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1_4 김동진_평화학 공부와 실천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4.

[시선 아일랜드에서 쓰는 평화학 이야기]


평화학 공부와 실천


김동진


평화학을 공부하다보면, 학문과 실천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사실 평화학이라는 말 자체가 참 부담스런 단어다. 평화를 공부하는 사람답게, 공부만이 아니라 삶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매일 다짐해보지만 얼마나 평화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부끄러움뿐이다.


다른 학문에 비해 유독 평화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 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평화학이 지향하는 가치 때문일 것이다. 평화학은 연구에 담긴 평화적 가치를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평화학은 학문으로서의 자격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정부상태의 세계에서 국가는 상대적 이익을 추구하며 늘 경쟁하기 때문에 서로 평화적 협력이 어렵다는 저 유명한 현실주의 이론과 같이, 국제관계 이론은 어떤 가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가정을 세우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과만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연구자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를 제시해야 하며, 그 결과가 어떻게 활용되는가는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정책과 실천의 영역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정말로 가치가 배제된 연구가 가능한가? 연구자는 연구결과의 활용에 있어 자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도 전 세계 주요 대학에서 이런 방식의 연구에 기반을 둔 이론을 배운 수많은 졸업생들이 주요 국가의 외교정책을 수립한다. 국가가 언제나 상대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현실주의 이론에 동의하는 이들은 절대로 다른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 이들에게 평화는 곧 힘이다. 힘으로 다른 국가를 압도하거나, 적어도 힘의 균형을 이루지 않는 한 평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이 수립하는 정책은 정말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학문적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자신의 물리학 이론이 원자폭탄 개발에 사용된 아인슈타인의 탄식에서처럼 어떤 분야의 연구자도 자신이 내놓은 연구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실증주의적 연구는 가치와 사실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의 가치와 권력관계를 사실로 정당화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자체가 이미 현실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평화학은 연구자가 연구하는 대상에 대한 가치와 책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는 당연히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많은 평화학자들이 평화학과 의학을 비교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의학이 과학적 학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의학은 언제나 사람에 대한 가치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낫게 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의학 연구가 오히려 사람을 더욱 아프게 한다면 이는 의학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화학은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한다. 학문적 연구로서의 평화학은 의학도가 질병과 인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분쟁 지역과 갈등 집단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있는 이해를 추구한다. 그러나 의학도가 사람을 단순히 연구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듯 평화 연구자에게 갈등 맥락 속의 연구대상은 학문적으로 연구해야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함께 평화를 이루어가야 할 실천 대상이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아일랜드와 한반도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공유하는 경험이 참 많다. 식민지로서의 아픔, 분단, 전쟁, 냉전 이후 희망찬 평화 프로세스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도 서로 겹치는 순간이 많다. 물론 많은 차이점도 있다. 특히 부러운 점이 있다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의 평화 프로세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일 것이다. 며칠 전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경계선을 방문했을 때, 지역 주민께서 불과 이십년 전만해도 이 경계선은 군인들로 가득했고,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한 지역이었다고 알려 주셨다. 지금은 핸드폰이 로밍으로 바뀌는 순간 외에는 거의 경계선을 확인할 길이 없다. 차를 멈추고 보면 길가에 돌표지판이 보이긴 한다. 옛 군사지역은 지역 사람들이 즐기는 펍으로 바뀌어 있다. 같이 동행했던 한국 연구자 한 분께서 부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탄식 소리를 내셨다. 우리도 언젠가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곳이 예전에는 남과 북을 가르던 DMZ였다고 과거형으로 이야기할 날이 올 수 있을까?


한반도 연구자로서 아일랜드를 공부하는 기회에 감사하며 매일매일 새로운 것들을 느끼고 배운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은 한반도에 가 있다. 더블린에서 벨파스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탈 때면 어린이어깨동무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기억이 늘 떠오른다. 아일랜드 분들과의 대화 속에 항상 어떻게 하면 남과 북이 어깨를 마주하며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꿈꾼다. 성급한 일반화와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고 매번 스스로를 다잡지만 아일랜드를 공부하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꿈과 가치를 서랍 속에 넣어두고 객관적 연구를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필자에겐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평화학이 지향하는 평화적 가치 때문에 오늘도 학문과 실천의 경계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아일랜드의 하루를 보낸다. 내일은 좀 더 삶에서 평화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길, 한반도의 평화가 한 걸음 더 앞당겨지길 소망하며.

 

 

김동진 | 한신대에서 신학을, 시드니대학에서 평화학을,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국제평화학 겸임교수로 평화학을 강의하면서,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