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나의 평화감수성]
자신의 삶을 장례식으로 만든 작가에게 바치는 헌사
김경민
매 학기 거의 모든 수업에서 빼놓지 않고 다루는 소설이 있다. 바로『소년이 온다』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문학을 사랑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 느끼는 감동에 더해, 마침 다음 날 수업에서 다룰 소설이『소년이 온다』라는 사실에 더 흥분했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번역된 문장이 아닌 조사와 어미의 미묘한 차이까지 얼른 알아차릴 수 있는 모국어로 써 내려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게 되는 영광을 함께 기뻐하고 더불어 그런 작품을 수업 텍스트로 정한 나의 선견지명을 슬쩍 자랑할 심산에 한껏 들떠 있었다.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읽게 하는 이유는 단지 80년 광주를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한강이『소년이 온다』에필로그에서도 밝혔듯 광주는 모든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며, 또한 우리의 사건, 나의 사건이다. 그렇기에 모든 폭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이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란 간사한 동물이라 먹고 사는 일에 치이다 보면 다른 이들의 죽음을 쉽게 잊게 마련이다. 그런 망각의 동물에게,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문학이다. 매 학기 학생들과 같이 이 소설을 읽는 이유 또한 그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며, 더불어 우리가 공부하는 문학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귀한 존재임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피스레터에 ‘문학으로 읽는 나의 평화감수성’이란 제목의 연재를 기꺼이 시작하게 된 것 또한 이렇게 멋진 문학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렇기에 피스레터의 첫 번째 글에서 다룬 소설이『소년이 온다』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글에서는 국가폭력이라는 끔찍한 과거를 덮어두려 하지 말고 제대로 기억하며, 더 나아가 그때의 폭력으로 아파하는 사람들(그 글에서는 이들을 ‘사후피해자’라 불렀었다)이 더 많이 생기길, 그래서 그들의 힘이 모여 또 다른 국가폭력이 반복되지 않길 염원했었다.
모든 노벨문학상은 노벨평화상이다
이렇듯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온몸으로 고통의 무게를 나누어지려는 존재가 작가이고, 문학이라면 노벨문학상의 또 다른 이름은 노벨평화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그리고 문학이 지녀야 할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는 어느 시인이 이미 백여 년 전에 수줍게 그러나 강단 있게 내놓은 저 한 구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평생 시 한 줄, 소설 한 편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작가였던 윤동주가 보여준 시인의 모습은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그가 시를 통해 꿈꾸었던 세상은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계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평화로운 삶이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꿈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리고 그들이 써 내려간 문학은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늘 높이 떠 있는 신기루 같은 그 꿈을 조금씩 우리의 일상 가까이 끌어내렸다. 작가라면, 문학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따라서 갈등과 전쟁을 지지하고, 권력의 편에 서서 약자를 짓누르는 것에는 감히 작가나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노벨상 수상 소식 후 『소년이 온다』를 두고 다시금 해묵은 트집을 잡는 자가 작가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을 때, 다른 어떤 이들의 입에서 그런 망언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분노가 치밀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아니 에르노(Annie Ernaux)가 수상 후 며칠 뒤 모습을 드러낸 곳이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 현장이었다는 사실이나,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 전쟁이 한창인 상황이기에 어떤 잔치도 하지 않겠다던 한강의 묵직한 메시지를 떠올린다면 노벨문학상의 의미가 노벨평화상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온몸으로 폭력에 맞서 싸우고 그런 폭력으로 상처받은 이들의 편에 서서 그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에 평화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기에…….
문학은 평화를 위한 가장 멋진 무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소년이 온다 』 를 비롯한 그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명품을 사려고 오픈런 하는 광경에만 익숙했던 내게 책을 사려고 아침부터 서점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은 반갑다 못해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이런 기분 좋은 소식 앞에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지만, 오픈런까지 해서 한강의 소설을 찾아 읽은 많은 사람들이 5‧18과 4‧3을 비롯해 살아 있는 모든 귀한 존재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마주하면서 그들 또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꺼내 본다.
트럭 짐칸에서 의식이 들었는데, 잘린 손가락에서부터 무서운 아픔이 뻗어나오고 있었어.
그런 아픔은 그전까지 상상도 못했고, 지금 말로 할 수도 없어. (…)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 『작별하지 않는다』 중)
자신의 손가락이 잘린 순간에도,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아팠을지를 걱정하는 소설 속 인물처럼, 한강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소년이 온다 』중)
물론 한강의 소설을 읽는 모든 이들이, 어린 동호에 대한 미안함으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처럼, 그리고 작가 한강처럼 삶의 매 순간을 장례식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년 5월이면, 혹은 세월호참사나 이태원참사, 용산참사처럼 80년 5월의 광주를 닮은 사건을 볼 때면, 아니면 적어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이라도 거대한 폭력에 맞섰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함께 아파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절감하고 그 고통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땅도 아닌 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기꺼이 내려놓았던 작가에게, 그리고 지금도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자신의 삶을 기꺼이 장례식으로 만들고 있는 작가 한강에게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최고의 축하가 아닐까.
“문학은 싸움의 무기”라고 했던 아니 에르노의 말을 빌리자면, 문학은 또한 평화를 위한 가장 멋진 무기다. 그러나 이 무기는 작가가 작품을 쓰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가 그것을 읽고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일 때 비로소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그 가치를 제대로 발하게 된다. 한강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은 이미 우리에게 멋진 무기를 아주 많이 선물해주었다. 그 무기가 온전한 제 힘을 발휘하기 위해 남은 것은 하나, 문학을 읽은 독자들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5‧18 정신을 훼손하는 망언이 여전히 난무하는 세상에 단호히 맞서는 것, 제2, 제3의 5‧18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경계하는 것,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 이런 것들이 문학을 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할 일들이다. 한강의 소설을 사러 아침부터 서점으로 오픈런 했던 이들이여, 이제는 그 소설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러 뛰어 가자.
김경민 | 국문학과 정치학 중 진로를 고민하다 문학으로는 사회의 모든 이야기를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국문학을 선택해, 지금까지 한 발은 문학에 다른 한 발은 문학 바깥의 세상에 두고 있다. 『한국 소설의 인권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계속 인권과 법, 국가폭력과 시민 등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경상국립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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