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9.05.14 12:12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독일, 아우토반과 분데스리가 축구

 

정진헌

흐리고 스산했던 독일의 겨울도 어느 덧 지나갑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4월을 독일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April, April, der macht was er will(4월, 4월은 자기 하고싶은 대로 한다네). 속담에도 Aprilwetter und Kartenglück wechseln jeden Augenblick(4월 날씨와 행운카드(운세)는 눈 깜짝할 새에 바뀐다)라고 할 정도로 비바람과 눈보라, 갑작스런 화창한 날씨 등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뒤바뀌곤 합니다. 

북유럽 계절의 전환기 4월이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주제라면, 한국의 4월은 우리 근현대 역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은 듯합니다. 참혹한 냉전의 서막으로 아직 원혼의 넋들이 잠들지 못한 제주 4.3사건, 젊은 꿈과 생명을 허망하게 앗아간 4.16 세월호 사건,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냈던 4.19 항쟁, 그리고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한 4.27 남북정상회담. 이렇듯 처절함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가 한국의 4월입니다.

그래서인지 4월에는 유난히,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국가라는 정치체와 주권자인 국민 개인들의 관계, 특히 책임(의무)과 권한(자유)이라는 계약 내용을 문화적인 차원에서 성찰해 봅니다. 

국가의 일원이기도 한 우리 개개인은 자연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욕구는 그가 속한 독특한 시대와 문화의 테두리 안에 만들어 지지만, 동시에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 노력해왔습니다. 바로 자유와 평등, 개인과 공동체가 누리고자 하는 욕구와 권리이자, 평화의 내용인 이 두 가치의 균형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 근대국가의 가치를 위한 개인(들)의 투쟁이 억압되는지, 아니면 나름 정당하고 공평한 약속에 맞추어 실현되는지에 따라 삶에 대한 만족도, 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저는 독일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가능하다면 두 가지 문화체험을 시도해 보라고 제안하곤 합니다. 독일이라는 나라의 특성, 특히 국가와 국민 개개인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경험해 보라는 의미에서인데, 사실 다소 낯선 체험일 수 있습니다. 바로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려보는 것, 그리고 분데스리가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입니다.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된 문화체험 코스인터라 다소 의아해 할 수 있으니, 제 경험에 비추어 추천 이유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아우토반에 대한 짧은 단상입니다. 외부에도 잘 알려져 있듯, 독일의 아우토반은 속도 제한이 지정된 구간을 제외하고는 마음껏 속도를 내며 달릴 수 있습니다. 도로의 약 40퍼센트인 도시 근교, 공사 구간(늘 항상 존재하죠), 위험 지역 등은 제한 속도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고, 그 규정을 위반할 시에는 벌금이나 벌칙이 매우 혹독합니다. 

속도 무제한 구간에서 아우토반을 달리다 보면, 질주에 대한 욕구, 무한의 자유주의가 최소한의 약속만 지키며 마음껏 구현되는 느낌을 체험합니다. 그 최소한의 규칙이란, 추월선인 일차선에서는 가장 빠른 차들이 달리도록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달리고 싶은 차들은 속도에 따라 이차선이나 삼차선으로 빠져서 달려야 합니다. 즉, 자기 달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달리도록 내버려 둔 곳이 아우토반 무제한 속도 구간에서의 일차선입니다. 그러나 아우토반은 ‘무한경쟁’의 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주하고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마치 ‘무한대로’ 체험되는 열린 공간인 셈입니다.  

이것이 아우토반의 묘미입니다. 평상시 독일 사람들을 보면, 질서 정연하고, 규율을 잘 지키고, 자기 감정들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소위 합리와 이성, 일상적 윤리를 중시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우토반에만 들어서면, 자동차 가속 페달을 거침없이 밟습니다. 매우 차분하고 친절하던 사람들도 종종 아우토반에만 들어서면, 질주의 본능의 되살아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무한속도 구간에서는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즉,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단속 카메라나 피하면서, 다른 운전자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불법 과속으로 방종을 누리려는 다른 나라들의 고속도로와 다른 차원인 셈입니다. 

물론, 시속 200키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면서도 안전하게 느껴지는 차량들은 독일에서도 고급 브랜드에 속합니다. 일차선을 바람처럼 달려가는 차들은 대부분 벤츠, 베엠베(BMW), 아우디 준중형급 이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한 속도의 자유가 주어지는 아우토반도 독일 사회의 계급 계층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간이기 보다는 오히려 극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장소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경제적 여유가 된다고 해서 다들 좋은 차를 구입해서 고속주행을 선호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싼 차량에 소비를 하느니, 집을 가꾸거나 좋은 와인, 혹은 특히 휴가 여행 등에 더 비중을 두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이지, 가상으로나 존재하는 “남들” 다 하는 거라며 따라하거나, 그렇게 못하면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조바심 소비 지상주의”는 아닙니다.  
 
이렇듯 아우토반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재현되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아우토반을 올라탄 개별 운전자들은 자신들의 속도를 자신들이 정할 수 있다는, 선택의 자유가 향유되는 걸로 인식합니다. 아우토반은 그래서 독일 국가의 개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제도적 문화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체험케 하는 실핏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우토반

이와 유사한 연장선상에서 저는 분데스리가 경기 관람 역시 의미 있는 체험이라 봅니다. 이는 경기를 관람하는 것 자체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주중의 독일 사람들이 질서와 규율에 따른 일상생활을 한다면, 주말 경기장 나들이는 마치 인류학에서 보는 비일상적 의례 행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축구장으로 가는 여정부터가 이미 의례입니다. 

적지 않은 축구장 위치는 전철역에서 약 20여분 도보로 떨어져 있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부터 이미 자기 팀을 응원하는 성인들은 맥주를 마시며 응원가를 부릅니다. 역에 내려 출구로 나가면 정복 입은 경찰들이 마중나와 있습니다. 인파들이 향해야 할 방향을 안내하듯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말이죠. 고래 고래 노래를 부르는 광팬이라 하더라도 남의 눈쌀을 찌푸릴 만한 과도한 행위는 알아서 자제하는 경향입니다. 긴 행렬을 따라 경기장으로 향하는 곳곳에도 큰 말들과 함께 서있는 멋진 정복 경찰들을 봅니다. 사람들은 모델처럼 예쁜 남녀 경찰들과 그들의 말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손에 든 맥주를 들이키며 친구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경기장으로 향합니다. 

그 긴 여정에 소변이 안 급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남녀노소없이 실례(?)해도 다들 눈감아 줍니다. 그렇게 비일상적 일탈을 즐기던 사람들도 경기장 앞에 도착하면, 안전 검색대부터 얌전해집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면, 경기 내내 난리법석인 지정 응원석을 제외한 일반석 관람객들은 “진지한” 관전 모드로 확 바뀝니다. 골이 들어갔거나, 상대 선수의 파울, 이따금의 파도타기 등을 제외하고는 정말 전후반 90여분 동안 자기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조용히 경기를 관람합니다. 경기가 끝나면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스르르 빠져나갑니다. 혼돈 속의 질서처럼, 비일상의 감흥을 즐긴 사람들은 다시 주중의 규율적 일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분데스리가

독일에서의 축구는 관람의 대상만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직접 참여하는 클럽 활동으로, 개인의 정체성, 인성, 그리고 사회성 등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문화기제입니다. 어깨동무 후원 회원이기도 한 제 아들은 초등 1학년 때부터 시작하여 어느 새 10여년째 매 주 2회 정기 연습과 주말 1회 경기를 치루고 있습니다. 경기를 하기 때문에 경쟁구조처럼 보이지만, 승패라는 결과는 과정의 연장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정식 심판에 의해 적용되는 룰, 상대팀의 전력과 자기 편의 그것들이 서로 맞붙어서 나는 승부에 대해 인정하는 태도를 기릅니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데, 지는 것을 분해하고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은 중간에 관두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공정한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습관은 사회 일반에 대한 신뢰성 구축에도 영향을 줍니다. 누군가 뒷돈이나 권력을 써서 일등이 되거나 대학에 입학하는 식의 부정한 경쟁을 의심하며 사회를 불신하는 경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수업에 나오지 않고도 학기말이 되면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학점을 잘 달라고 떼를 쓰는 희한한 습관을 기르지도  않습니다. 스포츠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 누리고 싶은 것들을 “선택”하는 권리와 그것들을 공정한 협력과 경쟁의 관계에서 책임 있게 수행하는 연습을 일찍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독일의 축구 팬 구성은 대부분 자기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하이마트(Heimat, 고향)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봉건시대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지역 기반 문화와 정체성이 지방자치제도 안에서 구현되므로, 독일 국가의 내적 다양성과 역동성도 함의합니다. 즉, 어려서부터 지역에 기반 한 국민 체육 시스템이 운영되기 때문에, 모든 연령대와 다양한 종목들을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동시에 더 수준 높은 선수들의 경기를 관람하는 순으로 나아가는 식입니다. 자신들의 낸 세금이 이러한 공공 스포츠 시설과 프로그램에 활용되므로, 세금 납부자들이 곧 수혜자이자, 사회의 공공성 유지가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일상의 평화가 존재하는 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권리와 책임의 균형 속에서요.

이런 점에서 한국도 그 동안 많이 좋아졌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까지 살았던 한국에서 저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먼저 채워야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분단 이후 오랜 독재정권 하에서 국민들이 누려야 할 권리들, 특히 기본권이라 불리는 생존권, 노동권,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누리고자 하는 대부분의 노력들은 폭력적으로 탄압되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개인, 노동자, 시민으로서의 자유는 “누리는”게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반면, 병역의 의무 등은 자유롭게 기피할 수 없었습니다. 

즉 우리는 분단국가 형성 과정에서 의무와 권리에 대한 불균형적인 경험을 해왔습니다. 특히나 권리를 주장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종종 자극적인 방법을 써야 했습니다. 합리와 이성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더 큰 문제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당연시 되어온 의무, 그리고 억압되어진 권리가 상위 기득권층들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내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며, 여기에 남녀 간의 차별까지 더해지고, “고객”과 “점원”간의 관계에도 재생산되어, 권력구조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국민 내부조차도 불평등의 문화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적폐라고 부르며 바꾸고자 하는 영역은 사실, 우리 몸에, 우리 안에 깊이 배어있는 불신의 문화인지도 모릅니다. 

1987년 윤이상 선생님의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가 북녘 땅 평양에서 초연되고, 남쪽에서는 2007년에야 연주되었습니다. 남쪽 민족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삼아 과거-현재-미래를 노래한 이 작품 마지막 4악장 미래 편에는 당시 시인과 음악가가 꿈꾸던 나라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어른들이 꿈꾸던 미래의 나라, 그러나 현재도 여전히 꿈만 꾸게 되는 그런 나라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향한 개인의 욕구가 다양한 방향으로 공정하게 발산되고 충족되면서,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어깨동무하며 사는 그런 “당연한” 나라가 일상과 비일상의 공간에서 체험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마지막 가사인 백기완 님의 시를 가슴으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북을 쳐라

새벽이 온다.

새벽이 오면 이방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무서움에 떨며 물으리니

누가 아침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타오르는 해를 보게 하라.
오 오 영광 조국

동방에 나라 있어

거기 사람이 살고 있다 하라

때가 오면 어둠에 지친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가 머리를 감고

은 웃음과 사랑노래로 

새로운 하늘과 땅을 경배하리니

오 오 그날이 오면

겨울이 가르쳐준

모든 언어, 모든 진리로 영광을 빛내자.

북을 쳐라, 바다여 춤춰라

오 영광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통일이여! 

 

정진헌ㅣ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 (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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