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4.19 10:38

[한반도 평화읽기]



담대한 구상과 유리그릇 :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정창현


연속적인 정상회담에 합의

 

조만간 남쪽 예술단이 방북해 공연한다. 공연 제목은 봄이 온다이다. 제목처럼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지나가고 평화의 봄이 찾아오고 있다.


남과 북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세를 대화·협상 국면으로 반전시켰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방한한 김여정 특사(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는 청와대를 예방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한 달쯤 뒤인 35일 남쪽의 대북특사단이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1시간의 짧은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남과 북은 4월 말 판문점 우리 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주제로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남측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남북 정상 간의 핫라인 설치도 합의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속적인 노력과 북측의 호응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기회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북특사단을 통해 북미정상회담도 제안했다. 대북특사단의 북한 방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특별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전례 없는 북미정상회담에 함께하면 두 정상이 역사적인 돌파구(historic breakthrough)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전했고, 공개되지 않은 특별메시지에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신뢰구축의 일환으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리스크(위험)가 있다는 참모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즉석에서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북한이 제시한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 비핵화 회담 의지 표명에 일단 신뢰를 보낸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간 접촉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도 상당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제한적 대북 예방공격 검토 등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나돌던 지난해 말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흐름이다. 신년사에서 99(북한 정권수립 70주년)의 대규모 행사를 위한 평화적 환경조성을 언급한 북한이 예상보다 전향적으로, 속전속결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기 1년 안에 남북대화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 올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행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정전협정 65년 만에 종전선언나오나

 

남북, 북미정상회담 합의로 한반도 정세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4월과 5월 한반도에서는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의 압박과 개입을 골자로 하는 대북정책, 전략국가론에 입각한 북한의 포괄적 세계전략이 부딪히는 정상외교의 장이 펼쳐진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중국, 일본과 정상회담을 통해 공조다지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롭게 외교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북한도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상무조(태스크포스팀)를 조직해 남북, 북미정상회담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26일 마침내 김정은 위원장이 첫 정상외교에 나서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했다.

 

평창올림픽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청와대(2018년 작성)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진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남측의 대북 특사단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청와대(2018년 작성)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진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구체적인 성과로는 종전선언이 거론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언급하며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남··3국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문제를 놓고 역사적 담판을 짓는 데 필요하다면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과 셋이서 직접 머리를 맞대자는 얘기다. 성사가 된다면 한반도 문제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자리가 될 수 있고, 종전선언에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담대한 구상이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남북정상회담에서 의견 조율 후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도록 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2+2회담방식이다.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미정상회담···중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정상외교를 통해 종전선언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를 위한 6자회담과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남···중의 4자회담을 병행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울과 평양에 남북연락사무소가 개설되고, 뒤이어 평양과 워싱턴에도 북미연락사무소가 개설될 수 있다. 세부적인 사안으로 한미연합훈련의 유연성 확보, 동북아 군사적 균형자 역할로의 주한미군의 지위 변화 등이 모색되고, 남북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포괄적인 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 북미정상회담은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선순환 구도를 핵심으로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의 정책시험대이자 실현과정이다. 단계별로 회담결과를 예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상황을 돌파하면서 평화만들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도 언급한 것처럼 지금의 대화국면은 과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과도 같다. 현재로선 전초전 격인 4월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5월 북미정상회담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최종적인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와 국면을 거쳐 최대 난제인 검증과 체제보장문제가 타결되어야 한다. 정상회담에서 큰 틀의 합의가 있더라도 실무회담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예상되지만 남이나 북이나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고 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본 원고는 2018327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정창현현대사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현대사전문기자와 <민족21> 편집주간을 역임했으며, 국가기록원과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7

[시선 | 평화의 마중물]



로힝야 난민촌에서 묻는다. “평화가 무엇인가?”


송강


당신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이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 맴돈다. 예수의 산상수훈, 간디의 비폭력 저항, 마틴 루터 킹의 꿈, 갈퉁의 적극적 평화 등등. 그러나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의 파편들 아래로 지극히 단순한 대답이 침전된다. 나에게 평화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평화이고 자기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을 다시금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평화 운동이 아닐까?

 

나는 이 평화에 대한 진실을 로힝야 족의 현실 속에서 더 실감하고 있다. 미얀마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방글라데시로 여러 차례에 걸쳐 추방당했다. 이렇게 강제로 쫓겨난 로힝야 족의 수가 70만 명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6천 여명이 학살당하고 2만 여명의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는 끔찍한 참화를 겪었다. 국경을 이루는 나프강과 인도양을 배로 건너다 배가 파선하거나 침몰하여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자 실제 정치에서도 실권자가 된 아웅산 수치여사나 자비를 가르치는 미얀마 불자들도 동정이나 연민을 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군부독재의 탄압에 저항했던 미얀마의 민주 투사들조차도 로힝야족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1824년 영국이 미얀마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을 때 당시 인도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을 데려와 앞잡이로 부렸기 때문에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로힝야족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방인들이요 쫓아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로힝야족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미 7~8세기에 자신들이 살고 있던 라카인 주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고 이미 당시부터 이슬람지도자 술탄이 라카인 지역을 통치했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현재 로힝야족이 당하고 있는 대량학살과 강간, 강제 추방과 인종차별은 비인도적인 만행으로 국제 사회의 규탄과 응징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개척자1)들의 로힝야족 현지 조사팀의 일원으로 작년 말부터 이번 달까지 두 차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촌에 파견되었었다. 난민촌이 시작되는 쿠트팔롱에 들어섰던 첫날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난민 천막들의 행렬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위에 검은 비닐을 덮은 허술한 천막집에서 여러 세대의 대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치 독일이나 전쟁 포로들의 집단 수용소 같아 보였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접경지역의 로힝야 난민촌은 약 10여 군데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비좁은 땅 덩어리에 작게는 4~5만에서 10만 명이상 되는 난민들이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 속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살고 있다. 각각의 난민촌 안에는 다시 A, B, C, D순으로 나뉘어진 블록들이 있는데 한 블록 안에는 대강 100가정이 모여 산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각 블록에는 마지라는 봉사자가 있는데 실상 이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협조하는 감시자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는 탄압을 피해 미얀마를 탈출한 로힝야족을 불쌍한 난민들이라고 여기지만 방글라데시 군인들은 이들을 자기 나라에 불법 침입한 범죄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로힝야 난민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날품팔이 이외에 취업 허가를 받을 수도 없다. 바닥에 기초를 놓고 영구적으로 살아갈 집을 짓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로힝야 족에게 있어서 현재의 난민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막장과도 같다


수많은 눈에 잘 띄는 큰길가에는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들이 로힝야를 위해 돕고 있는 000”, “로힝야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000”, “인도주의의 챔피언 000” 등등 요란스럽게 자기 활동을 선전해 대지만 정작 로힝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앞길을 헤쳐 나가도록 보이지 않게 묵묵히 돕고 있는 단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 종족의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로힝야족 청년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로힝야 난민촌

 

개척자들이 난민촌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난민촌의 어린이들이 배고프고 아프고 지쳐서 슬픈 기색으로 힘없이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겠지만 실상은 병들어 누워 있는 소수의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처럼 스스로 별별 희한한 놀이를 만들어 친구들과 명랑하게 뛰어 논다. 어디서 그런 창의력과 에너지가 생기는지 경이롭고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가 난민촌 마을을 찾아가 돗자리를 펴고 크레용과 종이를 놓아두면 아이들은 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종이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 자기 자녀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어서 부모들과 이웃들이 기웃거린다. 찰흙을 갖고 어떤 모양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난민촌의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아이들과 함께 집을 방문해 보면 아이들의 아빠가 죽었거나 가족 가운데 장애인이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만성질환 환자가 있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난민촌의 어두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UN이나 국제 구호단체들의 일반적인 난민 지원 활동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들은 이런 취약한 난민들을 찾아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친구가 되고 있다.

 

돗자리학교

 

난민촌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들

 

남을 도와주면서도 욕을 먹기가 쉽다. 다른 사람은 도움을 받는데 자신은 도움을 못 받게 되면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도움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난민촌의 한 블록에 만도 수백, 수천 명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데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지원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과 세심한 분배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여러 난민촌에서 활동하면서 적은 돈으로 아무도 불만이 생기지 않게 도움을 주고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이웃 난민들에게 조차 감사와 환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약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돕는 것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미얀마 군인들의 학살로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여인들이 많다. 이 여인들은 이슬람 관습에 따라 홀로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어서 거의 어두운 천막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감옥 안의 감옥에 갇힌 셈이다. 매달 두 번씩 배급 받는 양식을 받으러 갈 수가 없어서 받는 양식의 일부를 수고비 대신 주어서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강제 추방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병들어 누워 있어도 돌볼 사람이 없다. 시설이 잘 갖춰진 일반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난민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지옥 같은 현실이다.


로힝야 난민촌에는 다른 난민촌에 비해 비교적 많은 천막 병원들이 설치되어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MSF)나 적신월사(무슬림국가의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적인 민간단체들 뿐 아니라 많은 이슬람 단체들의 의료지원 활동도 눈에 띈다. 가히 민간 의료 시민단체들이 봉사 경쟁을 하는 각축장과도 같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난민촌 병원들이 감기나 배탈정도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1차 진료소라는 게 문제다. 당뇨나 고혈압, 관절염과 같은 만성 질환의 환자들이나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못된다. 난민촌에는 이렇게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장기적인 의료지원이 필요한 환자들이 방치되어 있다.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 우리를 돕고 있는 한 로힝야 족 친구는 만삭이 된 아내와 작은 나무배를 타고 피란하면서 3일 밤 3일 낮을 배 안에서 지내야 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출렁이는 배 위에서 아내가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난민촌에 새롭게 정착하면서 아기는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아기를 방글라데시의 모래 언덕에 묻어야 했다.


로힝야 난민캠프에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여인들이 있다. 바로 미얀마 군인들에 의해 강간피해를 당한 여인들이다. 국제 기관들은 그 숫자가 2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피해 여성들 가운데는 결국 임신하게 되어 아비 없는 아이들을 출산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기되거나 아무도 돌보려 들지 않는 불행한 고아가 되어버린다.


특히 이런 성폭행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려 들기 보다는 저주하고 수치스러워 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더 극심하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더 가혹한 2차 피해를 당한다. 성폭행을 당한 어린 소녀들이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경우 쉽게 인근 콕스 바자르나 수도 다카 혹은 인도의 콜카타 등지에 성매매를 위해 팔려 나가게 된다. 무슬림 사회에서 매매춘은 당연히 불법이다. 그러나 관광지인 콕스 바자르의 후락한 골목들 안에는 성매매를 위한 허름한 모텔들이 늘어서 있고 이 매음굴에서 로힝야족의 어린 소녀들을 쉽게 소개 받을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로힝야족 통행금지 구역까지 팔려 나온 데에는 10군데 넘는 방글라데시 군인과 경찰의 검문소에서 군경들과 인신매매단 사이의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트팔롱 난민촌의 평화학교

 

난민들을 함께 돕고자 하는 로힝야 청년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로힝야 난민촌에도 이런 약자들을 돕는 일을 시샘하거나 불만을 갖고 방해하려 드는 이웃들은 없다. 남을 돕는데도 오히려 환영하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기 보다는 로힝야 청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로힝야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부족 가운데 이런 연약한 지체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로힝야 난민들이 그런 회합을 하거나 단체를 결성하게 되면 방글라데시 군경에 의해 체포되거나 수감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이나 강제추방과 같은 가혹한 불이익을 무릅쓰고 라도 동족을 돕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는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척자들은 이런 청년들과 함께 이들이 쫓겨난 자신들의 고향 라카인 주까지 다시 돌아가는 멀고 험한 길을 동행할 것이다. 자기 땅이 있고 자기 집이 있었던 그곳, 자기 부모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마셔왔던 샘물을 다시 찾아가기까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길이 평화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5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노예제도, 인간이 인간에게 빼앗은 인권


김소울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건 신생 국가 아메리카.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완전하게 반하는 뜨거운 감자가 있었으니, 바로 노예제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땅의 주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고, 그들을 노예로 완전하게 부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자 서양인들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노예사냥꾼을 이용하여 흑인을 납치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의 부제는 <폭풍우가 밀려오자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바다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납치되어 배에 실려 팔려가던 노예들이 바다에서 겪은 실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783년 노예들은 족쇄가 채워져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비좁은 배의 바닥에 누워 몇 개월 동안의 항해를 견뎌야 했다. 최대한 많은 노예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실에 노예들을 눕혔고, 노예들은 물건처럼 온 몸이 고정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며 항해가 어려워지고 음식이 부족해지자 상인들은 다치거나 병드는 등 살아있는 이들마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만다. 이 항해 도중 1/3 이상이 사망하였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1840)

 

노예제도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1672년 영국의 찰스 2세는 왕립회사에 노예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 회사는 이후 약 90년간 백만 명이 넘는 노예를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게 되는데, 이 노예무역은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였고 17C-19C 거래된 흑인 노예들의 수는 1,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과거에는 단 맛을 내는 식품 재료는 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코란과 함께 서쪽으로 꿀보다 달콤한 설탕이 전해지게 된다. 11세기 말 설탕이 유럽에 상륙하자 유럽인들은 순식간에 설탕의 강력한 단 맛을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설탕의 원료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경작지를 위해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엄청난 인원이 노예무역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노예로 팔려간 이들은 끌려간 땅에 사탕수수 모종을 심고, 수확하였으며, 그것을 빻아 설탕을 만들어 냈다. 1800년경 당시 영국인 250명의 연간 설탕 소비량이 1톤에 달한 것으로 집계될 만큼 그들의 설탕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으며 1톤의 설탕은 흑인노예 한명이 평생을 바쳐 수확해 내는 양이었다. 설탕에 가장 탐닉했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들을 팔기 위해 보낸 선박의 수는 2,704척이다. 이러는 가운데 200-400만 명의 노예가 항해 중 사망하게 된다.


 프랑수와 오귀스트 비아르, 노예무역(1833)

 

비아르가 그린 <노예무역>이라는 그림 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납치해 온 흑인 족장이 백인 상인과 흥정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백인 귀족은 편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빈번하게 일어났던 노예무역, 그리고 흑인노예를 그저 경매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백인들의 끔찍했던 과거를 기록한 작품이다. 노예는 서양인들에게 화물이나 말과 같이 거래해야 할 물건에 불과했고, 그런 노예에게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흑인 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 당시 전 세계가 양모 대신 면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면화 재배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꼭 필요했다. 면화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채찍질을 했고, 도망가다가 붙잡히면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뺏는 일까지 일삼았다. 그러던 중, 1873년 버지니아 주에서 냇 터너라는 흑인 노예가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살해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흑인노예 10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착한 흑인 노예 톰이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내용을 읽은 미국인들은 노예제도의 잔혹함에 대해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예제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가던 18614,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는 길고 소모적이며 비극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9, 링컨 대통령은 중대한 노예 해방령을 내렸다. 그는 남부 연합의 일부를 이루는 주에 사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고 북부에서도 노예제를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못했으며, 노예제 해방령은 부분적으로 밖에 실시되지 못하였다.

 

1864년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링컨은 완전한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수정을 제시했으며, 1865년 초 의회를 통해 수정안을 강행한 후, 링컨 대통령은 암살당하게 된다. 헌법을 완전하게 수정하기 전 까지 법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했던 미국은 1865년 헌법수정안을 선포하고 미국과 그 영토 내 노예제도를 헌법상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미국의 주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했고, 1995년이 되어서야 미시시피주를 마지막으로 미국의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비준하게 된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2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너도밤나무골에서 봄인사 드립니다. 이제 4월이니 한국에도 봄이 찾아왔겠지요. 아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미세먼지 때문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봄비가 내려 모두 씻어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봄소식을 전해놓고서 오늘은 눈 소식을 먼저 이야기 할까 합니다. 작년 12월에 보낸 편지에서 눈 소식을 잠깐 전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눈이 내리고 얼마 안 있어서 다 녹아 버렸습니다. 도버 해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닷바람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눈이 제대로 왔습니다. 밤새 내린 눈이 차곡차곡 쌓여서 아침이 되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눈이 쌓였다.” 그냥 눈이 왔다가 아니라 쌓였다였습니다. 덕분에 공동체는 평일인데도 눈 축제의 날을 선포하고 아이들과 어른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언덕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신나게 썰매를 탔습니다. 처음에는 각자 타는 썰매에 앉아 내려가다가 누가 커다란 장판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여럿이 앉아서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싣고 내려갈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 무려 25명이 함께 타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침나절에 썰매를 타고,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미식축구를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에 따뜻한 물엿을 풀어 만든 눈 엿을 먹으며 함께 웃어봤습니다.

 

 

좀처럼 날씨가 영하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영국 남동부에서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눈에서 뒹굴 날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눈 놀이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언덕 가에 노란색 수선화가 아이들 웃음 짓는 모양으로 피어나는 봄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공을 차고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동네 개와 함께 달리기 경주를 하며 놉니다. 그렇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런던 북부의 한 학교에서 열린 용서 컨퍼런스에 초대받아 다녀온 마을 식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 수선화가 핀 언덕 아래에서 봄 청소를 하는 마을 청년들 <출처: bruderhof.com/ko>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언제 한 번 편지에서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비폭력 갈등 해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브레이킹더사이클이라는 프로그램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저희 마을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 부부가 런던 북부에 있는 한 학교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학교는 용서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강사로 참여한 분 중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온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컨퍼런스에서 아이들에게 게임을 가르쳐준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숲에 모여서 한 곳에 어떤 물건을 숨겨 두고, 여럿이 함께 찾기 시작해서 먼저 찾아온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재빨리 물건을 찾아서 출발 장소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놀이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안 해요.” 이제는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아무튼 게임은 시작됐고, 아이들은 숨겨놓은 물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먼저 찾겠다고 달려가는 아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 대신 서로 숙닥숙닥 의논을 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물건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아이가 좋은 생각을 냈는지 아이들이 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은 물건을 찾는 데 성공했고, 소식을 들은 다른 아이들도 모두 물건을 찾은 쪽으로 달려갔고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출발점으로 함께 돌아왔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분투요! 친구가 있으니까 제가 있지요.” 맞습니다. 아이들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아프리카의 전통 사상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자라온 것입니다. 이 사상을 남아프리카 말로는 우분투라고 하는데 남아프리카의 평화 운동, 그리고 이어진 자발적 과거사 청산의 정신적 뿌리가 된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이런 공동체적 생각의 뿌리가 있었기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1918-2013)는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보복적 정의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한 과거사 청산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데스몬트 투투 대주교는 인간은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우분투의 핵심입니다라고 했고, 그렇게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흑인과 백인 사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국경을 초월하고 사람들 마음에 보편적으로 녹아있는 우분투 사상, 즉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마음을 서로 살리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봄소식과 함께 그런 노래 하나를 소개하며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의 조운 휘트니와 알렉스 크레이머 부부가 1940년대에 지은 노래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No Man’s is an Island)’입니다. 언젠가 어깨동무 식구들과 함께 흥얼거리며 노래할 날을 꿈꿔 봅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No Man’s is an Island)’


(후렴)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 홀로 서 있게 할 수는 없어.

다른 이의 기쁨은 나의 기쁨

나의 기쁨은 다른 이의 기쁨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

그러니 나는 모두를 형제로, 친구로 여기고 의지하겠어.

 

1.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시작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 노래 소리는 내 가슴을 울리네.

2. 그 사람들이 부르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노래는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그 기쁨은 누구도 파괴할 수 없어.

3. 이 땅은 유혈사태와 슬픔, 비애,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곧 사람들이 다시 함께 노래할 날이 오리라.

 

노래듣기(클릭하시면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201841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께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 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4.19 10:30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1빠 선생’ 이야기 


심은보



저녁밥을 먹는데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기어이 1빠 선생.... 저녁밥을 먹다 말고 후다닥 파출소로 달려갔다. 가보니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아 무언인가 적고 있고 1빠 선생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다. 고딩 두 녀석과 맞짱을 뜬 모양이다. 고등학생 코에 핏자국 선명한 화장지까지 꽂혀 있는 걸 보니...이것 참...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1빠 선생은 우리 반 민이 녀석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앞 이야기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녀석을 따라 올해 6학년 1반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과 만난 첫 날 함께 정한 우리 반 이름은 심과 함께’. 반 이름을 정하고, 첫 날부터 뭘 할 때마다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우리 민이 녀석에게 나는 ‘1빠 선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라는 낱말을 교실 속에서 쓰는 일이 참 불편하면서도 녀석에게는 뭔가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녀석은 줄을 설 때도 1, 발표를 할 때도 1, 밥을 먹을 때도 1. 그런 특별함을 부여받게 되었다. 수업 시간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려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도 첫 날은 참 잘 해내려고 애 쓰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더구나 작년까지 먹었던 약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 지내는 모습이 참 기특했었다.

 

그렇게 주말이 넘어가고 교실에선 여전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친구 건들고 저 친구 건들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지만 커다란 문제없이 며칠 잘 지냈을까.

 

어느 날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OO 녀석과 싸움이 한판 진하게 붙은 모양. 급하게 뛰어나가 OO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흥분해 있는 1빠 선생의 두 팔을 강하게 잡았다. 녀석 이름을 부르며 손에 힘을 빼고 선생님을 보라고 몇 차례 이야기를 했다. 니가 그렇게 하고 나면 선생님이 니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겠노라고 힘을 풀라고 했다. 한참 씩씩대던 녀석이 조금 뒤 수그러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억울한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 1학년 동생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OO이가 1학년 동생에게 저런 놈이랑 놀지마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래서 화가 나서 밀었는데 교문 벽에 OO이가 부딪혔다고. 듣고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날만도 했다. 녀석의 억울한 마음을 읽어주고 오늘 하려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1년 동안 화가 나더라도 그 동안 쉽사리 넘어섰던 선들을 넘지 않고 문제를 잘 해결해내는 방법도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이 상황마다 너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주겠노라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날 갈등은 사과를 할 부분은 하고, 사과를 받을 부분은 받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 생겨나는 갈등들 속에서는 위험한 상황이 자꾸만 나타났다. 특히 어느 주말을 지내고 온 녀석의 모습은 그 전 주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멍 자국도 보이고. 집에서 일이 좀 있었던 듯 했다. 아버지에게 맞은 모양.

 

그 한 주 내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자 친구 한 녀석에게 자꾸만 다가가서 심각한 정도로 괴롭히는 모습을 보이고, 순간 욱해서 아무 관련 없는 친구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동생들을 때리기도 하고 전보다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에겐 자꾸만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고 결국엔 자꾸만 넘지 말아야할 선들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다. 교실 안 뿐만 아니라 교실 밖을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녀석을 멀쩡한 상태에서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 속에선 순식간에 흥분하여 돌변해버렸다.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물건을 부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대상을 가리지도 않았다. 담임인 내게도,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도. 그 동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지만 녀석의 경우엔 교육의 영역을 넘어서 치료의 영역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본인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고 어른들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의 행동 패턴들. 과잉행동을 넘어 분노 조절에 대해선 어느 정도 다른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인데 올핸 설날이후에 약까지 끊어버렸다고 했다. 아빠와 통화를 하며 우선 병원 진료를 이어가 줄 것을 부탁드렸다. 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도 찾아나가려고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상담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의 도움을 얻어 상담 및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녀석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녀석의 흥분 상태를 잠재워줄 무언가였다.

 

아빠와 한참 통화를 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면 그냥 신고하라는 말과 함께 약값도 아까워서 더 이상 약을 먹이는 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은 부모로서 최소한의 역할만 하겠노라고 했다. 한참을 통화하며 눈물이 절로 흘렀다.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이니 아빠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설득하는 사이 녀석이 친구들 속에서 하는 행동 패턴은 더욱 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 속에서 녀석의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녀석의 살기 위한 몸부림을 마주하며 사실 교육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겨우 아버지를 설득하여 4월이 훌쩍 넘어서야 녀석과 함께 병원엘 다녀왔다. 약도 받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너무 많은 상황이 교실 안팎에서 일어나버린 뒤였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으로 치달아버렸다. 마주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상황들을 너무도 많이 마주하게 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아 우리 학교가 다섯 번째 학교였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학교에서는 1년째 무사히 살아내고 있긴 하지만 현재 이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 많은 문제들과 마주하면 안 될 듯 하여 이번 주에 급하게 등교를 중지해 놓은 상황이다. 녀석의 가정엔 상담 선생님이 함께 정기적으로 하려고 하고 있다. 그 첫 날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한 시간도 안 된 틈에 집 앞 공원에서 고등학생들과 그런 시비가 붙어 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 것이고 말이다.

 

녀석 생각에, 녀석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며칠 밤을 못자며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딱히 학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교육의 영역과 치유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이 필요한 까닭이다. 치료의 영역까지 학교가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녀석 문제로 벌써 두 차례 반모임을 했다. 우리 학부모님들 모두 녀석의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워 때론 눈물도 짓고, 때론 함께 도울 방법을 모색 해보고. 하지만 마땅치 않은 우리들의 한계에 절망도 했다. 참으로 답답한 현재 상황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지역 사회는, 국가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다섯 번째 학교까지 강제전학으로 녀석이 학교를 돌고 돌 동안 녀석을 관리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전혀 갖추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책임을 학교로 던져놓은 것 빼놓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또 다른 학교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문제 해결을 지원해야 할 터인데... 녀석이 이렇게 어른이 된다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것인가. 그 모습이 눈에 빤히 보이는 녀석의 삶은 어떻게 할 것인지, 또 이후에 치를 사회적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온통 내 머릿속엔 녀석 생각이라 나의 일상이 이래저래 꼬여 버렸지만 나는 녀석이 우리학교에서 졸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도울 생각이다. 우리 지역에서 참으로 유명한 우리 '1빠 선생'을 이렇게 계속해서 방치할 것인지를 묻고 그 대안을 요구하고 만들어 가는 일에도 함께 해야겠다.


오늘은 부디 녀석이 무사히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할 터인데...




심은보8년차 혁신학교 죽백초등학교에서 행복한 배움터를 일궈가며 일곱 해 째를 보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심과 함께’ 6학년 1반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혁신교육을 생각하다2’,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이슈]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정영철


기원전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도시 올림피아에서는 서로 다른 (그리스)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4년에 한 번씩 모여 평화의 제전을 열었다고 한다. 비록 서로 다른 국가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올림픽의 기원으로 이야기되는 ‘올림피아 제전’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근대적인 형태로 부활하게 되었다.


올림픽의 출발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우스’ 신 앞에서 제전을 벌이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이번 평창올림픽은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에서 남북이 공동입장, 단일팀, 공동응원, 축하공연, 여기에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사실, 불과 50여일 전만 하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남북간에 벌어졌으니, 역시 남북관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함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보다 냉정할 것을 바라고 있다. 사실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이제 막 한 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북의 김여정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임을 밝히면서 친서를 전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한 순간 남북간에 넘어야 할 한 고개는 넘었지만, 넘어야 할 더 큰 고갯길이 우리 앞을 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했던 것처럼, ‘여건’을 만들어야 할 과제가 놓여있다. 그 ‘여건’이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결국은 북미의 문제이고, 우리와 미국의 문제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북에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우리 역시 미국과의 대화와 설득에 더 큰 힘을 쏟겠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로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하고, 일본의 반발을 잠재워야 하며, 평창의 분위기를 이어나가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북도 역시 중국, 러시아와의 다각도 협력의 강화, 관계의 재편 등을 시도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 방러도 모색할 것이다. 또한, 미국을 향해서도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는 온전히 남북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미국이다. 이번에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의 태도와 발언에서 보이듯이, 북과의 접촉과 대화는 아예 멀리하고 탈북자 면담과 천안함 기념관 방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더니, 아예 ‘최대폭의 제재’를 실시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펜스 부통령의 발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북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핵화와 별개로 남북관계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쩌면 ‘내정간섭’에 가까운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남북이 만나서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데에 미국이 간섭할 권리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북의 핵과 미사일 시험 도발 – 제재와 압박 – 더 큰 도발 – 더 큰 제재’의 악순환이었다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환영과 환대 – 평화의 노력 – 더 큰 환영과 환대 – 더 큰 평화의 노력’이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 큰 평화 노력’속에는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넘어서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장하는 한미동맹은 평화를 위한 동맹이지, 전쟁을 위한 동맹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의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미국의 행위는 동맹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한 더 큰 노력을 벌여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면,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더 큰 평화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합쳐져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평화를 말하고, 통일의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평화의 제전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평창올림픽이 그러한 평화의 제전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북이 손잡고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고, 함께 땀을 흘리며 ‘Corea’를 외쳤고, 남북의 응원단만이 아닌 해외의 동포들까지 함께 하는 응원단이 만들어져 평화를 노래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올림픽 이후까지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부터 ‘더 큰 평화 노력’이 요구된다.


2016-17년 촛불이 한반도 남단을 환하게 밝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남북이 함께 한반도 전체를 환하게 밝힐 ‘평화의 촛불’을 밝힐 시간이다.


자, 또 한 번 평화를 위한 촛불을 밝혀보자!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평화의 마중물 ]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송강호


제주도는 아름다운 관광지다. 일년의 거의 반은 눈이 덮인 한라산의 위엄을 볼 수 있고 산 자락은 바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산이 좋아서 들어오고 또 바다가 좋아서 찾아오는 섬이다. 전에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중국관광객들이 폭주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내리는 제주 공항의 활주로 아스팔트 밑에는 아직도 신원을 알 수 없는 4.3 사건 당시의 시신들이 고스란히 묻힌 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사실 상 국립공원인 한라산 전체가 학살지였으며 서귀포의 관광지 정방폭포를 비롯한 제주 바닷가 곳곳이 학살터였다. 학살지역을 피하면 제주도에 관광객들이 발디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주도민들에게는 낫지 않은 아픈 상처요 잊혀지지 않는 슬픈 기억이다. 2016년 바로 이곳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정부와 군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해군 기지에 어느 날엔가 서부터는 미군 군함들과 잠수함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죽 쒀서 개준다더니 우리 나라가 비싼 돈 들여 군사기지를 만들어 실제 유용하게 이용하는 나라는 정작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실제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태평양 전체를 자기집 안마당인 양 활보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아시아의 신흥 초 강대국 중국이 등장하여 태평양의 서쪽은 자기들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게 몹시 마땅치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2차대전에서 자신과 싸워 패망한 일본에게서 오키나와를 빼앗아 군사기지를 세웠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이 끊임없이 기지철수를 요구하고 있어서 불편하던 차에 강정해군기지건설, 이게 웬 떡인가? 최대의 적수 중국의 코앞에 있는 제주도에 미국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해군기지를 그것도 자기나라 돈 하나도 들이지 않고 새로 지어 준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처음에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는 이유가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우회하여 남쪽으로도 공격할 수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대비하여 지리적으로 최남단인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중국의 어선들이 떼로 달려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무장한 해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중국 어선이 아무리 난폭하다한들 이 민간 어선들을 퇴치하기 위해 미사일을 장착한 이지스함이나 어뢰로 무장한 잠수함까지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이도 이치에 닿지 않았다. 그러자 아덴만이나 말래카 해협의 해적들로부터 우리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대양해군이 필요하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우리의 유조선이나 상선이 중국에 의해 공격 당할 수 있다고 겁박하였다. 그러나 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군사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해적 퇴치는 우리 군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럴 경우 심각한 외교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상선을 중국이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중국과 무력 충돌을 일으켜서는 절대 안 된다.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런 횡설수설 이면에는 군인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은밀히 얽혀져있었다. 결국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대 중국 전략 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해군기지건설로 앞으로 초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을 자초한 것 일수도 있다. 저주스런 재앙을 불러오는 위험한 시설인 것이다.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에 묻힌 구럼비 바위는 기도와 명상의 터였다. [사진제공: 강정 해군기지반대 대책위]


강정의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운동은 육지 뿐 아니라 바다 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 강정 해상팀]


내가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런 재앙의 불을 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공사중단을 요구했고 해상 공사의 위법성을 증언하였다. 그 결과로 업무방해라는 죄목으로 세 차례나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지금도 재판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불행을 가져온 제주도에 애정이 더 깊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옥중에서 제주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제주도를 위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제주도는 군사기지 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 군인도 전쟁도 군대도 없는, 군사훈련도 전쟁 연습도 없는 평화로운 섬이 되어야 더 아름답고 더 가치 있는 소중한 섬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제주 해군기지를 세계의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평화 대학으로 전환시키자. 매장해 버린 아름답고 거룩한 구럼비 바위의 시멘트 콘크리트를 거둬내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자. 해군 본부는 대학 본부가 되고 군 관사는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도록, 복합 문화센터는 학생회관이 되도록. 굳게 닫힌 군대의 철문이 하루 속히 활짝 열리고 높은 돌벽이 허물어져 평화의 공원으로 개장되도록. 지금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볼 수 조차 없는 중덕 바다에 다시 돌고래 떼들이 몰려와 파도를 차 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강정 앞바다에서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라고 지금도 해군기지를 돌며 기도 드린다


2013년 1월 27일 평화운동가들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지 8주년이 되는 날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선언하였다.

[사진제공: 비무장 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이미 해군 기지가 지어졌는데 어떻게 이를 다시 되물릴 수 있겠느냐고 시름 섞인 푸념을 한다. 그러나 들어온 길이 있으면 나갈 길도 있는 법이다. 해군기지가 나가면 강정 앞바다를 버리고 떠나가 버린 돌고래들이 상서로운 기운을 몰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제주도의 선주민들이 진심으로 해군기지뿐 아니라 모든 군사기지를 원치 않고 또 군사 기지가 없어지는 것을 원하고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제주도는 더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쳐 외치고 분연히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4.3의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모두 정신적인 외상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으로 가족 중에 한 두 명 이상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고 모든 가족들이 나서지 말라고 눈을 흘기는데 누가 용기 있게 나서서 소리 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제주 도민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귀가 열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제주도를 피곤할 때 쉬고 심심할 때 놀고 오는 한반도 변두리의 부속섬 정도로 여긴다. 군인들은 본토를 지키기 위한 변두리의 국경 초소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몸이 다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제주도가 우리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예인선이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시아 바다의 지정학적 중심지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지난해 한반도는 촛불의 불길로 격동하는 한 해를 보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지난 해의 촛불처럼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담겨있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불길처럼 타오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날을 위해 한라산 남쪽 끝자락에서 군사기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불씨를 지키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이 통일의 횃불이 점화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번져갈 것을 희망하고 상상한다.



송강호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30

[시선 | 세상과 만나는 인문학]


어린 왕자와 영화인들


송태효


시네아스트 생텍스 
평화주의를 실천한 행동주의 소설가 생텍스의 시네아 스트로서의 삶은 영화사에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 소설가로 성공한 생텍스는 프랑스 유명 감독 레몽 베르 나르 (Raymond Bernard)가 연출한 「안느 -마리 (Anne–Marie)」 (1935) 의 시나리오를 쓰고 피에르 비용 (Poerre Billon) 의 『남방 우편기 (Courrier du Sud)』 (1936) 를 각색 하고 헌팅도 도왔다 .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1940 년 드 골의 런던 망명 정부와 페탱의 비시 프랑스 자치 정부의 위선에 항의하며 조국을 떠나던 생텍스는 피에르 비용에 게 「이고르 (Igor)」 시놉시스를 맡기며 귀국 후 공동 제작 을 제안한다 . 하지만 1944 년 7 월 31 일 동료들의 만류에 도 불구하고 아직 길들지 않는 신종 비행기로 자원 출정 한 마흔네 살의 전투 조종사 생텍스가 지중해에 추락하 며 이 제안도 물거품이 되었다 . 

뉴욕 망명 생활 중에도 생텍스는 모국어 감각 상실을 우려하여 영어 사용을 자제하며 세계의 프랑스인들에게 위 안과 용기를 주는 프랑스의 목소리를 전했다 . 생텍스는 1941 년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초청으로 할리우드를 방문한다 . 그는 기성 화단의 구태 성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새롭게 영화의 길을 선택하여 『게임의 규칙 (Règle du Jeu)을 발표하나 영화의 풍자 대 상인 부르주아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 하 지만 정작 망명지로 택한 미국에서 상영된 그의 작품들 은 관객을 열광시켰다 . 이방인 감독으로 추앙받던 르누 아르가 생텍스의 영화적 재능을 인정하고 『어린 왕자』의 전편인 『사람들의 땅』을 영화화하고자 원작자를 영화의 메카로 모신 것이다 . 

원작의 정신을 이미지로 재탄생시키는 르누아르의 천재적인 발상에 탄복한 생텍스는 자신의 기획안을 녹음한 레코드를 제작하여 르누아르에게 선물하며 서로의 우 정을 나눈다 . 갈리마르 출판사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우정어린 편지와 레코드 내용을 정리한 글을 한데 모아 1999년 『친애하는 르누아르에게 (Cher Renoir)』를 출간하였다. 당시 조종사들의 고난과 동지애를 통해 꺼져가는 양심의 불꽃들을 살리고 서로 소통시키려는 영화적 시도로서 르누아르가 자기 생애 최대의 걸작으로 여긴 이 영화의 제작은 아쉽게도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만다 . 하지만 다행히도 데이비드 셀즈닉 제작,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야간 비행 (Vol de Nuit)」 (1933, MGM) 은 오늘날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하다. 야간비행 시청하기



『어린 왕자 』의 영화화 역사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으로 프랑스 최고의 거장 르누아르와 함께 영화사를 풍미한 미국 명감독 오슨 웰스는 위대한 독일 소설가 카프카의 원작을 각색한 「소송(Procès)」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전신인 오르세 역에서 촬영할 정도로 유럽 문화에 정통한 시네아스트였다 . 그 역시 『사람들의 땅 』을 각색하며 그 희열을 친구들에게 쏟아냈고 이어서 『어린 왕자 』의 영화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린 왕자 』를 영화화하려는 그의 제안은 월트 디즈 니사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시민 케인 』에서 오슨 웰스는 이미 어린 왕자의 모험기 형식의 선례를 보여주고 있 다. 그 유명한 ‘로즈버드 ’ 수수께끼를 따라 케인의 어린 시절을 추적해가는 과정은 마치 『어린 왕자 』의 비행사가 어린 왕자의 기원을 풀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지며 그의 죽음을 맞는 것과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 


노골적으로 자신이 어린 왕자임을 천명한 배우도 출현하였으니 할리우드 신화 속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우상으로 남은 영화배우 겸 카레이서 제임스 딘이다 . 제임 스 딘은 열 살 무렵 생텍스를 직접 만났다고 친구에게 자랑한 적도 있다. 『어린 왕자 』의 영화화라는 위대한 꿈을 지닌 제임스 딘이었지만 그 꿈은 자신의 애마 포르셰(Porsche 550 Spyder)를 몰고 가던 1955년 10월 8일 SR 46 도로에서 처참히 부서져 버렸다. 동료 윌리엄 베 스트 (William Bast)가 제임스 딘의 무덤에 새긴 어린 왕자의 한 마디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라는 묘비명이 그의 어린 왕자 사랑을 전한다 . 제임스 딘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어린 왕자』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셜램(Cholame)의 제임스 딘 메모리얼 파크 소재 묘비명. 윗부분에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라고 에칭으로 새긴 구절이 보인다.


드디어 1967년 『어린 왕자 』가 장편 영화로 탄생하게 되니 파라마운트가 제작한 리투아니아 출신 아루나 스 제브리누아스(Arūnas Žebriūnas)감독의 「어린 왕자 (Malenki Prints)」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독특한 분장의 캐릭터들 대화로 구성된 판타지로 오늘날 창작물의 수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무대 연출과 구성으로 높 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시청하기


리투아니아 출신 아루나스 제브리누아스 감독의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영화로 옮기려는 시도 가운데 길들임의 주제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잘 살려낸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감독 스탠리 도넌 (Stanley Donen)의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1974) 이다 . 올드 무비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사랑은 비를 타고로 한국 시네필들에게 잘 알려진 스텐리 도넌의 「어린 왕자」는 생동감 넘치는 현대적 애니메이션 , 시대를 앞서는 안무와 음악 , 뱀 역의 발레 댄서 가수 밥 포시(Robert Louis Bob Fosse), 조종사 역의 리처드 컬리(Richard Kelly), 어린 왕자 역의 스티븐 워너(Steven Warner), 여우 역의 진 와일더 (Gene Wilder) 등의 명배우 캐스팅으로 세상의 찬사를 크게 받았다. 특히 원작의 주요 대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어린 왕자와 뱀 그리고 여우의 우정에 근거한 스토리텔링은 원작자 생텍쥐페리 자신도 흡족해했으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실사를 합성하여 성인과 아동이 함께 보며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즐길 수 있게 편집된 명작이다. 특히 여우와 뱀을 연기하는 두 명배우의 노래와 춤이 인상적인데 뱀 역을 맡은 밥 포시의 문 워크를 마이클 잭슨이 그대로 복원하여 크게 성공하기도 하였다 . 

스탠리 도넌의 「어린 왕자」(1974)의 오프닝 크레딧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원조 밥 포시의 안무. 스탠리 도넌의 「어린 왕자」(1974) 



현대적 감수성으로 부활한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 」 
『어린 왕자』의 감동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부활시키려는 시도도 계속되어 왔다. 이 가운데 『어린 왕자』를 읽고 크게 감동한 드림웍스의 「쿵푸 팬더 」감독 마크 오스본 이 원작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8년간의 노력 끝에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재탄생시켰다. 2015년 제68회 칸 국제영화제는 이 작품을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하여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하였다 . 

어린 왕자와 여우와 소녀, 

마크 오스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2015) 


비행사와 어린왕자, 마크 오스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2015)


생텍스는 일찍이 글과 영상을 통해 세계 시민들 모두에게 전쟁의 공포를 알리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진정한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로서 미국의 참전을 요구하였다. 그의 요구대로 미국이 유럽 전선에 일찍 참전하였다면 독일의 항복도 그만큼 빨랐을 것이고 생텍스는 일찍 조국으로 돌아가 시네아스트로서의 꿈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주의 공군과 해군의 공격을 받고서야 참전하게 된다. 우리의 광복도 그만큼 지연된 것이다 . 프랑스 공화국 법령에 의거 하여 1963년 파리의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된 어린 왕자 생텍스 그리고 그를 사랑한 인디애나의 어린 왕자 제임스 딘의 영혼에 평화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 '아트인라이프 ' 출간 < 월간 태백 > 에 12 회 연재한 동일한 제목의 기사 내용을 반으로 줄이고 <피스레터 > 의 기획 의도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송태효  불문학 박사로 현재 '어린왕자인문학당' 대표와 제주불교문화대학 불교인문학 교수, '성남시지역발전자문위원회' 교육체육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는 예술인가, 어둠의 방-시와 영화 속 그림자 이야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생텍쥐베리 사람들의 땅, 어린 왕자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아메리카 대륙, 승자만을 위한 자유의 나라


김소울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경, 황금과 보석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콜럼버스 일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정복한 강자들이 미화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당시 해양진출을 활발히 도모하던 스페인의 팽창정책과 콜럼버스의 개인적 야망은 일치하였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앞으로 발견하는 지역의 식민지 총독 및 부왕의 칭호를 내리고, 그 곳에서 산출된 귀금속의 1/10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며 그 자손들에게 직위가 영구히 상속될 것이라 명시하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을 했다. 때문에 지금도 카리브해 연안의 섬들을 서인도라 명명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후에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땅임을 밝혀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다.


외젠 들라크루아,『콜럼버스의 귀환』(1839)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영웅으로 칭송 받았으며, 왕과 왕비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게 된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콜럼버스의 귀환>에서는 보석과 귀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명예와 부에 대한 그의 야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콜럼버스의 열망과 욕심은 그를 분명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 영광을 이룩하기 위해서 수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1492년 10월 12일 이후 원주민들에 대한 길고 험한 대학살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이는 유럽인들의 약 400여년에 걸친 아메리카에서의 착취와 정복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과 아메리카 본토의 총독 겸 주지사가 되었으며, 토착 원주민들에게는 공납과 부역을 명령하였다. 신속하게 노예정책을 도입하고, 그들로부터 옥수수와 면화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한편, 금광 채굴 등의 강제 노역을 시키게 된다. 그는 토착 원주민들이 할당량의 금을 채우지 못할 경우 수족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이 때 많은 원주민들이 도망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에 대한 조직적인 몰살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가혹정치로 인해 약 800만명으로 추정되는 타이노(Taino)족이 1500년경, 그가 총독의 자리를 떠날 때 약 10만명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콜럼버스가 떠난 이후에도 그가 표방했던 3G정책은 지속되었다. Gospel(기독교의 전파), Glory(왕에 대한 영광), Gold(황금 약탈)로 요약되는 3G정책 결과 1514년 겨우 22,000명의 토착 원주민들이 생존하였고, 1542년에는 단지 200명의 원주민들만이 살아남았다. 그 이후 토착 원주민은 멸종되었다.


원주민의 땅이지만 식민지가 된 신대륙에서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새롭게 발견된 담배와 같이 귀한 물건들의 교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초기 정복자들은 이 땅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식민지의 교역을 통해 부자가 되어 다시 유럽에서 살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이주정책이 필요했고, 아메리카에 정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토지 50에이커(61,000평)을 제공하는 인두권 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그리하여 초기에 아메리카대륙에 뛰어든 스페인에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뒤따라 식민정책에 합류하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1772)


벤자민 웨스트가 그린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당시 신대륙에 모여든 사람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국의 귀족이었던 윌리엄 펜은 1681년에 펜실베니아에 있는 식민지 땅을 받게 된다. 펜은 영국과 식민 아메리카 등지에서 일어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의 한 부류인 퀘이커(Quarkers) 교인이었다. 퀘이커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교회조직을 부정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성격을 띄고있었다. 이 때문에 성공회와 퀘이커교는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다. 펜은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아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은 후, 그곳을 ‘펜실베니아’라 명명하고, 퀘이커 교인들처럼 박해 받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하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토착 원주민들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우애의 도시라는 의미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원주민들과 윌리엄 펜이 서로 만나 협정을 맺고 선물을 교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우애적이던 영국인들과 원주민들의 관계는 1718년 펜의 사망과 함께 깨지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는 이 그림을 펜의 사망 54년 이후에 그리게 되는데, 그림에서는 후에 일어났던 원주민에 대한 학살 장면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인물들은 윌리엄 펜과 그의 친구들이고, 오른쪽에는 펜실베니아의 토착 원주민들이 보인다. 벤자민 웨스트는 왼편의 인물 뒤에는 석조건물과 배, 그리고 무엇인가를 나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의 인물 뒤에는 나무와 풀, 그리고 벌거벗은 원주민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18세기말 서양 사회를 지배했던 문명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당연시 여기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왼쪽 아래에는 서양식 의복을 말끔하게 입은 인물들이, 오른쪽 아래에는 젖을 먹이고 있는 원주민 여성, 그리고 나무판에 아이를 묶어 놓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뒤편에 서있는 서양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는 반면 원주민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활이 들려 있는데, 이는 결국 서양인들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것이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약 100년이 지난 후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던 영국정부가 다양한 명목으로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식민지인들은 1775년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신대륙에서 시작된 서양인들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들이 일구어 낸 자유의 나라 미국. 그 그늘 아래에는 그들의 자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희생된 수 많은 원주민들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원주민들의 피로 물든 역사 위에 일궈낸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 벤자민 웨스트의 그림 속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영국에서 아리랑을 불러봅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설날을 맞을 준비를 하시겠군요.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게 된 지 이제 10년이 되어 가는데 여전히 저는 음력 설을 지내야 새해가 온 것 같고, 김치 만두를 빚어 떡만두국을 끓여 이웃을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세배도 하고 윷놀이를 노는 시간을 기대합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한국에서는 나이만큼 만두를 먹는다고 말해주었는데 올해는 만두를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깨동무 가족 모두 풍성한 설날을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명절이 오고 한국이 그리워질 때면 저는 아내, 아이들과 노래를 불러보는데 요즘 떠 오르는 노래는 개똥벌레와 아리랑입니다. 개똥벌레는 예전에 한 번 마을의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공동체 축제 때 불렀는데 친숙한 곤충이 등장해서 그런지, 아니면 개똥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소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입에 착착 붙는 노랫가락 때문인지 마을 사람 모두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한 친구는 이 노래를 영어로 번역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아니면 돈 고워에이(Don't go away) 돈 고 워에이 돈 고워에라고 흥얼거리는 친구를 간혹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슬프면서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울다 잠이 든다로 마무리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사람들 노래(folk song)인 포크송 개똥벌레 덕에 친구를 많이 사귀었습니다.


두 번째 노래 아리랑은 이곳 영국 식구들이 가장 잘 아는 한국 민요(folk song)입니다. 한국 손님이 오셨을 때 청하면 곧잘 부르는 노래가 이 노래이고, 런던에서 한국문화 행사가 열리면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저희 마을의 음반 도서관에 가면 미국의 포크송 가수 피트 시거가 세계 여러 나라의 민요를 모아 부른 음반이 있는데 거기에는 한국의 아리랑도 담겨 있습니다. 피트 시거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노래를 부르기 전에 관객들에게 아리랑의 배경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아리랑을 당시 고통당하던 사람들의 애환을 부른 노래인 동시에 남과 북의 사람들이 두루 아는 노래이기때문에 남북의 일치를 상징하는 노래라고 합니다.


피트 시거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정든 터전을 떠나야 했던 여행길에 아리랑을 부르며 슬픔을 달랬고, 서로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방마다 특유의 가락과 노랫말의 아리랑이 불리고 있지요. 그리고 아리랑은 소련 때문에 강제로 고국을 등져야 했던 고려인들에게도 불렸습니다. 저는 예전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17년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독일과 전투를 치르다가 포로로 잡인 고려인들이 수용소에 부른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프로이센 수용소에 갇혔던 김그리고리(김홍준)과 안 스테판(한국 이름 미상)이 불렀던 아리랑 노래가 100년이 지나서 공개된 겁니다.


두 사람이 부르는 애달픈 아리랑 곡조를 듣고 있자니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서 평화가 와서 정든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곳 영국에서 제가 찾던 형제애의 삶을 기쁘게 살고 있지만, 고국의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곳의 상황을 염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쩌다가 저도 모르게 아리랑을 콧노래로 부르게 되는데 그때는 한국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동시에 한국의 평화를 기원하게 됩니다.


고려인 전쟁 포로가 부른 아리랑 듣기


마을 식구들이 저녁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 부르는 모습. 사진: bruderhof.com/ko에서


곧 열릴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의 노래로 아리랑을 연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피트 시거의 말대로 이 노래는 남북 평화의 상징인 게 틀림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치적 입장을 잊은 채 손을 맞잡고 노래를 함께 부르다 보면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습니다. 아직 북한과 미국의 오래된 적대 관계를 풀어야 하는 등 넘어야 할 고개가 많지만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평화의 아리랑을 부르며 교류의 문을 열어나가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어깨동무가 다시 북녘의 어린이병원과 콩우유 공장, 학용품 공장을 찾아가 지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설에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우리 가족, 마을 식구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민요는 모름지기 우리의 삶을 담고 마음을 담아 함께 만들어 부르는 노래라고 하니 저희 나름대로 노랫말을 붙여 부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지어 부르는 노래는 영국 아리랑 또는 저희 마을 이름을 따서 너도밤나무 아리랑이 되겠군요. 벌써 입에서 노랫말이 흘러나와 한 번 적어봅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 봄이 왔네 새봄이 왔어 평화의 봄을 열어나 보세

(후렴)


2. 총을 버리고 손 맞잡고서 화해의 세상을 만들어봐요

(후렴)


3. 잠긴 문을 열어젖히고 기쁨의 잔치를 열어나 보세

(후렴)


영국 학교에 다니는 저희 아이들에게 한국 노래 부르기는 한국말을 배우면서 우리네 문화를 배우고, 아픔과 희망을 나눌 기회입니다. 멀리서지만 어깨동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마음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소식 전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2018년 2월 3일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게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