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12.20 11:31

[이슈]


내게 단비가 되어준 평화교육 워크숍

 활동가와 함께하는 평화교육 워크숍 후기

주희영


나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길라잡이 1기 강사이다. 학교에서 평화통일수업으로 어린이들을 만난 지 4년이 되어간다. 올해 부쩍 내가 이대로 수업을 해도 되는지 고민이 많았다. 평화라는 추상적이지만 소중한 의미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고민도 되고, 일상에서 내가 평화롭지 못할 때 평화수업을 하는 나의 이중적 모습에 내 스스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평화교육을 더 많이 접하고 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내게 전달 된 메일 한 통 활동가와 함께하는 평화교육 워크숍은 내가 바라던 워크숍이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신청했다.

 

기대하던 워크숍 날이 다가왔다. 워크숍은 세션1, 2로 진행되었다. 세션1. ‘알시티 프로젝트의 교육 매뉴얼과 실제는 알란 화이트가 진행해주셨고 세션2. ‘평화교육 진행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워크숍은 포드릭 오투마가 진행해주셨다. 알란 화이트가 청소년의 창의적이고 자발성 높은 알시티의 교육 사례를 설명하고 뒤이어 포드릭 오투마가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워크숍 시작부터 끝까지 앉아서 진행했다. 앉아서 하는 워크숍이라 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넘치는 동적인 워크숍이었다.






그는 대화를 할 때, 책을 읽을 때, 첫 문장에 집중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첫 문장에 담긴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참여자들에게 자신이 읽었던 책 중 기억나는 책의 첫 문장을 적어보라고 했다. 한 참여자가 발표한 책의 첫 문장을 듣고 느껴지는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다. 작가의 성격, 가족, 시대상황, 감정 등 다양한 이야기를 참여자들과 나누며 첫 문장이 이리도 많은 것을 내포한다는데 놀랐다.

 

다음은 자신에 대한 책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첫 문장에 무엇을 쓸지 적어보라고 했다. 2~3명이 자신이 쓴 첫 문장을 발표하고 포드릭은 참여자들에게 첫 문장이 전하는 느낌을 자유롭게 말해보라고 했다. 자유롭게 느낌을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참여자들이 첫 문장을 쓴 한 참여자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놀랍고 흥분되고 새롭고 신나기까지 했다.

 

다음은 조국에 대한 책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첫 문장을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얼른 첫 문장을 적고 발표하고 싶었다. 내 문장에 대한 나의 깊은 내면을 참여자들의 느낌을 통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첫 문장을 발표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면 눈물이 난다참여자들이 느낌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전쟁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국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등은 내가 쓴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나는 매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저항감이 든다. 너무 강하다’, ‘거부감이 느껴진다이러한 말들이 내게 불편하게 다가오면서 갑자기 마음이 굳어졌다. 저항감과 거부감 두 단어만이 내 머리에 맴돌고 모든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참여자들에게 섭섭하고 서운했고, 그들이 나의 감정을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은 회오리가 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발표하지말걸, 나의 의도와 다르게 말한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나? 등 혼란스런 생각들이 내 마음과 몸을 얼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워크숍은 계속 진행되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포드릭이 이 활동에서 전하고자 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태극기가 휘날리면 눈물이 난다는 내가 쓴 조국에 대한 책 첫 문장일 뿐 책은 그 책을 읽는 다양한 독자의 해석으로 읽혀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쓴 의도대로 읽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깊은 내면을 알고 싶어서 발표했고 나의 깊은 내면을 그 날 만났다. 나와 상반된 생각을 만났을 때 유연하지 못하고 내 몸과 마음이 경직되는 것을 내 스스로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다름을 만났을 때 편견과 혼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평화로움이 서로가 배우고 공감하는 관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신뢰와 평화가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문장에 각자의 느낌을 나누어 주고 워크숍을 함께 한 참여자들과 평화에 대해 고민했던 나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뭉클하게 만나게 해준 포드릭과 청소년과 평화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알란, 소중한 자리를 준비해준 사무국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만날 때, 일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내 마음에 편견과 혼란은 없는지,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나서 기쁘고 그런 나와 친하게 지내려 한다.

 

주희영어린이어깨동무 평화길라잡이 1기 강사이다. 성대골마을학교에서 3년간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어린이문화연대 소모임 '개구쟁이'에서 어린이 청소년 연극 읽는 활동을 했고, 어린이책시민연대에서 책모임을 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1:20

[시선-한반도 평화읽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은 없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2018년 성과와 2019년 과제

조성렬


“역사의 문을 빠져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아라!” 이것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여러 공국(princes)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민족이 처음으로 단일국가인 독일제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1990년 통일될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시 사민당은 국가연합을 거쳐 단계적으로 통일하자고 주장했지만, 집권당인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기 위해 조기통일을 추진했다.


1989년 10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시작해 동독에서 과도정부 수립, 자유 총선거, 개혁정부 등장 및 동서독정부의 통일협상을 거쳐 마침내 1990년 10월 1일 정식으로 통일국가를 선포했다. 이처럼 동서독의 통일은 채 1년도 안 돼 이루었다. 이러한 속전속결식 통일로 후유증도 적지 않았지만, 그 때 통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동서독은 분단국가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독일 통일의 역사적인 교훈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처럼 조기통일을 내걸고 당장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역사에서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열렸을 때 이를 잘 활용하여 민족적 과제를 성취해 내야한다는 의미이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해 더 이상 이 땅에서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남북관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두 차례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회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신의 옷자락’을 잡지 못했다.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10월에는 조명록 북한군 차수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이 이루어졌지만 11월 미 대선에서 대북 강경파인 부시대통령의 당선으로 관계개선이 무산되었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기회의 창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올해의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작년 1년은 수소폭탄과 ICBM 시험 성공 직후 북한의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과 이에 맞선 미국의 코피작전 등 대북 군사행동론으로 1953년 휴전 이래 최대로 전쟁위기가 고조됐던 해였다. 신베를린선언, 8.15경축사, 한중정상회담, 미 NBC인터뷰 등 전쟁을 막으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필사적인 노력과 금년 1월 신년사를 통한 김정은 위원장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대남특사 파견과 같은 결단으로 다행히 한반도 정세는 전쟁에서 평화로 급반전되었다.


2018년 한 해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미 4월과 5월, 9월 세 차례나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고 올해가 가기 전에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 중이다. 무엇보다 70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양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의 출범 이전부터 냉랭했던 북중관계가 3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풀린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이처럼 2018년은 한반도 대전환이 시작된 해이다.


한반도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뭐니 뭐니해도 김위원장의 핵무기 포기 결단과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문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 및 정치적 계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세 지도자가 마부 역할을 하고 한반도 비핵화가 말이 되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거대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민족사의 분수령이 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됐지만, 이미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교류협력의 경험을 가진 남북관계와 달리 지난 65년간 적대관계를 유지해 왔던 북미관계는 오랜 불신으로 기대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그 때마다 한국이 북미 사이에서 중재자로 나섰다. 5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밝혔을 때 5.26 번개 남북정상회담으로 양측을 중재했고, 8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했을 때도 대북특사 파견과 9월 18~20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북미 대화의 동력을 재창출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중재자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남측과는 핵문제를 논의를 할 수 없다던 북한을 설득해 유관국 전문가의 입회 아래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해체하며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핵시설 등을 영구히 폐기하기로 약속한 ‘9.19 평양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사소한 군사충돌만 발생해도 대화와 협상이 단절됐던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군사적 신뢰구축과 초보단계 운용적 군비통제 방안을 담은 ‘남북군사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처럼 한국은 중재자 역할을 넘어 당사자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마차가 나가는 앞길에는 곳곳에 돌부리가 널려있어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북간, 북미간 상호불신이 최대 걸림돌이었다. 변변한 재래식무기도 없는 북한이 어렵게 만든 핵무기를 포기하겠는가, 변덕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북한과 한 안전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가, 미 행정부가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미 의회가 반대하면 못 지키는 것 아닌가, 북미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한데 남북관계가 너무 빨리 나가는 게 아닌가, 남북관계 과속으로 한미관계가 삐끄덕거리는 건 아닌가 등등 기존의 불신이 새로운 불신을 만들어내며 갈 길을 어렵게 했다.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나 내부사정 따위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납치문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해체 등 자국 이익을 앞세우며 미 행정부와 의회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 대비해 북일대화에도 나서고 있다. 중국도 종전선언 참여는 물론 평화협정 체결과 그 이후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하려고 한다. 한발 떨어진 러시아도 6자회담의 재개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신과 방해에 따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1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평화의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수십년 동안 진행되어 온 남북관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빠른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해 네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내년 1~2월 중에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미 비핵화 협상의 진전과 함께 또다시 가속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2019년 새해를 맞이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우리는 어떤 자세로 풀어가야 할 것인가? 지금 주변국들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과도한 개입은 프로세스의 진행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남북미의 3두 마차로 달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따라서 우선은 의사소통을 통해 그들의 이익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율해 가다가 어느 정도 목적지가 보일 때 관련 주변국의 참여를 허용하면 될 것이다.


남과 북은 1948년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된지 벌써 70년이나 되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휴전한지도 6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상시적인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 왔다. 전쟁 재발의 위기에서 벗어나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 ‘신의옷자락’을 붙들고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에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빨리 진행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이란 없다.


조성렬ㅣ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장,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전략공간의 국제정치: 핵・우주・사이버 군비경쟁과 국가안보>, <뉴 한반도 비전: 비핵 평화와 통일의 길>, <한반도 평화체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체제의 전망>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1:08

[시선 | 평화의 마중물]


평화를 가르치는 꿈

 

송강호

언덕 위에서 종을 울려라!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 설레임과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했을 때 처음에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너무 막막하고 불안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국가간에 혹은 인종이나 종교간에 갈등과 분쟁을 겪는 현장을 찾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르완다 내전이 한창인 1994년 6월 이런 물음을 갖고 세 명의 청년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아프리카에서 절대 가난과 더러운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상황은 차라리 생지옥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밖에서 상상했던것 보다 아프리카가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주는 매우 아름다운 땅이며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아프리카 사람들도 어떤 방면으로는 우리 보다 유능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들이 가난과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유는 바로 부족들 간의 갈등과 분쟁 때문이고 이런 분쟁은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소위 기독교 국가들에 의한 비인도적인 식민지 경험으로 비롯된 것들이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슬람이 강세인 북부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 전역의 많은 나라들의 기독교인 비율은 우리나라보다 높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기독교적인 사회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에는 돈을 사랑하는 병든 기독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전파된 기독교는 마치 에이즈에 감염된 피가 수혈된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에게 정의와 평화의 혈청이 죽어버린 썩은 기독교가 퍼져나가게 했다. 교회들의 모양은 있으나 생명력은 없는 그런 죽은 기독교 사회가 되어버렸다. 미사나 예배를 드리며 평화의 주님을 노래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면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현실 속에서 교회도 기독교 신앙도 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1994년 르완다의 내전은 농경을 주로 하는 후투족과 유목민인 투치족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전쟁이었다. 우리는 바나나 운송차량을 타고 거대한 바나나 농장을 지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가르는 카게라(Kagera)강을 건너 르완다 국경에 접한 한 난민촌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는 수 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작은 천막 하나 만을 두른 채 삶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UN 천막 앞에 줄을 지어서 옥수수와 콩 그리고 식용유를 배급 받았고 좀 더 큰 여자 아이들은 하루에 두 차례 정도 물동이를 이고 약 3, 4 Km를 걸어가서 더러운 식수를 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땔 나무 조차 없었기 때문에 불을 펴 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난민촌에서 밤만 되면 캄캄한 가운데서도 모여서 밤이 늦도록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어른이 소리를 매기면 어린이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따라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밤 나는 어느 한 그룹을 찾아가서 도대체 무슨 내용의 노래를 그리 밤새 부르는 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 노래가 자기 종족의 원수인 투치족들을 죽여서 눈을 빼고, 코와 귀를 잘라서 씹어먹자는 내용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린 세대의 미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어둠 속에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도망치듯이 뒷걸음질을 쳐 내 천막으로 돌아왔다. 이런 현실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뒤척이며 밤을 새우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깨어 일어날 즈음에는 이미 천막의 문 틈으로 환한 아침햇살이 내 얼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천막의 문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늘 그렇듯이 건너편 언덕에는 우중충한 옷을 걸쳐 입은 난민들이 삼삼 오오 둘러 앉아 노름을 하거나 마약을 함께 씹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수 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투치족들의 복수를 피해 죽음의 강을 간신히 탈출해 나와서 이곳 난민촌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조차 도박과 마약, 매춘으로 세월을 보내며 자녀들에게는 복수와 증오를 가르치고 있었다. 난민촌에는 내일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 다른 복수의 전쟁이 준비되고 있는 카라그웨(Karagwe) 분지의 한 언덕에 올라 그 아래 수없이 늘어선 난민들의 천막들을 바라보며 하나의 환상을 품게 되었다. 평화를 가르칠 젊은이들을 온 세상에서 불러 이 언덕 위에 천막 학교를 세우고 종을 울리자. 언덕 높은 곳에서 아래 너른 분지로 울려퍼지는 그 종소리를 듣고 저 밑에 늘어선 난민들의 천막들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학교를 향해 뛰어 올라오리라. 눈을 감으면 평화를 배우겠다고 언덕 위로 달려오는 어린이들의 천진 난만한 얼굴들과 빛나는 눈망울들이 떠올랐다. 평화학교에 관한 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민촌에 천막으로라도 학교를 세운다면 이 천막학교는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게 된다. 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회에 “당신들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라는 소리 없는 설교다. 그리고 한 사람이나 사회가 자신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한 과거의 원한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나 분쟁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개척자들을 통한 평화 사역을 하기 위해 분쟁 지역에서 평화 캠프를 열고 평화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평화학교의 꿈은 아프리카의 분쟁 현장 한 복판에서 피어났다.


평화학교 학생들의 활동: 종이 비행기 날리기


평화학교의 어린이들


평화학교의 시작


개척자들이 처음 평화학교를 연 곳은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동티모르였다. 1999년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강압적인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집들을 불살랐다. 끔찍한 고문을 당했거나 강간당한 여인들도 무수했다. 나는 동티모르 교회의 목사들을 만나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자국의 군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직접 보게 하고 화해를 위한 재건에 참여하게 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하셨던 한 여자 목사님이 하늘을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목사인 내가 화해를 하자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파서 아무리 부드러운 솜털이 닿는다 할 지라도 우리에겐 너무 큰 아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나이 많으신 목사님을 가리키며 “저 목사님은 자녀가 10명인데 한 사람도 그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목사님과 둘러 앉은 다른 목사님들을 둘러 보았다. 모두 고요한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이가 지긋한 한 목사님이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우리는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을 때 당신은 우리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해 우리는 평화학교에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불러 올 수 없었다. 한국 청년들과 독일 청년들이 첫 동티모르 평화학교에 참여하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평화로와 보였다. 집들이 불타서 초가지붕 밑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면서도 이따금 파티를 열고 밤새 춤을 추기도했다. 우리는 낮에는 함께 집을 짓는 노동을 해서 피곤했지만 저녁에는 파티장에 까지 초대되어 밤이 늦도록 춤을 함께 추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때도 있었다. 그저 뜨겁게 사랑하고 안아주며 위로해 주겠다는 결심으로 갔지만 그러기에 한 달은 생각보다 긴 기간이었다.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이 바닥이 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자 참가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동요들을 가르쳐 주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곰 세마리, 거미 줄에 걸렸네, 영심이 짝짝 맞아 영심이 등등. 우리들은 아무런 것도 나눈 것이 없는데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돌아가는 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모두 정글에서 원숭이를 사냥하여 특별한 원숭이 탕을 만들어 주며 떠나지 말고 남아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회의를 해서 자원하는 두 명의 여자 청년들을 남겨두고 동티모르를 떠나왔다.


동티모르 평화학교 학생들과 함께


동티모르의 평화학교 모습


동티모르 투민의 학살 희생자 묘역


평화학교 참가자들을 위한 환송 파티의 동티모르 전통춤


1년 후 우리는 그 마을을 다시 찾았다. 작은 마을 버스의 지붕에 올라타고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어린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우리는 마을 한 가운데 성당 앞 뜰에 둘러 앉아 다시 찾아 온 동티모르에서 우리를 반겨 준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한 어린이가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든 마을 아이들이 작년에 참가자들에게서 배운 한국 동요들을 모두 메들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1년 내내 아이들이 이 뜻도 모르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우리는 10년이 넘도록 동티모르에서 평화학교를 열었고 우리 자신이 평화교육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그곳에서 배웠다.


개척자들은 전쟁과 미움으로 원수된 나라나 부족들 간의 갈등과 분쟁을 억제하고 돌이켜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 말레이지아, 아프가니스탄, 캐시미르 등지에서 열어 많은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평화학교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분쟁지역의 난민촌 어린이들을 만나 그들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고 사랑의 손길이 되어 주었다. 우리가 가르치던 마을에는 이제 작은 평화 도서관들이 생겨나 어린 아이들이 그 곳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0:55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우리 모두 어깨동무할 것입니다

독일에서의 윤이상 구명운동 50주년 기념 평화 토크 콘서트


 정진헌

 

1124일 오후, 스산한 하늘이 금방이라도 겨울비를 뿌릴 듯 했습니다. 독일에서 흐린 하늘과 가벼이 내리는 비는 흔한 겨울 풍경이지만 큰 행사를 위해 멀리서 오시는 분들이 혹시 힘드실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 대신에 미리 약속하셨던 많은 분들이 속속들이 윤이상하우스로 도착하셨습니다.

 

독일에서의 윤이상 구명운동 50주년 기념 평화 토크 콘서트. 이 행사는 지난 호 평화의 편지에서 소개해 드렸듯, 1968년 독일을 중심으로 전 세계 유명 음악인 181명이 윤이상 구명을 위한 탄원 운동에 서명하고 언론과 한국 정부에도 공개적으로 보낸 “Appell fűr Isang Yun”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 1967-69년 사이 박정희 정권하에서 자행되었던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대해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며, 향후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화예술()의 역할을 미래지향적으로 논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에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과 그 후대 작곡가의 작품 공연까지 더해져, 지식인은 지식으로, 예술가는 예술로, 역사를 넘나들며 지성과 감성을 자극한 종합예술 행사였습니다.

 

발표와 좌담, 연주 등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기라성같은 석학과 음악인들이 독일 도처와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짧은 준비 일정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해주었습니다. 장소가 좁아 50명만 모실 수 있는 곳인데도, 70여분이 넘는 한국인, 독일인, 학자, 음악인, 젊은 층, 노년 층 모두 빼곡히 끼어 앉아 장장 7시간 여를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이 행사의 의미를 높이 인식한 법무법인 양재 소속 변호사 세 분이 멀리 서울에서 날아오셨습니다.

 

본 행사는, 개회 특별 공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칼스루헤 음대 한가야 교수의 피아노와 소프라노 서예리 선생께서 기대에 찬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는 윤이상하우스 큰 행사의 타이틀곡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는 윤이상 선생님의 50년대 초기 가곡에 이어,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선생님의 피아노곡, 그리고 제주 4.3항쟁의 망명인으로 일본에서 사셨던 음악인 한재숙님(한가야 교수의 부친)의 가곡 망향제주는 이 행사의 의미를 감성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귀빈 소개를 하자니 관객 모두가 가족이자 귀빈이셨기에 적지 않은 분들을 한꺼번에 소개해드렸습니다. 이어, 주독대한민국대사관 정범구 대사님께서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셔서 행사의 중요성을 되새겨주시는 축사를 해주셨고,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독일대사를 역임하신 도리스 헤르트람프 (Doris Hertrampf) 여사께서도 독일과 남북한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주신 윤이상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축사를 해주셨습니다. 재독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서는 다른 일정상 대사께서 참석하지 못했으나, 향후 협력사업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1부 기억과 증언 세션은, 재독 한국인의 관점과 경험, 그리고 독일인의 그것들을 공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튀빙겐대학교 한국학과장이신 이유재 교수께서 "동백림 사건과 한국을 위한 초국가적 민주화 운동"이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냉전의 경험이 달랐던 시공간적 맥락의 중요성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 막 시작된 무렵에 독일 유학길에 오르셔서, 이후 대표적인 재독 철학자이자 통일운동가로 윤이상 선생님과 오랜 친분을 가지셨던, 송두율 교수께서 "내 체험공간 속의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주제로 역사적 사건을 생생한 삶의 이야기로 증언해주셨습니다.

 

잠시 환기시키는 차원이자, 동백림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미술작품으로 공감하고자, 이응로 화백의 옥중화를 감상하였습니다.

 

1부의 두번 째 세션은, 독일분들의 발표를 경청했습니다. 준비된 책상 위에 오래된 원본 문서들을 올려 놓은 독-한협회 회장 우베 슈멜터(Uwe Schmelter) 박사는, 동백림사건이 터진 1967년도 당시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역사 문화적 전환기(68운동)에 대한 독특한 시대적 배경과 동백림 사건으로 촉발된 독일-한국간 연대 활동을 소개했습니다. 윤이상선생님의 제자 중 한 분이셨던 어빈 코흐-라파엘(Erwin Koch-Raphael) 교수는 간결한 발표를 통해 윤이상선생님과의 만남과 옥중 작품 "나비의 미망인" 관람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수십 년간의 경험이 녹아있기에 그 모두를 담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았으나, 참으로 의미있는 지적인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2부로 넘어가기 전, 앞서 감상했던 이응로 화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자, 큐레이터이자 미술사학자 박계리 자유대 초빙교수께서 이응로 화백의 삶과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주셨는데, 이로써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늘의 화두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하여, 2부 콘서트는 예술을 통한 시대적 감성을 공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윤이상하우스 상주음악가 정은비 타악기 연주자가, 그리스에서 활동하다 프랑스로 망명한 크제나키스의 레봉을 힘차게 연주하여 우리의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이어서 윤이상 선생님 작품의 정통 해설가이신 국제윤이상협회 볼프강 슈파러 회장께서 윤선생님의 옥중 작품인 "(Riul)"의 음악적 특성에 대해 강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윤선생님의 제자인 토시오 호소가와 선생의 Memory of Isang Yun을 트리오 Sonia Achkar, Martin Funda, Jonathan Weigle 의 섬세한 연주로 감상했습니다. 이어서 지난 여름 레지던스 펠로우로 지냈던 작곡가 양이 룩군이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으로 만든 가곡을 메조소프라노 민수연(Su Yeon Hilbert)님이 불러 감성의 깊이를 더해주셨습니다. 이런 감성의 물결에 더해, 윤이상 선생님의 률(Riul)을 악보와 함께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러다보니 어느 덧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렸고, 우리는 원래 약속한 일정보다 더디게 가고 있었습니다. 하여 3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화예술의 힘 좌담 세션은 시간을 줄여서 진행하되, 발언자와 관객들이 함께 깊이있는 논의를 해나갔습니다. 우베 슈멜터 박사의 사회로, 정은비(Eunbi Jeong), 성악가 홍일(Hong Il), 다름슈타트 음대 코드 마이저링(Cord Meijering) 학장께서 개인적 경험과 음악의 시대사적 역할 및 중요성에 대해 창의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윤이상하우스를 통해 남북한 음악인들이 소통함은 물론, 윤이상 선생님의 작품을 함께 연주하는 활동의 중요성을 공유하였습니다. 한 분 한 분 소중한 얘기와 공연으로 열정 가득한 7시간여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교민들이 정성스레 준비해 주신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서로 사진도 찍고, 더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음악과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는 정감있는 뒤풀이를 가졌습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수고해 주신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먼저, 베를린 행사를 위해 좋은 의견과 더불어 재정 지원을 해주신 한국의 윤이상평화재단을 비롯, 한국의 강원랜드에서 선뜻 협찬을 해주셨고, ()어린이어깨동무도 기부금을 보내주었습니다.

 

베를린 현지에서도 후원이 이어졌습니다. 한국문화원에서 가능한 재원을 모아주었고, 베를린기독교한인교회에서는 동시통역기 무료 대여에 후원금까지 얹어주셨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이 제2대 회장을 역임하셨던 재독한인총연합회(총회장 박선유) 역시 후원금을,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과도 오랜 동지셨고 저희 행사때마다 손님들을 위한 음식과 주류 준비는 물론 상차림까지 해주시는 한민족유럽연대(의장 최영숙) 선생님들은 이번에도 든든한 후원자셨습니다. 신성식 선생님은 낙엽흡입기계를 가져오셔서 베란다 청소를 손수 해주셨고, 자유대학교 동료 학자들과 학생들, 멀리 다름슈타트에서 온 작곡 전공 이어진양 등이 봉사해주었습니다. 독일 최고의 동시통역사인 교포2세 이지예님은 다음 날 새벽 UN회의 통역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뜻깊은 행사에 봉사하겠다며 텍스트도 없는 발표와 좌담 등을 하루 종일 통역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이 행사는 많은 분들이 뒤에서 애써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과정 동안 스크린막 뒤 음향실에서 녹음과 기술적 문제를 담당해 준 승환(John Lee)씨와 야콥(Jakob Prell)에게 감사하고, 이틀 동안 와서 음악홀 정리와 마당 쓸기 등 궂은 일을 묵묵히 해준 철학도 정지원군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무엇보다, 행사 준비부터, 콘서트 기획, 홍보와 마무리까지 열심히 일하다 몸도 크게 상한 정은비 상주음악가에게, 그리고 다시 한 번, 애정과 관심으로 참여해주신 발표자와 음악인들께 큰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윤이상 선생님께서 많이 기뻐하시리라 믿으며, 이제부터 동백림 사건은 재조명되고, 한 맺힌 피해자분들의 명예가 제대로 회복되어, 그 과정에서 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길이 예술을 통해 한 차원 높게 진행되도록, 이 행사에 함께 해주신 우리 모두 어깨동무할 것입니다.

 

정진헌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0:28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평생에 걸쳐 반전화를 그린 화가, 베레시차긴

 

김소울


국에서 러시아 미술은 그리 익숙지 않다. 서양미술사를 소개하는 책에서도 우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의 미술을 주로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문화적인 편식이 강한 편이고,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러시아야 말로 수 없이 반복된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평화와 반전의 시각에서 러시아 미술은 눈여겨보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바실리 베레시차긴(Vasily Vereshchatin)19세기 러시아에서 활동한 반전화가였다. 우리는 모네, 마네, 고흐 등 수많은 19세기의 서양화가들을 알고 있지만 평생에 걸쳐 반전화를 그린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한국에 잘 소개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국경지대, 그리고 전쟁을 담고 있으며 희생자와 승리자 모두의 입장에서 그림을 써내려갔다. 그는 피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를 전쟁을 위한 세금으로 빼앗겨야 했던, 그리고 소중한 아들과 아버지를 싸늘한 주검으로 맞이해야 했던 러시아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던 화가였다.

 

베레시차긴은 10대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해군으로 복무를 하였다. 그리고 투르키스탄 전쟁을 비롯한 발칸전쟁, 러시아-터키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해군사관학교 당시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주변에서는 그가 장교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군사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그는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야간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사관학교 졸업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정식 주간으로 입학하게 된다.


 

바실리 베레시차긴, 전쟁 예찬(1871)

 

<전쟁 예찬>은 그가 참전했던 전쟁을 주제로 한 연작 투르키스탄 연작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는 20세기 반전 포스터에 수 없이 사용되고 또 사용되었을 정도로 단순 명료하게 반전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황량하고 메마른 대지에는 해골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맞이해 주는 것은 굶주린 까마귀들 뿐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나타내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액자에 문장을 기입하곤 했는데 <전쟁예찬>의 액자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위대한 정복자에게 바친다라는 문구를 적음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비참함을 불러일으킬 뿐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로부터 전쟁에서 승리의 상징은 적장의 목을 베어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살아있던 죽었던 상관없이 말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목을 전시하듯 높게 쌓아 올린 모습, 그리고 오른쪽 위에 보이는 누군가가 살았던 부서진 집은 너무나도 참혹하지만 하늘은 푸르르기만 하다.



 바실리 베레시차긴, They celebrate(1872)

 


바실리 베레시차긴, 죄수들의 휴식장소(1879)

 

적군의 목을 베어 걸어놓는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비난은 다음 해에 그린 <They celebrate>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가운데에 서 있는 흰 옷을 입은 인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결과를 알리고 있는 모습이다. 편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 낙타나 백마의 등에 탄 사람들도 있고 앉아있는 개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자리를 축하하고 있는 중이다. 전쟁을 거치며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그 과정과 희생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의 편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로 하얗고 긴 장대가 우뚝 서 있고, 그 위에는 적의 머리가 승리의 상징처럼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승리자들은 전쟁의 결과를 축하하지만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1878년부터 1879년까지 1년에 걸쳐 완성된 <죄수들의 휴식장소>는 가릴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주저앉아 눈보라를 맞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목처럼 그들은 정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눈보라에 버려진 고장난 수레바퀴는 마치 고장나고 그릇된 역사와도 같다.

 

베레시차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화가로서 전력을 다해 전쟁을 비난하지만 그것이 효과적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정면으로 맞서 가차없이 비난한다.” 러시아-터키전쟁을 향해 비난의 시선을 던진 그를 당시 알렉산더 2세는 인간 쓰레기 아니면 미친 놈이라고 언급했다. 베레시차긴은 단념하지 않고 러시아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반전작품들을 그려나갔고, 결국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받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베레시차긴의 시대와 같은 대규모 전쟁이나 학살은 부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타인을 짓밟은 대가를 과시하는 인간의 잔인함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하며 그것의 치열함은 그 시대의 전쟁과 같지 않은가.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0:17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극도로 예민한 중2 스물아홉이 모였다.

그중 담임이 가장 예민할 때 생기는 일들에 관하여.

운 놈 떡 하나 더 주기

주예지


극도로 예민한 중2 스물아홉이 모였다.

“왜 불렀는지 아니?”

“네, 떠들고 수업 방해해서요.”

“수업을 방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계속 선생님 말에 예의 없게 툭툭 말을 내뱉으면 (…)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네.”

“젤리 하나 가져 가.”(큰 젤리 통을 품에 안고 있었다.)

“네? 왜요?”

“왜긴 왜겠어. 미운 놈 뭐겠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속담은 미울수록 매 대신 떡을 준다는 것으로 미운 사람에게 오히려 잘 대해준다는 뜻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반동형성의 개념과 비슷하다. 반동형성은 무의식 중에 감정이나 욕구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억압된 감정이나 욕구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인 셈이다. 예컨대, 첫째 아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아버린 동생이 미운데 오히려 지나치게 친절하게 대하고 잘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유독 거슬리는 아이들에게 더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는 나의 저열한 속내가 무엇인지 섬뜩하다. 하지만 우리의 속담은 무언가 정이 느껴진다. 아직 떡 하나 더 줄 정도면 그래도 미운 정이라도 남아 있다는 말은 아닌지. 미운 사람일수록 떡 하나 더 줘서 정을 쌓으라는 건 아닌지. 미운 사람일수록 내 편으로 만들라는 건 아닌지. 미워서 매몰차게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밉지만 자꾸 미련이 남게 한다. 미움에 마음으로 대응하라는 지혜에 온기가 감돈다.



2학기 들어서 국어 공책을 내내 가져오지 않는 아이가 있다. 1학기에는 그래도 잘 따라왔는데 못내 아쉬워하던 참에 어느 하루는 공책을 가져 왔다고 자랑을 한다. 잘했다고 엄지 척을 하며 수업 끝나고 따라오면 사탕을 주겠다고 정말이지 폭풍칭찬을 한다. 그랬더니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물어본다.

“저는 왜 안 줘요? 맨날 공책 가져오는데.”

“너는 항상 갖고 오고 잘하잖아.”

그러더니 뒤에 앉아 있는 아이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귀에 꽂힌다.

“못하는 애는 한 번 잘하면 칭찬 받고, 늘 잘하는 애는 한 번 못하면 욕먹어.”



나름대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애들을 단기간만이라도 참여 시키게 하는 방법이 있다. 수업 내용에 무언가 잠깐 관심을 보일 때, 학습지를 채우는 시늉이라도 할 때를 놓치지 않고 조용히 다가가 은밀한 제안을 한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오늘처럼 수업을 잘 들으면 ‘수업 태도가 뚜렷이 좋아짐’이라는 항목으로 상점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항목은 다른 것과 다르게 상점이 3점이라는 것 또한 은밀하게 속삭인다. 백이면 백 다 넘어온다. 이 제안을 할 때 다른 아이들이 웅성웅성 난리가 난다.


“수업 태도 좋아지면 상점주는 거예요? 그럼 오늘부터 잘 안 듣고 다음 주에 잘 들어서 상점 받아야겠다!”

“그럼 수업 태도가 뚜렷이 ‘안’ 좋아짐으로 벌점 10점 줄거야!”



미운 놈에게 더 주는 떡 하나가 아이들은 못내 서운했나보다. 하긴 항상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다른 아이들이 억울할 만하다. 그 설움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 지금도 나는 어머니께 가끔 대들곤 한다. 평소에 지지리도 속 썩이는 자식은 한 번 잘하면 이런 효자가 없고, 평소에 백번 잘하는 자식은 한 번 못하면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없지 않느냐고. 그 말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니까 참 묘하고 싱숭생숭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을 보다 보면 알아서 잘하고, 수업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별 문제 없는 아이들은 잘 안 보이고 떠들고, 수업 안 듣고, 반항하고, 거슬리게 행동하고, 틱틱거리는 아이들만 보인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전자의 아이들이지만 더 많이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 아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사실 후자의 아이들이다. 서른 명 중에 한 명이 미우면 그 반 전체가 부담스러워서 수업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잘하고 예쁜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대다수임에도 말이다. 왜 이렇게 미운 놈이 더 커 보이는 걸까? 아무리 미운 놈을 달래고 달래서 떡 하나를 더 먹여도 어쩔 때는 뱉어버리니 영 신통치가 않다. 왜 좋은 것은 뒤로 하고 안좋은 것만 크게 보이는 걸까?



교원능력개발평가 결과가 나왔다. 교원능력개발평가 실시 여부를 가지고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일단 제쳐 두고 아이들의 의견이 나왔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구체적인 수치보다는 자유서술식이 궁금하다. 무언가 안 좋은 말이 있지는 않을까 상처 받기 싫어 보고 싶지 않다가도 인간이란 게 호기심을 버릴 수 없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고야 만다. 괜스레 손가락을 튕기며 스크롤바를 내린다.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 재미있는 활동을 자주하게 해주신다. 항상 꼼꼼하게 잘 가르쳐주십니다. 수업시간에 정말 열심히 수업을 하시고 이해도 잘 되게끔 노력하신다. 국어와 관련된 영상을 틀어주시고 비 올 때 노래 틀어 주시는 게 좋다. 수업진행이 매끄럽고 원활합니다. (…) 글씨를 좀 더 이쁘게 써주시면 좋을 것 같다. 말을 느리게 해주셨으면 좋겠고 글씨를 정확하게 써주셨으면 좋겠다. 이대로 2학년 끝날 때까지만 이어 나가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기분에 따라 우리에게 대하시는 태도가 다르다. 시험 끝나자마자 수행평가 하는 건 힘들어요.. 학습지가 많아요.(…)


여기에서도 미운 놈이 크게 보인다. 예상했던 이야기도 있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웃음이 나는 것도 있다. 근데 그 와중에 하나 미운 놈. ‘선생님의 기분에 따라 우리에게 대하시는 태도가 다르다.’ 아직 갈무리되지 않은 수많은 감정을 뒤로 한 채 웃으면서 밝게 수업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숱한 순간들이 떠오르고 이내 억울한 마음까지 샘솟는다. 그동안 교단에 선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던 걸까?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감정이 겉으로 드러날 수도 있지. 기분이 안 좋다보면 좀 예민하게 굴었을 수도 있지. 괜한 합리화를 해보지만 별 소득은 없다. 곧 반성을 한다.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감정을 정 못 감출 때는 쉬어 가거나 차라리 아이들에게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 인식도 했고 반성도 했고 다짐도 했다. 훌륭하다. 지금부터가 문제다. 저 한 문장이 뭐라고-심지어 문법적으로 비문이다.- 수업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고 누가 썼을까 괘씸하고 밉다. 지금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좋은 이야기들도 참 많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는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질문이 도돌이표다. 왜 늘 좋은 것은 뒤로 하고 안 좋은 것만 크게 보일까?



잘하는 아이보다 못하는 아이에, 좋은 점보다 안 좋은 점에 늘 시선이 간다. 미운 놈이 떡 맛을 알아버렸는지 끈질기게 쫓아온다. 떡 하나 더 주면서 체하지 않게 살살 달래서 돌려보내야할 텐데. 결국 사탕을 못 받아 구시렁거렸던 아이의 말이 계속 맴돌아서 원래 주려고 했던 아이뿐 아니라 반 전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잘 하는 아이들은 평소에 잘 해서 주는 의미로, 못했던 아이들은 앞으로 잘할 거라고 믿는다는 의미로. 물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주는 애도 있다는 사족도 역시 잊지 않고 덧붙였다. 다 같이 사탕을 맛있게 오물거리며 하루가 지나간다.


주예지  국어가 어렵다는 아이들의 투정 어린 원성에 나도 어렵다며 유치한 설전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는 국어교사입니다. 작년에 목동중학교에 교사로서 첫발을 디디고 2년 동안 중2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내년에는 중2를 맡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는 중입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12.19 01:09

통권16호_웹_최종.pdf



주희영  |  내게 단비가 되어준 평화교육 워크숍


조성렬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은 없다


송강호  |  평화를 가르치는 꿈


정진헌  |  우리 모두 "어깨동무"할 것입니다


김소울  |  평생에 걸쳐 반전화를 그린 화가_베레시차긴


주예지  |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






'피스레터(PDF)'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스레터 15호(통권17호)  (0) 2019.02.19
피스레터 14호(통권16호)  (0) 2018.12.19
피스레터 13호(통권15호)  (0) 2018.10.18
피스레터 12호(통권14호)  (0) 2018.08.19
피스레터 11호(통권13호)  (0) 2018.06.19
피스레터 10호(통권12호)  (0) 2018.04.19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