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이슈]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정영철


기원전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도시 올림피아에서는 서로 다른 (그리스)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4년에 한 번씩 모여 평화의 제전을 열었다고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국가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올림픽의 기원으로 이야기되는 ‘올림피아 제전’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근대적인 형태로 부활하게 되었다.


올림픽의 출발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우스’ 신 앞에서 제전을 벌이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이번 평창올림픽은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에서 남북이 공동입장, 단일팀, 공동응원, 축하공연, 여기에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실, 불과 50여일 전만 하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남북간에 벌어졌으니, 역시 남북관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함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보다 냉정할 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이제 막 한 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북의 김여정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임을 밝히면서 친서를 전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순간 남북간에 넘어야 할 한 고개는 넘었지만, 넘어야 할 더 큰 고갯길이 우리 앞을 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했던 것처럼, ‘여건’을 만들어야 할 과제가 놓여있다. 그 ‘여건’이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결국은 북미의 문제이고, 우리와 미국의 문제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북에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우리 역시 미국과의 대화와 설득에 더 큰 힘을 쏟겠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로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하고, 일본의 반발을 잠재워야 하며, 평창의 분위기를 이어나가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북도 역시 중국, 러시아와의 다각도 협력의 강화, 관계의 재편 등을 시도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 방러도 모색할 것이다. 또한, 미국을 향해서도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는 온전히 남북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미국이다. 이번에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의 태도와 발언에서 보이듯이, 북과의 접촉과 대화는 아예 멀리하고 탈북자 면담과 천안함 기념관 방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더니, 아예 ‘최대폭의 제재’를 실시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펜스 부통령의 발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북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핵화와 별개로 남북관계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쩌면 ‘내정간섭’에 가까운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남북이 만나서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데에 미국이 간섭할 권리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북의 핵과 미사일 시험 도발 – 제재와 압박 – 더 큰 도발 – 더 큰 제재’의 악순환이었다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환영과 환대 – 평화의 노력 – 더 큰 환영과 환대 –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 큰 평화 노력’속에는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넘어서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장하는 한미동맹은 평화를 위한 동맹이지, 전쟁을 위한 동맹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의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미국의 행위는 동맹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을 벌여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면,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더 큰 평화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합쳐져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평화를 말하고, 통일의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평화의 제전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평창올림픽이 그러한 평화의 제전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북이 손잡고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고, 함께 땀을 흘리며 ‘Corea’를 외쳤고, 남북의 응원단만이 아닌 해외의 동포들까지 함께 하는 응원단이 만들어져 평화를 노래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올림픽 이후까지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부터 ‘더 큰 평화 노력’이 요구된다.


2016-17년 촛불이 한반도 남단을 환하게 밝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남북이 함께 한반도 전체를 환하게 밝힐 ‘평화의 촛불’을 밝힐 시간이다.


자, 또 한 번 평화를 위한 촛불을 밝혀보자!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평화의 마중물 ]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송강호


제주도는 아름다운 관광지다. 일년의 거의 반은 눈이 덮인 한라산의 위엄을 볼 수 있고 산 자락은 바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산이 좋아서 들어오고 또 바다가 좋아서 찾아오는 섬이다. 전에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중국관광객들이 폭주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내리는 제주 공항의 활주로 아스팔트 밑에는 아직도 신원을 알 수 없는 4.3 사건 당시의 시신들이 고스란히 묻힌 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사실 상 국립공원인 한라산 전체가 학살지였으며 서귀포의 관광지 정방폭포를 비롯한 제주 바닷가 곳곳이 학살터였다. 학살지역을 피하면 제주도에 관광객들이 발디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주도민들에게는 낫지 않은 아픈 상처요 잊혀지지 않는 슬픈 기억이다. 2016년 바로 이곳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정부와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해군 기지에 어느 날엔가 서부터는 미군 군함들과 잠수함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죽 쒀서 개준다더니 우리 나라가 비싼 돈 들여 군사기지를 만들어 실제 유용하게 이용하는 나라는 정작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실제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태평양 전체를 자기집 안마당인 양 활보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아시아의 신흥 초 강대국 중국이 등장하여 태평양의 서쪽은 자기들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게 몹시 마땅치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2차대전에서 자신과 싸워 패망한 일본에게서 오키나와를 빼앗아 군사기지를 세웠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이 끊임없이 기지철수를 요구하고 있어서 불편하던 차에 강정해군기지건설, 이게 웬 떡인가? 최대의 적수 중국의 코앞에 있는 제주도에 미국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해군기지를 그것도 자기나라 돈 하나도 들이지 않고 새로 지어 준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처음에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는 이유가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우회하여 남쪽으로도 공격할 수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대비하여 지리적으로 최남단인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중국의 어선들이 떼로 달려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무장한 해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중국 어선이 아무리 난폭하다한들 이 민간 어선들을 퇴치하기 위해 미사일을 장착한 이지스함이나 어뢰로 무장한 잠수함까지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이도 이치에 닿지 않았다. 그러자 아덴만이나 말래카 해협의 해적들로부터 우리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대양해군이 필요하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우리의 유조선이나 상선이 중국에 의해 공격 당할 수 있다고 겁박하였다. 그러나 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군사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해적 퇴치는 우리 군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럴 경우 심각한 외교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상선을 중국이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중국과 무력 충돌을 일으켜서는 절대 안 된다.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런 횡설수설 이면에는 군인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은밀히 얽혀져있었다. 결국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대 중국 전략 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해군기지건설로 앞으로 초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을 자초한 것 일수도 있다. 저주스런 재앙을 불러오는 위험한 시설인 것이다.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 묻힌 구럼비 바위는 기도와 명상의 터였다. [사진제공: 강정 해군기지반대 대책위]


강정의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운동은 육지 뿐 아니라 바다 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 강정 해상팀]


내가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런 재앙의 불을 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공사중단을 요구했고 해상 공사의 위법성을 증언하였다. 그 결과로 업무방해라는 죄목으로 세 차례나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지금도 재판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불행을 가져온 제주도에 애정이 더 깊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옥중에서 제주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제주도를 위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제주도는 군사기지 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 군인도 전쟁도 군대도 없는, 군사훈련도 전쟁 연습도 없는 평화로운 섬이 되어야 더 아름답고 더 가치 있는 소중한 섬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제주 해군기지를 세계의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평화 대학으로 전환시키자. 매장해 버린 아름답고 거룩한 구럼비 바위의 시멘트 콘크리트를 거둬내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자. 해군 본부는 대학 본부가 되고 군 관사는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도록, 복합 문화센터는 학생회관이 되도록. 굳게 닫힌 군대의 철문이 하루 속히 활짝 열리고 높은 돌벽이 허물어져 평화의 공원으로 개장되도록. 지금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볼 수 조차 없는 중덕 바다에 다시 돌고래 떼들이 몰려와 파도를 차 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강정 앞바다에서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라고 지금도 해군기지를 돌며 기도 드린다


2013년 1월 27일 평화운동가들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지 8주년이 되는 날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선언하였다.

[사진제공: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이미 해군 기지가 지어졌는데 어떻게 이를 다시 되물릴 수 있겠느냐고 시름 섞인 푸념을 한다. 그러나 들어온 길이 있으면 나갈 길도 있는 법이다. 해군기지가 나가면 강정 앞바다를 버리고 떠나가 버린 돌고래들이 상서로운 기운을 몰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제주도의 선주민들이 진심으로 해군기지뿐 아니라 모든 군사기지를 원치 않고 또 군사 기지가 없어지는 것을 원하고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제주도는 더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쳐 외치고 분연히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4.3의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모두 정신적인 외상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으로 가족 중에 한 두 명 이상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고 모든 가족들이 나서지 말라고 눈을 흘기는데 누가 용기 있게 나서서 소리 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제주 도민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귀가 열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제주도를 피곤할 때 쉬고 심심할 때 놀고 오는 한반도 변두리의 부속섬 정도로 여긴다. 군인들은 본토를 지키기 위한 변두리의 국경 초소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몸이 다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제주도가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예인선이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시아 바다의 지정학적 중심지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지난해 한반도는 촛불의 불길로 격동하는 한 해를 보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지난 해의 촛불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담겨있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날을 위해 한라산 남쪽 끝자락에서 군사기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불씨를 지키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이 통일의 횃불이 점화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번져갈 것을 희망하고 상상한다.



송강호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세상과 만나는 인문학]


어린 왕자와 영화인들


송태효


시네아스트 생텍스 
평화주의를 실천한 행동주의 소설가 생텍스의 시네아 스트로서의 삶은 영화사에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 소설가로 성공한 생텍스는 프랑스 유명 감독 레몽 베르 나르 (Raymond Bernard)가 연출한 「안느 -마리 (Anne–Marie)」 (1935) 의 시나리오를 쓰고 피에르 비용 (Poerre Billon) 의 『남방 우편기 (Courrier du Sud)』 (1936) 를 각색 하고 헌팅도 도왔다 .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1940 년 드 골의 런던 망명 정부와 페탱의 비시 프랑스 자치 정부의 위선에 항의하며 조국을 떠나던 생텍스는 피에르 비용에 게 「이고르 (Igor)」 시놉시스를 맡기며 귀국 후 공동 제작 을 제안한다 . 하지만 1944 년 7 월 31 일 동료들의 만류에 도 불구하고 아직 길들지 않는 신종 비행기로 자원 출정 한 마흔네 살의 전투 조종사 생텍스가 지중해에 추락하 며 이 제안도 물거품이 되었다 . 

뉴욕 망명 생활 중에도 생텍스는 모국어 감각 상실을 우려하여 영어 사용을 자제하며 세계의 프랑스인들에게 위 안과 용기를 주는 프랑스의 목소리를 전했다 . 생텍스는 1941 년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초청으로 할리우드를 방문한다 . 그는 기성 화단의 구태 성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새롭게 영화의 길을 선택하여 『게임의 규칙 (Règle du Jeu)을 발표하나 영화의 풍자 대 상인 부르주아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 하 지만 정작 망명지로 택한 미국에서 상영된 그의 작품들 은 관객을 열광시켰다 . 이방인 감독으로 추앙받던 르누 아르가 생텍스의 영화적 재능을 인정하고 『어린 왕자』의 전편인 『사람들의 땅』을 영화화하고자 원작자를 영화의 메카로 모신 것이다 . 

원작의 정신을 이미지로 재탄생시키는 르누아르의 천재적인 발상에 탄복한 생텍스는 자신의 기획안을 녹음한 레코드를 제작하여 르누아르에게 선물하며 서로의 우 정을 나눈다 . 갈리마르 출판사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우정어린 편지와 레코드 내용을 정리한 글을 한데 모아 1999년 『친애하는 르누아르에게 (Cher Renoir)』를 출간하였다. 당시 조종사들의 고난과 동지애를 통해 꺼져가는 양심의 불꽃들을 살리고 서로 소통시키려는 영화적 시도로서 르누아르가 자기 생애 최대의 걸작으로 여긴 이 영화의 제작은 아쉽게도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다 . 하지만 다행히도 데이비드 셀즈닉 제작,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야간 비행 (Vol de Nuit)」 (1933, MGM) 은 오늘날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하다. 야간비행 시청하기



『어린 왕자 』의 영화화 역사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으로 프랑스 최고의 거장 르누아르와 함께 영화사를 풍미한 미국 명감독 오슨 웰스는 위대한 독일 소설가 카프카의 원작을 각색한 「소송(Procès)」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전신인 오르세 역에서 촬영할 정도로 유럽 문화에 정통한 시네아스트였다 . 그 역시 『사람들의 땅 』을 각색하며 그 희열을 친구들에게 쏟아냈고 이어서 『어린 왕자 』의 영화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린 왕자 』를 영화화하려는 그의 제안은 월트 디즈 니사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시민 케인 』에서 오슨 웰스는 이미 어린 왕자의 모험기 형식의 선례를 보여주고 있 다. 그 유명한 ‘로즈버드 ’ 수수께끼를 따라 케인의 어린 시절을 추적해가는 과정은 마치 『어린 왕자 』의 비행사가 어린 왕자의 기원을 풀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지며 그의 죽음을 맞는 것과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 


노골적으로 자신이 어린 왕자임을 천명한 배우도 출현하였으니 할리우드 신화 속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우상으로 남은 영화배우 겸 카레이서 제임스 딘이다 . 제임 스 딘은 열 살 무렵 생텍스를 직접 만났다고 친구에게 자랑한 적도 있다. 『어린 왕자 』의 영화화라는 위대한 꿈을 지닌 제임스 딘이었지만 그 꿈은 자신의 애마 포르셰(Porsche 550 Spyder)를 몰고 가던 1955년 10월 8일 SR 46 도로에서 처참히 부서져 버렸다. 동료 윌리엄 베 스트 (William Bast)가 제임스 딘의 무덤에 새긴 어린 왕자의 한 마디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라는 묘비명이 그의 어린 왕자 사랑을 전한다 . 제임스 딘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어린 왕자』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셜램(Cholame)의 제임스 딘 메모리얼 파크 소재 묘비명. 윗부분에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라고 에칭으로 새긴 구절이 보인다.


드디어 1967년 『어린 왕자 』가 장편 영화로 탄생하게 되니 파라마운트가 제작한 리투아니아 출신 아루나 스 제브리누아스(Arūnas Žebriūnas)감독의 「어린 왕자 (Malenki Prints)」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독특한 분장의 캐릭터들 대화로 구성된 판타지로 오늘날 창작물의 수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무대 연출과 구성으로 높 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시청하기


리투아니아 출신 아루나스 제브리누아스 감독의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영화로 옮기려는 시도 가운데 길들임의 주제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잘 살려낸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감독 스탠리 도넌 (Stanley Donen)의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1974) 이다 . 올드 무비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사랑은 비를 타고로 한국 시네필들에게 잘 알려진 스텐리 도넌의 「어린 왕자」는 생동감 넘치는 현대적 애니메이션 , 시대를 앞서는 안무와 음악 , 뱀 역의 발레 댄서 가수 밥 포시(Robert Louis Bob Fosse), 조종사 역의 리처드 컬리(Richard Kelly), 어린 왕자 역의 스티븐 워너(Steven Warner), 여우 역의 진 와일더 (Gene Wilder) 등의 명배우 캐스팅으로 세상의 찬사를 크게 받았다. 특히 원작의 주요 대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어린 왕자와 뱀 그리고 여우의 우정에 근거한 스토리텔링은 원작자 생텍쥐페리 자신도 흡족해했으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실사를 합성하여 성인과 아동이 함께 보며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즐길 수 있게 편집된 명작이다. 특히 여우와 뱀을 연기하는 두 명배우의 노래와 춤이 인상적인데 뱀 역을 맡은 밥 포시의 문 워크를 마이클 잭슨이 그대로 복원하여 크게 성공하기도 하였다 . 

스탠리 도넌의 「어린 왕자」(1974)의 오프닝 크레딧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원조 밥 포시의 안무. 스탠리 도넌의 「어린 왕자」(1974) 



현대적 감수성으로 부활한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 」 
『어린 왕자』의 감동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부활시키려는 시도도 계속되어 왔다. 이 가운데 『어린 왕자』를 읽고 크게 감동한 드림웍스의 「쿵푸 팬더 」감독 마크 오스본 이 원작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8년간의 노력 끝에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재탄생시켰다. 2015년 제68회 칸 국제영화제는 이 작품을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하여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하였다 . 

어린 왕자와 여우와 소녀, 

마크 오스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2015) 


비행사와 어린왕자, 마크 오스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2015)


생텍스는 일찍이 글과 영상을 통해 세계 시민들 모두에게 전쟁의 공포를 알리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진정한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로서 미국의 참전을 요구하였다. 그의 요구대로 미국이 유럽 전선에 일찍 참전하였다면 독일의 항복도 그만큼 빨랐을 것이고 생텍스는 일찍 조국으로 돌아가 시네아스트로서의 꿈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주의 공군과 해군의 공격을 받고서야 참전하게 된다. 우리의 광복도 그만큼 지연된 것이다 . 프랑스 공화국 법령에 의거 하여 1963년 파리의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된 어린 왕자 생텍스 그리고 그를 사랑한 인디애나의 어린 왕자 제임스 딘의 영혼에 평화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 '아트인라이프 ' 출간 < 월간 태백 > 에 12 회 연재한 동일한 제목의 기사 내용을 반으로 줄이고 <피스레터 > 의 기획 의도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송태효  불문학 박사로 현재 '어린왕자인문학당' 대표와 제주불교문화대학 불교인문학 교수, '성남시지역발전자문위원회' 교육체육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는 예술인가, 어둠의 방-시와 영화 속 그림자 이야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생텍쥐베리 사람들의 땅, 어린 왕자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아메리카 대륙, 승자만을 위한 자유의 나라


김소울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경, 황금과 보석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콜럼버스 일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정복한 강자들이 미화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당시 해양진출을 활발히 도모하던 스페인의 팽창정책과 콜럼버스의 개인적 야망은 일치하였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앞으로 발견하는 지역의 식민지 총독 및 부왕의 칭호를 내리고, 그 곳에서 산출된 귀금속의 1/10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며 그 자손들에게 직위가 영구히 상속될 것이라 명시하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을 했다. 때문에 지금도 카리브해 연안의 섬들을 서인도라 명명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후에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땅임을 밝혀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다.


외젠 들라크루아,『콜럼버스의 귀환』(1839)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영웅으로 칭송 받았으며, 왕과 왕비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게 된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콜럼버스의 귀환>에서는 보석과 귀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명예와 부에 대한 그의 야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콜럼버스의 열망과 욕심은 그를 분명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 영광을 이룩하기 위해서 수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1492년 10월 12일 이후 원주민들에 대한 길고 험한 대학살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이는 유럽인들의 약 400여년에 걸친 아메리카에서의 착취와 정복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과 아메리카 본토의 총독 겸 주지사가 되었으며, 토착 원주민들에게는 공납과 부역을 명령하였다. 신속하게 노예정책을 도입하고, 그들로부터 옥수수와 면화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한편, 금광 채굴 등의 강제 노역을 시키게 된다. 그는 토착 원주민들이 할당량의 금을 채우지 못할 경우 수족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이 때 많은 원주민들이 도망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에 대한 조직적인 몰살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가혹정치로 인해 약 800만명으로 추정되는 타이노(Taino)족이 1500년경, 그가 총독의 자리를 떠날 때 약 10만명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콜럼버스가 떠난 이후에도 그가 표방했던 3G정책은 지속되었다. Gospel(기독교의 전파), Glory(왕에 대한 영광), Gold(황금 약탈)로 요약되는 3G정책 결과 1514년 겨우 22,000명의 토착 원주민들이 생존하였고, 1542년에는 단지 200명의 원주민들만이 살아남았다. 그 이후 토착 원주민은 멸종되었다.


원주민의 땅이지만 식민지가 된 신대륙에서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새롭게 발견된 담배와 같이 귀한 물건들의 교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초기 정복자들은 이 땅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식민지의 교역을 통해 부자가 되어 다시 유럽에서 살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이주정책이 필요했고, 아메리카에 정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토지 50에이커(61,000평)을 제공하는 인두권 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그리하여 초기에 아메리카대륙에 뛰어든 스페인에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뒤따라 식민정책에 합류하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1772)


벤자민 웨스트가 그린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당시 신대륙에 모여든 사람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국의 귀족이었던 윌리엄 펜은 1681년에 펜실베니아에 있는 식민지 땅을 받게 된다. 펜은 영국과 식민 아메리카 등지에서 일어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의 한 부류인 퀘이커(Quarkers) 교인이었다. 퀘이커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교회조직을 부정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성격을 띄고있었다. 이 때문에 성공회와 퀘이커교는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다. 펜은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아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은 후, 그곳을 ‘펜실베니아’라 명명하고, 퀘이커 교인들처럼 박해 받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하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토착 원주민들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우애의 도시라는 의미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원주민들과 윌리엄 펜이 서로 만나 협정을 맺고 선물을 교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우애적이던 영국인들과 원주민들의 관계는 1718년 펜의 사망과 함께 깨지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는 이 그림을 펜의 사망 54년 이후에 그리게 되는데, 그림에서는 후에 일어났던 원주민에 대한 학살 장면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인물들은 윌리엄 펜과 그의 친구들이고, 오른쪽에는 펜실베니아의 토착 원주민들이 보인다. 벤자민 웨스트는 왼편의 인물 뒤에는 석조건물과 배, 그리고 무엇인가를 나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의 인물 뒤에는 나무와 풀, 그리고 벌거벗은 원주민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18세기말 서양 사회를 지배했던 문명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당연시 여기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왼쪽 아래에는 서양식 의복을 말끔하게 입은 인물들이, 오른쪽 아래에는 젖을 먹이고 있는 원주민 여성, 그리고 나무판에 아이를 묶어 놓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뒤편에 서있는 서양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는 반면 원주민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활이 들려 있는데, 이는 결국 서양인들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것이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약 100년이 지난 후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던 영국정부가 다양한 명목으로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식민지인들은 1775년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신대륙에서 시작된 서양인들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들이 일구어 낸 자유의 나라 미국. 그 그늘 아래에는 그들의 자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희생된 수 많은 원주민들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원주민들의 피로 물든 역사 위에 일궈낸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 벤자민 웨스트의 그림 속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영국에서 아리랑을 불러봅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설날을 맞을 준비를 하시겠군요.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게 된 지 이제 10년이 되어 가는데 여전히 저는 음력 설을 지내야 새해가 온 것 같고, 김치 만두를 빚어 떡만두국을 끓여 이웃을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세배도 하고 윷놀이를 노는 시간을 기대합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한국에서는 나이만큼 만두를 먹는다고 말해주었는데 올해는 만두를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깨동무 가족 모두 풍성한 설날을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명절이 오고 한국이 그리워질 때면 저는 아내, 아이들과 노래를 불러보는데 요즘 떠 오르는 노래는 개똥벌레와 아리랑입니다. 개똥벌레는 예전에 한 번 마을의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공동체 축제 때 불렀는데 친숙한 곤충이 등장해서 그런지, 아니면 개똥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소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입에 착착 붙는 노랫가락 때문인지 마을 사람 모두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한 친구는 이 노래를 영어로 번역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아니면 돈 고워에이(Don't go away) 돈 고 워에이 돈 고워에라고 흥얼거리는 친구를 간혹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슬프면서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울다 잠이 든다로 마무리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사람들 노래(folk song)인 포크송 개똥벌레 덕에 친구를 많이 사귀었습니다.


두 번째 노래 아리랑은 이곳 영국 식구들이 가장 잘 아는 한국 민요(folk song)입니다. 한국 손님이 오셨을 때 청하면 곧잘 부르는 노래가 이 노래이고, 런던에서 한국문화 행사가 열리면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저희 마을의 음반 도서관에 가면 미국의 포크송 가수 피트 시거가 세계 여러 나라의 민요를 모아 부른 음반이 있는데 거기에는 한국의 아리랑도 담겨 있습니다. 피트 시거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노래를 부르기 전에 관객들에게 아리랑의 배경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아리랑을 당시 고통당하던 사람들의 애환을 부른 노래인 동시에 남과 북의 사람들이 두루 아는 노래이기때문에 남북의 일치를 상징하는 노래라고 합니다.


피트 시거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정든 터전을 떠나야 했던 여행길에 아리랑을 부르며 슬픔을 달랬고, 서로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방마다 특유의 가락과 노랫말의 아리랑이 불리고 있지요. 그리고 아리랑은 소련 때문에 강제로 고국을 등져야 했던 고려인들에게도 불렸습니다. 저는 예전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17년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독일과 전투를 치르다가 포로로 잡인 고려인들이 수용소에 부른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프로이센 수용소에 갇혔던 김그리고리(김홍준)과 안 스테판(한국 이름 미상)이 불렀던 아리랑 노래가 100년이 지나서 공개된 겁니다.


두 사람이 부르는 애달픈 아리랑 곡조를 듣고 있자니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서 평화가 와서 정든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곳 영국에서 제가 찾던 형제애의 삶을 기쁘게 살고 있지만, 고국의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곳의 상황을 염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쩌다가 저도 모르게 아리랑을 콧노래로 부르게 되는데 그때는 한국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동시에 한국의 평화를 기원하게 됩니다.


고려인 전쟁 포로가 부른 아리랑 듣기


마을 식구들이 저녁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 부르는 모습. 사진: bruderhof.com/ko에서


곧 열릴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의 노래로 아리랑을 연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피트 시거의 말대로 이 노래는 남북 평화의 상징인 게 틀림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치적 입장을 잊은 채 손을 맞잡고 노래를 함께 부르다 보면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습니다. 아직 북한과 미국의 오래된 적대 관계를 풀어야 하는 등 넘어야 할 고개가 많지만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평화의 아리랑을 부르며 교류의 문을 열어나가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어깨동무가 다시 북녘의 어린이병원과 콩우유 공장, 학용품 공장을 찾아가 지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설에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우리 가족, 마을 식구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민요는 모름지기 우리의 삶을 담고 마음을 담아 함께 만들어 부르는 노래라고 하니 저희 나름대로 노랫말을 붙여 부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지어 부르는 노래는 영국 아리랑 또는 저희 마을 이름을 따서 너도밤나무 아리랑이 되겠군요. 벌써 입에서 노랫말이 흘러나와 한 번 적어봅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 봄이 왔네 새봄이 왔어 평화의 봄을 열어나 보세

(후렴)


2. 총을 버리고 손 맞잡고서 화해의 세상을 만들어봐요

(후렴)


3. 잠긴 문을 열어젖히고 기쁨의 잔치를 열어나 보세

(후렴)


영국 학교에 다니는 저희 아이들에게 한국 노래 부르기는 한국말을 배우면서 우리네 문화를 배우고, 아픔과 희망을 나눌 기회입니다. 멀리서지만 어깨동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마음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소식 전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2018년 2월 3일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게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28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좌충우돌 민이 녀석 이야기


심은보



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지난 이야기에 등장했던 민이 녀석은 여전히 좌충우돌이다. 그 날 나는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회의 중이었다. 오징어 녀석이 나를 다급하게 찾았다. “큰 일 났어요. 민이 형이랑 우리 반 연이랑 싸워요날도 추운데 겉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나는 밖으로 뛰어 나갔 다. 학교 밖 마을 한 켠에서 싸움이 난 모양이다. 민이 녀석의 입에서는 차마 듣고 있기 민망한 욕이 마구 난사되고 있었다. 내가 달려가니 녀석은 또 욕을 하며 달아난다. 쫓아갈까 하다 그냥 두었다. 녀석 안엔 어떤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두려 움? 사실 나는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불렀는데 녀석은 선생님이 쫓아오니 도망을 간 모양이다.

 

연이, 오징어, 강이까지 녀석들을 모두 교실로 데리고 들어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찬찬히 들었다. 요사이 민이 녀석은 강이 녀석이랑 곧잘 어울려 놀았다. 드디어 민이 녀석에 게도 함께 놀 수 있는 한 학년 아랫니긴 하지만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30분짜리 중간놀이 시간에도 강이 녀석과 학교 안팎을 뛰어다니며 아지트를 만들기도 하며 뛰어 놀았다. 또 학교를 마치고 나면 학교 밖을 넘어 마을을 뛰어다 니며 놀기도 했다. 하지만 요 며칠 강이 녀석이 다른 친구들과 뛰어노는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날도 민이 녀석이 강이 에게 다가가니 친구들이랑 친구 집을 가기로 했다면서 달아난 모양이다. 민이에게는 어떤 마음이 솟아났을까. 녀석은 친구가 생겼다고 참 좋아했는데 또 다시 친구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좌절감, 배신감이 있지 않았을까.

 

결국 쫓고 쫓기는 상황이 펼쳐지다 마을 한 공터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다. 싸움이라기보다는 아마 일방적으로 맞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다행히 누구도 다치지 않고 상황이 마무리 되었기에 다음 날 민이 녀석을 만나면 이야기를 좀 나눠 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잠시 교무실엘 다녀왔다. 교실로 다시 돌아오는데 녀석이 우리 교실 둘레를 맴돌고 있길 래 불렀더니 또 다시 쫓아오지 말라면서 뒤로 물러난다. 선생님은 안 쫓아 갈테니 민이가 선생님 쪽으로 오라고 했더니 그래도 또 뛰기 시작한다. ~ 내가 녀석을 잡아서 잡아먹기라도 하겠는 가. 무엇이 두려워 왜 자꾸 도망가는 걸까. 이 안에 스며있는 녀석의 익숙함은 무엇일까. 쫓아간다고 해결될 수는 없을 터,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었다. 그리고 교실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사이 교무실에선 일이 심각하게 일어난 모양이다. 민이 녀석이 창고에 있던 석유통을 가지고 교무실에 들어와서 뿌리려고 하고 그러면서 몇 가지 해프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녀석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린 것인가? 만약 불이라도 났다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내 안 어떤 마음이 하나 일렁이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느껴지는 의무감이랄까



이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나자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다. 녀석의 아버지가 전학을 시켜달라고 한 모양이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자꾸만 여러 상황이 생기는 것에 대한 불편함, 학교가 그 상황들을 안고 가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던 모양 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이런 문제해결 방식이 참 불편했 다. 그 상황을 벗어나고, 그 공간에서 배제시켜버리는 방식은 참으로 편한 방식 아닌가. 아이는 그 사이 무엇을 배워왔고, 무엇에 익숙해져왔는가

사실 이 안을 잘 들여다보면 녀석의 익숙한 두려움, 억울함, 그리고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분노와 화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녀석은 늘 자기 책임이 되었고, 그러면서 또 배제되는 상황들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본인이 그 상황을 크게 만들어야 사람들이 본인을 보아주었을 것이고, 또 이야기나마 들어주는 척 했을 것이 다. 전학을 와서 녀석이 간간히 하곤 하던 전학가면 될 것 아니에요라는 말이 떠올라 참으로 아프게 다가왔다.

 

어떤 면에선 녀석에게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약도 챙겨 먹고 있다고 한다. 치료와 함께 되어야 할 것은 어쩌면 치유일지도 모르겠다. 녀석 마음 안에 어쩌면 참으로 익숙한 상처들이 곪고 곪아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화로 자리잡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일시적으론 치료가 그 아픈 것들을 어찌할 수 있겠지만 긴 호흡으로 보았을 땐 따스한 치유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날 누군가가 교실 밖을 기웃기웃 거리기에 확인해보니 민 이 녀석이다. 우리 교실로 불러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 그런 상황이 또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면 너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나서 문제를 함께 풀어가겠노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올해 나와 함께 생활했던 통통이(첫 이야기에서 꺼내 놓았던) 의 경우도 역시 그러했다. 커다란 덩치에 몇 가지 행동 특성으로 인해 친구들과의 많은 갈등 상황 속에서 모든 책임은 통통이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녀석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당장의 문제들을 잘 풀어갔겠지만 녀석에겐 학교라는 공간은 사실 참으로 괴로운 공간이었을 게다. 그러는 가운데 녀석의 행동패턴은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올 한 해 녀석의 억울함을 들어주면서도 행동의 경계를 함께 찾아가고자 함께 노력했다. 학기 초 문제 상황이 되면 큰 소리를 지르거나 울부짖던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교실 안은 나름 편안한 공간이 되었고 녀석은 그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워나가고 있다. 종업식을 앞두고 녀석을 조용히 불러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선생님과 함께 새롭게 공부하면서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통통이 녀석이 5학년이 되어서도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잘 생활했으면 좋겠다.

 

전날 그 일렁이던 마음 하나는 결국 오늘 민이 녀석을 보며 확고하게 내 마음 안에 자리를 잡았다. 며칠 뒤 선생님들과 새학년을 결정하며 내 마음 안에 담아두었던 그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민이 녀석이 있는 6학년 그 반을 맡겠노라고 말이다. 녀석도, 나도 참으로 좌충우돌 할 게다. 녀석의 이야기를 참많이 들어줄게다. 듣고 나선 나도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 줄게다.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하는지,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구들과 친해지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다. 우리 함께 마주 앉아 마음 나누고 이야기 나누는 일을 통해서 오늘 안 되면, 내일 또 이어나갈게다. 그게 안 되면 또 그 다음, 다음.... 끊임없이 그리 하는 게 우리 살아가는 일 아니겠나 싶다. 녀석이 우리 함께 하는 한 해를 통해 살아 나가는 일을 배워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2018년 새롭게 만날 우리 반 녀석들의 행운을 빈다. 아울러 나의 새로운 한 해에도.


심은보 ㅣ 일곱 해 된 경기도 혁신학교 평택 죽백초등학교에 여섯 해 째 행복한 배움터 만들기에 애쓰고 있다. 학교에서 맡은 일은 희망을 일궈가는 우리 선생님 한 분 한 분 응원하며 함께 가고자 뜻과 마음 모아가는 죽백초 희망부장이다. 아이들 속에선 심슨으로 살고 있으며 좌충우돌 모두에게 의미있는 나날 가꿔가기 위해 4학년 아이들과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며 길을 찾아가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02.1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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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철 |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송강호 |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송태효 | 어린 왕자와 영화인들


김소울 | 아메리카 대륙, 승자만을 위한 자유의 나라


원마루 | 영국에서 아리랑을 불러봅니다


심은보 | 좌충우돌 민이 녀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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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2.20 11:05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아픔의 역사를 그림에 담은 스페인 화가 - 고야


김소울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1746년 스페인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스페인은 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왕정이 무력 세력들에 의해 빈번하게 교체되며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를 살았던 고야가 반전과 평화의 생생한 메신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야는 전쟁의 참화를 적나라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끔찍한 시대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1808년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을 침략하려고 진입했을 때, 스페인 민중들은 프랑스 군이 자신들을 스페인 지도자들의 학정으로부터 구해준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민중들은 적극적으로 군대를 환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민족이 진입해왔을 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정복자이지 해방자가 될 수는 없었던 것.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임명하고, 스페인 민중들은 이에 분노하게 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스페인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민중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러자 프랑스 군대가 이를 진압하게 되고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등 학살극이 벌어지게 된다. 고야는 이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였다. 


1814년,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섭정관에게 마드리드에서 일어났던 스페인 시민 봉기를 그림으로 남기는 것에 대해 제안한다. 그의 예술적 능력을 늘 인정하던 섭정관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고야는 이 사건을 시위편인 『1808년 5월 2일』과 학살편인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으로 스페인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광경을 그림으로써 역사 속에 남기게 된다.



스페인 민중들은 프랑스 군대를 향해 격렬히 저항했고, 이들의 저항은 무차별한 총살 처형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 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하루 밤 사이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마을은 삽시간에 폐허로 변하게 된다.


『1808년 5월 2일』을 살펴보면 화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인물들과 말이 물밀 듯이 쏟아지고 있으며, 달려드는 프랑스 군인의 말들은 땅에 나뒹구는 사체에 발이 걸려 주춤거리고 있고 시민들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그림은 과거 영웅적인 모습을 그려내며 승리의 순간을 묘사하던 전쟁화와는 달리, 민중의 광기어린 절망감과 잔혹한 학살을 시작하는 군대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봉기가 일어나는 그 순간을 정직하게 잡아내고 있다.



작품 『1808년 5월 3일』을 살펴보면,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저 멀리 교회가 보이고 왼 편에는 시민들이 늘어서 있다. 오른 편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군인들도 눈 뜨고 못 볼, 너무나도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러했듯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던 프랑스 군인들은 어느새 총 쏘는 기계로 전락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듯 기계적으로 시민들을 죽이고 또 죽이던 처형은 밤새도록끝나지 않고 새벽을 맞이하게 된다.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다른 사람 뒤에 숨기도 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며, 머리를 움켜쥐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들의 발 밑에는 이미 목숨을 잃어버린 마드리드 시민들의 시체가 즐비하다. 총살형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여기 서 있는 시민들은 죽을 것이 분명하며, 그들 뒤로 길게 늘어진 줄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가운데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남성은 자신을 향해 겨눈 총을 마주보고 양 팔을 벌린 채 당당히 맞서고 있다. 그의 모습은 비록 총칼 앞에 육신은 무릎 꿇고 쓰러질 수밖에 없으나, 자신의 영혼은 결코 노예가 될 수 없으며 조국은 곧 해방을 맞이할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시민들의 죽음을 목격한 고야의 영혼이 이 사람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야의 생생한 기록은 사람들이 당대의 사건을 잊지 않고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의 잔혹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은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정복자에 맞서 싸우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냄으로써 폭력으로도 감히 저지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픔의 역사를 담아내려 했던 화가 고야.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바라봤던 죽어가던 시민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은 여전히 그림 속에 생생히 남아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2.20 03:51

[시선 | 세상과 만나는 인문학]


어린 왕자의 미술 세계


송태효



화가로서의 꿈의 결실 『어린 왕자』


생텍스(생텍쥐페리의 애칭)는 『어린 왕자』에서 자신이 여섯 살에 화가의 꿈을 접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화가에 대한 열정은 나날이 심화해 갔다. 청년기 시와 편지, 저술 원고의 데생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는 글과 이미지의 조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과감히 폐기해버렸다. 마지막 작품 『어린 왕자』는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완성도 높은 작품을 기대하던 화가로서의 꿈의 결실이었다. 언어의 한계성을 그림으로 보완하려는 화가 생텍스의 열정이 그림 동화 『어린 왕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열아홉 살의 생텍스는 파리의 명문 생루이 고등학교(Lycée Saint Louis) 졸업반 재학 중 해군사관학교 입시에 지원한다. 생텍스는 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고도 문학 출제 문항에 모순을 제기하고 백지 답안을 제출하여 낙방한다. 이후 파리의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십오 개월 간 화가들과 교류를 통해 회화와 건축에 대한 열정을 키워간다.


1920년대 군 복무 시절이나 트럭 외판원 시절에도 생텍스는 끊임없이 그림으로 자신의 일상을 표현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마치 화가 이중섭이 구겨진 담배 은박지를 펼쳐 가난한 가족의 복작거림을 새기듯 식당 메뉴, 책과 편지지 여백에 인생 잡사의 고달픔, 나부의 아름다움, 친구들의 풍자적 초상을 열심히 그렸다. 이렇게 글과 데생이 어우러진 화가로서의 재능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콘수엘로 순신(Consuelo Suncin)과 결혼하면서 한층 성숙해졌다.



초현실주의자들과 생텍스 부부


생텍스의 부인 콘수엘로 순신은 엘살바도르 출신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생텍스와 순신은 동시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빈번한 교류를 가졌다. 특히 21세의 나이에 화단과 결별한 천재 화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각별한 사이였다. 르네 마그리트의 중산모자(derby hat) 이미지를 이방인 시각으로 풀어낸 「중산모자를 쓴 남자(Homme chapeau melon)」에서 그녀의 무의식 세계를 교감할 수 있다. 『어린 왕자』의 장미를 연상하면 그녀의 그림이 한층 친밀하게 다가온다.



생텍스는 천재 작가 뒤샹의 체스 상대로 잘 알려져 있다. 생텍스가 어린 왕자와 장미 이야기를 신뢰, 의심, 분석, 추론 혹은 종합, 열거, 형식적 귀납법 같은 데카르트의 정신지도규칙에 따라 논리적으로 풀듯,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매료된 뒤샹은 수학 법칙이 적용된 체스를 통해 예술의 진정성을 추구하였다. 데카르트의 수학과 철학을 통해 두 예술가의 우정이 돈독해진 것이다. 생텍스의 부인은 1941년 프랑스에서 미국 롱아일랜드로 이주하여 대저택을 구입한다. 생텍스가 『어린 왕자』를 집필하게 되어 순신이 진정한 ‘어린 왕자 집’이라 부르게 될 이곳에 입주하면서 순신은 인테리어 벽지 색상을 선택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뒤샹은 당시 순신의 내면 세계를 위로하는 색상들을 제시해줄 정도로 순신과 친밀한 사이였다. 프랑스어, 영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순신은 미국에 귀화한 뒤샹과 르누아르 이외에도 당시 미국에 머물던 망명 예술가들 특히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같은 초현실주의자들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장 가뱅(Jean Gabin),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마를렌 디트리히(Marlène Dietrich) 같은 유명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편의를 제공하며 우정을 나누던 화단의 중심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보아뱀과 마그리트의 중산모자


생텍스 역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들의 동인지 「거울(Miroir)」에 생텍스의 핸드 트레이싱(hand tracing)이 실렸을 정도로 초현실주의자들과 생텍스는 서로 교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생텍스의 속이 들여다보이는 보아뱀 그림을 어른들이 모자라고 우기듯, 고정 관념을 지닌 어른들은 일반적 경험에 근거하여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극단을 피해 개별과 보편의 접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보아뱀 그림에서 자신들이 꿈꾸던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이상적 이미지를 발견하였다. 특히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그린 중산모자(derby hat)와 생텍스가 그린 코끼리를 통째로 삼키는 보아뱀이 이들의 가교 구실을 하였다. 마그리트는 “그림의 제목은 해설이 아니며 그림은 그 제목의 설명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생텍스가 『어린 왕자』에서 하고 싶은 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말은 오해의 근원이며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자는 것이다.



앞서간 평화주의 예술가 생텍스


보들레르 시의 상징성, 프로이트의 무의식,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을 토대로 앙드레 브르통이 주도하던 초현실주의 그룹은 부르주아 문화 타파를 국시로 삼았다. 이들과 달리 이미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 내란에서 과도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희생을 경험한 생텍스는 계급투쟁 너머의 인간성 유대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문학을 추구하였다.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일촉즉발의 긴박한 현실 갈등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생텍스를 비판하다 전쟁이라는 물리적 현실을 겪고 나서야 생텍스를 이해하게 된다. 생텍스는 이미 대륙의 전쟁을 예견하고 그 공포와 폐해를 경고하는 평화주의 메시지를 언론과 문예지에 호소해온 선각자였다. 생텍스는 정신적 장애나 다름없는 편파적 이데올로기 미술 교육에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새로운 그림이라는 것이 눈으로 교육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되는 현실에서, 민중에게 화가를 고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역설이란 말인가. 모든 요인을 거부할 것.

생텍스, 『수첩(Carnets)』, 갈리마르, 1953, p.201,


생텍스가 마음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평화는 전쟁의 공포를 인식시키고 평화의 기능을 일상에서 누리게 하는 심미적 실천적 평화이다. 이러한 평화는 관습적 이데올로기와 사유의 틀을 벗어나 평화에 관한 새로운 의식 전환을 요구한다. 갈등과 대립의 원인인 증오의 바오밥나무를 제거하는 예술적 교육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어쩌면 평화는 빈센트의 그림 한 작품을 통해서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평화는 각자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마음을 길들여야 가능한 평화이다. 『어린 왕자』에서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생텍스가 유명한 화가들 명단에 올라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생텍스가 그린 고독한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피카소가 그린 카사헤마스(Casagemas)의 죽음을 추모하는 청색 시대 작품들, 그리고 빈센트의 말년 초상화들이 떠오른다. 그 인물들의 눈은 마음의 눈이다. 그리고 빛나는 별이다. 그리고 생텍스도 별이 되어 세상에 평화의 빛을 밝히고 있다.



송태효  불문학 박사로 현재 '어린왕자인문학당' 대표와 제주불교문화대학 불교인문학 교수, '성남시지역발전자문위원회' 교육체육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는 예술인가, 어둠의 방-시와 영화 속 그림자 이야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생텍쥐베리 사람들의 땅, 어린 왕자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12.20 03:10

[시선 |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 관계사]


하늘길, 바닷길, 땅길 열어 평화로! 통일로! : 우리는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정영철


우리에게 분단-통일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가 있다. 분단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통일은 곧 가족과의 만남이자 고향의 회복일 것이다. 분단 때문에 총을 들고 적과 마주했던 사람들에게 통일은 곧 평화와 화해를 의미할 것이다. 분단으로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통일은 곧 새로운 번영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우리 세대에게 분단, 그리고 통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분단으로 억눌린 삶의 자유와 평화를 의미할 것이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미래의 설계일 것이며, 평화로운 한반도에서의 희망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바로 ‘꿈’일 것이다. 우리는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막연하게 ‘통일’이라는 꿈이 아니라 분단이 만들어놓은 불안, 걱정, 억압, 전쟁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와 번영과 공존과 화해와 협력을 꿈꾸는 것이어야 한다. 


분단이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을 의미한다면, 통일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연대를 의미한다. 2007년 정상회담은 이러한 꿈을 한 발 더 진전시킬 수 있었던 기회였다. 정치-경제적인 합의를 넘어 그 이듬해 열렸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이 공동으로 응원단을 만들어 부산-서울에서 개성-평양을 거쳐 신의주를 넘어 베이징까지 철도를 운영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분단 이후 단절되었던 철길을 놓고, 도로를 놓기로 했다. 이제야 ‘갇힌 나라’가 아니라 대륙으로, 바다로 ‘열린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2000년 정상회담 때부터 남북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구상했고, 2007년 정상회담에서는 그것을 더욱 구체화시켜 TCR(Trans China Railroad, 중국횡단열차)과 TSR(Trans Siberian Railroad)을 연결하여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현실화하기로 합의했다.    



마침내 2007년 5월 17일 경의선 구간 중 남북이 끊어진 지점에서 철도가 연결되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1, 2차 장관급회담에서 합의되었던 경의선 철도 연결 사업이 진행되었고, 북의 핵실험 등으로 미뤄졌다가 북의 개성과 남의 문산을 잇는 27.3km 구간에 대한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5월 17일 경의선 연결 철도 시범 운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2007년 10월 정상회담을 계기로 철도 운행을 정기화하기로 합의하면서 북의 봉동과 남의 문산을 잇는 철도가 12월 11일 개통되어 정례적으로 운행하게 되었다. 이 철도는 개성공단을 오가는 철길로 주 1회씩 정기적으로 운항하였지만, 결국 2008년 12월부터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는 현재 끊어져 있는 경의선, 경원선, 동해선 등을 연결하면 곧바로 대륙과 연결된다. 남북이 힘을 합쳐 끊어진 구간을 복구하고 북의 철도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한다면 언제라도 연결할 수 있다. 끊어진 구간이라야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경의선 구간을 제외하면 경원선 약 25km, 그리고 동해선 약 110km이다. 만약 금강산까지 철도를 새로 놓는다면 약 100km의 구간이 추가될 수 있다. 


철도와 도로의 연결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부터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철도와 도로의 연결이 멀리 돌아가던 길을 단축시켜서 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경제적 이득만이 아니라 여전히 해체되지 않고 있는 동북아 지역의 냉전을 해체하고, 군사적으로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을 제고하는 핵심적인 사업의 하나이다. 특히, 이 철도와 도로를 통해 사람이 다니고, 화물이 다니고, 시베리아의 천연자원이 유통된다면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북방의 영토를 개척하는 의미를 지닐 것이고, 동북아 지역의 협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색 국면이 지속되면서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머나먼 일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끊어진 철로 한편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낡은 기차는 철길이 아니라 남북의 정치–분단의 정치–로 인해 정차하고 있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철길과 도로의 연결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시간만큼 더 큰 분단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우리의 꿈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소련(러시아)도 가고, 달나라도 가는데 평양만 갈 수 없는 데서 오는 우리의 미래 희망의 쪼그라듦이다.


부산 어귀 한 곳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를 거치고 시베리아를 지나서 유럽 한복판으로 달려가는 상상을 해보자. 우리 학생들이 배낭을 메고, 어깨동무하면서 평양을 내려, 신의주를 내려, 만주를 내려, 시베리아를 내려, 유럽을 내려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바다로는 오대양육대주를 누비고 있으면서, 대륙으로는 왜 이런 상상을 하지 못하는가 생각해보자. 그 한복판에 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을 넘어, 하늘길, 땅길, 바닷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미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비록 실행은 되고 있지 않지만, 남북이 주춤거릴 때 중국이 중국 단둥과 북의 신의주, 평양, 개성을 연결하는 고속철도를 놓겠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분단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한다. 남북이 힘을 합쳐 해야 한다. 분단의 정치에서 벗어나, 민족의 미래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이유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이런 꿈들이 모여 현실이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지금의 꿈이 한낱 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꿈이 아닌 평화의 꿈, 통일의 꿈을 꾸어야 할 때다. 

피스레터에 지금껏 다양한 주제로 연재했지만, 이제 연재를 끝내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평화로! 통일로!


<참고한 글>

통일노력 60년 발간위원회,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통일로』, 서울:다해, 2005. 

전상봉, 『통일, 우리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서울:시대의 창, 2007.


<사진출처>

정영철・정창현, 『어린이어깨동무 교양시리즈1 - 남북관계사 20장면: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보다』, 서울:유니스토리, 2017.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