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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5

피스레터 No33_3 역사를 통한 평화 만들기_강화 평화마을 이야기 [기억과 평화] 강화 평화마을 이야기 역사를 통한 평화 만들기 강화지역 민간인학살과 갈등문화 확대 한국전쟁 당시 강화에서는 최소 1천 명 이상의 주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집단 희생되었다. 첫 번째로 인민군 후퇴 시기인 1950년 10월 초, 약 70명의 주민들이 내무서원(사회안전원) 등에 체포되어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인화성과 개성 송악산 등지로 이송되어 학살되었다. 내무서(사회안전기관)는 각 면의 분주소와 민간인 치안대가 체포한 약 3백 명의 주민들을 강화읍 산업조합 등지에 구금한 후 이들 중 일부를 인화성 등지로 이송한 후 학살한 것이다. 두 번째, 10월 초부터 12월까지 부역혐의로 경찰과 민간인 자치치안대에 의해 체포된 주민 수백 명이 강화읍 경찰서, 각 면 지서 등지에 구금되었다가 이 중 3백여.. 2023. 2. 16.
피스레터 No32_4 임재근_볕으로 나온 뼈들이 말을 한다 [기억과 평화] 볕으로 나온 뼈들이 말을 한다 -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유해 발굴 이야기 임재근 표정.. 땅속 뼈들이 말하고 있다 표정은 마음속 감정이나 정서 등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을 말한다. 표정은 입술이나 주름 등 피부를 통해 만들어 낸다. 그런데 피와 살이 흙 속으로 되돌아가고 단단한 뼈들마저 삭아 버렸지만, 산내 골령골의 차갑고 어두운 땅 속에서 흙을 뚫고 나온 두개골을 보고 있노라면 표정이 느껴진다. 고통스런 표정 또는 분노하는 표정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20여 일간 법적 절차 없이 충남지구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최소 1,800명 이상, 최대 7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집.. 2022. 11. 18.
피스레터 No31_4 임재근_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 국민을 죽인 정권 [기억과 평화]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 국민을 죽인 정권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하다! 임재근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 제주4·3사건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5·10단독선거를 거부하면서 증폭되었고, 여순사건은 제주 4·3 진압 출병 명령을 거부하면서 촉발되었다. 불안한 미래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대가는 참혹했지만, 그들의 거부는 항거였고, 항쟁이었다. 제주4·3사건의 여파로 군법재판을 받고 여러 육지 형무소로 이감된 제주 사람 중에서 7년 형을 선고받은 30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수백 명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이 대전으로 압송되어 임시군법재판소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6월 18일, 제주.. 2022. 8. 18.
피스레터 No30_4 임재근_산내 골령골과 여순항쟁 [기억과 평화] 산내 골령골과 여순항쟁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군인과 부당한 명령에 순응한 군인 임재근 제주 4·3항쟁에서 여순항쟁으로... 제주 4·3항쟁은 고립된 제주 섬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1948년 4월 28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 인민유격대장 김달삼 간의 평화회담이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을 핑계로 파기되었다. 당시 윌리엄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5월 5일 직접 제주도로 가서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제주도지사, 9연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등이 참석한 ‘9인 최고 수뇌회의’를 주재했다. 제주도에서 돌아간 다음 날인 5월 6일, 딘 장관은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김.. 2022. 5. 18.
피스레터 No22_3 이근향_평화를 생각하는 서로 배움의 공간- 노근리평화공원 [평화를 담은 공간] 평화를 생각하는 서로 배움의 공간 – 노근리평화공원 이근향 노근리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까지 5일 동안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하가리 및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 및 쌍굴 일대에서 미 공군기에 의한 공중 폭격과 미 제1기병사단 소속 미군들의 무차별적인 기관총 및 소총사격에 의해 수 백 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1950년 7월 23일 주곡리 마을을 비우라는 명령을 받은 주민들은 인근 산골마을인 임계리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7월 25일 저녁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500~600명을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하였고 날이 저물자 피난민들은 하가리 냇가에서 노숙을 하였습니다. 이튿날인 7월 26일 새벽 미군은 이미 퇴각하였고 피난민들은 4.. 2020.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