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PDF)2019. 8. 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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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화|평화의 시대, 우리 아이들의 평화를 찾아서


김동엽|판문점 회동 이후, 희망과 과제


박정배|평양냉면, 서울냉면


박종호|평화를 향한 열정이 우리를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한다


정진헌|기억의 문화, 탈분단 도시의 열망


임요한|여러분이 맞았어요, 내가 틀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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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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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8. 16. 07:00

[이슈]

평화의 시대, 우리 아이들의 평화를 찾아서   

정진화

 

평화의 시대에 청소년들은 안녕한가?
도무지 뚫릴 수 없는 철옹성같던 남북미 관계가 작년부터 놀라운 반전과 진전을 보여주고 세계의 주목을 받는 한반도의 평화 시대가 오고 있다. 식민지와 전쟁에 멍든 기성세대와 달리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인 청소년들의 일상은 그래서 얼마나 더 평화로울까. 어른들은 하루 8시간 노동, 주 52시간 노동이 정착되어 간다는데, 학생들은 학교 수업 끝나면 서둘러 저녁도 잘 못 먹고 학원 갔다가 한밤중에 돌아오는 일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 자유학년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중학교 1학년은 시험으로부터 자유롭고 진로탐색 할 여유시간이 늘어났다지만, 학원 가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활동도 하고 방과후 활동도 하면서 놀다가,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족들과 이야기도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텔레비전 보고 인터넷도 들여다보면서 숙제하고, 읽고 싶은 책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잠들기에도 저녁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현재의 직업은 머잖아 대부분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될지 불확실하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한 사실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2017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초중고 학생들의 수면시간을 조사하였는데, 6시간도 안 자는 중고생이 50.1%, 고등학생은 41%나 되었다. 이전의 세대보다 청소년들은 더 불평등한 사회에서 못 자고 못 쉬고 공부만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다 해 줄게. 그저 공부만 잘하면 돼”라는 압박에 많은 청소년들은 자신을 성적순에 따라 이미 불행하고 망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이명박정부 초기에 청소년들이 거리에 나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라고 외쳤던 목소리는 불행히 지금도 유효하다. 2009년에 학교생활만족도가 24.3%에서 2019년 38.0%로, 삶의 만족이 26%에서 43.2%로 늘었다는 데에 안도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도시와 농산어촌에 사는 청소년들의 다른 일상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다른 일을 해보거나 한눈을 팔고 세상을 두리번두리번 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도시의 청소년들이 학교 밖에 갈 데라고는 노래방과 피시방이 고작이다. 돈 있으면 쇼핑 하거나 영화를 본다. 얼마 전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우리 모두에게 생각해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 드라마는 상류층의 학업에 대한 엄청난 집착과 고도의 학업관리가 아이를 몰아세우고 가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준 수작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드라마를 다 본 어느 부모들은 우리도 저렇게 코디를 수십억 들여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 못해서 우리 아이가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니 같은 드라마를 봐도 어쩌면 이토록 다를까. 누구를 탓하랴. 

도시의 청소년들은 학업 부담과 시험에 시달리면서 학교와 학원 외에는 다른 곳에 갈 기회도,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 공부는 흥미롭고 인간과 세계,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예민하고 여유가 없으며, 누가 뭐라 하면 날카롭게 반응하고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풀어 학교폭력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리를 지어 조금 다른 친구를 은따 시키거나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엎드려 있거나 심지어 집안에 은둔해있는 청소년들도 있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청소년들이 줄어들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현상에 교사도 학부모도 당혹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오늘날 만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입시경쟁과 학교폭력, 사교육의 번창과 같은 흔히 말하는 교육문제들은 주로 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농산어촌에서는 한 반에 몇 명 되지 않고 학급 수도 작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이름과 가정형편까지 교사들이 잘 안다. 학원이 없어서 늦게까지 다닐래야 다닐 수도 없다. 학교의 도서관과 시설도 잘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신의 생활이 답답하고 뒤처져 있고, 별 볼일 없다는 생각에 도시로 갈 기회를 꿈꾸며 탈출하려고 한다. 돈 벌러 도시에 간 부모를 기다리며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상당수가 조손가정과 다문화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자기도 언젠가 떠날 수만 있다면 도시로 떠나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도시로 가면 어떤 미래가 그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다행히 올해 귀농귀촌 하는 젊은이들이 늘었다는 기사는 도시의 한계를 드러내며 농촌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짐 로저스의 이야기를 빌지 않아도 21세기 첨단산업이자 4차 산업혁명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 농업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깨달음, 인정과 대화
학생들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중한 존재이며 삶이란 누리고 살 만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고 해보는 일이 많아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마. 공부만 해. 나머지는 내가 다 해 줄게.”하는 어른들의 말이야말로 청소년들을 매우 힘들고 무기력하게 하고 삶의 의미와 성취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 말고는 어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 밧줄로 책상에 묶여있는 신세나 다름없다. 

늘 바빠서 쫓기듯 사는 청소년들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도전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부모와 교사들이 기다려주고 믿어주며 아이가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가도록 인정해준다면 관계는 편안하게 이어질 수 있다. 힘든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 청소년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판단해도 어른들이 단정하여 야단치지 말고 “왜?” 그런가를 묻는다면 뜻밖의 답을 들을지도 모른다. 집안일도 같이 하고 요리도 하고 심부름도 보내고 가족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주관적인 행복지수가 내내 꼴찌인 것은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부족하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즐겁게 일 하는 아이들, 평화로운 마을공동체 
학생들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시킨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제가 하고 싶어서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어 집중하여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면서 한다. 

이전에 내가 있던 중학교에서 청양으로 하루 농촌봉사활동을 떠난 적이 있었다. 버스 두 대로 80명 모집을 했는데, 하루 만에 마감이 되었다. 주변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과연 힘든데 가려고 할까 하는 우려를 했는데, 왠걸. 수업을 빼먹고 간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아이들은 신이 나서 서로 일하러 가겠다고 했다. 특히 활동적이고 가만히 있지 못하여 야단을 많이 맞는 학생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미리 청양의 농민단체와 이야기하여 열 집을 신청 받아 학생들이 여덟 명씩 한 모둠을 이루어 들어갔다. 비닐을 제거하고 고추를 따고, 콩 껍질을 까고, 무거운 물건을 날랐는데, 학생들은 교실에서보다 훨씬 집중하여 일하고 참 즐거워했다. 중간에 새참을 먹고 웃으며 장난치다가 다시 일을 하고, 저녁은 음식점을 전세 내다시피 하여 시끌벅적 맛있게 먹고 올라왔다. 교실에서는 천덕꾸러기처럼 수업 방해하고 교사에게 대들던 학생들이 거뜬하게 일하며 기뻐하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작년에는 예산의 사과농장에 가서 사과를 땄다. 흠을 내면 안 되니까 사과는 조금만 따고 상자를 사과나무 아래 나르는 일을 한참 했다. 중간에 사과는 원 없이 먹고 나중에 한 봉지씩 싸줘서 선물까지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한참 일하다가 힘들었던 한 학생은 “학교 가고 싶어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라고 말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학생도 자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많은 대안학교에서 노작교육을 하고 농산어촌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일을 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연을 닮는다. 언젠가 변산공동체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 둘을 보낸 적이 있다. 그 아이 둘 다 거기서 농사일 하며 제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바느질도 하고 흙집도 짓고 빨래도 하면서 지리산도 가고 계절학교도 진행하였다. 그 애들은 상처를 딛고 제 앞가림을 하면서 남다른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고 있다. 자연 속에서 땀 흘리는 농사일이 이처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워주었다고 생각한다.

올해 봄에 상영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도시에서 상처받은 젊은이들이 농사일도 하고, 맛있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만들어 먹으며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자신을 회복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야기이다. 싱싱하고 풋풋하고 맑고 밝은 자연 속에서 이웃과 나누며 사는 평화로운 마을공동체가 우리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희망찬 터전이고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반도 평화의 봄이 오듯이,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농사를 지으며 먹을 것을 해결하고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평화마을을 꿈꾸어본다.

 

어린이들의 모내기 - 출처 : 피스레터 통권8호_학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심은보


정진화ㅣ빛고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교육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청소년들이 행복하게 웃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청소년문화연대 킥킥을 만들어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평화마을만드는사람들 모임에 참여하여 파주에 첫 삽을 뜨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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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8. 15. 08:00

[한반도평화읽기]

 

판문점 회동 이후, 희망과 과제

 

김동엽

 

사상 첫 남북미 판문점 회동이 있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잠시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질 것 같았던 북미 정상 간 만남은 1시간 가까운 대화로 이어졌다. 사진 한 장 남길 것 같았던 상봉은 2~3주내 북미 실무회담 재개라는 성과까지 도출했다. 무언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던 기대와 희망이 가득했건만 북미 실무회담조차 언제 열릴지 깜깜 무소식이다. 말은 풍년인데 실제 수확된 것은 없다. 한미연합 연습은 계획대로 실시되었고 이를 핑계로 판문점 회동 이후에만 북한은 5차례 미사일과 방사포를 쏘아 올렸다. 2018년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 한반도의 시계는 2017년 11월 29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을 발사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한반도 평화는 살아있다...
2019년 한반도는 지난 2018년을 생각하면 평화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대와 달리 북미대화가 정체되어 있고 남북관계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연일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소식이 끊이지 않았던 2017년 이전을 떠올리면 지금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말은 언감생심이다. 어려웠던 시절 생각은 못하고 희망과 욕심이 큰 탓인지도 모른다. 2018년 남북이 함께 만들어낸 ‘판문점 선언’과 ‘평양선언’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중한 선물이었다.

지난 1년여를 되돌아보자. 2018년에만 정상 간의 만남이 세 차례나 이루어졌다. 남북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 남북을 오가는 모습과 도보다리 환담 장면, 문대통령의 평양 시민을 향한 연설이 전한 감동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양 정상은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천명하고 남북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완화와 전쟁위험 해소,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나갈 것에 대해 합의했다. 남북한 주민들이 삶 속에서 70여년의 전쟁의 공포를 떨치고 비로소 평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1년 사이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싱가포르/하노이)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남북 정상의 만남이 남북관계 복원과 정상화를 넘어 비핵화 협상과 북미관계 정상화 과정을 추동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북관계는 이제 더 이상 북핵문제와 북미관계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는 길라잡이다.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를 뒷받침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여는 열쇠와 같다.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간 협상 동력을 유지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버팀목임엔 틀림없다. 

비록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의미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하노이 이후 우리 정부의 노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북한으로부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까지 굴하지 않았던 끈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남북미 판문점 상봉이라는 명장면이 가능했다. ‘판문점 선언’ 이후 시간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 가는 노력의 과정이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반도 평화번영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길고 험한 과정인 만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먼 길, 오르막의 시작점에 서다.
우리 속담 중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단련이 되어 더 강해진다는 뜻이다. 쉼 없이 내달릴 것 만 같았던 남북관계가 경사가 심한 오르막 앞에 다다랐다. 통일각 2차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먼 길을 떠나오며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닐 것이다. 판문점 선언 이후에도 수많은 장애물을 넘고 오르막을 올랐다. 그러나 진짜 오르막은 지금부터이다. 오르막에 오르기 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그 동안 남북이 서로를 얼마나 생각해 왔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해 ‘판문점선언’ 전후 남북관계가 달라졌다면 이제는 판문점 상봉을 기점으로 또 한 번 달라지고 진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적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지난 시간 하고자 한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간극이 컸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기충족적 예언은 실현 가능한 정책과 전략수립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벤트성 해법과 단기적 치유법에는 한계가 있다. 남북관계가 먼 길이라면 정치적 고민을 앞세워 가시적인 성과에 연연하거나 급급할 필요는 없다. 

판문점 회동으로 북미 간 대화 채널이 다시 열렸다고 남북관계까지 정상화됐다거나, 우리의 중재자 역할이 복원됐다는 당위론은 우리의 희망일 뿐이다. 중재자 역할에 대한 미련과 집요함보다 냉정하고 신중하게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를 만들 담대함이 필요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북한의 변화와 선택을 염두에 두고 남북관계의 자율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노력과 함께 정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깨동무’ 할 용기
판문점 만남 이후 한반도 정세는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중요 정치 일정으로 9월 유엔총회가 열리고, 10월 1일 중국 건국 70주년과 10월 6일 북중 수교 70주년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이 방중 해 북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그 이전 북미실무회담이 열린다고 당장이라도 북미정상회담이 먼저 열릴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9월 평양선언에 합의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답방으로 4차 남북정상회담도 가능성이 열려있다. 시진핑 주석의 서울 방문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북한을 향한 일본의 움직임도 지켜봐야 한다. 11월에 교황이 일본을 방문하는 만큼 북한 방문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대한 국면의 해결을 위해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향후 많은 정치 일정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어떤 순서로 진행되어야할지 상상력을 발휘해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그러나 상상력과 공상력은 다르다. 특히 외교와 안보의 영역은 상상력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여기에 머물러 있고 지금까지도 금강산을 다시 가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촛불을 밝힌 것도 상상력이 아니라 시민들의 용기였다. 이제 정부차원의 일방적 Top-down만을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민간차원의 남북관계 재정립을 위한 Bottom-up 접근 방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남북이 당사자로서 한 번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용기가 아닐까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오르막은 조금 힘들어도 남북이 어렵게 잡은 손 놓지 않고 분단 않을 용기를 가진다면 너끈히 이겨낼 길이다. 아무리 어렵고 험한 길이라도 남과 북이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갈 수만 있다면 정말 즐겁고 행복하지 않을까? 

 

 

남북미 판문점 회동


김동엽ㅣ현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며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방부/통일부/해양수산부 정책자문위원과 북한연구학회 총무위원장을 맡고 있다. 북한군사와 국방안보문제 전문가로 연구와 함께 대중강연과 언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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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8. 14. 08:00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평양냉면, 서울냉면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차가운 국물에 면을 말아먹는 음식문화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음식 문화와 온돌의 뜨거움과 여름 더위를 견디기 위해 찬 육수에 국수를 말아먹는 냉면이 탄생한 것이다. 2018년은 몇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뜨거웠고 차가운 냉면은 주연급 조연으로 한민족은 물론 전세계인의 이목을 받았다. 서울의 냉면집들도 덩달아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근 들어 북한 이탈 주민들의 냉면집 창업도 이어지고 있다. 평양의 냉면 문화는 건재하고 서울의 냉면 문화는 세련되고 다양화되었다. 평양냉면에 견줄 실체가 서울냉면으로 구축되었다. 

해방 전까지의 평양냉면
한민족 최초의 냉면 기록은 조선 중기의 문인 장유(張維, 1587~1638)의 문집인 『계곡집』(谿谷集, 1643)에 실린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紫漿冷麵)라는 시에 처음 등장한다. 정약용은 「장난 삼아 서흥 도호부사 임군 성운에게 주다(贈瑞興都護林君性運), 그때 수안 군수와 함께 해주(海州)에 와서 고시관(考試官)을 하고 돌아갔음」(1797년)이라는 긴 제목의 시에 '시월 들어 서관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이중 휘장 폭신한 담요로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냄비에 노루고기 전골하고, 무김치 냉면에다 송채무침 곁들인다네'라는 시에서 평안도의 냉면 풍정(風情)을 적었다. 1849년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시풍속집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 국물에 말고 돼지고기와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또 여러 가지 채소,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 썬 것, 기름, 간장을 국수와 섞어 비빈 것을 ‘골동면’이라 부른다. 관서지방의 냉면이 가장 맛이 있다.'고 적고 있다. 관서(關西)는 평안도 지역을 말한다. 지역은 물론 내용에서도 여기 언급한 냉면은 분명 평양식을 지칭한다. 

 

평양냉면

19세기 말 평양냉면집에 관한 기록은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한다. '밤에는 대동문 옆에 가서 면을 먹었다. 처음에는 주점 주인이 주는 대로 소면(素麵)을 먹다가 나중에는 육면(肉麵)을 그대로 먹었다. '(『백범일지』 1899년 5월) 19세기 말에 평양 대동문 주변에 냉면집들이 제법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19세기 후반의 평양 모습을 그린 회화식 지도인 기성전도(箕城全圖)에는 대동문 옆 동포루(東砲樓) 앞에 '냉면가(冷麵家)'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 옥류관과 그리 멀지 않은 대동강변 성 안쪽이다. '평양냉면은 특히 평양의 명물인 바 부민식료(府民食料)중 제일 중요한 부분을 점령하였으니 ‘평양냉면’이라는 것은 사시1년을 공통으로 식용한다. 그에 따라서 연산액(年産額)도 상당하니 실로 50만 원에 달한다.'(동아일보, 1926년 9월 11일자) 

1936년판 <평양상공명록>에 등재된 평양냉면집들은 16곳이다. 1940년판 <평양상공명록>에는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의 회원이 60명으로 나온다. 1937년 8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평양부 내에 “80여 냉면업자는 일제히 냉장고를 사용하도록 엄달할 터이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평양상업조사(1939년)에는 평양의 전체 음식점 578개 가운데 냉면집이 127개로 22%를 차지 하는데 단일 업종으로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9월 1일자 <개벽> 잡지에는 ‘평남은 냉면국’이란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해방 이전에 평양냉면에 관한 기사는 제법 등장한다. '냉면이란 어디 것 어디 것 합니다마는 평양냉면같이 고명한 것이 없습니다. 이곳 냉면은 첫째, 국수가 좋고 둘째, 고기가 많고 셋째, 양념을 잘합니다. 게다가 분량조차 많고 값조차 눅은싼데야 더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동아일보, 1926년 8월 21일, 「평양인상, 요리비판 평양냉면」)

'겨울에 평양냉면이라면 얼른 동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앉아 덜덜 떨면서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먹는 맛은 도저히 다른 데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무슨 특별히 담그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오. 평양은 물이 좋고 웬일인지 다른 지방보다 무 맛이 다른 데다가 일기가 차가우니까 한번 익은 맛이 변하지를 아니하므로 그 맛이 그대로 보존되어 씩씩한 맛을 잃지 않는 것뿐입니다.' (동아일보, 1926년 8월 21일)

분단 전의 기사를 보면 평양냉면은 순메밀면에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육수나 겨울에는 주로 동치미 국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분단 이후의 냉면에 대한 기록은 1960년 옥류관 건설 이전에는 찾기 힘들다. 이후 북한에서 옥류관은 '민족 료리의 원종장(原種場)'(로동신문, 2011년 2월 4일자)으로 평양냉면은 '인민이 사랑하는 민족 음식'이 된다. 평양냉면이 평양과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오랜 전통을 지닌 음식이었다. 둘째는 김일성과 김정일 위원장의 냉면 사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1995년 9월 21일자 로동신문에 실린 '고유한 민족 음식 평양랭면'이란 기사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최근에도 어버이 수령님(김일성)께서 생전에 평양랭면은 순메밀 가루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시였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바로 평양랭면의 특징이며 자랑이라고 가르치시었다. (중략) 고유한 민족 음식인 평양랭면은 메밀 껍질을 지내(너무 지나치게) 벗기지 말아야 구수한 메밀 냄새가 잘 풍기며 육수물도 시원하게 잘 만들어야 고유한 맛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먹을 때에도 식초를 국수 발에 친 다음 그것을 육수 물에 말아야 고유한 제 맛이 난다.' 당과 수령, 인민이 사랑하는 평양냉면의 지위는 평양냉면이 단순한 음식을 넘어섰음을 말해준다. 때문에 평양냉면은 남북정상회담의 상수가 되었다. 평양냉면은 해방이전과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1990년대 중반까지는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국물을 섞은 육수와 동치미를 사용하고 면발은 메밀을 주로 사용했지만 고난의 행군과 김정일 위원장의 감자 권장 정책에 의해 메밀에 감자나 고구마 전분이 섞인 냉면이 일반화되었다. 

 

서울냉면

 

서울냉면


서울냉면의 시작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19세기에 여러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서울의 냉면 역사는 오래되었고 평양과는 별도로 시작되었다. 18세기 무렵의 한양은 상업의 발달과 얼음과 쇠고기, 돼지고기가 일반화되어 냉면 문화의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유만공(柳晩恭, 1793~?)이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세시풍요』(歲時風謠, 1843)라는 시집에도 냉면이 등장한다. '냉면집과 탕반(湯飯), 장국밥집이 길가에서 권세를 잡고 있어, 다투어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마치 권세가 문전처럼 벅적인다.'고 적고 있다. 냉면하면 고종 임금이 유명하지만 순조 임금의 이야기도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88)이 중국과 조선의 사물에 관해 기록한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 「춘명일사」(春明逸史)편에는 순조 임금의 냉면 이야기가 나온다. 

‘초년(1800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순묘(純廟), 순조는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가지고 왔으므로 임금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 일은 측근 시신(侍臣)이 자못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다.’ 

19세기 말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지규식(池圭植, 1851~?)이 20년간 쓴 『하재일기』(荷齋日記, 1891~1911)에도 1895년 4월 12일, 20일, 24일 연이어 냉면을 먹은 기록이 있다. 19세기 말엽 냉면은 서울에서 매우 보편적인 외식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서울에는 무교동의 ‘혜천옥’, 관철동의 ‘평양루’ 등이 유명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북한 실향민들이 대거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 서울의 평양냉면집들은 평양에서 온 냉면 본가에게 맛에서 밀리고, 실향민들의 모임 장소로서도 북한 출신 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몰락하게 된다. 대한민국에 평양냉면이 다시 번성하게 된 것은 1972년 8월 30일에 이루어진 남북적십자 본 회담을 전후로 신문과 방송이 북한 관련 기사를 봇물처럼 쏟아내면서부터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실향민이 아닌 대한민국 출신의 셰프들이 냉면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온 실향민 중심의 평양냉면 문화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평양의 평양냉면이 식량난과 민족 음식의 정체성이란 기준의 한계에 봉착한 것과 달리 서울의 평양냉면은 여러 가지 냉면 문화가 공존하는 속에서 새로운 발상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육수의 전통인 양지육수를 기본으로 해방 이후 정착한 실향민 냉면에, 최근에 북한을 이탈한 주민들의 요즘 북한식 냉면까지 서울의 냉면은 다양하다. 최근 들어 메밀을 몇 가지 섞는 면발에 투플러스 쇠고기로 만든 국물과 꾸미를 장착한 완전히 새로운 미식 냉면이 연착륙하면서 이제는 서울냉면이라는 선언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 조성되었다. 평양 사람 서울냉면 먹고, 서울 사람 평양냉면 먹는 날이 어서 오는 즐거운 상상으로 더운 여름을 이기련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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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8. 13. 17:00

[평화의 마중물]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3)

평화를 향한 열정이 우리를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한다 

 

박종호

 

북아일랜드에 온 지 다섯째 날, 1월 17일, 코리밀라를 떠나는 날이다. 지난 밤 데릭 윌슨 교수님 집에서 받은 감동이 남아서일까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두 해 만에 다시 와 본 이 곳을 또 떠나야 한다. 아침을 가볍게 먹고 어제 댄 가즌 선생님이 소개한 평화축구(Peace Soccer)를 잔디밭에서 해 보기로 한다. 평화축구의 목표는 이기고 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우리 편 저쪽 편이 어디라도 잘하면 손뼉을 쳐 주어야 한다. 선수를 바꾸는 일도 자유롭다. 댄이 심판을 맡고 우리는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규칙은 서로 협력하고 또 협력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기고 싶은 마음은 숨기지 못한다. 드디어 내 발끝에서 흘러간 공이 상대편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손흥민 선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만세를 부르는데, 갑자기 상대방 선수들도 같이 달려와서 어깨동무를 하고 흥겹게 축하해 준다. 이겨야 한다는 마음보다 같이 좋아하는 운동이라니! 잠깐 충격에 사로잡혔다가, 마치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모두 참 잘 했다며 환하게 웃으며 이끌어 주는 댄 가즌 선생님과 둘러서서 웃으면서 축구를 마쳤다. 돌아가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평화축구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구도 공부도 모두 전쟁이고 이기는 사람만이 기억에 남고 진 사람은 패배자로 낙인찍는 세상에서 평화축구는 분명 큰 흔들림을 가져 올 것이라 생각한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사진을 찍느라 한바탕 웃고 떠들고 나서 짐을 꾸려서 떠날 준비를 한다. 

 

평화축구


데릭 박사와 김동진 박사의 안내로 데리 오크그로브(Derry Oakgrove)통합학교와 데리(Derry), 아일랜드 국경선 방문을 하려고 출발하였다.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 넘게 달려서 오크그로브 학교에 닿았다. 차에서 내려서 춥고, 미끄러운 터라 발을 조심해 가며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학교는 초등, 중등 통합과정으로 운영하고 있고, 한눈에 보기에도 시설이 참 훌륭해 보였다. 먼저 강당에 들어가서 안내를 받았는데 마침 오후와 저녁에 있을 연극 공연을 위해 공연 장비를 설치하고 있다. 전문가들 도움을 받아서 장비를 설치하는 곁에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방문한 우리들을 맞아 주려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눈다. 모둠마다 서너 명 학생들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우리가 던지는 질문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활기차고 유창하게 대답이 이어 나온다. 

잠깐 오크그로브 학교와 같은 통합학교와 통합교육에 대해서 살펴보자. 북아일랜드에서 통합교육은 신교도와 구교도의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서 이를 초등, 중등 교육에서 실현하자는 움직임으로 출발하였다. 서로 다른 종교와 가치관을 안고 자란 아이들에게 평화, 화해, 공존의 가치를 같은 공간에서 일상적인 만남을 공유하면서 익히도록 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와서 교육학자들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통합교육 운동이 번져나갔고, 2016년 현재 63개의 초,중등 통합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학교에 다녀야 할 어린이, 청소년의 7% 정도인 22,509명 정도가 통합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북아일랜드 통합교육위원회에서 학교 설립과 행정 지원, 교사 연수와 프로그램 지원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이후 오히려 흐름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전환학교, 공유교육 같은 흐름이 더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어제 밤 데릭 윌슨 교수님 집에서 만난 코리밀라 공동체 어른들은 모두 걱정하는 얼굴로 이런 흐름은 서로를 만나게 하고 통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분리하고, 쉽게 통치하려는 정치가들의 편의주의에서 나온 흐름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통합교육은 장애를 지닌 학생들을 일반 학교 교실에서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말이다. 북아일랜드에서 쓰는 통합교육과는 결이 다른 말인데, 보태어 말하면 우리나라도 남과 북이 다가 올 화해의 시대에 교육에서 바로 맞닥뜨려야 할 과제가 바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다가올 가까운 과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곳이 바로 북아일랜드 통합학교인 셈이다.)

다시 오크그로브 학교 학생들과 나눈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 방문단은 학생들에게 통합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만족하는지, 어떤 수업을 받고 있는지, 앞으로 대학에 가고 싶은지를 물었다. 고3 과정이고 ‘모범생’ 표시인 배지를 가슴에 두세 개씩 단 학생들은 정말 씩씩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수업 시간은 35분씩 10시간이고, 마지막 학년 학생들은 두 시간을 연달아 쉬기도 한다고 한다. 

“공부 말고 학생들 스스로 하는 것은 없나요?”
“학교의 학생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역사 수업 시간에 갈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배우고 있나요?”
“수업 말고 평화에 대한 활동, 방과 후 활동 같은 것을 하고 있나요?”
“앞으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요?”
“체육 수업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질문은 이어지고 학생들 대답도 바로 나왔다. 내가 던진 역사 시간 수업에 대한 대답을 옮겨 본다. 

“고학년(고등 과정) 역사 수업에서 남북 아일랜드의 갈등 역사를 배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랐기 때문에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나이가 좀 들어서 이 갈등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교육 내용을 묻고 싶었는데, 다음 일정 안내가 나오는 바람에 여기서 멈추었다. 대답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서 우리 교실 학생들 표정이 자꾸 겹쳐 떠오른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고등학교 3학년들에게 이런 여유가 넘치는 표정을 보는 날은 어쩌다 가끔 정말 드물게 만난다. 아, 졸업식 날은 밝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어지는 대화는 놓치고 말았다. 처음 이 학교에 들어 올 때 학생들을 위해서 사진 촬영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어느새 우리 선생님들은 학생들 그림이 그려진 벽이며 내용들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학생들도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을 같이 찍어 준다. 이 학교는 북아일랜드에서 대학 진학하는 학생들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하고, 학생들도 자부심이 대단해 보인다. 북아일랜드 통합학교가 모두 이 학교처럼 운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그래서 이곳 교육자들도 고민이 깊어 보인다. 

 

통합학교 방문 모둠 활동 


오크그로브 학교를 나와서 간 곳은 아일랜드 국경선이다. 국경선 하면 총을 든 남북의 병사들이 말없이 마주 보고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아일랜드 국경선은 좀 싱거운 곳이다. 그냥 남북으로 이어진 길에 차들이 씽씽 달리고 그 한켠에 여기가 남북을 나누는 경계선이라는 표지만 덜렁 서 있다. 우리는 그래도 사진은 남겨야 한다며 달리는 차들 옆에서 조심조심하면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브렉시트’ 이후 다시 이 국경선에 장벽을 쌓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총길이 499km, 도로만 275개, 날마다 국경선을 넘어서 출퇴근하는 사람 3만 명, 여기에 다시 장벽을 세우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다시 장벽을 마주하고 대결의 시대로 돌아 갈 수는 없다. 

국경선 근처에서 있었던 슬픈 역사 이야기를 듣다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러 음식도 나눠 먹었지만, 기네스 생맥주를 높이 들고 평화를 위해 건배하는 일은 빼먹지 않았다.

 

데리 성벽 위해서 시내를 바라본 모습 


우리는 점심을 먹고 바로 버스에 올라 데리 방문에 나섰다. 2017년에 왔을 때 데리에서는 하루 묵으면서 천천히 걸어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고, 이곳에서 평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기도 했다. 오늘은 저녁 일정 때문에 서둘러서 17세기에 만들어진 데리 성벽을 걸으면서 1972년 1월 30일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성벽 아래 건너다보이는 벽화와 상징물, 그리고 성벽 뒤편 현대적인 건물로 가득한 런던데리(영국) 마을을 대비하면서 1998년 평화협정 때까지 3천 5백여 명의 사망자와 더 많은 부상자를 남긴 대립과 갈등의 상처를 눈으로 보았다. 놀라운 것은 그 대립과 갈등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평화와 화해를 염원하고 있고 다음 세대들이 이 역사의 현장에 와서 그렇게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느껴보기를 바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데리 시내를 걸어서 도착한 곳은 포일강 양쪽을 이어주는 피스 브리지(Peace Bridge), 다리 이름처럼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남쪽과 북쪽이지만,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오가면서 오랜 시간이 덧쌓여서 조금씩 갈등과 대립이 풀려가는 꿈. 그 꿈의 현장이기도 했다. 다리 한 가운데서 다 같이 사진을 찍고 다시 벨파스트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벨파스트에 돌아와서 한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집 떠나오면 집밥이 그립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한 편이라 허겁지겁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저녁 책잔치에 쓸 꽃다발을 구하러 거리로 나섰다. 

오후 7시, 벨파스트 코리밀라 사무소에서 평화 책잔치(Book Concert)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시민사회(The Korean Peace Process and Civil Society, 김동진. 2019.)가 시작되었다. 좁은 공간이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 박사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김동진 박사와 같은 대학에서 동료로 일하는 미첼은 아일랜드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와 연구에 매진하는 김 박사를 칭찬했고, 다른 연구자는 할 수 없는 전문성 깊은 성과를 이렇게 출판해서 평화프로세스와 시민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소감을 말하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다룬 주제, 한국에서 지속된 평화구축 과정을 다루고, 어린이어깨동무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노력을 다룬 점, 평화학의 개념을 잘 소개하고, 적용하려고 한 점에서 크게 기여하였다고 말했고, ‘교수들은 정작 책을 많이 읽지 않는데, 이 책은 꼭 읽을 만하다.’고 말을 맺었다.

 

책잔치 모습 


김동진 박사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란 말을 연거푸 하면서 감격스런 표정을 짓고는, 코리밀라 식구들, 트리니티 컬리지 학생들, 서울에서 온 어깨동무 선생님들을 불러주었다. 책을 쓰면서 아일랜드와 한반도를 나란히 올려놓고, 더욱이 ‘한국을 잘 모르는’ 서양의 학자들에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영어로 말하고는 다시 서울에서 온 우리를 위해 우리말로 다시 말하고, 통역을 맡아 준 댄 가즌 선생님에 대한 칭찬도 했다. 마치면서는 ‘책 바우처’를 선물로 나누어 주기도 하셨다. 

이어서 질의응답이 이어지고, 마치기 전에 데릭 교수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때로는 즐겁지만 고립되고 힘든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를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헤어지기 전에 한 문장씩 나누자.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들어도 어떤 것이 우리가 지치지 않고 일을 하도록 하는 힘이 되나요?’ 물으셨다.
 
어린이어깨동무 김윤선국장이 먼저 답을 했다. ‘안녕, 친구야!’ 어깨동무에서 즐겨하는 인사말을 소개하면서 남북의 어린이들이 만나서 친구가 되자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알시티(R-city)를 이끄는 알란이 말을 받았다. “저는 평화를 위한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이 없으면 금방 지칩니다. 저는 청소년들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 열정을 보고, 그 열정이 저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한국에서 온 분 누가 더 말해 줄래요? 그러면서 데릭은 나에게 눈짓을 보내왔다. 나는 엉겁결에 일어서야 했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을 선생님들과 같이 해 왔고, 그 인연으로 이번에 두 번째로 북아일랜드에 왔습니다. 헌신적이고 활동적인 여러분들을 만나서 반갑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한반도 평화가 오기까지 그날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남과 북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운동에 힘껏 참여하겠습니다.” 버벅대며 자리에 앉았다. 

책잔치는 근처 펍으로 옮겨서 뒤풀이(미첼 교수는 한국에서 온 분들을 위해 순서에 넣었다고 했다.)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신기하게도 아일랜드 분들은 딱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났고, 남은 기네스는 나와 몇 사람이 독차지 했다.ㅋㅋ 호텔로 돌아와서 댄 가즌, 심은보, 김경옥 선생님과 같이 맥주를 더 마셨다. 최관의 교장선생님 지갑을 좀 털었는데, 다음날부터 꽤 오래 시달릴 만한 일을 저지른 셈이다. 벨파스트에서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더블린으로 가야하고, 가슴에 남은 감동도 안고 가야 한다.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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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8. 13. 10:00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기억의 문화, 탈분단 도시의 열망

 

정진헌

 

베를린은 “기억의 문화(Erinnerungskultur, the Culture of Remembrance)”를 체험할 수 있는 글로벌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과거에 대한 기억의 흔적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분단 국가에서 온 한국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교훈과 열망들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억의 문화와 탈분단 도시의 열망이라는 주제를 함께 나눌까 합니다. 마침, 지난 편지 이후에 베를린을 방문해 주신 분들과의 만남이 이 주제와 딱 맞는 듯합니다.

기억의 문화는 위에 적었듯, 독일어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개념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나 사회가 과거의 유의미한 사건과 상황을 집단의 의식속에 간직하고 지속적으로 환기 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실천들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문화”라는 개념에서 이미 개인적 개별적 기억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이 서로 동의하는 기억이자 과거이며, 그것을 외화시키는 방법도 다수가 동의하는 방법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의 가해국인 독일에서의 기억 문화는 홀로코스트, 즉 나찌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문화와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는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유대인 학살 추모비가 눈에 자주 띕니다. 

나찌의 인종 청소 희생자들은 약 1천7백만명에 달합니다. 그 중, 유대인이 약 6백만여 명이고, 그 외 1천만 명이 넘는 희생자들은 소비에트 국민들, 폴란드인, 성소수자, 루마니아계 유목민(과거에 집시라 불림), 장애인 등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나찌 전범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법정에 세우고, 학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역사로 삼고 있으며, 각종 추모비와 추모공원의 건립 등을 통해 정부 차원의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시민 개개인들도 자체적으로 나찌의 치욕적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노력들을 외화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억의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지난 5월말에는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4.16연대 예술가분들이 함께 베를린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답사 마지막 행사로 윤이상하우스에서 기억과 치유를 위한 토크 &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추모공간 형성 과정과 의미를 교민들과 공유하고, 음악가들의 감성적 공연이 어우러졌습니다. 그리고 송두율 교수님의 기억문화에 대한 발제를 바탕으로,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생명안전공원 건립에 유의미한 토론을 함께 가졌습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억과 치유를 위한  평화 토크 & 콘서트 포스터 

 

우리는 베를린 현장을 통해, “기억의 문화”라는 개념이 이미 개별적 기억과 사회적 기억, 그리고 피해자의 기억과 국가 권력의 기억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내포한다는 점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차이를 좁히는 일은 “기억 투쟁”이라는 송교수님의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실제로 베를린에서 정부 차원에서 크거나 작게 조성한 홀로코스트 추모 공원이나 추모비들은 “추상적” 조형물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해자”인 익명적 독일 국가체의 죄의식을 지속적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에, 베를린과 독일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걸림돌(Stolperstein)은 “피해자” 개개인을 호명하며 기억하려는 의지의 발현입니다. 

이는 한국의 과거사 진상규명 운동이나,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의 최대 장애물인 일본의 사죄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국가 폭력에 의한 죄는 추상적 형상물과 공간을 통해 잘못의 반복을 경계하는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피해자 개개인들의 기억을 호출하고 지속적으로 각인하는 실천과 만났을 때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과를 상징할 만한 형상물이 없다면, 그 죄에 대한 형별은 자칫 희생자 개개인들에 대한 개별적 금전 보상으로 치환,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희생자 개개인들의 이름과 삶을 호명하는 걸림돌(Stolperstein)같은 예술적 형상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기억 투쟁은 희생자 개개인들 중심으로 벌이는 종합 예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기억의 문화란, 희생자들의 역사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에 지속적으로 재생되는 세대간, 인류 간 소통의 과정인 것입니다. 

더불어, 기억의 문화는 미래지향적 열망을 지향합니다. 나찌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되새기면서, 그와 동시에 아직 분단 국가의 국민인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는 베를린 기억의 문화 중 하나는 바로 장벽입니다. 전쟁에 대한 형벌로써 독일은 분단되었습니다. 일본 대신 분단된 한반도와는 다른 분단의 동기입니다. 분단에서 통일로 나아갔다고 해서, 분단의 원인이 되었던 무자비한 학살과 전쟁의 죄과가 모두 소멸된 건 아닙니다. 죄의식에 벗어나 다시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을 호소하는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정당)이 마침내 의회에 입성했지만, 그렇다고 죄의식을 되뇌이는 기억의 문화를 뒤집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독일 내적 역동성과 갈등을 잠시 뒤로 미룬다면, 통일 독일을 가장 부러워하는 외국인들은 아마 한국인들일 것입니다. 더욱이 올해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라, 독일에서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탈분단의 기억을 축하하고, 통일 국가의 미래상을 열망하기 위해 한국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베를린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지난 7월말 베를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부터 포츠다머 플라츠까지 평화 마라톤을 한 문경에서 온 열다섯 명의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 장벽이 설치되었던 흔적을 가로 질러 달린 후,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현지 북패가 함께 어우러져 브란덴부르크까지 이어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길놀이의 깃발수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전 요청이 있었던 터라, 학생들과 행사 후 만남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중 나라와 나라 사이를 육로로 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하루 종일 고생한 학생들이 잠시 고민해 봅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런던까지만 비행기로 오고, 런던에서 파리, 파리에서 베를린은 모두 기차로 이동했던 기억을 되살리더니, 다들 손을 듭니다. 

“여러분은, 유럽 대륙에서 탈경계의 경험을 해보았어요.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동서를 나누었던 장벽의 흔적을 가로 질러 달리며, 탈분단 역사와 문화 또한 몸소 체험한 셈이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한반도의 휴전선을 가로 질러 달리는 통일 마라톤을 하게 되리라 믿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탈분단을 경험한 최초의 세대가 되는 거군요!”

길거리 식당에 앉아 케밥으로 허기를 달랜 후 피곤이 솔솔 밀려올 즈음인데, 학생들의 눈망울이 다시 초롱초롱해 집니다. 우리는 내친 김에 훔볼트 대학까지 걸어 가서, "철학자들은 세상을 오로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라는 칼 맑스의 명언까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한반도 평화통일 길놀이


우리는 몇 년 전 이 또래 청소년들을 허망하게 잃은 슬픔의 기억을 안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베를린을 통해 한국만의 기억 문화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영감을 얻었다면, 문경 청소년들의 가슴에는 탈분단 문화에 대한 열망이 싹 틔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열망”은 개인마다 간직한 꿈에 머물지 않습니다. 낯선 도시를 경험하면서, 다른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서로가 동의하는 공동의 비전을 찾아 나가고, 그것을 실천하는 서로의 노력과 과정이 바로 열망의 문화입니다. 

어깨동무 친구들이여,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고, 희생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는 속에서, 우리를 얽매이고 있는 분단의 문화를 걷어내고 보편적 평화를 구현할 미래를 열망합니다. 그 기억과 열망의 문화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어깨동무”하기로 약속하며, 베를린에서 보내드렸던 그 동안 편지를 마칩니다. 

“안녕, 친구야~~!” 

 


정진헌ㅣ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로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 (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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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8. 12. 19:49

[좌충우돌 교실이야기]

 

여러분이 맞았어요, 내가 틀렸어요

 

임요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고, 학생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수업은 학생 중심으로 하되 학생 활동 시 학생들 사이를 순회하며 관찰하다가 학생들이 논의의 방향을 잡지 못한다든지, 학생들의 논의가 학습 목표와는 다른 엉뚱한 쪽으로 전개될 때에는 즉각 개입하여 옳은 방향으로 학생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배웠다.

오랜만에 학급 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체육대회 우리 반 반티 선정’. ‘나는 학생들의 자율권을 존중하고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 조력하며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학급을 운영하는 담임 교사이므로’라고 쓰고 ‘급히 처리해야 할 공문이 있어서’라고 읽는다. 어쨌든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무조건적으로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하니까, 반장을 중심으로 여러분들끼리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토론해서 잘 정해보세요. 제가 있으면 여러분이 불편할 수 있으니까 저는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교무실로 뛰어 올라와 긴급한 공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학급 회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반장이 교무실로 와서 

“선생님, 저희 반티 결정했어요.”
“응, 뭐로 하기로 했어?”
“이걸로 하기로 했어요.” 
라고 하며 반장은 스마트폰으로 태권도 도복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 뭥미? 이게 반티야?”
“네, 아이들이 이게 제일 좋다고 했어요.”
“모두가 이걸 원했어? 일부 아이들이 막 이쪽으로 의견을 몰고 간 거 아니야?”
“아니에요 선생님, 아이들이 전부 이게 제일 좋다고 이걸로 하자고 했어요.”
“그래? 일단 알겠어. 선생님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따 이야기 하자.”
“네, 선생님.”

반장이 내려갔다. 내가 전에 근무하던 시내 고등학교(남학교)는 모든 반의 반티가 축구팀의 유니폼이었다. 내가 그동안 맡아왔던 반들도 반티로 축구팀 유니폼을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마다 내가 생각한 건 ‘아이들이 개성과 창의성이 없다.’였다. 온 학교의 반티가 죄다 유럽 프로 축구팀 유니폼 일색이니…….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반티가 태권도복이라고? 이걸 입고 어딜 다니지? 축구 유니폼은 개성은 없어도 축구할 때나 학교 체육 시간에 입을 수라도 있다. 하지만 이건 체육대회 당일 한 번 착용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이걸 2만원이나 주고 살 필요가 있나? 이건 아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종례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 번 입고 옷장에 넣어둘 옷을 2만원이나 주고 사는 것은 낭비이다, 우리 부모님께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시는데 우리가 그런 소비를 하면 안 된다, 체육대회 때도 입고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반티를 맞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반티라는 것이 꼭 반티를 파는 웹사이트에서 사야만 반티가 아니다, 청바지에 흰 면 티셔츠라도 우리 반끼리 콘셉트를 맞추어서 깔끔하게 입으면 될 일이지 굳이 코스프레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런 옷을 사서 한 번만 입고 장롱에 넣어두거나, 버리는 것은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고 이는 지구를 병들게 하고 우리 후손들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다, 부디 그 옷을 착용하고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옷으로 반티를 정해주길 바란다.’ 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돌려놓으려고 부모님에 대한 효심에 호소하고, 지구 환경 문제까지 들먹이며 이렇게도 구차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종례를 마쳤다. 나는 당연히 세상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각자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음 학급 회의 시간에 최종 결정을 하기로 하고 교실을 나왔다. 

다음 학급 회의 시간, 나는 또 ‘학급 회의는 학생들끼리 하는 것이 진정한 학생 자치’라는 자기합리화로 회의를 아이들에게 맡기고 교무실에 와서 급한 내부결재 기안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오늘은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려오겠지?’ 나는 전날 이미 우리 반 단체 톡방에다가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예쁜 반티의 예시 사진을 대거 살포해놓고 ‘나는 당연히 여러분들의 의사를 존중하겠지만 내가 제시한 반티 중에 괜찮을 걸로 골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아 둔 터였다. 학급 회의가 끝나고 반장이 올라왔다.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어떻게 됐어?”
“선생님, 애들이 그냥 태권도복으로 하고 싶대요.”
속 깊은 반장은 곤란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대답을 했다.
“그래? 일단 알겠어.”

‘도대체 누구 생각이냐, 어떤 놈이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냐, 데리고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최대한 덤덤하고 쿨한 척을 해야 하므로 ‘일단 알겠다’는 말로 반장을 내려보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약간 삐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며칠 뒤 반장이 개인 톡을 보내왔다.
“선생님, 내일 저희 반티 주문하려고 하는데, 선생님도 하실 건가요? 저는 선생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실은 아이들도 결론은 그렇게 내놓고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 한 것 때문에 괜히 선생님께 죄송해 하고 있어요.”

반장의 톡을 보는 순간 내가 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아이들은 담임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뭔가. 실은 반장의 그 톡을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멋대로 정한 그 반티를 나는 절대 입지 않으리라는 꽁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내가 너무 잘아 보였고 그런 오기를 부리려 했던 내 자신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선생님도 입어야지, 같은 반인데……^^ 내 것도 주문해줘.” 

반장은 아주 기뻐하며, 

“꺄~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ㅠㅜ 열다섯 명 이상 주문하면 한 벌이 무료인데 저희 반이 열여섯 명이라 한 벌을 무료로 받을 수 있어요. 선생님은 돈 내지 마세요.”
“아니야, 내야지. 너희들 중 한 명이 무료로 받든, 무료로 받는 금액을 n분의 1로 나누어서 너희가 내는 부담을 줄여.”
“아니에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선생님은 무조건 내지 마세요. 저 이만 공부하러 가야해서, 내일 봬요.~”

반장과의 톡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아이들의 결정에 토라져 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십 먹은 어른보다 열여덟 살짜리 아이들이 더 속이 깊구나…….’

 

만국기가 휘날리는 영흥중고등학교 운동장


이윽고 체육대회 날이 되었다. 우리 학교 체육대회는 시내 학교의 체육대회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도서 지역의 특성상 마을 주민들이 체험할 수 있는 문화 행사가 별로 없어서 학교 체육대회는 아이들이나 마을 주민들에게는 제법 큰 마을의 문화 행사였고, 우리 학교 체육대회에는 아직 과거의 학교 운동회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체육대회 날은 운동장에 만국기를 달고, 풍물패가 사물놀이 공연을 하고,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종목이 있고, 체육대회를 우리 어릴 때처럼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서 한다. 중1부터 고3까지 1반은 청군, 2반은 백군, 박 터뜨리기나 공굴리기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뻔 했으나 그게 없는 것이 아쉬웠다. 어쨌든 우리 학교 체육대회는 한 마디로 마을의 축제였다. 마을의 기관장들이 본부석의 한 자리씩을 차지했고, 어떤 가정은 학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오셔서 손녀를 응원해주시고,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도 학교에 와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각양각색의 반티
각양각색의 반티

 

아이들의 반티도 각양각색이었다. 초밥집 알바생, 정신병원 환자와 의사, 한복, 슈퍼마리오, 드래곤볼 손오공, 텔레토비 등 아주 다양하면서 어느 한 반 겹치지 않는 콘셉트로 중1부터 고3까지의 학급이 모였다. 평범한 의상은 하나도 없었다. 먼지를 듬뿍 뒤집어쓰고, 얼굴도 제법 검게 그을린 채 체육대회가 끝났다. 우리 반이 속하지 않은 청군이 우승을 했고, 우리는 준우승을 했다. 이제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응원상 학급 발표 시간이다. 중학교에서 한 학급, 고등학교에서 한 학급, 가장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이며 열심히 응원한 학급을 뽑아 적지 않은 상금을 주는 응원상은 단합이 잘 되는 학급의 상징이고,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에게는 소박한 명예가 있는 상이었다. 중학교는 1학년 1반이 받았다.

고등학교는……
“고등학교 응원상 2학년 2반.”

우리 반이 호명되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너무 깜짝 놀라 펄쩍펄쩍 뛰며 박수를 쳤다. 아이들도 깜짝 놀랐다. 응원상 수상 학급이 우리 반이어서가 아니라 담임 선생님이 점프를 너무 높이 해서 놀랐단다. 그 정도로 기쁘고 의외였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큰 칭찬을 해주고 귀가시킨 후 선생님들끼리 모인 자리, 한 선생님께서 우리 반의 응원상 수상을 축하해주시자 다른 선생님들도 연이어 우리 반을 칭찬해주셨다. 이럴 때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겸손해야한다.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저도 저희 반이 어떻게 응원상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중 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선생님 반 반티가 예뻐서야. 그 반 반티가 가장 깔끔하고 눈에 띄었어.”
“맞아맞아, 너무 잘 어울렸어요.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들 같아 보였어. 담임은 사범이고. 하하하.”

선생님들의 말씀에 나는 머리가 쭈뼛 서고 귀가 시뻘게지는 걸 느꼈다. 아이들에게 반티를 다시 정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하던, 뜻대로 되지 않자 아이들에게 실망했던, 찌질 임요한 선생이 소환되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가 틀렸구나. 아이들이 맞았구나.’

교사가 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교사를 가르칠 때도 있고, 교사도 아이들에게 배운다. 착하고 순수한 우리 영흥도 아이들에게 내가 배웠다. 그날 저녁 좋은 기분으로 술을 한 잔 걸치고 취기를 빌어 우리 반 단체 톡으로 고백을 했다.

“오늘 우리 반티 너무 예뻤대요. 여러분이 맞았어요. 내가 틀렸어요. 오늘 수고 많이 했고……
선생님은 우리 2학년 2반 모두모두 내 친동생처럼, 하나뿐인 내 아들처럼 많이많이 사랑합니다.~♥”

 

사범과 제자들


임요한ㅣ인천영흥고등학교 국어 교사.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 읽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은 국어 교사. 여러 길 돌고 돌아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무얼 잘하는지, 이다음에 뭐가 될지 궁금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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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싶은 이야기2019. 8. 7. 18:31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는 2019년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5일간 평화교육 전문가 과정으로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대화 프로그램, Dialogue for Peaceful Change’(이하 DPC)을 진행했습니다. DPC는 국제분쟁 상황에서 활동하는 평화교육자들이 개발한 글로벌 대화 훈련 프로그램으로, 북아일랜드 신구교 갈등에서 ‘대화’를 통해 평화프로세스를 이끌어낸 코리밀라의 전 대표 콜린 크랙이 개발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개발자인 콜린 크랙과 전문 트레이너 레이첼 크랙이 한국에 방문하여 처음으로 진행한 과정으로 개설 후 이틀 만에 신청이 마감될 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주셨습니다. 이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어린이어깨동무 회원, 교사, 평화교육 활동가 등 24명으로 5일간의 일정에 모두 참여하셔서 전원이 수료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1
“안녕하세요? 저는 7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서 이름도 열 살 많은 큰 언니가 지었어요.”
“저는 제 이름이 너무 흔해서 싫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얼마나 좋으면 많이 짓겠나 싶어서 이제는 제 이름이 좋아요.”
“제 이름은 OO이고, 제 별명은 △△에요. 진짜 저랑 안어울리죠?”

2019년 7월 29일. 많은 사람들이 더위와 피곤한 일상을 피해 휴가를 떠나던 그날, 스물 네 명의 DPC(Dialog for Peaceful Change,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대화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모여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멀리 북아일랜드에서 날아온 강사 두 분 콜린(Colin Craig)과 레이첼(Rachel Craig)도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5일의 대장정을 함께 할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가정에서 겪은 갈등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갈등과 평화를 탐색해보고, 갈등의 생물학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갈등’에 대해 탐구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레고 게임을 통해 집단문제해결 프로젝트도 경험해보았습니다. 

 
#.2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은 다양한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고, 인과관계도 난해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몇 가지 기호와 약속을 통해 시각화하고 갈등을 분석해보는 갈등지도와 갈등기둥 그리기는 두 번째 날의 주요한 활동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족, 모임, 단체, 직장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상황을 분석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갈등을 분석하는 연습을 통해 갈등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 고민하던 참가자들은 ‘아이스버그(Iceberg, 빙산)모델’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갈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스버그 모델은 갈등이 직접적인 행위자 외에도 간접적인 행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이에 대해서도 고려하여 갈등을 해결해야한다는 점을 다룬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첫날부터 참가자들이 열심히 강의를 듣고, 모둠활동을 하는 사이 레이첼은 쉬지 않고 그래픽 레코딩(그림으로 기록하기)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강의 내용, 활동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도움을 주었습니다.  

 
#.3-4
셋째 날과 넷째 날은 참가자들이 이틀간 탐구한 갈등의 구조와 변화 이론을 바탕으로 실제로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선 우리는 학교, 교실, 공동체, 직장 등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 중 네 가지를 골랐습니다. 첫 번째 모둠에서는 해당 문제의 갈등지도와 갈등기둥을 그렸습니다. 두 번째 모둠에서는 해당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 위한 예방단계에서의 전략을 구상하고, 세 번째 모둠에서는 긴장해소를 위한 응급전략을, 마지막 네 번째 모둠에서는 갈등을 감소할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네 단계의 활동을 네 모둠이 함께 진행해서 네 가지 문제에 대한 갈등감소 전략을 구성해볼 수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이론과 분석능력뿐만 아니라, 서로의 힘을 모아 갈등을 해결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5
마지막 날에는 공감과 중재의 의사소통에 대해 이해하고, 연습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 명이 모둠을 이루어 이야기를 하고, 바꾸어 말하고, 요약해보는 연습을 통해 중재의 기초를 연습해볼 수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대화프로그램, 이제야 그 뜻을 알았다. 
5일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역동적으로 진행된 이번 프로그램을 마친 참가들은 각자의 소감을 말하며 수료식을 장식했습니다. 

“실제로 저희 공동체의 문제를 푸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서. 정말 알토란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너무너무 바쁜 일정이라 포기할까 생각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듣기를 잘 한 것 같아요.”
“저의 일터에서 일어난 갈등에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프로그램 제목이 왜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대화프로그램인지 이제야 그 뜻을 알겠어요. 참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갈등이 없으면 평화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갈등을 평화롭게 잘 해결해가는 과제가 남았네요!”

어린이어깨동무는 앞으로도 한반도의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다양한 평화교육 프로그램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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