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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9_3 임재근_산내 골령골과 제주4·3사건

by 어린이어깨동무 2022. 2. 18.

[기억과 평화] 

산내 골령골과 제주4·3사건

- 바다 건너 제주 사람들은 왜 대전까지 끌려와 죽임당했을까?

 

임재근

 

제주도에 가면 어느 곳을 다녀오는가?
제주도는 1,850.2㎢의 면적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이다. 동부와 서부로 나누거나, 남북으로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누어 어디를 다녀올지 생각하며 목적지를 살펴봐야 할 정도로 넓다.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다랑쉬오름은 382m로 360여개 오름 중에서 가장 높다. 경사가 가파르긴 하지만 1~2시간이면 오름에 올라 정상의 분화구를 돌고 내려올 수 있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함덕해수욕장은 ‘한국의 몰디브’로 불리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아름다운 곳이다. 제주시 서쪽 한림읍 월령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손바닥 선인장 자생지로 유명하다. 해질 녘 월령리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붉은 태양이 바닷속으로 내려앉는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다. 제주도 남쪽 서귀포시에는 국내에선 유일하게 뭍에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정방폭포가 있다. 푸른 바다로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정방폭포는 서귀포를 대표하는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이다.

 

제주도의 첫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비행기가 활주로로 내려 앉고 있다.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운 제주도이지만 제주4·3의 아픈 역사를 아는 이들이 꼭 찾아야 하는 곳을 꼽으라 한다면 제주4·3평화공원을 추천한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분단을 거부했던 제주 사람들이 항거했던 제주4·3항쟁. 하지만 미군정과 이후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 사람들을 초토화 작전으로 탄압했고, 대량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해방 시기부터 제주4·3항쟁을 거쳐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항쟁과 아픈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제주4·3평화공원이다.


사실 제주도는 전역이 4·3항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터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제주에 처음 도착할 때 첫발을 내딛는 제주국제공항도 학살터다. 과거에 정뜨르비행장으로 불렸던 그곳은 4·3사건 당시 일상적으로 제주도 주민들을 끌어다 총살했던 최대의 학살터였다.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많은 주민들과 숙군(肅軍)된 군인들이 비행장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1949년 10월 2일에는 제2차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이 이곳에서 총살되기도 했다.


다랑쉬오름 아래에는 다랑쉬굴 학살터가 있다. 다랑쉬굴 학살사건은 1948년 12월 18일(음력) 제9연대 군인과 경찰, 민보단 등 군·경·민합동토벌대가 종달리, 하도리 주민 22명 이상을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초토화 작전을 피해 주민들이 다랑쉬굴로 피난한 상황에서, 토벌대가 수류탄 등을 굴 속에 던지고 입구를 봉쇄해 갇혀있던 주민이 연기에 질식해 죽은 곳이다. 함덕해수욕장도 4·3사건 당시 제9연대와 제2연대가 주둔하면서 함덕 주민뿐만 아니라 인근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수시로 희생된 곳이다.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월령리에는 4·3사건 당시 총상으로 인해 턱을 잃어 무명천을 감고 생활해 ‘무명천 할머니’라 불린 진아영 할머니가 살았던 ‘삶터’가 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정방폭포 주변에서 서귀포 주민 248명이 총칼과 죽창으로 희생되었다. 절벽 밑으로 떨어진 희생자 중 100여 구는 희생 직후 파도에 쓸려갔기 때문에 수습되지 못했다. 아름답게 보이는 풍경 뒤로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가려진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주4·3평화공원을 주의깊게 둘러보아야 한다.


제주4·3평화공원 내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전역이 학살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제주4·3항쟁의 역사를 집대성해 전시하고 있다. 4·3의 원인, 전개, 결과, 진상규명과정이 6개의 전시관에 걸쳐 구성되어 있다. 다랑쉬 특별전시관에는 다랑쉬굴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이곳을 충분히 관람하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위령탑과 각명비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제주도의 분화구 형태로 설정된 위령탑은 현충원 등 다른 국립묘지에 설치된 하늘 높이 치솟은 위령탑과는 달라서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위령탑 주위에는 각명비가 들어서 있는데, 4·3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성명·성별·당시 연령·사망 일시와 장소 등이 당시의 마을 단위로 각명되어 있다. 각명비 사이에 설치된 상징조형물 귀천(歸天) 뒤편 계단을 오르면 위령광장이 나온다. 위령광장은 4·3희생자 추념식이 진행되는 공간이다. 그 너머 위패봉안실 앞에서 분향과 묵념을 하게 된다. 위패봉안실 뒤편으로 행방불명인표석이 있는데, 외진 곳에 있고,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제주4·3평화공원에 여러 번 다녀왔더라도 이곳은 가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표석에 설치된 ‘대전지역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


제주와 대전 사이의 아픈 인연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표석에서 만나는 ‘대전지역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 제주와 대전 사이에 어떤 아픈 인연이 있기에 이런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것일까?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정부는 이후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간주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던 초토화 작전에 들어갔다.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해변 마을로 내려오도록 했으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죽임당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가 불타 없어졌다. 이때 집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진 주민 중 상당수가 두려움 속에서 해변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고 더 높은 산간 지역으로 올라가 추운 겨울을 나야만 했다.


다음 해인 1949년 봄, 진압군은 선무공작을 진행했다. 산간 지역 피난민들에게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며 하산을 종용했다. 고통스럽게 한겨울을 보냈던 피난민들은 이 말을 믿고 하산길에 나섰다. 하지만 죄를 묻지 않겠다던 진압군은 이 약속을 어겼고 이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때 군법회의에서 249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한 장소가 정뜨르비행장,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이다. 이때 징역형을 받고 사형을 면한 사람들은 형기와 특성에 따라 육지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제주에는 그만한 사람들을 수감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2차 군법회의는 1949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총 10차례 열렸다. 당시 제2연대 연대장 함병선 대령이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호~18호’를 발령하며 제2차 군법회의를 진행했다. 이때 1949년 7월 2일에 25명, 7월 3일 75명, 7월 4일 200명이 7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제2차 군법회의에 앞서 1948년 12월 3일~27일 사이 12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던 1차 군법회의까지 합친다면 사형 384명, 무기 305명, 징역 1~20년을 선고받은 이들을 포함해 2,530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들 중 7년 형을 받은 300명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들 이외에 무기징역은 주로 마포형무소, 15년형은 주로 대구형무소, 7년 형을 받은 215명도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세 이하의 소년들은 인천소년형무소,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고향 제주섬을 떠난 이들 대부분은 7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표석에는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행방불명인표석은 행방불명된 지역에 따라 ‘대전지역’, ‘경인지역’, ‘호남지역’, ‘영남지역’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표석은 제주에서 행방불명된 이들까지 포함해 3,976기(2021년 10월 기준)가 들어서 있다. 표석의 높이는 4·3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43cm이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행방불명인표석은 찾기 어려운 장소이지만 제주4·3평화공원을 갔을 때 꼭 다녀왔으면 하는 장소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진행되는 합동위령제에 앞서 제주도 희생자 유족들이 제주도 식으로 별도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희생자 앞에 ‘행방불명’이 붙은 이유는 아직도 이들의 유해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유해없이 표석만 세워놓은 ‘헛묘’다. ‘대전지역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 뒤로 세워진 표석에 이름이 새겨진 이들은 1949년에 제주를 떠난 뒤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대전형무소 재소자 중 정치사상범 대부분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산내 골령골 학살은 1950년 6월 28일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어 매년 6월 27일마다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제주 희생자 유족들도 가족의 유해가 묻혀 있는 산내 골령골을 찾아 합동위령제에 참석한다. 제주 사람들은 합동위령제에 앞서 별도로 제주도식 위령제를 진행한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된 제주 유족회 양성홍 씨가 위령제에 참석해 눈물을 훔치고 있다.


300여명의 희생자 이름이 현수막에 빼곡히 적혀 있다. 300여명의 이름 속에는 1947년생 양성홍의 아버지 양두량도 포함되어 있다. 양성홍은 2~3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에 안겨 1948년~1949년 한겨울을 초토화 작전을 피해 산간 지역으로 피난 갔다가 내려왔다. 하지만 아버지 양두량은 1949년 7월 4일에 군법회의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양성홍은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져 아버지 얼굴도 기억할 수 없고, ‘아버지’를 불러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는 지난 2018년 위령제에 참석해 “3살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불러 보지 못했다”며, “위령제에서라도 ‘아버지’를 불러 보고 싶다”며,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면서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가해자는 현충원에, 희생자는 땅속 긴 구덩이 속에
제주 사람들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제주4·3사건의 가해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현실이다. 제주4·3사건 과정에서 초토화 작전과 군법회의 책임자였던 당시 제2연대장 함병선이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대전에 주둔했던 제2연대는 초토화 작전이 한참 진행 중인 1948년 12월 29일에 제9연대와 교대해 제주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제2연대장 함병선은 제주도계엄지구사령부 사령관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하면서 군법회의를 주관했다. 제주 4·3사건 단일 사건으로는 희생 규모가 가장 컸던 1949년 1월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부대도 제2연대였다. 제2연대 연대장 함병선은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으로 예편해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에 반해 4·3사건 희생자는 70여 년 동안, 대전현충원의 반대쪽에 위치한 산내 골령골의 땅속 긴 구덩이 속에서 누구의 뼈인지도 모른 채 뒤엉켜 있었다.


수만 명의 희생을 치르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다시 말하면 통일국가를 바랐던 제주사람들의 염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단독정부 수립을 막지 못했고, 분단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땅은 아직도 분단 상태와 전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청산, 학살 책임자 처벌과 함께 제주 사람들이 꿈꿨던 하나된 조국을 만들어 내는 통일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뜻을 이어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임재근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사무처장 겸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다. KAIST 산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후 통일운동과 통일교육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해 북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으로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와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가 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영동 노근리 등 평화기행 해설에 나서고 있다. 2021년부터 공주대학교에서 ‘북한의 이해’, ‘한반도 평화와 쟁점’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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