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16_2 조성렬_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은 없다

by 어린이어깨동무 2018. 12. 20.

[시선-한반도 평화읽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은 없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2018년 성과와 2019년 과제

조성렬


“역사의 문을 빠져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아라!” 이것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여러 공국(princes)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민족이 처음으로 단일국가인 독일제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1990년 통일될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시 사민당은 국가연합을 거쳐 단계적으로 통일하자고 주장했지만, 집권당인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기 위해 조기통일을 추진했다.


1989년 10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시작해 동독에서 과도정부 수립, 자유 총선거, 개혁정부 등장 및 동서독정부의 통일협상을 거쳐 마침내 1990년 10월 1일 정식으로 통일국가를 선포했다. 이처럼 동서독의 통일은 채 1년도 안 돼 이루었다. 이러한 속전속결식 통일로 후유증도 적지 않았지만, 그 때 통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동서독은 분단국가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독일 통일의 역사적인 교훈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처럼 조기통일을 내걸고 당장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역사에서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열렸을 때 이를 잘 활용하여 민족적 과제를 성취해 내야한다는 의미이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해 더 이상 이 땅에서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남북관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두 차례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회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신의 옷자락’을 잡지 못했다.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10월에는 조명록 북한군 차수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이 이루어졌지만 11월 미 대선에서 대북 강경파인 부시대통령의 당선으로 관계개선이 무산되었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기회의 창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올해의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작년 1년은 수소폭탄과 ICBM 시험 성공 직후 북한의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과 이에 맞선 미국의 코피작전 등 대북 군사행동론으로 1953년 휴전 이래 최대로 전쟁위기가 고조됐던 해였다. 신베를린선언, 8.15경축사, 한중정상회담, 미 NBC인터뷰 등 전쟁을 막으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필사적인 노력과 금년 1월 신년사를 통한 김정은 위원장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대남특사 파견과 같은 결단으로 다행히 한반도 정세는 전쟁에서 평화로 급반전되었다.


2018년 한 해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미 4월과 5월, 9월 세 차례나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고 올해가 가기 전에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 중이다. 무엇보다 70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양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의 출범 이전부터 냉랭했던 북중관계가 3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풀린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이처럼 2018년은 한반도 대전환이 시작된 해이다.


한반도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뭐니 뭐니해도 김위원장의 핵무기 포기 결단과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문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 및 정치적 계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세 지도자가 마부 역할을 하고 한반도 비핵화가 말이 되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거대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민족사의 분수령이 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됐지만, 이미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교류협력의 경험을 가진 남북관계와 달리 지난 65년간 적대관계를 유지해 왔던 북미관계는 오랜 불신으로 기대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그 때마다 한국이 북미 사이에서 중재자로 나섰다. 5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밝혔을 때 5.26 번개 남북정상회담으로 양측을 중재했고, 8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했을 때도 대북특사 파견과 9월 18~20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북미 대화의 동력을 재창출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중재자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남측과는 핵문제를 논의를 할 수 없다던 북한을 설득해 유관국 전문가의 입회 아래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해체하며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핵시설 등을 영구히 폐기하기로 약속한 ‘9.19 평양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사소한 군사충돌만 발생해도 대화와 협상이 단절됐던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군사적 신뢰구축과 초보단계 운용적 군비통제 방안을 담은 ‘남북군사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처럼 한국은 중재자 역할을 넘어 당사자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마차가 나가는 앞길에는 곳곳에 돌부리가 널려있어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북간, 북미간 상호불신이 최대 걸림돌이었다. 변변한 재래식무기도 없는 북한이 어렵게 만든 핵무기를 포기하겠는가, 변덕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북한과 한 안전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가, 미 행정부가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미 의회가 반대하면 못 지키는 것 아닌가, 북미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한데 남북관계가 너무 빨리 나가는 게 아닌가, 남북관계 과속으로 한미관계가 삐끄덕거리는 건 아닌가 등등 기존의 불신이 새로운 불신을 만들어내며 갈 길을 어렵게 했다.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나 내부사정 따위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납치문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해체 등 자국 이익을 앞세우며 미 행정부와 의회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 대비해 북일대화에도 나서고 있다. 중국도 종전선언 참여는 물론 평화협정 체결과 그 이후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하려고 한다. 한발 떨어진 러시아도 6자회담의 재개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신과 방해에 따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1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평화의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수십년 동안 진행되어 온 남북관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빠른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해 네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내년 1~2월 중에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미 비핵화 협상의 진전과 함께 또다시 가속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2019년 새해를 맞이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우리는 어떤 자세로 풀어가야 할 것인가? 지금 주변국들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과도한 개입은 프로세스의 진행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남북미의 3두 마차로 달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따라서 우선은 의사소통을 통해 그들의 이익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율해 가다가 어느 정도 목적지가 보일 때 관련 주변국의 참여를 허용하면 될 것이다.


남과 북은 1948년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된지 벌써 70년이나 되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휴전한지도 6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상시적인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 왔다. 전쟁 재발의 위기에서 벗어나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 ‘신의옷자락’을 붙들고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에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빨리 진행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이란 없다.


조성렬ㅣ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장,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전략공간의 국제정치: 핵・우주・사이버 군비경쟁과 국가안보>, <뉴 한반도 비전: 비핵 평화와 통일의 길>, <한반도 평화체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체제의 전망>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