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9. 11. 18. 18:18

[평화의 마중물]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4)

분노를 넘어 희망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한 까닭 

 

박종호

 

지난 밤 김동진 박사 평화 책 잔치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최관의, 심은보, 댄 가즌, 김경옥 선생님과 ‘벨파스트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면서 기네스 맥주를 신나게 마셨다. 젊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방에 올라와서 눈을 붙인 시간이 새벽 2시, 어찌어찌해서 맥주를 사느라고 지갑을 털린(^^) 최관의 선생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냥 눈을 감았다 뜨니, 오전 모이는 시간이 코앞에 와 있다.

오늘 마지막 방문지인 벨파스트 교육청 지원센터(Belvoir Youth Centre)에 들어섰다. 북아일랜드 사회통합을 위해 교육청이 하는 여러 일 가운데, 분리 교육이 시행되고 있는 신교도, 구교도 지역 학교들을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협력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연결하는 공유교육을 지원하는 곳이다. 깔끔한 시설과 부지런하고 친절한 직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이런 노력들이 풍부한 기금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교육청 관계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앞두고, 한 시간 정도 회의실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데릭 윌슨 박사님이 김동진박사와 함께 사회를 보고, 이번 연수에서 배우고 느낀 바를 함께 나누는 ‘총화’ 시간이다. 데릭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우리들에게 이번 연수에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을 말하고, 두 번째는 이번 연수에서 얻어 가는 게 무엇인지 말해 보자고 하신다. 우리는 시계 방향으로 바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평화, 평화교육을 처음 경험한 기회였는데, 어제 기네스를 좀 많이 마셔서 저를 관리하지 못한 게 아쉽고, 함께한 선생님들 기운을 받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좋은 경험을 해서 고맙다.”(김경옥)

“코리밀라에서 데릭 교수님 집에 가서 겪은 밤이 많이 생각난다. 모둠으로 나누어 파티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문화는 제도나, 행정으로는 만들 수 없는 부러운 문화였다.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는 평화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일상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다시 돌아봐야 하고, 의심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최관의)

“데릭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희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더디게 천천히 오지만 멈추지 말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향숙)

“활동가들이 서로 영감을 주는 게 감동 깊었고, 이번 연수에서 어쩌면 평생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평화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코리밀라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선명하지 않아서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이런 혼란은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했다. 그래도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에 담았다.” (주예지)

“워크숍이 좋았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 김동진 박사님,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어젯밤 종호, 경옥 선생님 노래에서 좋은 영감 많이 받았다. 그런 경험을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는지 앞으로 많이 고민하려고 한다.” (댄 가즌)

“평화교육을 깊이 경험하게 되어 좋았고, 지금 고민은 이것을 돌아가서 어떻게 나눌 것인지, 어깨동무에서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이 성장하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숙제를 안고 간다.” (김윤선)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중간에 소화할 시간을 좀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극은 받았는데, 그냥 돌아가면 잊혀질까 두렵기도 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나는 왜 저분들만큼 자신감이 없을까?를 자문하며, 좀더 과감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성숙)

“평화라는 말이 훅 들어오는 느낌. 평화는 목적이 아니고 과정이다. 우리 남과 북은 통일이 목적이지만, 그 이후도 끊임없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강명희)

“알시티에서 청소년과 대화해 본 일, 코리밀라 워크숍에서 프로그램을 배운 일, 통합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과 이야기 나눈 일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평화, 평화교육은 이제 시작이라는 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해 천천히 더 생각해 보겠다.”(정진화)

“곳곳에서 벽을 만났는데, 이름에 평화(Peace)라고 해서 놀랐고, 여기서 알시티, 코리밀라 같은 만남의 장들이 있고, 그곳에서 상상력을 많이 받았다. 잠깐 스치는 경험이지만, 돌아가서 실제 삶 속에서 다양한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심은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데릭 윌슨 박사님은 짧게, 그렇지만 울림이 있는 말을 해 주었다. 어쩌면 평생을 날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갈등과 전쟁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희망을 길어 올린 사람이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을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전수받는 게 학습이라 생각하는데, 진짜 학습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리로 먼저 걷고, 머리가 따라간다. 뭔지 몰라도 일단 걷는다. 그래도 걷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회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신념은 좁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으로 만날 때 공간이 넓어진다. 신념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차례가 오자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로 온 북아일랜드에서 또 많은 걸 느끼고 깨닫고 간다. 삼십 년 넘게 교사로 살면서 나를 지탱한 것은 분노였고, 다른 한편에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코리밀라에 와서 배우고 싶다.”

내 말을 듣고 데릭 선생님이 마무리 삼아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에서 뭔가 울컥한다.

“완벽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좌절에 이르는 길이다. 분노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희망을 가지면, 미래를 보게 되고, 그 미래를 위한 계획과 전략을 세운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희망을 공유하는 배움의 공동체. 이 희망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고맙다.”

일정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 우리를 태운 버스 앞에서 데릭 선생님과 진하게 포옹을 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란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말없이 한 번 더 안아 주셨다.
(2019. 2. 18.)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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