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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47_2 김병연_혐오 표현이 일상화된 교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by 어린이어깨동무 2026. 8. 19.

[평화 이슈] 

혐오 표현이 일상화된 교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병연

 

“장난인데요, 뭐”

잘못임을 알지만 청소년들의 일상에서 널리 공유되는 서글픈 말들이 있다. 쉬는 시간, 학교 행사, 과제, 심지어 수업 중 발표에서도 혐오와 조롱의 말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밈(meme)과 특정 지역을 비하하거나 장애인·성소수자·이주민·특정 국가를 향한 멸칭이 놀이 문화가 되어버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7월 발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교사의 73.9%가 최근 1년 사이 학생들의 말과 글에서 혐오·차별·역사 왜곡 표현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특정 인물의 죽음이나 정치적 비극을 조롱하는 표현을 접한 비율이 88.9%,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을 접한 비율이 86.8%에 달한다. 혐오와 차별, 사실에 대한 왜곡이 우리 학생들의 삶에서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교육적인 대응은 무기력하다. 대다수 학생은 “장난이었다”(56.0%)거나 “남들도 다 쓰니까 썼다”(55.5%)며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학년이 바뀌고 학교급이 바뀌면서 무심결에 장난처럼 사용하던 말들이 그들의 언어와 행위로 내면화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과 평화적 감수성을 찾기 어렵다.

 

'혐오·역사왜곡 표현, 교사・학생 인식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 (사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가난하게 태어난 것도 능력이에요”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윤리 교과서는 사회 불평등과 사회 정의를 중요하게 다룬다. 빈부격차, 장애인 차별, 성차별과 성평등 문제 등이 수업 소재가 되는데 언젠가부터 “가난하게 태어난 것도 능력이에요.”와 같이 과거에 들어보지 못한 당황스러운 말들을 학생으로부터 자주 듣게 되었다. 진지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학생 앞에서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청소년들과 젊은 세대 사이에서 공유되는 공정과 정의는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최소한의 합의와는 달라진 것 같다.

그들은 세상과 타인을 왜 이처럼 삭막하게 바라보게 되었을까? 인터넷 알고리즘의 확증 편향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부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폭력과 따돌림, 혐오 표현이 일상화되었다고도 한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붕괴되어 버린 공동체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겉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자신은 그런 가치와 무관하게 살면서 학생들이 처한 삶의 문제에 무관심한 기성세대와 정치권에 대한 환멸을 원인으로 들기도 한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놀이할 장소와 기회가 사라진 불행한 청소년들의 현실도 함께 언급된다.

이런저런 글들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어온 단어는 ‘불안’이었다. 20대 어느 청년은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망해 가는 대한민국에서 나의 인생 지키기”라고 고백한다. 어려서부터 마음 깊이 내면화한 경쟁의식과 학업 스트레스, 대학 입학으로는 보장되지 않는 미래의 삶. 소수점 단위로 매겨지는, 인정사정없는 성적과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서열화할 것같이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는 특정한 능력을 절대적 기준으로 만들었다. 그 능력을 기준으로 승자는 자신의 독점을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당연시하고, 패자는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자기 능력 부족을 탓한다. 불안이 일상화된 그들에게 희망을, 평등을, 자유를 함께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것은 위선으로 다가가는 듯하다. 

사회적 정의와 연대가 무색해진 왜곡된 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자리 잡았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공정은 약자 보호나 평등이 아니라 “손해 보지 않는 것”, “나의 불편에 대한 정당한 보상” 등으로 인식된다. 이 과정에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도태는 자연적인 것이고 배제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그들 사이에 널리 공유된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여성, 성소수자를 향한 공격이 ‘솔직함’이나 ‘공정한 비판’으로 정당화된다.

 

교육, 평화교육의 무력함

10여 년 전 ‘진지충’, ‘설명충’ 등 단어 끝에 벌레 ‘충(蟲)’을 붙이는 말들이 학생들의 일상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유저를 비하하던 ‘일베충’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어, 인터넷은 물론 교실 공간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학교와 교실은 그 성격상 재미있기보다 진지할 때가 많고 설명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많은 공간이다. 돌이켜보면 학교와 우리교육은 이미 그때부터 학생들에게 희화화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험이 누적되어 오늘의 교실이 되었다.

혐오, 혐오 표현이 일상화된 교실에서 평화교육, 다문화교육, 민주시민교육 등이 설 자리는 매우 좁다.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선배 교수의 하소연이 떠오른다. 얼마 후 교사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을 주제로 강의할 예정이던 그는 강의를 의뢰한 관계자로부터 “교사들로부터 당혹스러운 질문이나 이견이 제기될 수도 있으니, 각오하셔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교사들과 교육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임에도 평화, 민주, 인권, 평등 등을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강의 시간에 만난 한 청년은 또래 친구들에게 ‘평화’는 ‘친북, 종북, 빨××’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연상어라고 말했다. ‘통일’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교육 나아가 평화교육은 어쩌다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게 되었을까? 평화교육은 인권, 다양성, 비폭력에 관한 당위적 명제나 선언을 제시한다. 당장의 생존 경쟁과 젠더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실존적인 삶의 문제와 결합하지 못한 당위적인 담론들은 무기력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구조적 불평등과 승자독식 체제는 그대로 둔 채 교실에서만 개인 차원의 윤리적 해결 방안을 요구하는 관행이다. 청소년들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알 것은 안다. 그들은 너무 이른 시기에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접고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

교사들은 사회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 매우 신중하다. 앞서 소개한 설문조사에서 교사들은 혐오 표현이나 역사 왜곡을 지도할 때 ‘정치적 중립 위반’(69.9%), ‘학부모 민원 및 외부 공격 우려’(60.1%) 등과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고등학교 교사의 74.3%가 정치적 중립 프레임에 부담을 느끼며 정당한 사회적 쟁점 교육과 비판적 지도를 주저한다고도 한다. 교실에서 숙의와 토론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 자리를 유튜브 알고리즘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자극적이고 배타적인 극단주의 언어가 채우고 있다.

 

교육보다 먼저 안전한 사회

더 나은 세상을 믿고 타자를 사랑하라고 설득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청소년들이 왜 배타적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는지 물어야 한다. 혐오는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라기보다, 무한경쟁과 양극화 속에서 쌓인 불안과 낙오에 대한 공포, 상대적 박탈감이 약자를 향해 투사된 정동(Affect)의 결과이다. 복지 결핍과 사회적 무관심 속에 방치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눈앞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논리를 익힌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그들을 훈계하고 처벌과 같은 책임을 부여하기 전에 구조적 불안과 차별을 해소할 방안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시험 성적은 조금 낮더라도 사회에서 사람 대접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의 사회적 안전망(주거 안정, 임금격차 해소 등)을 만들어야 한다. 혐오 표현을 방치하고 상업화하는 SNS 플랫폼 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묻고, 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쌓일 때 비로소 혐오는 사라지지 않을까? 

 

학교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혹스러운 교육 현실의 변화 앞에서 교육이, 평화교육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언제나 하는 고민이지만 솔직히 어떤 대답도 만족스럽지 않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학교를 교육하는 공간, 소통하는 공동체로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라 여겨진다. 청소년을 비롯해 젊은 세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관계 맺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귀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학년 초 새로 배정된 학급에서 친구 맺기를 어려워하며 괴로워하거나 눈물 흘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관계 맺기는 주저하면서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끼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학교는 교과 수업을 통해 삶을 위한 지혜를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활동을 통해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공동체 활동이 간소화되거나 폐지되어 왔다. 교실과 운동장에서 공동체 놀이의 기회가 눈에 띄게 줄었고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과 같은 교외 활동이 축소되었으며 동아리 활동과 학교 축제 등도 생기 발랄함을 잃어버렸다. 졸업 앨범에 자신의 사진을 포함하는 것을 거부하는 학생과 교사들도 있다. 코로나 위기를 지나면서 더 심해진 면이 있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사회 변화와 맞물려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에 그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과거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과정과 학교 교육 활동에서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시간을 제도적으로 늘렸으면 한다. 학교에서는 (지식)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 학교교육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어떨까? 사회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입법을 통해 학교에 강제되어 온 수많은 교육 주제들, 이를테면, 학교폭력 예방교육, 성폭력 예방교육, 생명존중 교육, 안전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줄지 않고 법과 처벌 중심으로 전달하는 현실에서 학생들은 공동체의 온기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너무 일찍 체화하며 불안을 키운 것은 아닐까? 

화해보다 처벌이 중시되는 학교 분위기는 ‘교육의 사법화’로 요약된다. 사법화된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이 되기 어렵다. 교사의 자리를 경찰과 변호사가 차지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교육과정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고 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관계 맺으며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새로운 만남에 조금은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로 설레임과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교사들이 이러한 변화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를 개선하고 교육 활동이 최소한 처벌받지 않도록 제도화 해야 한다. 행정이 아닌 학생을 중심에 두고 교사들이 학교에서 의미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 평화교육의 페다고지도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평화와 평화교육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학생들의 실존적인 삶을 중심에 두고 평화교육의 페다고지를 고민한 흔적은 많지 않다. 친절하게 규범을 전달하는 방식은 더 이상 학생들에게 내면화되기 어렵다. 삶과 연계한 살아있는 경험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많은 지식을 다루기보다 삶의 다양한 문제 상황을 학생 눈높이에 맞게 제시하고 해결 방안을 탐구하도록 도와야 한다.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언어로 혐오와 차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대화의 소재를 발굴하고 질문을 만들고 가능한 답들을 함께 탐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가 교육의 공간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관심과 해결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모두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김병연 | 공주교육대학교에서 예비교사들과 함께 우리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모든 교육은 곧 평화교육이어야 한다고 믿고 공감대를 넓히고자 노력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현실 앞에 전전긍긍할 때가 많지만, 학교 안과 밖에서 ‘모두를 위한 평화’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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