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PDF)2019. 11. 1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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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범|새로운 터전에서 ‘제대로 된 평화혁명’으로 나아갑니다


정영철|희망의 근거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


박정배|국수, 농마국수, 함흥냉면, 밀면


박종호|분노를 넘어 희망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한 까닭


김영환|친일청산과 역사정의의 실현으로 평화의 길을 열다


임요한|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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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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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11. 19. 09:39

[이슈]

새로운 터전에서 ‘제대로 된 평화혁명’으로 나아갑니다   

이기범

 

드디어 어깨동무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터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렇게 가까이 왔던 남북의 평화가 다시 질척거리고 있어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네요. 그야말로 ‘기나긴 혁명’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나 봅니다. 과거의 남북 관계와는 또 다른 낯선 길을 열어갈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새 터전이 그렇게 각별하게 여겨집니다. 기나긴 길로 나설 채비를 할 수 있는 곳. 같이 걸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걷고 또 걷다 돌아올 수 있는 곳. 험한 봉우리 넘은 사연을 나누고 더 험한 봉우리 넘을 궁리를 하는 곳. 굽고 험한 길을 가다가 함께 모이고 먹고 웃을 수 있는 곳. 평화의 날을 맞이하는 잔치를 예비하는 곳. 새 터전이 기나긴 ‘평화혁명’을 이어가는 길의 시작이자 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뜻을 모아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물을 살 수 있는 재원을 오랫동안 모아왔네요. 설립 초기에 임원들께서 밑천으로 내어주신 종잣돈과 회원들이 내주시는 후원금에 크게 힘입어서 푼푼이 돈을 모아왔습니다. 기꺼이 자비를 쓰면서 활동한 임원들과 내내 살림을 알뜰하게 챙겨온 사무국 활동가들 덕분에 쌈짓돈을 목돈으로 키워서 건물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아놓고도 우리에게 독립건물이 꼭 필요한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이사회에서 의결을 한 뒤에도 적합한 지역과 건물을 찾는데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매물로 나온 건물들을 보러 다니면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데 따르는 책임감과 전망을 다져갔습니다. 앞서 세워진 국내외의 평화 공간들을 공부하면서 상상을 펼쳤습니다. 그 공간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열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터전에 어깨동무의 역사를 새기고 희망을 내다보는 구상이 무르익을 즈음 지금의 건물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건물이 그때까지 어깨동무를 기다린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터전이 환대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를 배우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다시 배움을 길어내는 일을 환영하는 공간이 되어야겠지요. 연대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선 ‘어린이 세상’을 펼쳐가는 데 함께 뜻을 모았던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과 ‘동거인’이 되었으니 더 멀리 갈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입니다. 두 단체의 소통과 결합을 통해 평화 네트워크를 더 촘촘하게 엮어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상과 개척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곳에 오면 일상의 관성과 기존의 합리성을 뛰어 넘어서 무모하고 황당한 평화의 가능성을 펼치고 다듬을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저만 하더라도 남녘 사회와 남북 관계의 앞날을 그릴 수 있는 생각의 자원이 소진되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공동의 삶의 질을 진전시키고 숙성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상상으로 어떻게 평화의 지평을 개척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나아갈수 있기 바랍니다.

 

▲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입구
▲ 교육공간으로 활용될 '안녕친구야홀'
▲ 북녘 친구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평화자료실'

제 소망을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일을 하기에 우리 터전이 넉넉한가라는 걱정이 듭니다. 하고 싶고 담고 싶은 일이 많다보니 공간 크기가 턱없이 모자라서 맥이 빠졌을 때 역시 구원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일하고 쉴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습니다.

기나긴 평화혁명으로 글을 시작했으니 그로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D. H. 로렌스는 ‘제대로 된 혁명’이라는 시에서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라고 말합니다. 그저 재미로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엄숙주의’를 깨고, 웃고 즐기며 재미있게 무리 지으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하고 조금 더 평화롭게 바꿔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곳에서 ‘제대로 된 평화혁명’의 걸음을 길게 이어가겠습니다. 앞으로 터전에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라고 계속 격려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후원 역시 웃고 즐기며 재미있게 해주시면 더 큰 힘이 되겠습니다. 제대로 된 평화혁명을 위하여!

 


이기범ㅣ어린이어깨동무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사무총장으로 10년 동안 일했고, 현재는 이사장을 맡고 있다. 남북의 어린이들이 교류하며 한반도 평화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함께 가기를 소망한다. 숙명여대에서 교육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한반도 평화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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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11. 19. 09:03

[한반도평화읽기]

 

희망의 근거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

 

정영철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8월 북의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은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10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금강산을 현지지도하면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도록’지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열린 ‘비동맹정상회의’에 참석한 북의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은 ‘역사적인 남북 선언들이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남조선당국의 외세의존정책과 사대적 근성’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남북관계의 개선은 외세의존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 앞에 지닌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북의 발언은 남북관계가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한 마디로 남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 사대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관계의 개선은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로 인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제재의 대상이 아닌 관광과 여타의 협력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제대로 된 남북 협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야 이러저러한 대북제안을 하고 있지만 (돼지열병 방역등)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는 상황,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의 대북 제안은 말 그대로 명분 쌓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통일부 장관조차도 비무장지대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엔사의 간섭으로 인해) 대북제안의 실질적인 이행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타미플루 지원의 경우에는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차량 출입을 통제하면서 무산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국제적인 제재를 명분으로 한 노골적인 간섭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 우리 정부의 태도는 엄혹한 대북 제재 그리고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희망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현상유지에서는 자율성’을, 그러나 ‘현상타파에서는 종속성’을 보이고있다. 지난해에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남북 간의 역사적인 회담과 합의를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지는 뒤로 미뤄놓고, 오로지 북과 미국의 만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내세웠던 ‘담대한 여정’에서 ‘담대’는 쏙 빠지고, 오로지 중재자만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이 강조했듯이 우리는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여야 한다. 하루빨리 ‘중재자의 신화’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다른 문제로 넘어가보자.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고 있고, 지난해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에서도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 국방비는 ‘이전의 10년 정권’보다도 더한 증액이 이루어지고 있고, 더욱 파괴적인 무기가 도입되고 있다. 평화를 주장하고, 이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증강은 대북 강경정책을 펼치던 정권보다 더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를 바라보는 북의 입장에서 과연 남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을까? 지난 평양에서 열렸던 월드컵 예선에 대해 통일부 장관까지 ‘실망스럽다’고 했지만, 정작 ‘실망’을 표해야 하는 쪽은 북이 아닐까?

물론 우리 정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북미관계의 개선이 남북관계의 개선의 결정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정부가 스스로를 ‘중재자’의 울타리에 가두어놓고, 북과 미국의 사이에서 ‘중재’를 한다는 것이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난 역사적 경험을 보면, 우리는 남북관계의 힘을 통해 오히려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고, 남북관계 개선–북미관계 개선의 선순환을 만들어내었다. 과거 2000년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가 그러했고, 당장 지난해 판문점 ‘번개회동’을 통해 좌초 위기였던 북미회담을 성사시켰던 경험이 이를 보여준다.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바로 남북관계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힘을 바로 세우는 것은 정부의 노력과 함께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해 힘을 합칠 때만 가능하다. 과거 2000년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정부와 함께 시민사회가 남북관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힘을 합쳤고, 지난해 2018년에는 전쟁 위기의 한반도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길에 정부와 시민사회가 뜻을 같이하였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는 우리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노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고, 시민사회는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를 향해서 우리 내부의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남북의 교류와 화해를 위한 협력의 정당성과 그를 위한 동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든든한 내부의 동력이 마련된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국제사회도 쉽게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난해부터 남북관계는 정부가 주도하고 시민사회는 한 발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어찌 보면 시민사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평양’행 비행기에 올라타는 꿈만을 이야기했지, 평화와 번영의 공고한 토대를 만드는 것에서는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모두가 ‘평양’행 비행기를 놓칠 수 있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정부와 시민사회는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할것이다. 최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 범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우리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종속’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지금처럼 북미관계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세로는 남북관계의 문제를 풀 수도 없고, 우리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제대로 된 남북관계의 힘은 남북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 내었을 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든든히 의지해야 할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정영철ㅣ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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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11. 18. 18:40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국수, 농마국수, 함흥냉면, 밀면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남북이 북한에서 만날 때면 평양냉면이 언제나 화제에 오른다. 중국의 면(麵) 요리를 한국인은 국수로 부른다. 국수란 단어의 최초 기록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編)에 '국슈(麵)'으로 나온다. 면(麵)은 중국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면을 총칭하지만 한국에서는 밀가루, 메밀가루 등 모든 면을 총칭하고 국수도 마찬가지다. 서정범 교수는 한민족 고유어 '국'은 물이 중심인 음식을 말한다고 했고 '수'도 물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서정범 교수에 의하면 국수는  국물 음식이란 뜻이 된다. 평양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국수라 부른다. 평양의 국수가 유명해지면서 평양의 찬 국수는 평양냉면이 되었다.

 

 

농마국수(조선료리전집2000)

함경도 분들도 자신들의 면 음식을 국수라 불렀다. 타 지방 국수와의 차별이 필요한 순간이 되자 국수 앞에 정체성을 내세울 기호가 생겨났다. 평안도와 달리 함경도는 감자와 고구마가 많이 났던 탓에 이를 가루로 만들어 농마국수라 부르기 시작했다. 농마는 감자나 고구마를 걸러낸 가루인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지만 일반적으로 감자 녹말을 칭한다. 북한에서는 함흥냉면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만으로 추적하면 함흥냉면은 남한에서 함경도 실향민들이 만든 단어라고 추정된다. 미군병사 클리포드 L. 스트로버스(Strovers, Clifford L)는 1953년 11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미 공병부대원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을 사진에 담았다. 1954년 부산 국제시장을 찍은 사진 중에는 ‘함흥냉면옥’을 찍은 사진이 있다. 함경도식 냉면집답게 간판 아래 ‘회국수’란 글자도 선명하다. 1954년에 찍은 국제시장 ‘함흥냉면옥’을 비롯해 신창동 '고려정냉면', 시청 옆 '평양서부면옥', 동아극장 옆 '황금냉면옥', 동광동 '광락냉면'같이 냉면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부산의 전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된다.

 

속초 함흥냉면옥 1950년대 초반 사진

 

클리포드 사진집 <칼라로 만나는 1954년 Korea>에 실린 함흥냉면집

함흥냉면은 함경도 사람들의 안부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음식이었고 냉면집은 만남의 장소였다. 남한에 최초의 함흥냉면집은 함경도와 가장 가까운 속초에서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1951년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던 속초에 함흥냉면 집이 최초로 세워졌고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서울의 청계천 평화시장과 중부시장 오장동에 1954년부터 함흥냉면집들이 들어섰다. 함흥냉면은 함경도의 농마국수, 감자농마국수가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면서 생긴 변형된 음식 체계인 것이다. 남한 사회에 함경도식 냉면의 정착기는 평양냉면보다 험난한 과정을 겪는다. 평양냉면은 오래전부터 남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음식이었지만 농마국수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농마국수의 주성분인 감자 전분은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거기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함경도 음식의 특징과 가자미식해 같은 생선 꾸미가 올려지는 것도 다르다. 남한 사람들은 이런 음식 체계를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전쟁과 이후의 부산에는 감자 전분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남한 사람들의 식성과 재료 부족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게 된다. 당시 부산 구포국수가 유명했다. 전쟁과 이후에 미군에 의한 밀가루 공급이 확대되면서 밀가루로 만든 마른 국수인 구포국수는 부산 시민과 실향민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함흥에서 내려와 함흥냉면을 팔던 사람들은 남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고구마전분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었다. 실향민이 몰려 살던 우암동 입구에는 함경도 흥남 내호 출신 실향민이 세운 '내호냉면'이 들어서고 당감동에는 본정냉면, 함흥회냉면같은 식당이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부산사람들은 우동이나 소면 같은 밀가루 국수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다수를 차지하던 부산 토박이 손님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내호냉면은 창업 후부터 북한 실향민에게는 회국수같은 함경도식 냉면을, 부산 토박이들에게는 국수를 팔았다. 몇 년간의 냉면과 국수의 동거를 끝낼 새로운 면이 1959년에 내호냉면에서 만들어진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이 탄생하자 실향민들과 부산 토박이들 모두가 좋아한다. 당시에는 밀냉면, 경상도 냉면, 부산 냉면이라 불렀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 내호냉면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 정책에 인해 맞이한 밀가루 음식의 전성기와 때를 같이하여, 1966년 개금 시장 입구에 세워진 ‘개금밀면’이, 1970년대 초반 가야2동 동의대입구역에서 언덕이 시작되는 부근에 있는 ‘가야밀면’이 문을 열면서 밀면의 대중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00% 밀가루를 이용한 부드럽고 단 맛이 나는 면과, 새콤달콤한 양념과 한약재를 넣어 시원하고 담백하며 몸에도 좋은 육수로 만든 가야밀면에 대중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밀면이 함경도 사람들을 넘어 부산 사람들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함흥냉면보다 부드러워진 면발의 변화와 더불어 가야식의 달달한 한약재육수, 개금식의 개운한 닭고기육수가 완성된 뒤의 일이었다. 면과 육수가 부산의 재료와 풍토, 사람들의 입맛을 완벽하게 반영하면서 밀면은 비로소 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발전과 분화를 시작했다. 밀면은 한반도 현대사가 낳은 한민족의 음식이다. 북한 분들이 자신들이 낳은 음식의 남한식 변형과 탄생을 마음껏 맛볼 그날을 그린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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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11. 18. 18:18

[평화의 마중물]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4)

분노를 넘어 희망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한 까닭 

 

박종호

 

지난 밤 김동진 박사 평화 책 잔치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최관의, 심은보, 댄 가즌, 김경옥 선생님과 ‘벨파스트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면서 기네스 맥주를 신나게 마셨다. 젊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방에 올라와서 눈을 붙인 시간이 새벽 2시, 어찌어찌해서 맥주를 사느라고 지갑을 털린(^^) 최관의 선생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냥 눈을 감았다 뜨니, 오전 모이는 시간이 코앞에 와 있다.

오늘 마지막 방문지인 벨파스트 교육청 지원센터(Belvoir Youth Centre)에 들어섰다. 북아일랜드 사회통합을 위해 교육청이 하는 여러 일 가운데, 분리 교육이 시행되고 있는 신교도, 구교도 지역 학교들을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협력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연결하는 공유교육을 지원하는 곳이다. 깔끔한 시설과 부지런하고 친절한 직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이런 노력들이 풍부한 기금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교육청 관계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앞두고, 한 시간 정도 회의실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데릭 윌슨 박사님이 김동진박사와 함께 사회를 보고, 이번 연수에서 배우고 느낀 바를 함께 나누는 ‘총화’ 시간이다. 데릭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우리들에게 이번 연수에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을 말하고, 두 번째는 이번 연수에서 얻어 가는 게 무엇인지 말해 보자고 하신다. 우리는 시계 방향으로 바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평화, 평화교육을 처음 경험한 기회였는데, 어제 기네스를 좀 많이 마셔서 저를 관리하지 못한 게 아쉽고, 함께한 선생님들 기운을 받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좋은 경험을 해서 고맙다.”(김경옥)

“코리밀라에서 데릭 교수님 집에 가서 겪은 밤이 많이 생각난다. 모둠으로 나누어 파티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문화는 제도나, 행정으로는 만들 수 없는 부러운 문화였다.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는 평화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일상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다시 돌아봐야 하고, 의심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최관의)

“데릭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희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더디게 천천히 오지만 멈추지 말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향숙)

“활동가들이 서로 영감을 주는 게 감동 깊었고, 이번 연수에서 어쩌면 평생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평화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코리밀라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선명하지 않아서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이런 혼란은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했다. 그래도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에 담았다.” (주예지)

“워크숍이 좋았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 김동진 박사님,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어젯밤 종호, 경옥 선생님 노래에서 좋은 영감 많이 받았다. 그런 경험을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는지 앞으로 많이 고민하려고 한다.” (댄 가즌)

“평화교육을 깊이 경험하게 되어 좋았고, 지금 고민은 이것을 돌아가서 어떻게 나눌 것인지, 어깨동무에서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이 성장하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숙제를 안고 간다.” (김윤선)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중간에 소화할 시간을 좀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극은 받았는데, 그냥 돌아가면 잊혀질까 두렵기도 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나는 왜 저분들만큼 자신감이 없을까?를 자문하며, 좀더 과감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성숙)

“평화라는 말이 훅 들어오는 느낌. 평화는 목적이 아니고 과정이다. 우리 남과 북은 통일이 목적이지만, 그 이후도 끊임없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강명희)

“알시티에서 청소년과 대화해 본 일, 코리밀라 워크숍에서 프로그램을 배운 일, 통합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과 이야기 나눈 일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평화, 평화교육은 이제 시작이라는 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해 천천히 더 생각해 보겠다.”(정진화)

“곳곳에서 벽을 만났는데, 이름에 평화(Peace)라고 해서 놀랐고, 여기서 알시티, 코리밀라 같은 만남의 장들이 있고, 그곳에서 상상력을 많이 받았다. 잠깐 스치는 경험이지만, 돌아가서 실제 삶 속에서 다양한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심은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데릭 윌슨 박사님은 짧게, 그렇지만 울림이 있는 말을 해 주었다. 어쩌면 평생을 날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갈등과 전쟁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희망을 길어 올린 사람이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을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전수받는 게 학습이라 생각하는데, 진짜 학습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리로 먼저 걷고, 머리가 따라간다. 뭔지 몰라도 일단 걷는다. 그래도 걷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회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신념은 좁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으로 만날 때 공간이 넓어진다. 신념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차례가 오자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로 온 북아일랜드에서 또 많은 걸 느끼고 깨닫고 간다. 삼십 년 넘게 교사로 살면서 나를 지탱한 것은 분노였고, 다른 한편에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코리밀라에 와서 배우고 싶다.”

내 말을 듣고 데릭 선생님이 마무리 삼아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에서 뭔가 울컥한다.

“완벽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좌절에 이르는 길이다. 분노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희망을 가지면, 미래를 보게 되고, 그 미래를 위한 계획과 전략을 세운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희망을 공유하는 배움의 공동체. 이 희망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고맙다.”

일정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 우리를 태운 버스 앞에서 데릭 선생님과 진하게 포옹을 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란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말없이 한 번 더 안아 주셨다.
(2019. 2. 18.)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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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11. 18. 16:33

[평화를 담은 공간-1]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의 실현으로 평화의 길을 열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영환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일본기업(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 피해를 당한 원고들에게 역사적인 승소판결을 내렸습니다. 1997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싸워 온 피해자들이 20여년의 기나긴 투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대법원 판결은 국제인권법의 성과를 반영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고, 식민지배와 직결된 강제동원·강제노동이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의 극복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딘 세계사적인 판결이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냉전과 분단체제 아래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강요한 ‘65년 체제’를 피해자들과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극복한 역사적인 성과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해방 70여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못한 자신들의 인권회복과 정의의 실현을 고대해 온 피해자들의 기대는 처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아베 정권은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고 사죄, 반성하기는커녕 ‘국제법 위반’을 운운하며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으며, 피고 기업들에게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판결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경제규제와 노골적인 배외주의를 선동하여 일본 사회 전체를 ‘혐한의 광풍’으로 몰아넣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혐한의 광풍’ 속에서 재일조선인들은 일상적으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으며,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문제에서 드러나듯 역사왜곡과 혐한발언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언론 보도를 통해 일본사회 전체가 ‘재특회’처럼 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이후 지난 1년 동안 악화의 한 길을 걷고 있는 한일관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아직도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사회의 현실은 역사왜곡과 친일청산의 과제가 비단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과제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과 뜻을 같이 하는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한 평생을 싸워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노력을 모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65년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분노한 고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66년 『친일문학론』을 비롯하여 친일파 관련 저작을 발표했습니다. 선생은 친일파의 행적을 자신의 손으로 낱낱이 기록한 1만 3천 장의 인명카드를 남기고 1989년 작고했습니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이 남긴 뜻을 이어받아 민족문제연구소가 탄생했습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09년 선생의 인명카드는 친일파 청산을 열망하는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친일파 4,389명이 기록된 『친일인명사전』으로 태어났습니다.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문제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통한 역사문제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여 적극적으로 역사왜곡을 막기 위한 실천운동을 벌여왔습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김활란상 제정 반대, 박흥식 동상 철거, 친일문학인상 반대 등 일제 잔재와 친일청산을 위한 실천운동과 함께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발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강행된 뉴라이트 교과서 채택,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 등 역사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실천운동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에도 앞장 서 왔습니다. 지난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 낸 강제동원 소송의 사무국을 맡고 있으며, 야스쿠니신사 합사취소 소송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법정에서 대일과거사 청산을 위해 일본의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소송투쟁을 벌이는 한편 강제동원의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08년이 되는 2018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식민지주의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활동의 거점으로 마련된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강제병합의 역사, 민중의 입장에서 본 식민지지배의 실상, 한 시대를 다르게 걸어 온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대조적인 삶,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의 목소리, 그리고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싸워 온 한일시민연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입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
역사정의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그동안 모아온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도서 외에도 재일동포를 비롯한 해외동포들,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시민들이 보내준 기증 자료와 성금으로 마련되어 순수하게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박물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채운 ‘역사정의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3.1 독립선언서’ 초판본, 난징대학살에 가담한 일본군의 일장기,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의 기록, 강제동원 피해자의 절절한 편지,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김활란 등의 친일 행적,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 한일시민연대의 기록 등을 보고 박물관을 나서면서 여러분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분단과 냉전체제를 방패삼아 ‘반공’이라는 무기로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2020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그들이 친일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친일잔재의 청산과 역사정의의 실현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길에서 우리가 내디뎌야 할 첫걸음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시민여러분과 함께 그 길을 열어가겠습니다.



김영환 ㅣ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동아시아공동워크숍,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평화박물관에서 평화운동을 했다. 동아시아 시민들이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이곳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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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11. 14. 20:39

[좌충우돌 교실이야기]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임요한

 

인천영흥고에 부임한 지도 여덟 달이 지났다. 추운 겨울에 처음 부임 인사를 와서 첫 만남으로 설레던 봄을 보내고, 밤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싱그러웠던 여름도 보내고 영흥도에서의 첫 가을을 맞이한다. 아직까지 영흥에서의 생활이 대부분 평화롭고 행복하지만 가끔은 원인모를 답답함이 느껴질 때도 있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주는 고립감, 농어촌 지역이기 때문에 누리기 어려운 문화적 혜택 등이 그 이유일 게다. 이를테면 어느 날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햄버거 세트가 너무나 먹고 싶다거나, 몇 달 동안 출시를 기다려온 한정판 운동화의 실물이 너무나 보고 싶다거나.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여기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이곳 아이들은 주말이면 근처에 있는 시화, 안산 중앙, 배곧 등으로 나들이를 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부모님들은 모두 생업이 바쁘셔서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대중교통을 이용해 뭍에 나갔다가 버스가 끊기기 전에 들어와야 하는데, 주말에 행락객들이 많은 시간에 걸리면 왔다갔다 차에서 보내는 시간만 서너 시간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외부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는 편인데 내가 소속되어 있는 부서는 ‘교과 융합 현장 체험 학습(이하 융합 답사)’이라는 것을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다. 지난 융합 답사는 부여와 공주로 가서 신동엽 문학관, 정림사지, 궁남지, 구드래조각공원, 부소산성, 무령왕릉 등을 돌고 오는 1박 2일 코스로 진행을 하였다. 학생 30명과 인솔 교사 5명이 버스 한 대로 학교에서 출발하여 답사지를 돌고 오는데, 아이들이 직접 답사지 근처의 식당을 섭외해서 예약을 하면 교사는 예산을 품의하여 결재를 하고, 학생들이 답사지에 대한 사전 조사를 통해 답사 자료집을 만들어 해당 장소에서 발표를 하면 교과 교사가 보충 설명을 곁들이고 미션을 주는 현장 체험 및 사제동행 프로그램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학생들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여 무탈한 여행이 되도록 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하고, 학생들은 빡빡한 일정이 지체되지 않고 계획대로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단체 활동을 잘 해야 한다.

신동엽 문학관 

첫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랜만에 하는 나들이에 날씨도 도와주어 며칠 간 좋지 않았던 미세 먼지 농도가 여행 당일에는 ‘아주 좋음’ 상태였고, 고속도로도 막히지 않아 계획했던 일정대로 잘 진행이 되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 두둑이 받은 용돈으로 최근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화제가 된 각종 휴게소 음식들을 사먹으며 버스 이동 시간조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답사의 모든 여정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충청남도 내륙 지역에 위치해 있는 부여는 백제의 오랜 도읍이었던 관계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임에도 도시 계획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잘 정비된 도로망은 섬에 사는 아이들에게 사통팔달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큰 도시처럼 혼잡하지도 않고 횡단보도에는 신호가 없을 정도로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산과 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자연도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숙소에서도 우리 착한 영흥도 아이들은 단 한 건의 일탈도 이탈도 없이 늦은 밤까지 방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자라고 하는 시간에 모두 코 잠들었다. 이렇게 착한 아이들이 또 있을까. 가뜩이나 천사같은 놈들이 이렇게 잠도 잘 자니 예뻐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께 불침번을 서는 선생님과도 계속 아이들이 착하고 선생님 말을 잘 듣는다는 칭찬을 하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마을에서, 평화로운 첫 날 밤을 보내고 둘째 날이 밝았다. 일정 내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평화의 기운이 걷히기 시작했다.

 

신동엽 시인 생가에서

둘째 날의 첫 번째 일정은 부소산성이었다. 아침 일찍 부소산성 매표소에서 출발해 삼충사, 영일루, 군창지, 반월루 등을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이동 거리가 제법 되었고, 안전사고 예방과 학생들의 몸 상태 체크 등 이틀간의 여정 중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도보로 이동하여 부소산성 매표소에 도착해서 인원 파악을 했다. 한 명이 비었다. 그 한 명은 다름 아닌 우리 반 상민이었다. 아이들 말로 잠시 화장실에 갔단다. 오전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일단 매표소를 출발하기로 하고 선생님 한 분이 상민이를 기다렸다가 함께 일행을 쫓아오기로 했다. 삼충사에 도착해서 상민이와 함께 오기로 한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상민이가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매표소 앞에 있는 화장실에 갔는데 없었어요.”
“네, 제가 전화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바로 상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계속 가는데 상민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도 상민이를 본 사람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들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떠나서는 상민이를 본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몇 아이들도 전화를 해보더니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전화를 했다. 묵묵부답. 너무나 걱정이 되었지만 상민이를 기다리기로 한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주변을 좀 잘 찾아봐 달라고 하고 학생들을 인솔했다. 영일루에 도착해서도, 군창지에 도착해서도 상민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도 계속 받지 않았다. 이놈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건가. 처음에는 또 어디 가서 뭘 사먹는다고 정신이 팔렸거나 혹은 중간에 다른 길로 새서 피시방 같은 곳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정도였던 걱정이 계속 전화 통화가 되지 않자 행방불명이나 납치, 사고 등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다른 학생들을 인솔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렇게 된 건 아닌가, 저렇게 된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계속 일었다. 반월루 쯤에 도착했을 때 상민이를 찾으러 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상민이 찾았습니다.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아, 네. 다행이네요. 그 자식 뭐하다가 이제 나타났나요?”
“볼 일이 급해서 화장실에 갔답니다. 매표소 옆 화장실이 상태가 안 좋아서 좀 멀리 있는 화장실을 갔다네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조심히 올라오시고, 상민이에게 담임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났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렇게 걱정했던 놈이 그저 여유롭게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 녀석의 평소의 모든 행동 특성이 다 밉게 느껴졌다. 우리 학교에서 한 덩치를 하는 상민이는 그 덩치에 걸맞게 먹성도 아주 좋다. 제주도 수학여행에 가서 고기국수 한 그릇 먹는데 2분이 채 걸리지 않는 그의 장기를 우리는 ‘국수 순삭 마술’이라고 불렀다. 그럴 정도로 먹성이 좋은 녀석은 어제 아침부터 엄청나게 먹어댔다. 이동하는 버스에서도, 휴게소에서도, 여정 중 들른 점심, 저녁 식당에서도. 그리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주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그때도 아마 분명 실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친구 여럿이서 정해진 양의 치킨을 먹어야 했으니 스피드가 생명이었을 터, 닭을 씹지도 않고 뼈까지 그냥 삼켰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먹고 똥을 싸느라 오전 내내 내 애를 태운 생각을 하니 걱정을 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담임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섭기는 했는지 녀석은 낙화암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올라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뭐한다고 전화도 안 받아?”
성이 잔뜩 나서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 폰을 무음으로 해두었어요.”

한참을 녀석을 쏘아보아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인천에 올라가서 보자고는 녀석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말을 던지고 일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장소에서도, 또 그 다음 장소에서도 상민이는 계속 화장실에 들렀고, 급기야 영흥도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의 마지막 휴게소가 지난 후에도 화장실이 급하다고 정차를 요구했다.

“뭘 얼마나 처먹었길래 하루 종일 똥질이야!”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빽 질렀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빵 터졌다. 원래도 얼굴에 홍조가 있는 상민은 귀까지 벌게진 채로 화장실에 다녀왔고, 융합답사는 그렇게 끝났다.

공주박물관에서

학교에 도착해서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들만 관사에 남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아까 상민이를 찾아 헤매던 후배 선생님이 근처에 있는 십리포 해변으로 산책을 다녀오자고 했다. 그래서 나, 함께 답사를 다녀온 후배 여 선생님 한 분, 이렇게 셋은 근처에 있는 십리포 해변 쪽으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우리 학교에서 십리포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왕복 1시간정도의 거리이다. 학교 일과를 마치고 종종 다니는 산책 코스였다.

 

여느 때와 같이 십리포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화장실을 많이 가리는 나는 지난 융합답사 내내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못했고 여행이 끝나자 긴장이 풀리면서 괄약근도 함께 풀려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근엄한 선배 체면에 같이 온 후배 선생님들에게 똥이 마려워 어쩔 줄 몰라하는 방정맞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관사에 돌아갈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오만이었다. ‘이건 곧이다. 어디든 뛰어 들어가야 한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나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이 어디였던가 생각했다. ‘십리포 해변 가운데쯤에 공용 화장실이 있다. 학교까지는 아직 20분, 그곳까지는 조금 서두르면 금방 도착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두피에서 샘솟은 땀이 등줄기를 지나 엉덩이 골까지 흘러내렸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후배 선생님들께 고백했다. 나 지금 너무 급하다고……. 그들은 깔깔깔 웃고 난리가 났고, 어서 화장실로 가시라고 자신들은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나는 기다리지 말라며, 뛰는 모습은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 혹은 뛰었다가는 정말 큰일을 볼 것 같아 괄약근을 힘껏 조인 채 빠른 걸음으로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을 하고 혹시 몰라서 텃밭에 들어가 상추도 네 장 땄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뒷일까지 생각한 내가 스스로 너무 대견스러웠다. 급하다고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일을 치르고 뒤처리를 어쩔 뻔 했는가. 그 와중에도 발생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경우를 생각하며 더 빠른 걸음으로 십리포 해수욕장 쪽으로 이동했다. 화장실에 도착해서 바로 앞에 있는 관리사무실에 가서 휴지를 얻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장실의 세 칸이 모두 잠겨 있음을 확인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져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어서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마지막 칸에서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그 어떤 사랑의 속삭임보다 더 달콤한 소리였다. 그 칸에서 나오시는 분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드디어 나만의 공간에 도착하여 착석했다. 나는 김수영 시인의 ‘폭포’라는 시의 구절을 떠올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도서관과 화장실의 공통점은 학문을 펼치고, 학문에 힘을 쓰고, 학문을 닦는 곳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날은 학문에 힘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한 바탕 거사를 치르고 나서 화장실을 나오려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상민이었다.

“선생님 오늘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상민아, 너 십리포 화장실에 CCTV 설치해놓았니?ㅠ 상민이의 참회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자연 앞에서, 생리 현상 앞에서 이리도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누가 누구를 멸시하고 조롱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은 누구에게도 그럴 자격은 부여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학교에서 상민이를 만나 사과했다. 어제는 선생님이 오만했다. 미안했다. 영문도 모른 채 덥석 잡힌 손을 멋쩍어하며 상민이는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김수영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우습지 않으냐 이깟 똥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를 떠올리며


임요한ㅣ인천영흥고등학교 국어 교사.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 읽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은 국어 교사. 여러 길 돌고 돌아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무얼 잘하는지, 이다음에 뭐가 될지 궁금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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