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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5

피스레터 No34_4 데이빗 벤바우_이 밤이 끝나기는 할까? [여우굴에서 온 편지] 이 밤이 끝나기는 할까? 데이빗 벤바우 여우굴에서 다시 긴 밤을 보낸다. 밤마다 DMZ 철책선 근처 여우굴에 앉아 있노라면 나의 생각은 천릿길을 헤맨다. 깜깜한 데서 아홉 시간을 앉아 누가 나를 죽이러 오지 않는지 살피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 보면 졸리고 때로는 겁이 나고, 늘 긴장이 되고 신경이 곤두선다. 지금은 지루하고 불안하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바쁜 것보다는 지루한 것이 낫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물을 한 통만 가지고 왔다. 더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포도 맛 쿨에이드를 물에 탔다. 야전 식량으로 나온 복숭아 캔이 있지만 야식으로 남겨둘 참이다. 주스를 마시고 복숭아 조각을 먹으면서 새로운 날로 달력이 바뀌는 걸 축하해야겠다. 그런데 이곳 모기는 방충.. 2023. 5. 18.
피스레터 No33_4 데이빗 벤바우_방탄조끼 [여우굴에서 온 편지] 방탄조끼 데이빗 벤바우 다음은 제가 DMZ의 경험을 생각하며 1995년에 쓴 시입니다. 방탄조끼 은백색 싸구려 사물함이 그의 1969년 주소로 배달됐다. 파병 기간이 끝이 나서 전역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우편료는 미군 본부가 부담했다. 사물함을 열어보니 예전에는 헐렁했지만 이제는 작아져버린 카키색 바지와 셔츠 그리고 보이스카우트 배지같이 생긴 훈장과 리본 같은 개인 물품이 보였다. 녹색의 잡동사니들, 초록 양말 아홉 켤레, 헤진 속옷, 손가락 없는 양모 장갑, 낡은 천막 반쪽, 허름한 판초 우의와 위장용 병장 계급장이 붙은 야전잠바도 보였다. 잠바 어깨에는 인디언 헤드 부대 마크, 가슴에는 임진 정찰대 약장이 붙어 있었다. 사물함 안에는 래커를 칠한 작고 검은 나무 상자 두 .. 2023. 2. 16.
피스레터 No32_3 데이빗 벤바우_ DMZ 여름밤의 기억 [여우굴에서 온 편지] DMZ 여름밤의 기억 데이빗 벤바우 어느 봄날 밤, 내가 여섯인가 일곱 살이었을 때 밤에 자다가 깬 적이 있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2층 침실 창문을 통해 어두운 뒤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심어진 노란색 개나리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그림자들이 춤을 추었다. 갑자기 무서워서 아버지를 불렀고, 잠옷 바람으로 오신 아버지는 창가에 앉으셨다. “아빠, 뒤뜰에 사람들이 있어요. 울타리 옆을 걸으면서 얘기하는 게 보이세요?” 내 말에 아버지는 “그냥 개나리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거야.” 하고 대답하셨지만, 나는 “깜깜한 밤이 무서워요.”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낮에 뜰에 없었던 것은 저녁에도 없어.”라고 안심시켰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놓여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이 들.. 2022. 11. 18.
피스레터 No31_3 데이빗 벤바우_친애하는 한국의 친구분들께 [여우굴에서 온 편지] 친애하는 한국의 친구분들께 데이빗 벤바우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한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데이빗 벤바우씨가 한국의 시민들에게 전하는 평화의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연재 제목은 ‘여우굴에서 온 편지’입니다. 여우굴이 뭘까요? 야전에서 군인 두세 명이 전투를 하기 위해 파는 구덩이를 보통 참호라고 합니다. 여우굴(Foxhole)은 군인 한두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만 판 참호로 주로 미군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벤바우 할아버지는 한국 DMZ에서 근무할 때 이 여우굴에서 해 질 무렵에서 동이 틀 때까지 보초를 섰습니다. 1968년 당시 DMZ 지역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벤바우 할아버지는 밤에는 여우굴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주변 숲에서 관측되는 움직임이나 소리 때.. 2022. 8. 18.
피스레터 No13_5 원마루_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친구 여러분!여름의 길목에서 인사드립니다. 어쩌면 벌써 봄을 건너뛰고 여름으로 향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네요. 먼저 드리는 소식은 박새가 알을 깐 소식입니다. 지난 3월 중순 막내 창호의 여섯 살 생일을 맞아 새가 알을 낳을 수 있는 상자를 함께 만들어서 숲속의 나무 위에 달았습니다. 나무상자에 지름 2.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어 나무에 달면 푸른 박새가 둥지를 틀수도 있다고 해서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아이와 함께 작은 나무판자들을 나사못으로 조여서 숲으로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자기가 쉽게 볼 수 있는 나지막한 곳을 고집하는 거예요. 새 보호 단체의 안내문에는 최소한 2미터 높은 곳에 달아야 박새.. 2018.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