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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17_4 김영환_역사의 길에서 평화를 찾다

by 어린이어깨동무 2019. 2. 19.

[시선 | 평화의 마중물]


역사의 길에서 평화를 찾다

 

김영환

내가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97년 여름의 일이다

 

남북어린이어깨동무의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친구들과 함께 일본 최북단의 땅 홋카이도(北海道) 슈마리나이(朱掬内)를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서 머나먼 혹한의 땅으로 강제연행되어 혹독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열린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현재 동아시아공동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얼룩진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인, 재일조선인, 아이누1)친구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삽을 들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두 나라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 빽빽하게 얽힌 대나무 뿌리를 걷어내고, 조심스레 한 뼘 한 뼘 땅을 깎아 내려가자 쪼그린 자세로 유골이 되어 묻혀있는 이름 모를 강제동원 희생자와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교과서로만 배우고 말로만 들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처음으로 눈앞에 마주한 순간이었다.

 1)아이누: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에 분포하는 선주(先住) 민족

 

이름도, 국적도 알 수 없는 희생자는 유골이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고통과 암흑의 세월을 딛고 역사의 증인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물음을 던졌다.

 

이 사람은 식민지에서 끌려온 조선인인가 아니면 빚에 쫓겨 온 일본인 노동자인가? 이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끌려왔을까? 왜 이 사람은 1945년 해방이 되고 60여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숲속에 묻혀 있을까? 고향에는 이 사람을 기억하는 가족들이 있을까?’

 

60여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강제동원 희생자는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만남을 선사했다. 한국인, 재일조선인, 일본인, 아이누 등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존재들이 유골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함께 마주하고, 서로의 다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곳에서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재일조선인 친구들을 처음으로 만났고, 70년대부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밝히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애써온 일본의 시민들과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곳에서 국가와 민족 벽을 넘어 손을 잡은 사람들은 참혹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켜 왔고 지금도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나 역시 일본에서 5년 동안 평화운동을 배웠고, 지금도 역사의 길에서 평화를 찾는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다

 

20181030,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철(신일철주금 주식회사’)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원고 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이 입은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여 피고 신일철주금이 원고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943년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한 19세의 청년 이춘식은 94세의 노인이 되어 법정에서 승소판결을 들었다. 그러나 2013년 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던 원고 여운택 할아버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1997년부터 21년 동안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함께 싸워 온 신천수 할아버지도, 2005년부터 13년 동안 한국의 법정에서 함께 싸워 온 김규수 할아버지의 모습도 이날 법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박근혜의 청와대와 외교부는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정치적 야합을 꾀하면서 한일관계의 악화를 빌미로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미루도록 지시했다. 양승태의 사법부와 피고 일본 기업의 대리인 김앤장은 한통속이 되어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재판거래를 통해 확정판결을 고의로 지연시켰다. 국가권력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를 벌이는 동안 이 날을 평생 기다려왔을 세 분의 피해자는 끝내 승소판결의 기쁨을 맞지 못하고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누구를 위한 국가이고, 누구를 위한 정부이며, 누구를 위한 사법부인가?

 

1997년부터 일본 법정에서 시작된 재판투쟁을 지원해 온 일본 시민들도 이 날 법정에서 승소판결의 기쁨을 함께 했다.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 나카타 미쓰노부(中田光信). 40대의 공무원 신분으로 재판지원 활동을 시작해 온 두 사람은 여운택 할아버지가 재판을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찾은 날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오라며 자신들에게 돈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일본 사람은 못 믿겠다며 할아버지가 돈을 맡기기를 주저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 2003년까지 일본에서 진행된 재판을 위해 할아버지가 일본을 찾을 때마다 지원자들은 할아버지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부자지간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었고, 한국에서의 재판투쟁도 지원하며 할아버지의 곁을 지켜왔다. 할아버지가 끝내 승소판결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매년 성묘를 거르지 않는 정성을 쏟아왔다.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두 사람은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훔쳤다.

 


왼쪽부터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 , 여운택 할아버지, 나카타 미쓰노부(中田光信)

 

강제동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일관계의 악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5한일협정을 졸속으로 맺어 일제 피해자들의 권리를 짓밟았다. 2015년 박근혜는 외교참사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합의를 발표하여,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존엄의 회복을 위해 싸워 온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2018년 대법원의 승소판결이 있기까지 역사 정의와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은 필요할 때만 국익을 말해온 권력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외로운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 온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잡아 온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다. 국익을 들먹이며 한일관계의 악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피해자의 곁에서 손잡아 온 이들에게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내일이 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동아시아공동워크숍,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 평화박물관에서 평화운동을 했다. 동아시아 시민들이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이곳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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