현장에서 가진 것 없는 난민들과 함께 힘 있는 가진 자들과 싸워야했다. 난민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덤프트럭에 모래를 퍼와 무작정 난민천막에 부어 모래더미에 파묻히기도 했고 쓰레기차의 운전자를 가로 막고 서다 수박만한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당해 서너 발 치 뒤로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그날 밤 난민들이 모두 몰려와 이 쓰레기차를 포위한 채 다시 쓰레기를 트럭에 담아 돌려보낸 것은 내게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에게 난민 구호는 그들이 겪는 수치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모래를 붓는 덤프트럭 [사진제공=개척자들]

 

개척자들이 그나마 무엇인가 물질적으로 난민들을 도운 것이 있다면 영양실조에 빠진 어린 아이들에게 기름진 밥과 영양가 있는 고기를 제공한 것일 거다. 각 가정에 돈이나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보다는 직접 요리를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먹여주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그럴 수 있는 인력이나 장비를 동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 난민촌에 살면서 보니 각 가정에 어린이들이 많아서 좀 더 자란 청소년들이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잘 돌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이 어린이 보호를 위해 플라스틱으로 된 간이 울타리와 천막 두 개를 설치했다가 단체는 활동을 마치고 떠났고 시설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자 난민들은 너도 나도 울타리를 잘라서 자기 집 염소 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어린 아이들을 불러서 마을 사람들이 절취해간 울타리들을 다시 거둬 오도록 했고 다시금 원래의 보호마당을 복구했다. 그리고 이 보호마당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어린이들의 도시(Cite Timon)라는 놀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도시의 식품 시장 [사진제공=개척자들]

 

아이들의 도시의 어린이 엄마들 [사진제공=개척자들]

 

아이들의 도시의 어린이 경찰 [사진제공=개척자들]

 

어린이들의 도시는 놀이를 통해서 영양이 부족한 어린이들에게 영양을 보충하는 것과 민주주의의 훈련을 하는 종합적인 활동이었다. 매주 금요일에 이 보호마당에는 어린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어린이들의 도시의 시장과 경찰을 스스로 뽑았고 15살 이상의 여자 어린이들은 마마(엄마)가 되어 10명 이상의 더 어린 아이들을 가족으로 구성했다. 이 어린 마마들은 자기 집에서 취사를 위한 화로를 가져와야 하고 모든 어린이들은 자기 그릇과 숟가락과 포크를 가져와야 했다. 우리는 보호마당 안에 식자재를 파는 시장을 만들고 마마들에게 마을 화폐를 나누어 주어 그 화폐로 자기들의 고기와 구미에 맞는 음식 재료를 구입하게 하였다. 마을 화폐는 표식을 해놓은 코카콜라 병뚜껑이었다. 나중에는 이상한 병뚜껑이 나돌았다. 아이들이 만든 위조화폐였다. 린이 경찰들이 범인들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서도 여자 아이들은 마치 자기들이 진짜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즐겁게 요리를 했고 어린 아이들은 그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식사시간에는 어린 아이들의 가족들이 모두 둘러 앉아 평소에 먹지 못했던 영양과 맛이 풍부한 식사를 했다. 이 어린 엄마들은 자기들끼리 더 단단한 우정과 결속을 하게 되었고 자기들끼리 동아리처럼 활동도 했다.

 

어린이들의 도시는 재난 현장에서 난민들이 스스로 어떻게 창조적으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지를 우리 자신이 배울 수 있었던 의미심장한 경험이었다. 도움은 마중물처럼 그들 안에 있는 힘을 길어 올리는 정도여야 한다. 마중물은 너무 적어도 안되고 너무 많을 필요도 없다. 난민들이 계속 구호물품에 의존하도록 길들여진다면 그런 구호는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셈이다. 2005년 쓰나미가 난 아체에서 주민들이 해 준 이야기가 귓가에 쟁쟁하다. “처음에는 바다에서 쓰나미가 몰려와 사람이 죽고 집들이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국제구호단체들이 몰려와 마을 공동체를 파괴시켰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겪은 더 무서운 쓰나미였습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6.19 22:59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결국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심은보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한 녀석이 자리를 매주 월요일마다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휙 던졌다. 그 동안 우리 반은 달마다 자리를 바꾸어 앉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의 맞장구가 있었고, 결국 그 제안은 월요일 아침이면 하는 우리반 회의에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자리를 바꾸는 횟수를 늘리겠다는 원칙이 강했던 것일까. 왜 그러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나쁜지에 대한 검토도 없이 두세 가지 방법을 발표하더니 바로 표결에 돌입하는 녀석들. 잘 되었다 싶었다. 이참에 다수결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결정 사항에 따라 월요일인 그 날 바로 자리를 바꾸었다. 자리를 바꾸는 방법은 내 마음대로... 여기저기 투덜투덜 거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참을 지켜보다 아이들에게 회의란 것이 무엇이어야 할까 하는 이야기부터 꺼내놓았다.

 

회의를 하라고 했더니 각각에 대한 검토 없이 다수결로 무엇인가를 순식간에 결정해버리고 말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먼저 짚고, 결국 합의를 해놓은 게 언제 자리를 바꿀 것인가를 빼고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회의가 올바로 진행되려면 각각의 방법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이 있은 후에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 또 해당 시기마다 자리를 바꾸었을 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며 자리를 정할 것인가 하는 방법까지도 의논했어야 맞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덧붙여 우리가 회의를 한다는 것은 다수결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삶 속에서 회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국 아이들은 회의를 다시 진행하겠노라고 했고, 어설프고 불편했지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결론은 주마다 자리를 바꾸는 것으로 하고 자리를 정하는 방법도 결정했다. 더 나아가 자리 바꾸는 주기가 짧아지면 예상되는 문제에 대한 보완책도 정해 놓고서 마무리를 지었다.

 

아이들의 회의는 차츰 습관적인 다수결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요사이 진행되고 있는 목공수업의 과정에서 아이들의 변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학교 5,6학년 아이들은 해마다 목공수업을 한다. 무엇인가 조그만 물건을 만들어 가곤 하는 목공체험이 아니라 함께 사용할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꾸미는 그야말로 목공수업을 진행한다. 작년 5,6학년은 목공수업을 통해 소리마루라고 하는 놀이터를 하나 만들었고, 현재는 전체 학생들이 즐겁게 뛰어 노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는 중앙현관을 꾸며보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두 주간은 아이들과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각자 모눈종이에 디자인을 해보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 처음에는 책상과 책장, 의자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생각이 두 주 째는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큐브 형태의 방을 만들자는 이야기부터 책장을 계단 삼아 올라갈 수 있는 다람쥐통 형태의 독서방, 전교생의 소원을 매달 수 있는 소원나무, 신발걸이 등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이야기들을 칠판에 적어 놓고 먼저 모둠별로 무엇을 만들면 좋을 것인가 하는 것을 두 가지 정도씩 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선 전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결정하는 시간. 모둠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꺼내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모둠 안에서 차근차근 의견들이 정리되어 가기 시작했고, 모둠별 의견을 듣고 토론을 통해 하나로 모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다른 의견들 속에서도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들의 의견을 또 꺼내 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합리적이다 생각하면 수긍을 하기도 했고, 때론 다른 생각들에 맞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설득하고자 애 쓰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이야기를 할만도 한데 어느 누구도 다수결을 꺼내들지 않고 모든 친구들이 합의할 때까지 회의를 이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도 신기한 모습이었지만 목공 선생님께서 놀라워하셨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긴 시간의 아이디어 회의 끝에 전교생의 소원을 매단 소원 나무를 만들고, 그 아래에는 어두운 중앙 현관을 간접 조명으로 밝혀줄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는 치즈형태의 의자(안에는 오렌지색 조명을 포함)를 만들자는 의견으로 결정되었다.

 

지난주까지의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어제부턴 공방에 가서 목공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업은 두 모둠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한 모둠은 치즈등상자를 만들고, 또 한 모둠은 소원나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모둠은 10명의 친구들이 작업을 하고, 또 한 모둠은 11명의 친구들이 작업을 했다. 함께 하기에는 모둠마다 속한 사람의 수가 많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한명도 소외됨 없이, 커다란 갈등도 없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으며 모든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치즈등상자를 만드는 모둠 아이들 모습 속에서는 치수를 재어가며 못 박을 자리를 정하는 과정부터 구멍을 뚫고 나사를 박아 조립하는 과정까지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모든 친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가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소원나무를 만드는 모둠 아이들은 이후 활용까지 고민하며 나무줄기와 나뭇가지의 배치를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과 함께 나무의 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방법을 의논하는 모습, 또 도와가며 구멍을 뚫고 마무리까지 해내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후 녀석들이 만든 것들은 학교에 들어서면 만나게 될 중앙현관의 한 쪽 벽면을 수놓게 될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거칠고 투박할지 모르지만 학교 공간에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학교 민주주의도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때론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지라도 아이들의 자리를 조금 더 넓혀 주는 것, 조금은 더디 가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가는 것... 그런 것 말이다.

 

학교에서 민주주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거창한 프로그램 이야기나 교장, 교감을 비롯한 관리자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부분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운다는 건 결국은 살아가는 일이니 민주주의를 아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민주적으로 살아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겪어 본 아이들이 또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 갈 테니 말이다.

 

어느 날 오후 지금은 중3에 올라가서 생활하고 있는 OO이의 아버지로부터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아침에 OO이와 학교에 가는데, OO이가 죽백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왜냐니까 토론으로 수업하는 게 좋은 거라는 것을 지금은 알겠다고 하더군요. 좋은 오후 되세요.”


심은보 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8

[한반도 평화읽기]



담대한 구상과 유리그릇 :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정창현


연속적인 정상회담에 합의

 

조만간 남쪽 예술단이 방북해 공연한다. 공연 제목은 봄이 온다이다. 제목처럼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지나가고 평화의 봄이 찾아오고 있다.


남과 북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세를 대화·협상 국면으로 반전시켰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방한한 김여정 특사(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는 청와대를 예방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한 달쯤 뒤인 35일 남쪽의 대북특사단이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1시간의 짧은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남과 북은 4월 말 판문점 우리 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주제로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남측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남북 정상 간의 핫라인 설치도 합의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속적인 노력과 북측의 호응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기회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북특사단을 통해 북미정상회담도 제안했다. 대북특사단의 북한 방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특별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전례 없는 북미정상회담에 함께하면 두 정상이 역사적인 돌파구(historic breakthrough)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전했고, 공개되지 않은 특별메시지에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신뢰구축의 일환으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리스크(위험)가 있다는 참모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즉석에서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북한이 제시한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 비핵화 회담 의지 표명에 일단 신뢰를 보낸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간 접촉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도 상당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제한적 대북 예방공격 검토 등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나돌던 지난해 말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흐름이다. 신년사에서 99(북한 정권수립 70주년)의 대규모 행사를 위한 평화적 환경조성을 언급한 북한이 예상보다 전향적으로, 속전속결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기 1년 안에 남북대화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 올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행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정전협정 65년 만에 종전선언나오나

 

남북, 북미정상회담 합의로 한반도 정세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4월과 5월 한반도에서는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의 압박과 개입을 골자로 하는 대북정책, 전략국가론에 입각한 북한의 포괄적 세계전략이 부딪히는 정상외교의 장이 펼쳐진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중국, 일본과 정상회담을 통해 공조다지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롭게 외교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북한도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상무조(태스크포스팀)를 조직해 남북, 북미정상회담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26일 마침내 김정은 위원장이 첫 정상외교에 나서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했다.

 

평창올림픽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청와대(2018년 작성)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진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남측의 대북 특사단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청와대(2018년 작성)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진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구체적인 성과로는 종전선언이 거론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언급하며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남··3국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문제를 놓고 역사적 담판을 짓는 데 필요하다면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과 셋이서 직접 머리를 맞대자는 얘기다. 성사가 된다면 한반도 문제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자리가 될 수 있고, 종전선언에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담대한 구상이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남북정상회담에서 의견 조율 후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도록 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2+2회담방식이다.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미정상회담···중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정상외교를 통해 종전선언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를 위한 6자회담과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남···중의 4자회담을 병행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울과 평양에 남북연락사무소가 개설되고, 뒤이어 평양과 워싱턴에도 북미연락사무소가 개설될 수 있다. 세부적인 사안으로 한미연합훈련의 유연성 확보, 동북아 군사적 균형자 역할로의 주한미군의 지위 변화 등이 모색되고, 남북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포괄적인 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 북미정상회담은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선순환 구도를 핵심으로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의 정책시험대이자 실현과정이다. 단계별로 회담결과를 예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상황을 돌파하면서 평화만들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도 언급한 것처럼 지금의 대화국면은 과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과도 같다. 현재로선 전초전 격인 4월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5월 북미정상회담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최종적인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와 국면을 거쳐 최대 난제인 검증과 체제보장문제가 타결되어야 한다. 정상회담에서 큰 틀의 합의가 있더라도 실무회담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예상되지만 남이나 북이나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고 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본 원고는 2018327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정창현현대사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현대사전문기자와 <민족21> 편집주간을 역임했으며, 국가기록원과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7

[시선 | 평화의 마중물]



로힝야 난민촌에서 묻는다. “평화가 무엇인가?”


송강


당신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이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 맴돈다. 예수의 산상수훈, 간디의 비폭력 저항, 마틴 루터 킹의 꿈, 갈퉁의 적극적 평화 등등. 그러나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의 파편들 아래로 지극히 단순한 대답이 침전된다. 나에게 평화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평화이고 자기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을 다시금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평화 운동이 아닐까?

 

나는 이 평화에 대한 진실을 로힝야 족의 현실 속에서 더 실감하고 있다. 미얀마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방글라데시로 여러 차례에 걸쳐 추방당했다. 이렇게 강제로 쫓겨난 로힝야 족의 수가 70만 명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6천 여명이 학살당하고 2만 여명의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는 끔찍한 참화를 겪었다. 국경을 이루는 나프강과 인도양을 배로 건너다 배가 파선하거나 침몰하여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자 실제 정치에서도 실권자가 된 아웅산 수치여사나 자비를 가르치는 미얀마 불자들도 동정이나 연민을 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군부독재의 탄압에 저항했던 미얀마의 민주 투사들조차도 로힝야족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1824년 영국이 미얀마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을 때 당시 인도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을 데려와 앞잡이로 부렸기 때문에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로힝야족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방인들이요 쫓아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로힝야족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미 7~8세기에 자신들이 살고 있던 라카인 주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고 이미 당시부터 이슬람지도자 술탄이 라카인 지역을 통치했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현재 로힝야족이 당하고 있는 대량학살과 강간, 강제 추방과 인종차별은 비인도적인 만행으로 국제 사회의 규탄과 응징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개척자1)들의 로힝야족 현지 조사팀의 일원으로 작년 말부터 이번 달까지 두 차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촌에 파견되었었다. 난민촌이 시작되는 쿠트팔롱에 들어섰던 첫날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난민 천막들의 행렬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위에 검은 비닐을 덮은 허술한 천막집에서 여러 세대의 대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치 독일이나 전쟁 포로들의 집단 수용소 같아 보였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접경지역의 로힝야 난민촌은 약 10여 군데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비좁은 땅 덩어리에 작게는 4~5만에서 10만 명이상 되는 난민들이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 속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살고 있다. 각각의 난민촌 안에는 다시 A, B, C, D순으로 나뉘어진 블록들이 있는데 한 블록 안에는 대강 100가정이 모여 산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각 블록에는 마지라는 봉사자가 있는데 실상 이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협조하는 감시자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는 탄압을 피해 미얀마를 탈출한 로힝야족을 불쌍한 난민들이라고 여기지만 방글라데시 군인들은 이들을 자기 나라에 불법 침입한 범죄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로힝야 난민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날품팔이 이외에 취업 허가를 받을 수도 없다. 바닥에 기초를 놓고 영구적으로 살아갈 집을 짓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로힝야 족에게 있어서 현재의 난민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막장과도 같다


수많은 눈에 잘 띄는 큰길가에는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들이 로힝야를 위해 돕고 있는 000”, “로힝야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000”, “인도주의의 챔피언 000” 등등 요란스럽게 자기 활동을 선전해 대지만 정작 로힝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앞길을 헤쳐 나가도록 보이지 않게 묵묵히 돕고 있는 단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 종족의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로힝야족 청년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로힝야 난민촌

 

개척자들이 난민촌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난민촌의 어린이들이 배고프고 아프고 지쳐서 슬픈 기색으로 힘없이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겠지만 실상은 병들어 누워 있는 소수의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처럼 스스로 별별 희한한 놀이를 만들어 친구들과 명랑하게 뛰어 논다. 어디서 그런 창의력과 에너지가 생기는지 경이롭고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가 난민촌 마을을 찾아가 돗자리를 펴고 크레용과 종이를 놓아두면 아이들은 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종이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 자기 자녀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어서 부모들과 이웃들이 기웃거린다. 찰흙을 갖고 어떤 모양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난민촌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아이들과 함께 집을 방문해 보면 아이들의 아빠가 죽었거나 가족 가운데 장애인이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만성질환 환자가 있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난민촌의 어두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UN이나 국제 구호단체들의 일반적인 난민 지원 활동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들은 이런 취약한 난민들을 찾아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친구가 되고 있다.

 

돗자리학교

 

난민촌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들

 

남을 도와주면서도 욕을 먹기가 쉽다. 다른 사람은 도움을 받는데 자신은 도움을 못 받게 되면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도움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난민촌의 한 블록에 만도 수백, 수천 명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데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지원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과 세심한 분배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여러 난민촌에서 활동하면서 적은 돈으로 아무도 불만이 생기지 않게 도움을 주고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이웃 난민들에게 조차 감사와 환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약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돕는 것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미얀마 군인들의 학살로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여인들이 많다. 이 여인들은 이슬람 관습에 따라 홀로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어서 거의 어두운 천막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감옥 안의 감옥에 갇힌 셈이다. 매달 두 번씩 배급 받는 양식을 받으러 갈 수가 없어서 받는 양식의 일부를 수고비 대신 주어서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강제 추방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병들어 누워 있어도 돌볼 사람이 없다. 시설이 잘 갖춰진 일반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난민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지옥 같은 현실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다른 난민촌에 비해 비교적 많은 천막 병원들이 설치되어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MSF)나 적신월사(무슬림국가의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적인 민간단체들 뿐 아니라 많은 이슬람 단체들의 의료지원 활동도 눈에 띈다. 가히 민간 의료 시민단체들이 봉사 경쟁을 하는 각축장과도 같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난민촌 병원들이 감기나 배탈정도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1차 진료소라는 게 문제다. 당뇨나 고혈압, 관절염과 같은 만성 질환의 환자들이나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못된다. 난민촌에는 이렇게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장기적인 의료지원이 필요한 환자들이 방치되어 있다.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 우리를 돕고 있는 한 로힝야 족 친구는 만삭이 된 아내와 작은 나무배를 타고 피란하면서 3일 밤 3일 낮을 배 안에서 지내야 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출렁이는 배 위에서 아내가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난민촌에 새롭게 정착하면서 아기는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아기를 방글라데시의 모래 언덕에 묻어야 했다.


로힝야 난민캠프에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여인들이 있다. 바로 미얀마 군인들에 의해 강간피해를 당한 여인들이다. 국제 기관들은 그 숫자가 2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피해 여성들 가운데는 결국 임신하게 되어 아비 없는 아이들을 출산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기되거나 아무도 돌보려 들지 않는 불행한 고아가 되어버린다.


특히 이런 성폭행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려 들기 보다는 저주하고 수치스러워 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더 극심하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더 가혹한 2차 피해를 당한다. 성폭행을 당한 어린 소녀들이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경우 쉽게 인근 콕스 바자르나 수도 다카 혹은 인도의 콜카타 등지에 성매매를 위해 팔려 나가게 된다. 무슬림 사회에서 매매춘은 당연히 불법이다. 그러나 관광지인 콕스 바자르의 후락한 골목들 안에는 성매매를 위한 허름한 모텔들이 늘어서 있고 이 매음굴에서 로힝야족의 어린 소녀들을 쉽게 소개 받을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로힝야족 통행금지 구역까지 팔려 나온 데에는 10군데 넘는 방글라데시 군인과 경찰의 검문소에서 군경들과 인신매매단 사이의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트팔롱 난민촌의 평화학교

 

난민들을 함께 돕고자 하는 로힝야 청년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로힝야 난민촌에도 이런 약자들을 돕는 일을 시샘하거나 불만을 갖고 방해하려 드는 이웃들은 없다. 남을 돕는데도 오히려 환영하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기 보다는 로힝야 청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로힝야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부족 가운데 이런 연약한 지체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로힝야 난민들이 그런 회합을 하거나 단체를 결성하게 되면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체포되거나 수감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이나 강제추방과 같은 가혹한 불이익을 무릅쓰고 라도 동족을 돕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는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척자들은 이런 청년들과 함께 이들이 쫓겨난 자신들의 고향 라카인 주까지 다시 돌아가는 멀고 험한 길을 동행할 것이다. 자기 땅이 있고 자기 집이 있었던 그곳, 자기 부모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마셔왔던 샘물을 다시 찾아가기까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길이 평화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5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노예제도, 인간이 인간에게 빼앗은 인권


김소울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건 신생 국가 아메리카.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완전하게 반하는 뜨거운 감자가 있었으니, 바로 노예제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땅의 주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고, 그들을 노예로 완전하게 부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자 서양인들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노예사냥꾼을 이용하여 흑인을 납치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의 부제는 <폭풍우가 밀려오자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바다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납치되어 배에 실려 팔려가던 노예들이 바다에서 겪은 실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783년 노예들은 족쇄가 채워져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비좁은 배의 바닥에 누워 몇 개월 동안의 항해를 견뎌야 했다. 최대한 많은 노예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실에 노예들을 눕혔고, 노예들은 물건처럼 온 몸이 고정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며 항해가 어려워지고 음식이 부족해지자 상인들은 다치거나 병드는 등 살아있는 이들마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만다. 이 항해 도중 1/3 이상이 사망하였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1840)

 

노예제도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1672년 영국의 찰스 2세는 왕립회사에 노예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 회사는 이후 약 90년간 백만 명이 넘는 노예를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게 되는데, 이 노예무역은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였고 17C-19C 거래된 흑인 노예들의 수는 1,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과거에는 단 맛을 내는 식품 재료는 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코란과 함께 서쪽으로 꿀보다 달콤한 설탕이 전해지게 된다. 11세기 말 설탕이 유럽에 상륙하자 유럽인들은 순식간에 설탕의 강력한 단 맛을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설탕의 원료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경작지를 위해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엄청난 인원이 노예무역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노예로 팔려간 이들은 끌려간 땅에 사탕수수 모종을 심고, 수확하였으며, 그것을 빻아 설탕을 만들어 냈다. 1800년경 당시 영국인 250명의 연간 설탕 소비량이 1톤에 달한 것으로 집계될 만큼 그들의 설탕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으며 1톤의 설탕은 흑인노예 한명이 평생을 바쳐 수확해 내는 양이었다. 설탕에 가장 탐닉했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들을 팔기 위해 보낸 선박의 수는 2,704척이다. 이러는 가운데 200-400만 명의 노예가 항해 중 사망하게 된다.


 프랑수와 오귀스트 비아르, 노예무역(1833)

 

비아르가 그린 <노예무역>이라는 그림 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납치해 온 흑인 족장이 백인 상인과 흥정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백인 귀족은 편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빈번하게 일어났던 노예무역, 그리고 흑인노예를 그저 경매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백인들의 끔찍했던 과거를 기록한 작품이다. 노예는 서양인들에게 화물이나 말과 같이 거래해야 할 물건에 불과했고, 그런 노예에게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흑인 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 당시 전 세계가 양모 대신 면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면화 재배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꼭 필요했다. 면화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채찍질을 했고, 도망가다가 붙잡히면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뺏는 일까지 일삼았다. 그러던 중, 1873년 버지니아 주에서 냇 터너라는 흑인 노예가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살해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흑인노예 10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착한 흑인 노예 톰이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내용을 읽은 미국인들은 노예제도의 잔혹함에 대해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예제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가던 18614,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는 길고 소모적이며 비극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9, 링컨 대통령은 중대한 노예 해방령을 내렸다. 그는 남부 연합의 일부를 이루는 주에 사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고 북부에서도 노예제를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못했으며, 노예제 해방령은 부분적으로 밖에 실시되지 못하였다.

 

1864년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링컨은 완전한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수정을 제시했으며, 1865년 초 의회를 통해 수정안을 강행한 후, 링컨 대통령은 암살당하게 된다. 헌법을 완전하게 수정하기 전 까지 법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했던 미국은 1865년 헌법수정안을 선포하고 미국과 그 영토 내 노예제도를 헌법상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미국의 주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했고, 1995년이 되어서야 미시시피주를 마지막으로 미국의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비준하게 된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2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너도밤나무골에서 봄인사 드립니다. 이제 4월이니 한국에도 봄이 찾아왔겠지요. 아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미세먼지 때문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봄비가 내려 모두 씻어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봄소식을 전해놓고서 오늘은 눈 소식을 먼저 이야기 할까 합니다. 작년 12월에 보낸 편지에서 눈 소식을 잠깐 전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눈이 내리고 얼마 안 있어서 다 녹아 버렸습니다. 도버 해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닷바람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눈이 제대로 왔습니다. 밤새 내린 눈이 차곡차곡 쌓여서 아침이 되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눈이 쌓였다.” 그냥 눈이 왔다가 아니라 쌓였다였습니다. 덕분에 공동체는 평일인데도 눈 축제의 날을 선포하고 아이들과 어른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언덕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신나게 썰매를 탔습니다. 처음에는 각자 타는 썰매에 앉아 내려가다가 누가 커다란 장판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여럿이 앉아서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싣고 내려갈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 무려 25명이 함께 타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침나절에 썰매를 타고,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미식축구를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에 따뜻한 물엿을 풀어 만든 눈 엿을 먹으며 함께 웃어봤습니다.

 

 

좀처럼 날씨가 영하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영국 남동부에서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눈에서 뒹굴 날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눈 놀이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언덕 가에 노란색 수선화가 아이들 웃음 짓는 모양으로 피어나는 봄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공을 차고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동네 개와 함께 달리기 경주를 하며 놉니다. 그렇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런던 북부의 한 학교에서 열린 용서 컨퍼런스에 초대받아 다녀온 마을 식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 수선화가 핀 언덕 아래에서 봄 청소를 하는 마을 청년들 <출처: bruderhof.com/ko>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언제 한 번 편지에서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비폭력 갈등 해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브레이킹더사이클이라는 프로그램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저희 마을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 부부가 런던 북부에 있는 한 학교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학교는 용서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강사로 참여한 분 중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온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컨퍼런스에서 아이들에게 게임을 가르쳐준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숲에 모여서 한 곳에 어떤 물건을 숨겨 두고, 여럿이 함께 찾기 시작해서 먼저 찾아온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재빨리 물건을 찾아서 출발 장소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놀이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안 해요.” 이제는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아무튼 게임은 시작됐고, 아이들은 숨겨놓은 물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먼저 찾겠다고 달려가는 아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 대신 서로 숙닥숙닥 의논을 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물건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아이가 좋은 생각을 냈는지 아이들이 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은 물건을 찾는 데 성공했고, 소식을 들은 다른 아이들도 모두 물건을 찾은 쪽으로 달려갔고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출발점으로 함께 돌아왔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분투요! 친구가 있으니까 제가 있지요.” 맞습니다. 아이들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아프리카의 전통 사상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자라온 것입니다. 이 사상을 남아프리카 말로는 우분투라고 하는데 남아프리카의 평화 운동, 그리고 이어진 자발적 과거사 청산의 정신적 뿌리가 된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이런 공동체적 생각의 뿌리가 있었기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1918-2013)는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보복적 정의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한 과거사 청산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데스몬트 투투 대주교는 인간은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우분투의 핵심입니다라고 했고, 그렇게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흑인과 백인 사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국경을 초월하고 사람들 마음에 보편적으로 녹아있는 우분투 사상, 즉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마음을 서로 살리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봄소식과 함께 그런 노래 하나를 소개하며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의 조운 휘트니와 알렉스 크레이머 부부가 1940년대에 지은 노래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No Man’s is an Island)’입니다. 언젠가 어깨동무 식구들과 함께 흥얼거리며 노래할 날을 꿈꿔 봅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No Man’s is an Island)’


(후렴)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 홀로 서 있게 할 수는 없어.

다른 이의 기쁨은 나의 기쁨

나의 기쁨은 다른 이의 기쁨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

그러니 나는 모두를 형제로, 친구로 여기고 의지하겠어.

 

1.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시작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 노래 소리는 내 가슴을 울리네.

2. 그 사람들이 부르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노래는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그 기쁨은 누구도 파괴할 수 없어.

3. 이 땅은 유혈사태와 슬픔, 비애,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곧 사람들이 다시 함께 노래할 날이 오리라.

 

노래듣기(클릭하시면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201841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께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 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0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1빠 선생’ 이야기 


심은보



저녁밥을 먹는데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기어이 1빠 선생.... 저녁밥을 먹다 말고 후다닥 파출소로 달려갔다. 가보니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아 무언인가 적고 있고 1빠 선생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다. 고딩 두 녀석과 맞짱을 뜬 모양이다. 고등학생 코에 핏자국 선명한 화장지까지 꽂혀 있는 걸 보니...이것 참...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1빠 선생은 우리 반 민이 녀석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앞 이야기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녀석을 따라 올해 6학년 1반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과 만난 첫 날 함께 정한 우리 반 이름은 심과 함께’. 반 이름을 정하고, 첫 날부터 뭘 할 때마다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우리 민이 녀석에게 나는 ‘1빠 선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라는 낱말을 교실 속에서 쓰는 일이 참 불편하면서도 녀석에게는 뭔가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녀석은 줄을 설 때도 1, 발표를 할 때도 1, 밥을 먹을 때도 1. 그런 특별함을 부여받게 되었다. 수업 시간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려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도 첫 날은 참 잘 해내려고 애 쓰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더구나 작년까지 먹었던 약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 지내는 모습이 참 기특했었다.

 

그렇게 주말이 넘어가고 교실에선 여전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친구 건들고 저 친구 건들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지만 커다란 문제없이 며칠 잘 지냈을까.

 

어느 날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OO 녀석과 싸움이 한판 진하게 붙은 모양. 급하게 뛰어나가 OO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흥분해 있는 1빠 선생의 두 팔을 강하게 잡았다. 녀석 이름을 부르며 손에 힘을 빼고 선생님을 보라고 몇 차례 이야기를 했다. 니가 그렇게 하고 나면 선생님이 니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겠노라고 힘을 풀라고 했다. 한참 씩씩대던 녀석이 조금 뒤 수그러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억울한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 1학년 동생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OO이가 1학년 동생에게 저런 놈이랑 놀지마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래서 화가 나서 밀었는데 교문 벽에 OO이가 부딪혔다고. 듣고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날만도 했다. 녀석의 억울한 마음을 읽어주고 오늘 하려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1년 동안 화가 나더라도 그 동안 쉽사리 넘어섰던 선들을 넘지 않고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방법도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이 상황마다 너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주겠노라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날 갈등은 사과를 할 부분은 하고, 사과를 받을 부분은 받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 생겨나는 갈등들 속에서는 위험한 상황이 자꾸만 나타났다. 특히 어느 주말을 지내고 온 녀석의 모습은 그 전 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멍 자국도 보이고. 집에서 일이 좀 있었던 듯 했다. 아버지에게 맞은 모양.

 

그 한 주 내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자 친구 한 녀석에게 자꾸만 다가가서 심각한 정도로 괴롭히는 모습을 보이고, 순간 욱해서 아무 관련 없는 친구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동생들을 때리기도 하고 전보다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에겐 자꾸만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고 결국엔 자꾸만 넘지 말아야할 선들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다. 교실 안 뿐만 아니라 교실 밖을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녀석을 멀쩡한 상태에서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 속에선 순식간에 흥분하여 돌변해버렸다.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물건을 부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대상을 가리지도 않았다. 담임인 내게도,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도. 그 동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지만 녀석의 경우엔 교육의 영역을 넘어서 치료의 영역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본인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고 어른들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의 행동 패턴들. 과잉행동을 넘어 분노 조절에 대해선 어느 정도 다른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인데 올핸 설날이후에 약까지 끊어버렸다고 했다. 아빠와 통화를 하며 우선 병원 진료를 이어가 줄 것을 부탁드렸다. 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찾아나가려고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상담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의 도움을 얻어 상담 및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녀석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녀석의 흥분 상태를 잠재워줄 무언가였다.

 

아빠와 한참 통화를 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면 그냥 신고하라는 말과 함께 약값도 아까워서 더 이상 약을 먹이는 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은 부모로서 최소한의 역할만 하겠노라고 했다. 한참을 통화하며 눈물이 절로 흘렀다.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이니 아빠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설득하는 사이 녀석이 친구들 속에서 하는 행동 패턴은 더욱 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 속에서 녀석의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녀석의 살기 위한 몸부림을 마주하며 사실 교육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겨우 아버지를 설득하여 4월이 훌쩍 넘어서야 녀석과 함께 병원엘 다녀왔다. 약도 받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너무 많은 상황이 교실 안팎에서 일어나버린 뒤였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으로 치달아버렸다. 마주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상황들을 너무도 많이 마주하게 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아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였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학교에서는 1년째 무사히 살아내고 있긴 하지만 현재 이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 많은 문제들과 마주하면 안 될 듯 하여 이번 주에 급하게 등교를 중지해 놓은 상황이다. 녀석의 가정엔 상담 선생님이 함께 정기적으로 하려고 하고 있다. 그 첫 날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한 시간도 안 된 틈에 집 앞 공원에서 고등학생들과 그런 시비가 붙어 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 것이고 말이다.

 

녀석 생각에, 녀석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며칠 밤을 못자며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딱히 학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교육의 영역과 치유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이 필요한 까닭이다. 치료의 영역까지 학교가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녀석 문제로 벌써 두 차례 반모임을 했다. 우리 학부모님들 모두 녀석의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워 때론 눈물도 짓고, 때론 함께 도울 방법을 모색 해보고. 하지만 마땅치 않은 우리들의 한계에 절망도 했다. 참으로 답답한 현재 상황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지역 사회는, 국가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다섯 번째 학교까지 강제전학으로 녀석이 학교를 돌고 돌 동안 녀석을 관리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전혀 갖추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책임을 학교로 던져놓은 것 빼놓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또 다른 학교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문제 해결을 지원해야 할 터인데... 녀석이 이렇게 어른이 된다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것인가. 그 모습이 눈에 빤히 보이는 녀석의 삶은 어떻게 할 것인지, 또 이후에 치를 사회적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온통 내 머릿속엔 녀석 생각이라 나의 일상이 이래저래 꼬여 버렸지만 나는 녀석이 우리학교에서 졸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도울 생각이다. 우리 지역에서 참으로 유명한 우리 '1빠 선생'을 이렇게 계속해서 방치할 것인지를 묻고 그 대안을 요구하고 만들어 가는 일에도 함께 해야겠다.


오늘은 부디 녀석이 무사히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할 터인데...




심은보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4.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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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이슈]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정영철


기원전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도시 올림피아에서는 서로 다른 (그리스)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4년에 한 번씩 모여 평화의 제전을 열었다고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국가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올림픽의 기원으로 이야기되는 ‘올림피아 제전’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근대적인 형태로 부활하게 되었다.


올림픽의 출발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우스’ 신 앞에서 제전을 벌이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이번 평창올림픽은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에서 남북이 공동입장, 단일팀, 공동응원, 축하공연, 여기에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실, 불과 50여일 전만 하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남북간에 벌어졌으니, 역시 남북관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함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보다 냉정할 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이제 막 한 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북의 김여정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임을 밝히면서 친서를 전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순간 남북간에 넘어야 할 한 고개는 넘었지만, 넘어야 할 더 큰 고갯길이 우리 앞을 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했던 것처럼, ‘여건’을 만들어야 할 과제가 놓여있다. 그 ‘여건’이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결국은 북미의 문제이고, 우리와 미국의 문제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북에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우리 역시 미국과의 대화와 설득에 더 큰 힘을 쏟겠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로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하고, 일본의 반발을 잠재워야 하며, 평창의 분위기를 이어나가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북도 역시 중국, 러시아와의 다각도 협력의 강화, 관계의 재편 등을 시도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 방러도 모색할 것이다. 또한, 미국을 향해서도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는 온전히 남북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미국이다. 이번에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의 태도와 발언에서 보이듯이, 북과의 접촉과 대화는 아예 멀리하고 탈북자 면담과 천안함 기념관 방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더니, 아예 ‘최대폭의 제재’를 실시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펜스 부통령의 발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북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핵화와 별개로 남북관계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쩌면 ‘내정간섭’에 가까운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남북이 만나서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데에 미국이 간섭할 권리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북의 핵과 미사일 시험 도발 – 제재와 압박 – 더 큰 도발 – 더 큰 제재’의 악순환이었다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환영과 환대 – 평화의 노력 – 더 큰 환영과 환대 –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 큰 평화 노력’속에는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넘어서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장하는 한미동맹은 평화를 위한 동맹이지, 전쟁을 위한 동맹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의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미국의 행위는 동맹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을 벌여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면,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더 큰 평화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합쳐져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평화를 말하고, 통일의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평화의 제전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평창올림픽이 그러한 평화의 제전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북이 손잡고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고, 함께 땀을 흘리며 ‘Corea’를 외쳤고, 남북의 응원단만이 아닌 해외의 동포들까지 함께 하는 응원단이 만들어져 평화를 노래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올림픽 이후까지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부터 ‘더 큰 평화 노력’이 요구된다.


2016-17년 촛불이 한반도 남단을 환하게 밝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남북이 함께 한반도 전체를 환하게 밝힐 ‘평화의 촛불’을 밝힐 시간이다.


자, 또 한 번 평화를 위한 촛불을 밝혀보자!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