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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1_3 김성일_그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by 어린이어깨동무 2020. 2. 19.

[평화를 담은 공간]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가 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 

 

그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김성일

 

지난 2016년 가을부터 17년 봄까지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피어 올랐던 촛불을 떠올려 본다. 꽁꽁 동여맨 부위를 여지없이 파고드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시청광장으로 광화문으로 종로로 안국로로 서로의 함성과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던 그 시간들. 그 겨울 우리는 그렇게 개인과 역사가 조웅하는 광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촛불의 힘을 계승하겠다는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그렇게 2017년 한 해는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 그리고 세월호 사건 등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소외, 슬픔과 고통, 권력자들의 막무가내식 부정과 부패에 대한 분노가 아로새겨진 촛불의 승리로 도취해 있던 해이기도 했다.

 

그 2017년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의한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이라는 한 대학생의 죽음으로 촉발되어 독재정권의 호헌을 철폐시키고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10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2017년 겨울 개봉한 영화 '1987'의 울림은 그렇게 30년이라는 시간차를 무색하게 하며, 촛불을 들어올렸던 세대와 짱돌을 던졌던 세대, 부모와 자식 세대 모두에게 공명했다.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세대가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소통의 시간을 잠시나마 갖는 기회도 됐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6.10민주화운동 31주년 기념식에서 “민주주의자 김근태 의원이 고문당하고,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이곳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국민들과 나누는” 장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될 곳은 바로 수 많은 민주인사들과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하고 희생시켰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자리했던 바로 그 곳이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가 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나가다 첫 번째 마주치는 오른쪽 골목으로 150여미터를 걸어들어가면 오른편에 짙은 흙벽돌로 날카로운 각을 세우며 올려진 7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이다. 박정희 정권 때 경찰청의 전신이었던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사용하면서 간첩들을 잡아다 수사해서 이 땅에 공산주의가 침투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사실은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주인사나 학생, 무고한 시민들을 이곳에 연행해서 간첩으로, 빨갱이로 둔갑시키기 위해 살인적인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 칠성판 고문 등을 자행해 왔던 곳이었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민사회의 요청도 있었지만, 2005년 경찰은 이곳을 '경찰인권센터'로 만들어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고 발표한 상태로 곁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치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2007년 박종철 사망 30주기를 기리면서 5층에 박종철기념전시실이라는 작은 공간 정도를 내어준 게 전부였다.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가 된 후 2019년부터는 월요일과 추석, 설 명절을 제외한 기간 동안  이 공간을 자유롭게 방문하여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곳은 두꺼운 철문으로 닫혀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니라 초등학생들부터 노인들까지, 경찰부터 노동조합 단체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찾아와 가슴 아픈 역사를 날 것 그대로 대면하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2019년에만 3만 7천여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하루 평균 120명에 육박한다. 아직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이유는 바로 이 공간에서 베어져 나오는 그 아픔 때문이지 않을까? 다시는 그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약속같은 것을 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이곳은 76년 5층 건물로 지어진 후, 더 많은 대공수사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1983년에 2개층이 증축된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2011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이 이곳에 끌려와 전기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폭로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더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된 계기는 1987년 1월 14일 그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경찰은 이곳 5층 조사실에서 참고인으로 불려온 박종철을 물고문하던 도중에 죽게 만들고는 “탁 치니 억 하고” 심장쇼크로 죽었다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이러한 고문조작사건이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러나면서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2018년 1차 조사연구를 통해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확인한 분들만 393명이다. 그러나 이 명단은 언론이나 피해자 중심의 조사일 뿐이지, 76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 그리고 특히 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경찰은 한 번도 스스로 공개한 적이 없다. 올바른 과거 청산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진상을 먼저 규명하고 난 이후에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가해집단의 진실한 사과와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고 난 이후,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게 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이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화해이고 평화이지 않을까?  

이곳으로 붙잡혀 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떠올려 본다. 이 곳이 어딘지 모르게 차에 갇혀 눈을 가린 상태로 잡혀 오면 우선 두꺼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청각적인 공포감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 그 후 본관 건물 후문에서 5층 조사실까지 연결되어 있는, 방향감각을 알 수 없게 설계된 원형계단을 통해 끌려 올라간다. 5층 조사실은 층수도 알 수 없게 숫자 1~16까지로만 표기되어 있다. 3평 정도 남짓 되는 이 조사실 대부분은 2000년 초반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 내부구조가 다 바뀌어 그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단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 당했던 509호실은 박열사의 아버님 고(故) 박정기 님이 끝까지 공사를 막아 1980년대 조사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변기와 욕조(이곳에서 물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간이침대와 조사용 책상과 의자가 그 공간을 비좁게 채우고 있다. 조사실 내 의자와 책상들은 조사를 받던 사람들이 흥분해서 들어 올리지 못하게 고정되어 있고, 창문은 밖에서 안을 안에서 밖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비좁게 만들어져 있다. 전등은 철망으로 막아 놓았고, 갇혀 있는 자를 감시하고 조사과정을 확인하기 위한 ITV카메라가 방마다 달려 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벽면마다 둘러쳐져 있는 나무 흡음판은 고문을 당하는 고통으로 흘러나오는 비명소리를 차단하고 자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조사실 내부의 불은 조광기라고 하는 스위치에 의해 밖에서만 조절될 수 있고, 안에서 밖을 살피기 위한 외시경은 오히려 5층복도에서 조사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거꾸로 설계되어 있다. 

 

 

1층에서 5층 조사실로만 연결된 원형계단

 

 

출구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5층 조사실 복도

 

밖에서 안을 보게 거꾸로 제작된 외시경, 무궁화 모양의 섬세한 디자인 또한 인상적이다

 

유독 5층 조사실의 창문만 저렇게 좁은 이유는 뭘까?

 

이곳을 둘러본 사람들은 이 공간이 조사와 고문을 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되고 만들어진 것에 경악한다.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이 건물을 설계하고 지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한국 건축의 1세대로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는 김수근이다. 올림픽주경기장, 남산 자유센터와 워커힐 호텔, 여의도 종합개발 계획, 안국동의 공간 사옥 등을 설계한 건축가이다. 과연 그런 건축가가 왜 이런 건물을 설계하고 만들었을까? 질문을 던지면서 이곳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건축가는 건물주의 요구에 최대한 충실해야 한다는 직업 논리로 과연 이곳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문제인지, 더 나아가 경찰이라는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 사람들을 잡아다 수십일 동안 가둬놓고 고문해도 되는 것인지 이 공간에서 그 답을 찾아보길 바란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이제는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가 된 이곳은 결국 분단이라는 우리의 상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조국의 통일과 평화,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가 꽃피우기를 염원했던 많은 민주인사들을 포함해서,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행불자나 납북자를 둔 가족들이 평생을 보호관찰을 받다가 정권이 필요할 때마다 불려 와서 모진 고문을 받고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했던 무리로, 간첩으로 조작되어 억울하고 비통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비명과 아픔을 이곳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땅에 소외받는 이 없이 한 발 한 발 평화를 정착시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분단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고 이 공간은 울부짖고 있다.

 

2022년이면 이 공간은 새롭게 조성된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분단의 과정에서, 그리고 그 분단을 자양분 삼아 오랜세월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세력들이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폭력의 역사를, 그럼에도 그 폭력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외쳤던 분들의 희생과 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그 역사 위에 우리는 어떤 세상, 어떤 평화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것인가?

 

이곳을 찾을 당신과 함께 그 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서영걸)

 

 

김성일ㅣ 97년 대학 복학 후 어린이어깨동무와 인연을 맺어왔다. 지금은 이곳 민주인권기념관을 관리 운영하고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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