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9. 11. 19. 09:39

[이슈]

새로운 터전에서 ‘제대로 된 평화혁명’으로 나아갑니다   

이기범

 

드디어 어깨동무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터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렇게 가까이 왔던 남북의 평화가 다시 질척거리고 있어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네요. 그야말로 ‘기나긴 혁명’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나 봅니다. 과거의 남북 관계와는 또 다른 낯선 길을 열어갈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새 터전이 그렇게 각별하게 여겨집니다. 기나긴 길로 나설 채비를 할 수 있는 곳. 같이 걸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걷고 또 걷다 돌아올 수 있는 곳. 험한 봉우리 넘은 사연을 나누고 더 험한 봉우리 넘을 궁리를 하는 곳. 굽고 험한 길을 가다가 함께 모이고 먹고 웃을 수 있는 곳. 평화의 날을 맞이하는 잔치를 예비하는 곳. 새 터전이 기나긴 ‘평화혁명’을 이어가는 길의 시작이자 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뜻을 모아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물을 살 수 있는 재원을 오랫동안 모아왔네요. 설립 초기에 임원들께서 밑천으로 내어주신 종잣돈과 회원들이 내주시는 후원금에 크게 힘입어서 푼푼이 돈을 모아왔습니다. 기꺼이 자비를 쓰면서 활동한 임원들과 내내 살림을 알뜰하게 챙겨온 사무국 활동가들 덕분에 쌈짓돈을 목돈으로 키워서 건물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아놓고도 우리에게 독립건물이 꼭 필요한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이사회에서 의결을 한 뒤에도 적합한 지역과 건물을 찾는데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매물로 나온 건물들을 보러 다니면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데 따르는 책임감과 전망을 다져갔습니다. 앞서 세워진 국내외의 평화 공간들을 공부하면서 상상을 펼쳤습니다. 그 공간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열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터전에 어깨동무의 역사를 새기고 희망을 내다보는 구상이 무르익을 즈음 지금의 건물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건물이 그때까지 어깨동무를 기다린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터전이 환대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를 배우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다시 배움을 길어내는 일을 환영하는 공간이 되어야겠지요. 연대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선 ‘어린이 세상’을 펼쳐가는 데 함께 뜻을 모았던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과 ‘동거인’이 되었으니 더 멀리 갈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입니다. 두 단체의 소통과 결합을 통해 평화 네트워크를 더 촘촘하게 엮어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상과 개척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곳에 오면 일상의 관성과 기존의 합리성을 뛰어 넘어서 무모하고 황당한 평화의 가능성을 펼치고 다듬을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저만 하더라도 남녘 사회와 남북 관계의 앞날을 그릴 수 있는 생각의 자원이 소진되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공동의 삶의 질을 진전시키고 숙성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상상으로 어떻게 평화의 지평을 개척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나아갈수 있기 바랍니다.

 

▲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입구
▲ 교육공간으로 활용될 '안녕친구야홀'
▲ 북녘 친구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평화자료실'

제 소망을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일을 하기에 우리 터전이 넉넉한가라는 걱정이 듭니다. 하고 싶고 담고 싶은 일이 많다보니 공간 크기가 턱없이 모자라서 맥이 빠졌을 때 역시 구원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일하고 쉴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습니다.

기나긴 평화혁명으로 글을 시작했으니 그로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D. H. 로렌스는 ‘제대로 된 혁명’이라는 시에서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라고 말합니다. 그저 재미로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엄숙주의’를 깨고, 웃고 즐기며 재미있게 무리 지으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하고 조금 더 평화롭게 바꿔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곳에서 ‘제대로 된 평화혁명’의 걸음을 길게 이어가겠습니다. 앞으로 터전에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라고 계속 격려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후원 역시 웃고 즐기며 재미있게 해주시면 더 큰 힘이 되겠습니다. 제대로 된 평화혁명을 위하여!

 


이기범ㅣ어린이어깨동무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사무총장으로 10년 동안 일했고, 현재는 이사장을 맡고 있다. 남북의 어린이들이 교류하며 한반도 평화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함께 가기를 소망한다. 숙명여대에서 교육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한반도 평화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가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11. 19. 09:03

[한반도평화읽기]

 

희망의 근거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

 

정영철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8월 북의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은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10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금강산을 현지지도하면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도록’지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열린 ‘비동맹정상회의’에 참석한 북의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은 ‘역사적인 남북 선언들이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남조선당국의 외세의존정책과 사대적 근성’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남북관계의 개선은 외세의존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 앞에 지닌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북의 발언은 남북관계가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한 마디로 남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 사대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관계의 개선은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로 인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제재의 대상이 아닌 관광과 여타의 협력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제대로 된 남북 협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야 이러저러한 대북제안을 하고 있지만 (돼지열병 방역등)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는 상황,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의 대북 제안은 말 그대로 명분 쌓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통일부 장관조차도 비무장지대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엔사의 간섭으로 인해) 대북제안의 실질적인 이행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타미플루 지원의 경우에는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차량 출입을 통제하면서 무산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국제적인 제재를 명분으로 한 노골적인 간섭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 우리 정부의 태도는 엄혹한 대북 제재 그리고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희망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현상유지에서는 자율성’을, 그러나 ‘현상타파에서는 종속성’을 보이고있다. 지난해에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남북 간의 역사적인 회담과 합의를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지는 뒤로 미뤄놓고, 오로지 북과 미국의 만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내세웠던 ‘담대한 여정’에서 ‘담대’는 쏙 빠지고, 오로지 중재자만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이 강조했듯이 우리는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여야 한다. 하루빨리 ‘중재자의 신화’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다른 문제로 넘어가보자.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고 있고, 지난해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에서도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 국방비는 ‘이전의 10년 정권’보다도 더한 증액이 이루어지고 있고, 더욱 파괴적인 무기가 도입되고 있다. 평화를 주장하고, 이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증강은 대북 강경정책을 펼치던 정권보다 더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를 바라보는 북의 입장에서 과연 남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을까? 지난 평양에서 열렸던 월드컵 예선에 대해 통일부 장관까지 ‘실망스럽다’고 했지만, 정작 ‘실망’을 표해야 하는 쪽은 북이 아닐까?

물론 우리 정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북미관계의 개선이 남북관계의 개선의 결정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정부가 스스로를 ‘중재자’의 울타리에 가두어놓고, 북과 미국의 사이에서 ‘중재’를 한다는 것이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난 역사적 경험을 보면, 우리는 남북관계의 힘을 통해 오히려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고, 남북관계 개선–북미관계 개선의 선순환을 만들어내었다. 과거 2000년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가 그러했고, 당장 지난해 판문점 ‘번개회동’을 통해 좌초 위기였던 북미회담을 성사시켰던 경험이 이를 보여준다.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바로 남북관계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힘을 바로 세우는 것은 정부의 노력과 함께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해 힘을 합칠 때만 가능하다. 과거 2000년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정부와 함께 시민사회가 남북관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힘을 합쳤고, 지난해 2018년에는 전쟁 위기의 한반도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길에 정부와 시민사회가 뜻을 같이하였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는 우리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노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고, 시민사회는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를 향해서 우리 내부의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남북의 교류와 화해를 위한 협력의 정당성과 그를 위한 동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든든한 내부의 동력이 마련된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국제사회도 쉽게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난해부터 남북관계는 정부가 주도하고 시민사회는 한 발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어찌 보면 시민사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평양’행 비행기에 올라타는 꿈만을 이야기했지, 평화와 번영의 공고한 토대를 만드는 것에서는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모두가 ‘평양’행 비행기를 놓칠 수 있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정부와 시민사회는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할것이다. 최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 범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우리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종속’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지금처럼 북미관계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세로는 남북관계의 문제를 풀 수도 없고, 우리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제대로 된 남북관계의 힘은 남북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 내었을 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든든히 의지해야 할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정영철ㅣ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11. 18. 18:40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국수, 농마국수, 함흥냉면, 밀면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남북이 북한에서 만날 때면 평양냉면이 언제나 화제에 오른다. 중국의 면(麵) 요리를 한국인은 국수로 부른다. 국수란 단어의 최초 기록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編)에 '국슈(麵)'으로 나온다. 면(麵)은 중국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면을 총칭하지만 한국에서는 밀가루, 메밀가루 등 모든 면을 총칭하고 국수도 마찬가지다. 서정범 교수는 한민족 고유어 '국'은 물이 중심인 음식을 말한다고 했고 '수'도 물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서정범 교수에 의하면 국수는  국물 음식이란 뜻이 된다. 평양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국수라 부른다. 평양의 국수가 유명해지면서 평양의 찬 국수는 평양냉면이 되었다.

 

 

농마국수(조선료리전집2000)

함경도 분들도 자신들의 면 음식을 국수라 불렀다. 타 지방 국수와의 차별이 필요한 순간이 되자 국수 앞에 정체성을 내세울 기호가 생겨났다. 평안도와 달리 함경도는 감자와 고구마가 많이 났던 탓에 이를 가루로 만들어 농마국수라 부르기 시작했다. 농마는 감자나 고구마를 걸러낸 가루인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지만 일반적으로 감자 녹말을 칭한다. 북한에서는 함흥냉면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만으로 추적하면 함흥냉면은 남한에서 함경도 실향민들이 만든 단어라고 추정된다. 미군병사 클리포드 L. 스트로버스(Strovers, Clifford L)는 1953년 11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미 공병부대원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을 사진에 담았다. 1954년 부산 국제시장을 찍은 사진 중에는 ‘함흥냉면옥’을 찍은 사진이 있다. 함경도식 냉면집답게 간판 아래 ‘회국수’란 글자도 선명하다. 1954년에 찍은 국제시장 ‘함흥냉면옥’을 비롯해 신창동 '고려정냉면', 시청 옆 '평양서부면옥', 동아극장 옆 '황금냉면옥', 동광동 '광락냉면'같이 냉면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부산의 전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된다.

 

속초 함흥냉면옥 1950년대 초반 사진

 

클리포드 사진집 <칼라로 만나는 1954년 Korea>에 실린 함흥냉면집

함흥냉면은 함경도 사람들의 안부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음식이었고 냉면집은 만남의 장소였다. 남한에 최초의 함흥냉면집은 함경도와 가장 가까운 속초에서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1951년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던 속초에 함흥냉면 집이 최초로 세워졌고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서울의 청계천 평화시장과 중부시장 오장동에 1954년부터 함흥냉면집들이 들어섰다. 함흥냉면은 함경도의 농마국수, 감자농마국수가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면서 생긴 변형된 음식 체계인 것이다. 남한 사회에 함경도식 냉면의 정착기는 평양냉면보다 험난한 과정을 겪는다. 평양냉면은 오래전부터 남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음식이었지만 농마국수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농마국수의 주성분인 감자 전분은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거기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함경도 음식의 특징과 가자미식해 같은 생선 꾸미가 올려지는 것도 다르다. 남한 사람들은 이런 음식 체계를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전쟁과 이후의 부산에는 감자 전분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남한 사람들의 식성과 재료 부족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게 된다. 당시 부산 구포국수가 유명했다. 전쟁과 이후에 미군에 의한 밀가루 공급이 확대되면서 밀가루로 만든 마른 국수인 구포국수는 부산 시민과 실향민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함흥에서 내려와 함흥냉면을 팔던 사람들은 남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고구마전분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었다. 실향민이 몰려 살던 우암동 입구에는 함경도 흥남 내호 출신 실향민이 세운 '내호냉면'이 들어서고 당감동에는 본정냉면, 함흥회냉면같은 식당이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부산사람들은 우동이나 소면 같은 밀가루 국수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다수를 차지하던 부산 토박이 손님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내호냉면은 창업 후부터 북한 실향민에게는 회국수같은 함경도식 냉면을, 부산 토박이들에게는 국수를 팔았다. 몇 년간의 냉면과 국수의 동거를 끝낼 새로운 면이 1959년에 내호냉면에서 만들어진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이 탄생하자 실향민들과 부산 토박이들 모두가 좋아한다. 당시에는 밀냉면, 경상도 냉면, 부산 냉면이라 불렀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 내호냉면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 정책에 인해 맞이한 밀가루 음식의 전성기와 때를 같이하여, 1966년 개금 시장 입구에 세워진 ‘개금밀면’이, 1970년대 초반 가야2동 동의대입구역에서 언덕이 시작되는 부근에 있는 ‘가야밀면’이 문을 열면서 밀면의 대중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00% 밀가루를 이용한 부드럽고 단 맛이 나는 면과, 새콤달콤한 양념과 한약재를 넣어 시원하고 담백하며 몸에도 좋은 육수로 만든 가야밀면에 대중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밀면이 함경도 사람들을 넘어 부산 사람들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함흥냉면보다 부드러워진 면발의 변화와 더불어 가야식의 달달한 한약재육수, 개금식의 개운한 닭고기육수가 완성된 뒤의 일이었다. 면과 육수가 부산의 재료와 풍토, 사람들의 입맛을 완벽하게 반영하면서 밀면은 비로소 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발전과 분화를 시작했다. 밀면은 한반도 현대사가 낳은 한민족의 음식이다. 북한 분들이 자신들이 낳은 음식의 남한식 변형과 탄생을 마음껏 맛볼 그날을 그린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11. 18. 18:18

[평화의 마중물]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4)

분노를 넘어 희망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한 까닭 

 

박종호

 

지난 밤 김동진 박사 평화 책 잔치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최관의, 심은보, 댄 가즌, 김경옥 선생님과 ‘벨파스트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면서 기네스 맥주를 신나게 마셨다. 젊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방에 올라와서 눈을 붙인 시간이 새벽 2시, 어찌어찌해서 맥주를 사느라고 지갑을 털린(^^) 최관의 선생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냥 눈을 감았다 뜨니, 오전 모이는 시간이 코앞에 와 있다.

오늘 마지막 방문지인 벨파스트 교육청 지원센터(Belvoir Youth Centre)에 들어섰다. 북아일랜드 사회통합을 위해 교육청이 하는 여러 일 가운데, 분리 교육이 시행되고 있는 신교도, 구교도 지역 학교들을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협력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연결하는 공유교육을 지원하는 곳이다. 깔끔한 시설과 부지런하고 친절한 직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이런 노력들이 풍부한 기금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교육청 관계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앞두고, 한 시간 정도 회의실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데릭 윌슨 박사님이 김동진박사와 함께 사회를 보고, 이번 연수에서 배우고 느낀 바를 함께 나누는 ‘총화’ 시간이다. 데릭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우리들에게 이번 연수에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을 말하고, 두 번째는 이번 연수에서 얻어 가는 게 무엇인지 말해 보자고 하신다. 우리는 시계 방향으로 바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평화, 평화교육을 처음 경험한 기회였는데, 어제 기네스를 좀 많이 마셔서 저를 관리하지 못한 게 아쉽고, 함께한 선생님들 기운을 받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좋은 경험을 해서 고맙다.”(김경옥)

“코리밀라에서 데릭 교수님 집에 가서 겪은 밤이 많이 생각난다. 모둠으로 나누어 파티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문화는 제도나, 행정으로는 만들 수 없는 부러운 문화였다.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는 평화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일상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다시 돌아봐야 하고, 의심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최관의)

“데릭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희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더디게 천천히 오지만 멈추지 말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향숙)

“활동가들이 서로 영감을 주는 게 감동 깊었고, 이번 연수에서 어쩌면 평생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평화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코리밀라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선명하지 않아서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이런 혼란은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했다. 그래도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에 담았다.” (주예지)

“워크숍이 좋았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 김동진 박사님,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어젯밤 종호, 경옥 선생님 노래에서 좋은 영감 많이 받았다. 그런 경험을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는지 앞으로 많이 고민하려고 한다.” (댄 가즌)

“평화교육을 깊이 경험하게 되어 좋았고, 지금 고민은 이것을 돌아가서 어떻게 나눌 것인지, 어깨동무에서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이 성장하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숙제를 안고 간다.” (김윤선)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중간에 소화할 시간을 좀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극은 받았는데, 그냥 돌아가면 잊혀질까 두렵기도 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나는 왜 저분들만큼 자신감이 없을까?를 자문하며, 좀더 과감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성숙)

“평화라는 말이 훅 들어오는 느낌. 평화는 목적이 아니고 과정이다. 우리 남과 북은 통일이 목적이지만, 그 이후도 끊임없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강명희)

“알시티에서 청소년과 대화해 본 일, 코리밀라 워크숍에서 프로그램을 배운 일, 통합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과 이야기 나눈 일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평화, 평화교육은 이제 시작이라는 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해 천천히 더 생각해 보겠다.”(정진화)

“곳곳에서 벽을 만났는데, 이름에 평화(Peace)라고 해서 놀랐고, 여기서 알시티, 코리밀라 같은 만남의 장들이 있고, 그곳에서 상상력을 많이 받았다. 잠깐 스치는 경험이지만, 돌아가서 실제 삶 속에서 다양한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심은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데릭 윌슨 박사님은 짧게, 그렇지만 울림이 있는 말을 해 주었다. 어쩌면 평생을 날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갈등과 전쟁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희망을 길어 올린 사람이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을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전수받는 게 학습이라 생각하는데, 진짜 학습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리로 먼저 걷고, 머리가 따라간다. 뭔지 몰라도 일단 걷는다. 그래도 걷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회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신념은 좁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으로 만날 때 공간이 넓어진다. 신념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차례가 오자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로 온 북아일랜드에서 또 많은 걸 느끼고 깨닫고 간다. 삼십 년 넘게 교사로 살면서 나를 지탱한 것은 분노였고, 다른 한편에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코리밀라에 와서 배우고 싶다.”

내 말을 듣고 데릭 선생님이 마무리 삼아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에서 뭔가 울컥한다.

“완벽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좌절에 이르는 길이다. 분노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희망을 가지면, 미래를 보게 되고, 그 미래를 위한 계획과 전략을 세운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희망을 공유하는 배움의 공동체. 이 희망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고맙다.”

일정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 우리를 태운 버스 앞에서 데릭 선생님과 진하게 포옹을 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란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말없이 한 번 더 안아 주셨다.
(2019. 2. 18.)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11. 18. 16:33

[평화를 담은 공간-1]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의 실현으로 평화의 길을 열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영환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일본기업(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 피해를 당한 원고들에게 역사적인 승소판결을 내렸습니다. 1997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싸워 온 피해자들이 20여년의 기나긴 투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대법원 판결은 국제인권법의 성과를 반영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고, 식민지배와 직결된 강제동원·강제노동이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의 극복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딘 세계사적인 판결이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냉전과 분단체제 아래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강요한 ‘65년 체제’를 피해자들과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극복한 역사적인 성과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해방 70여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못한 자신들의 인권회복과 정의의 실현을 고대해 온 피해자들의 기대는 처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아베 정권은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고 사죄, 반성하기는커녕 ‘국제법 위반’을 운운하며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으며, 피고 기업들에게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판결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경제규제와 노골적인 배외주의를 선동하여 일본 사회 전체를 ‘혐한의 광풍’으로 몰아넣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혐한의 광풍’ 속에서 재일조선인들은 일상적으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으며,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문제에서 드러나듯 역사왜곡과 혐한발언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언론 보도를 통해 일본사회 전체가 ‘재특회’처럼 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이후 지난 1년 동안 악화의 한 길을 걷고 있는 한일관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아직도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사회의 현실은 역사왜곡과 친일청산의 과제가 비단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과제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과 뜻을 같이 하는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한 평생을 싸워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노력을 모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65년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분노한 고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66년 『친일문학론』을 비롯하여 친일파 관련 저작을 발표했습니다. 선생은 친일파의 행적을 자신의 손으로 낱낱이 기록한 1만 3천 장의 인명카드를 남기고 1989년 작고했습니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이 남긴 뜻을 이어받아 민족문제연구소가 탄생했습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09년 선생의 인명카드는 친일파 청산을 열망하는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친일파 4,389명이 기록된 『친일인명사전』으로 태어났습니다.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문제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통한 역사문제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여 적극적으로 역사왜곡을 막기 위한 실천운동을 벌여왔습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김활란상 제정 반대, 박흥식 동상 철거, 친일문학인상 반대 등 일제 잔재와 친일청산을 위한 실천운동과 함께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발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강행된 뉴라이트 교과서 채택,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 등 역사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실천운동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에도 앞장 서 왔습니다. 지난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 낸 강제동원 소송의 사무국을 맡고 있으며, 야스쿠니신사 합사취소 소송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법정에서 대일과거사 청산을 위해 일본의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소송투쟁을 벌이는 한편 강제동원의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08년이 되는 2018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식민지주의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활동의 거점으로 마련된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강제병합의 역사, 민중의 입장에서 본 식민지지배의 실상, 한 시대를 다르게 걸어 온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대조적인 삶,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의 목소리, 그리고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싸워 온 한일시민연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입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
역사정의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그동안 모아온 3만여 점의 역사자료와 4만여 점의 관련도서 외에도 재일동포를 비롯한 해외동포들,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시민들이 보내준 기증 자료와 성금으로 마련되어 순수하게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박물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채운 ‘역사정의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3.1 독립선언서’ 초판본, 난징대학살에 가담한 일본군의 일장기,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의 기록, 강제동원 피해자의 절절한 편지,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김활란 등의 친일 행적,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 한일시민연대의 기록 등을 보고 박물관을 나서면서 여러분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분단과 냉전체제를 방패삼아 ‘반공’이라는 무기로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2020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그들이 친일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친일잔재의 청산과 역사정의의 실현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길에서 우리가 내디뎌야 할 첫걸음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시민여러분과 함께 그 길을 열어가겠습니다.



김영환 ㅣ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동아시아공동워크숍,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평화박물관에서 평화운동을 했다. 동아시아 시민들이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이곳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11. 14. 20:39

[좌충우돌 교실이야기]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임요한

 

인천영흥고에 부임한 지도 여덟 달이 지났다. 추운 겨울에 처음 부임 인사를 와서 첫 만남으로 설레던 봄을 보내고, 밤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싱그러웠던 여름도 보내고 영흥도에서의 첫 가을을 맞이한다. 아직까지 영흥에서의 생활이 대부분 평화롭고 행복하지만 가끔은 원인모를 답답함이 느껴질 때도 있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주는 고립감, 농어촌 지역이기 때문에 누리기 어려운 문화적 혜택 등이 그 이유일 게다. 이를테면 어느 날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햄버거 세트가 너무나 먹고 싶다거나, 몇 달 동안 출시를 기다려온 한정판 운동화의 실물이 너무나 보고 싶다거나.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여기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이곳 아이들은 주말이면 근처에 있는 시화, 안산 중앙, 배곧 등으로 나들이를 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부모님들은 모두 생업이 바쁘셔서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대중교통을 이용해 뭍에 나갔다가 버스가 끊기기 전에 들어와야 하는데, 주말에 행락객들이 많은 시간에 걸리면 왔다갔다 차에서 보내는 시간만 서너 시간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외부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는 편인데 내가 소속되어 있는 부서는 ‘교과 융합 현장 체험 학습(이하 융합 답사)’이라는 것을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다. 지난 융합 답사는 부여와 공주로 가서 신동엽 문학관, 정림사지, 궁남지, 구드래조각공원, 부소산성, 무령왕릉 등을 돌고 오는 1박 2일 코스로 진행을 하였다. 학생 30명과 인솔 교사 5명이 버스 한 대로 학교에서 출발하여 답사지를 돌고 오는데, 아이들이 직접 답사지 근처의 식당을 섭외해서 예약을 하면 교사는 예산을 품의하여 결재를 하고, 학생들이 답사지에 대한 사전 조사를 통해 답사 자료집을 만들어 해당 장소에서 발표를 하면 교과 교사가 보충 설명을 곁들이고 미션을 주는 현장 체험 및 사제동행 프로그램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학생들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여 무탈한 여행이 되도록 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하고, 학생들은 빡빡한 일정이 지체되지 않고 계획대로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단체 활동을 잘 해야 한다.

신동엽 문학관 

첫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랜만에 하는 나들이에 날씨도 도와주어 며칠 간 좋지 않았던 미세 먼지 농도가 여행 당일에는 ‘아주 좋음’ 상태였고, 고속도로도 막히지 않아 계획했던 일정대로 잘 진행이 되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 두둑이 받은 용돈으로 최근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화제가 된 각종 휴게소 음식들을 사먹으며 버스 이동 시간조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답사의 모든 여정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충청남도 내륙 지역에 위치해 있는 부여는 백제의 오랜 도읍이었던 관계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임에도 도시 계획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잘 정비된 도로망은 섬에 사는 아이들에게 사통팔달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큰 도시처럼 혼잡하지도 않고 횡단보도에는 신호가 없을 정도로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산과 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자연도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숙소에서도 우리 착한 영흥도 아이들은 단 한 건의 일탈도 이탈도 없이 늦은 밤까지 방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자라고 하는 시간에 모두 코 잠들었다. 이렇게 착한 아이들이 또 있을까. 가뜩이나 천사같은 놈들이 이렇게 잠도 잘 자니 예뻐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께 불침번을 서는 선생님과도 계속 아이들이 착하고 선생님 말을 잘 듣는다는 칭찬을 하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마을에서, 평화로운 첫 날 밤을 보내고 둘째 날이 밝았다. 일정 내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평화의 기운이 걷히기 시작했다.

 

신동엽 시인 생가에서

둘째 날의 첫 번째 일정은 부소산성이었다. 아침 일찍 부소산성 매표소에서 출발해 삼충사, 영일루, 군창지, 반월루 등을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이동 거리가 제법 되었고, 안전사고 예방과 학생들의 몸 상태 체크 등 이틀간의 여정 중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도보로 이동하여 부소산성 매표소에 도착해서 인원 파악을 했다. 한 명이 비었다. 그 한 명은 다름 아닌 우리 반 상민이었다. 아이들 말로 잠시 화장실에 갔단다. 오전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일단 매표소를 출발하기로 하고 선생님 한 분이 상민이를 기다렸다가 함께 일행을 쫓아오기로 했다. 삼충사에 도착해서 상민이와 함께 오기로 한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상민이가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매표소 앞에 있는 화장실에 갔는데 없었어요.”
“네, 제가 전화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바로 상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계속 가는데 상민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도 상민이를 본 사람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들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떠나서는 상민이를 본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몇 아이들도 전화를 해보더니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전화를 했다. 묵묵부답. 너무나 걱정이 되었지만 상민이를 기다리기로 한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주변을 좀 잘 찾아봐 달라고 하고 학생들을 인솔했다. 영일루에 도착해서도, 군창지에 도착해서도 상민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도 계속 받지 않았다. 이놈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건가. 처음에는 또 어디 가서 뭘 사먹는다고 정신이 팔렸거나 혹은 중간에 다른 길로 새서 피시방 같은 곳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정도였던 걱정이 계속 전화 통화가 되지 않자 행방불명이나 납치, 사고 등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다른 학생들을 인솔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렇게 된 건 아닌가, 저렇게 된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계속 일었다. 반월루 쯤에 도착했을 때 상민이를 찾으러 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상민이 찾았습니다.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아, 네. 다행이네요. 그 자식 뭐하다가 이제 나타났나요?”
“볼 일이 급해서 화장실에 갔답니다. 매표소 옆 화장실이 상태가 안 좋아서 좀 멀리 있는 화장실을 갔다네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조심히 올라오시고, 상민이에게 담임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났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렇게 걱정했던 놈이 그저 여유롭게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 녀석의 평소의 모든 행동 특성이 다 밉게 느껴졌다. 우리 학교에서 한 덩치를 하는 상민이는 그 덩치에 걸맞게 먹성도 아주 좋다. 제주도 수학여행에 가서 고기국수 한 그릇 먹는데 2분이 채 걸리지 않는 그의 장기를 우리는 ‘국수 순삭 마술’이라고 불렀다. 그럴 정도로 먹성이 좋은 녀석은 어제 아침부터 엄청나게 먹어댔다. 이동하는 버스에서도, 휴게소에서도, 여정 중 들른 점심, 저녁 식당에서도. 그리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주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그때도 아마 분명 실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친구 여럿이서 정해진 양의 치킨을 먹어야 했으니 스피드가 생명이었을 터, 닭을 씹지도 않고 뼈까지 그냥 삼켰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먹고 똥을 싸느라 오전 내내 내 애를 태운 생각을 하니 걱정을 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담임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섭기는 했는지 녀석은 낙화암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올라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뭐한다고 전화도 안 받아?”
성이 잔뜩 나서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 폰을 무음으로 해두었어요.”

한참을 녀석을 쏘아보아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인천에 올라가서 보자고는 녀석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말을 던지고 일정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장소에서도, 또 그 다음 장소에서도 상민이는 계속 화장실에 들렀고, 급기야 영흥도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의 마지막 휴게소가 지난 후에도 화장실이 급하다고 정차를 요구했다.

“뭘 얼마나 처먹었길래 하루 종일 똥질이야!”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빽 질렀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빵 터졌다. 원래도 얼굴에 홍조가 있는 상민은 귀까지 벌게진 채로 화장실에 다녀왔고, 융합답사는 그렇게 끝났다.

공주박물관에서

학교에 도착해서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들만 관사에 남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아까 상민이를 찾아 헤매던 후배 선생님이 근처에 있는 십리포 해변으로 산책을 다녀오자고 했다. 그래서 나, 함께 답사를 다녀온 후배 여 선생님 한 분, 이렇게 셋은 근처에 있는 십리포 해변 쪽으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우리 학교에서 십리포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왕복 1시간정도의 거리이다. 학교 일과를 마치고 종종 다니는 산책 코스였다.

 

여느 때와 같이 십리포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화장실을 많이 가리는 나는 지난 융합답사 내내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못했고 여행이 끝나자 긴장이 풀리면서 괄약근도 함께 풀려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근엄한 선배 체면에 같이 온 후배 선생님들에게 똥이 마려워 어쩔 줄 몰라하는 방정맞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관사에 돌아갈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오만이었다. ‘이건 곧이다. 어디든 뛰어 들어가야 한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나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이 어디였던가 생각했다. ‘십리포 해변 가운데쯤에 공용 화장실이 있다. 학교까지는 아직 20분, 그곳까지는 조금 서두르면 금방 도착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두피에서 샘솟은 땀이 등줄기를 지나 엉덩이 골까지 흘러내렸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후배 선생님들께 고백했다. 나 지금 너무 급하다고……. 그들은 깔깔깔 웃고 난리가 났고, 어서 화장실로 가시라고 자신들은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나는 기다리지 말라며, 뛰는 모습은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 혹은 뛰었다가는 정말 큰일을 볼 것 같아 괄약근을 힘껏 조인 채 빠른 걸음으로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을 하고 혹시 몰라서 텃밭에 들어가 상추도 네 장 땄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뒷일까지 생각한 내가 스스로 너무 대견스러웠다. 급하다고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일을 치르고 뒤처리를 어쩔 뻔 했는가. 그 와중에도 발생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경우를 생각하며 더 빠른 걸음으로 십리포 해수욕장 쪽으로 이동했다. 화장실에 도착해서 바로 앞에 있는 관리사무실에 가서 휴지를 얻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장실의 세 칸이 모두 잠겨 있음을 확인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져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어서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마지막 칸에서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그 어떤 사랑의 속삭임보다 더 달콤한 소리였다. 그 칸에서 나오시는 분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드디어 나만의 공간에 도착하여 착석했다. 나는 김수영 시인의 ‘폭포’라는 시의 구절을 떠올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도서관과 화장실의 공통점은 학문을 펼치고, 학문에 힘을 쓰고, 학문을 닦는 곳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날은 학문에 힘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한 바탕 거사를 치르고 나서 화장실을 나오려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상민이었다.

“선생님 오늘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상민아, 너 십리포 화장실에 CCTV 설치해놓았니?ㅠ 상민이의 참회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자연 앞에서, 생리 현상 앞에서 이리도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누가 누구를 멸시하고 조롱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은 누구에게도 그럴 자격은 부여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학교에서 상민이를 만나 사과했다. 어제는 선생님이 오만했다. 미안했다. 영문도 모른 채 덥석 잡힌 손을 멋쩍어하며 상민이는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김수영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우습지 않으냐 이깟 똥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를 떠올리며


임요한ㅣ인천영흥고등학교 국어 교사.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 읽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은 국어 교사. 여러 길 돌고 돌아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무얼 잘하는지, 이다음에 뭐가 될지 궁금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8. 16. 07:00

[이슈]

평화의 시대, 우리 아이들의 평화를 찾아서   

정진화

 

평화의 시대에 청소년들은 안녕한가?
도무지 뚫릴 수 없는 철옹성같던 남북미 관계가 작년부터 놀라운 반전과 진전을 보여주고 세계의 주목을 받는 한반도의 평화 시대가 오고 있다. 식민지와 전쟁에 멍든 기성세대와 달리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인 청소년들의 일상은 그래서 얼마나 더 평화로울까. 어른들은 하루 8시간 노동, 주 52시간 노동이 정착되어 간다는데, 학생들은 학교 수업 끝나면 서둘러 저녁도 잘 못 먹고 학원 갔다가 한밤중에 돌아오는 일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 자유학년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중학교 1학년은 시험으로부터 자유롭고 진로탐색 할 여유시간이 늘어났다지만, 학원 가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활동도 하고 방과후 활동도 하면서 놀다가,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족들과 이야기도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텔레비전 보고 인터넷도 들여다보면서 숙제하고, 읽고 싶은 책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잠들기에도 저녁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현재의 직업은 머잖아 대부분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될지 불확실하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한 사실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2017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초중고 학생들의 수면시간을 조사하였는데, 6시간도 안 자는 중고생이 50.1%, 고등학생은 41%나 되었다. 이전의 세대보다 청소년들은 더 불평등한 사회에서 못 자고 못 쉬고 공부만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다 해 줄게. 그저 공부만 잘하면 돼”라는 압박에 많은 청소년들은 자신을 성적순에 따라 이미 불행하고 망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이명박정부 초기에 청소년들이 거리에 나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라고 외쳤던 목소리는 불행히 지금도 유효하다. 2009년에 학교생활만족도가 24.3%에서 2019년 38.0%로, 삶의 만족이 26%에서 43.2%로 늘었다는 데에 안도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도시와 농산어촌에 사는 청소년들의 다른 일상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다른 일을 해보거나 한눈을 팔고 세상을 두리번두리번 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도시의 청소년들이 학교 밖에 갈 데라고는 노래방과 피시방이 고작이다. 돈 있으면 쇼핑 하거나 영화를 본다. 얼마 전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우리 모두에게 생각해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 드라마는 상류층의 학업에 대한 엄청난 집착과 고도의 학업관리가 아이를 몰아세우고 가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준 수작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드라마를 다 본 어느 부모들은 우리도 저렇게 코디를 수십억 들여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 못해서 우리 아이가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니 같은 드라마를 봐도 어쩌면 이토록 다를까. 누구를 탓하랴. 

도시의 청소년들은 학업 부담과 시험에 시달리면서 학교와 학원 외에는 다른 곳에 갈 기회도,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 공부는 흥미롭고 인간과 세계,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예민하고 여유가 없으며, 누가 뭐라 하면 날카롭게 반응하고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풀어 학교폭력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리를 지어 조금 다른 친구를 은따 시키거나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엎드려 있거나 심지어 집안에 은둔해있는 청소년들도 있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청소년들이 줄어들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현상에 교사도 학부모도 당혹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오늘날 만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입시경쟁과 학교폭력, 사교육의 번창과 같은 흔히 말하는 교육문제들은 주로 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농산어촌에서는 한 반에 몇 명 되지 않고 학급 수도 작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이름과 가정형편까지 교사들이 잘 안다. 학원이 없어서 늦게까지 다닐래야 다닐 수도 없다. 학교의 도서관과 시설도 잘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신의 생활이 답답하고 뒤처져 있고, 별 볼일 없다는 생각에 도시로 갈 기회를 꿈꾸며 탈출하려고 한다. 돈 벌러 도시에 간 부모를 기다리며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상당수가 조손가정과 다문화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자기도 언젠가 떠날 수만 있다면 도시로 떠나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도시로 가면 어떤 미래가 그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다행히 올해 귀농귀촌 하는 젊은이들이 늘었다는 기사는 도시의 한계를 드러내며 농촌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짐 로저스의 이야기를 빌지 않아도 21세기 첨단산업이자 4차 산업혁명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 농업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깨달음, 인정과 대화
학생들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중한 존재이며 삶이란 누리고 살 만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고 해보는 일이 많아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마. 공부만 해. 나머지는 내가 다 해 줄게.”하는 어른들의 말이야말로 청소년들을 매우 힘들고 무기력하게 하고 삶의 의미와 성취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 말고는 어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 밧줄로 책상에 묶여있는 신세나 다름없다. 

늘 바빠서 쫓기듯 사는 청소년들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도전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부모와 교사들이 기다려주고 믿어주며 아이가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가도록 인정해준다면 관계는 편안하게 이어질 수 있다. 힘든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 청소년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판단해도 어른들이 단정하여 야단치지 말고 “왜?” 그런가를 묻는다면 뜻밖의 답을 들을지도 모른다. 집안일도 같이 하고 요리도 하고 심부름도 보내고 가족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주관적인 행복지수가 내내 꼴찌인 것은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부족하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즐겁게 일 하는 아이들, 평화로운 마을공동체 
학생들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시킨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제가 하고 싶어서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어 집중하여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면서 한다. 

이전에 내가 있던 중학교에서 청양으로 하루 농촌봉사활동을 떠난 적이 있었다. 버스 두 대로 80명 모집을 했는데, 하루 만에 마감이 되었다. 주변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과연 힘든데 가려고 할까 하는 우려를 했는데, 왠걸. 수업을 빼먹고 간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아이들은 신이 나서 서로 일하러 가겠다고 했다. 특히 활동적이고 가만히 있지 못하여 야단을 많이 맞는 학생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미리 청양의 농민단체와 이야기하여 열 집을 신청 받아 학생들이 여덟 명씩 한 모둠을 이루어 들어갔다. 비닐을 제거하고 고추를 따고, 콩 껍질을 까고, 무거운 물건을 날랐는데, 학생들은 교실에서보다 훨씬 집중하여 일하고 참 즐거워했다. 중간에 새참을 먹고 웃으며 장난치다가 다시 일을 하고, 저녁은 음식점을 전세 내다시피 하여 시끌벅적 맛있게 먹고 올라왔다. 교실에서는 천덕꾸러기처럼 수업 방해하고 교사에게 대들던 학생들이 거뜬하게 일하며 기뻐하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작년에는 예산의 사과농장에 가서 사과를 땄다. 흠을 내면 안 되니까 사과는 조금만 따고 상자를 사과나무 아래 나르는 일을 한참 했다. 중간에 사과는 원 없이 먹고 나중에 한 봉지씩 싸줘서 선물까지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한참 일하다가 힘들었던 한 학생은 “학교 가고 싶어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라고 말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학생도 자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많은 대안학교에서 노작교육을 하고 농산어촌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일을 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연을 닮는다. 언젠가 변산공동체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 둘을 보낸 적이 있다. 그 아이 둘 다 거기서 농사일 하며 제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바느질도 하고 흙집도 짓고 빨래도 하면서 지리산도 가고 계절학교도 진행하였다. 그 애들은 상처를 딛고 제 앞가림을 하면서 남다른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고 있다. 자연 속에서 땀 흘리는 농사일이 이처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워주었다고 생각한다.

올해 봄에 상영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도시에서 상처받은 젊은이들이 농사일도 하고, 맛있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만들어 먹으며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자신을 회복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야기이다. 싱싱하고 풋풋하고 맑고 밝은 자연 속에서 이웃과 나누며 사는 평화로운 마을공동체가 우리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희망찬 터전이고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반도 평화의 봄이 오듯이,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농사를 지으며 먹을 것을 해결하고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평화마을을 꿈꾸어본다.

 

어린이들의 모내기 - 출처 : 피스레터 통권8호_학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심은보


정진화ㅣ빛고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교육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청소년들이 행복하게 웃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청소년문화연대 킥킥을 만들어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평화마을만드는사람들 모임에 참여하여 파주에 첫 삽을 뜨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8. 15. 08:00

[한반도평화읽기]

 

판문점 회동 이후, 희망과 과제

 

김동엽

 

사상 첫 남북미 판문점 회동이 있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잠시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질 것 같았던 북미 정상 간 만남은 1시간 가까운 대화로 이어졌다. 사진 한 장 남길 것 같았던 상봉은 2~3주내 북미 실무회담 재개라는 성과까지 도출했다. 무언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던 기대와 희망이 가득했건만 북미 실무회담조차 언제 열릴지 깜깜 무소식이다. 말은 풍년인데 실제 수확된 것은 없다. 한미연합 연습은 계획대로 실시되었고 이를 핑계로 판문점 회동 이후에만 북한은 5차례 미사일과 방사포를 쏘아 올렸다. 2018년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 한반도의 시계는 2017년 11월 29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을 발사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한반도 평화는 살아있다...
2019년 한반도는 지난 2018년을 생각하면 평화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대와 달리 북미대화가 정체되어 있고 남북관계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연일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소식이 끊이지 않았던 2017년 이전을 떠올리면 지금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말은 언감생심이다. 어려웠던 시절 생각은 못하고 희망과 욕심이 큰 탓인지도 모른다. 2018년 남북이 함께 만들어낸 ‘판문점 선언’과 ‘평양선언’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중한 선물이었다.

지난 1년여를 되돌아보자. 2018년에만 정상 간의 만남이 세 차례나 이루어졌다. 남북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 남북을 오가는 모습과 도보다리 환담 장면, 문대통령의 평양 시민을 향한 연설이 전한 감동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양 정상은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천명하고 남북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완화와 전쟁위험 해소,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나갈 것에 대해 합의했다. 남북한 주민들이 삶 속에서 70여년의 전쟁의 공포를 떨치고 비로소 평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1년 사이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싱가포르/하노이)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남북 정상의 만남이 남북관계 복원과 정상화를 넘어 비핵화 협상과 북미관계 정상화 과정을 추동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북관계는 이제 더 이상 북핵문제와 북미관계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는 길라잡이다.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를 뒷받침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여는 열쇠와 같다.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간 협상 동력을 유지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버팀목임엔 틀림없다. 

비록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의미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하노이 이후 우리 정부의 노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북한으로부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까지 굴하지 않았던 끈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남북미 판문점 상봉이라는 명장면이 가능했다. ‘판문점 선언’ 이후 시간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 가는 노력의 과정이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반도 평화번영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길고 험한 과정인 만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먼 길, 오르막의 시작점에 서다.
우리 속담 중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단련이 되어 더 강해진다는 뜻이다. 쉼 없이 내달릴 것 만 같았던 남북관계가 경사가 심한 오르막 앞에 다다랐다. 통일각 2차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먼 길을 떠나오며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닐 것이다. 판문점 선언 이후에도 수많은 장애물을 넘고 오르막을 올랐다. 그러나 진짜 오르막은 지금부터이다. 오르막에 오르기 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그 동안 남북이 서로를 얼마나 생각해 왔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해 ‘판문점선언’ 전후 남북관계가 달라졌다면 이제는 판문점 상봉을 기점으로 또 한 번 달라지고 진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적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지난 시간 하고자 한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간극이 컸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기충족적 예언은 실현 가능한 정책과 전략수립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벤트성 해법과 단기적 치유법에는 한계가 있다. 남북관계가 먼 길이라면 정치적 고민을 앞세워 가시적인 성과에 연연하거나 급급할 필요는 없다. 

판문점 회동으로 북미 간 대화 채널이 다시 열렸다고 남북관계까지 정상화됐다거나, 우리의 중재자 역할이 복원됐다는 당위론은 우리의 희망일 뿐이다. 중재자 역할에 대한 미련과 집요함보다 냉정하고 신중하게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를 만들 담대함이 필요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북한의 변화와 선택을 염두에 두고 남북관계의 자율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노력과 함께 정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깨동무’ 할 용기
판문점 만남 이후 한반도 정세는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중요 정치 일정으로 9월 유엔총회가 열리고, 10월 1일 중국 건국 70주년과 10월 6일 북중 수교 70주년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이 방중 해 북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그 이전 북미실무회담이 열린다고 당장이라도 북미정상회담이 먼저 열릴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9월 평양선언에 합의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답방으로 4차 남북정상회담도 가능성이 열려있다. 시진핑 주석의 서울 방문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북한을 향한 일본의 움직임도 지켜봐야 한다. 11월에 교황이 일본을 방문하는 만큼 북한 방문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대한 국면의 해결을 위해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향후 많은 정치 일정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어떤 순서로 진행되어야할지 상상력을 발휘해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그러나 상상력과 공상력은 다르다. 특히 외교와 안보의 영역은 상상력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여기에 머물러 있고 지금까지도 금강산을 다시 가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촛불을 밝힌 것도 상상력이 아니라 시민들의 용기였다. 이제 정부차원의 일방적 Top-down만을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민간차원의 남북관계 재정립을 위한 Bottom-up 접근 방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남북이 당사자로서 한 번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용기가 아닐까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오르막은 조금 힘들어도 남북이 어렵게 잡은 손 놓지 않고 분단 않을 용기를 가진다면 너끈히 이겨낼 길이다. 아무리 어렵고 험한 길이라도 남과 북이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갈 수만 있다면 정말 즐겁고 행복하지 않을까? 

 

 

남북미 판문점 회동


김동엽ㅣ현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며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방부/통일부/해양수산부 정책자문위원과 북한연구학회 총무위원장을 맡고 있다. 북한군사와 국방안보문제 전문가로 연구와 함께 대중강연과 언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8. 14. 08:00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평양냉면, 서울냉면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차가운 국물에 면을 말아먹는 음식문화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음식 문화와 온돌의 뜨거움과 여름 더위를 견디기 위해 찬 육수에 국수를 말아먹는 냉면이 탄생한 것이다. 2018년은 몇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뜨거웠고 차가운 냉면은 주연급 조연으로 한민족은 물론 전세계인의 이목을 받았다. 서울의 냉면집들도 덩달아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근 들어 북한 이탈 주민들의 냉면집 창업도 이어지고 있다. 평양의 냉면 문화는 건재하고 서울의 냉면 문화는 세련되고 다양화되었다. 평양냉면에 견줄 실체가 서울냉면으로 구축되었다. 

해방 전까지의 평양냉면
한민족 최초의 냉면 기록은 조선 중기의 문인 장유(張維, 1587~1638)의 문집인 『계곡집』(谿谷集, 1643)에 실린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紫漿冷麵)라는 시에 처음 등장한다. 정약용은 「장난 삼아 서흥 도호부사 임군 성운에게 주다(贈瑞興都護林君性運), 그때 수안 군수와 함께 해주(海州)에 와서 고시관(考試官)을 하고 돌아갔음」(1797년)이라는 긴 제목의 시에 '시월 들어 서관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이중 휘장 폭신한 담요로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냄비에 노루고기 전골하고, 무김치 냉면에다 송채무침 곁들인다네'라는 시에서 평안도의 냉면 풍정(風情)을 적었다. 1849년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시풍속집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 국물에 말고 돼지고기와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또 여러 가지 채소,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 썬 것, 기름, 간장을 국수와 섞어 비빈 것을 ‘골동면’이라 부른다. 관서지방의 냉면이 가장 맛이 있다.'고 적고 있다. 관서(關西)는 평안도 지역을 말한다. 지역은 물론 내용에서도 여기 언급한 냉면은 분명 평양식을 지칭한다. 

 

평양냉면

19세기 말 평양냉면집에 관한 기록은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한다. '밤에는 대동문 옆에 가서 면을 먹었다. 처음에는 주점 주인이 주는 대로 소면(素麵)을 먹다가 나중에는 육면(肉麵)을 그대로 먹었다. '(『백범일지』 1899년 5월) 19세기 말에 평양 대동문 주변에 냉면집들이 제법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19세기 후반의 평양 모습을 그린 회화식 지도인 기성전도(箕城全圖)에는 대동문 옆 동포루(東砲樓) 앞에 '냉면가(冷麵家)'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 옥류관과 그리 멀지 않은 대동강변 성 안쪽이다. '평양냉면은 특히 평양의 명물인 바 부민식료(府民食料)중 제일 중요한 부분을 점령하였으니 ‘평양냉면’이라는 것은 사시1년을 공통으로 식용한다. 그에 따라서 연산액(年産額)도 상당하니 실로 50만 원에 달한다.'(동아일보, 1926년 9월 11일자) 

1936년판 <평양상공명록>에 등재된 평양냉면집들은 16곳이다. 1940년판 <평양상공명록>에는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의 회원이 60명으로 나온다. 1937년 8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평양부 내에 “80여 냉면업자는 일제히 냉장고를 사용하도록 엄달할 터이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평양상업조사(1939년)에는 평양의 전체 음식점 578개 가운데 냉면집이 127개로 22%를 차지 하는데 단일 업종으로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9월 1일자 <개벽> 잡지에는 ‘평남은 냉면국’이란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해방 이전에 평양냉면에 관한 기사는 제법 등장한다. '냉면이란 어디 것 어디 것 합니다마는 평양냉면같이 고명한 것이 없습니다. 이곳 냉면은 첫째, 국수가 좋고 둘째, 고기가 많고 셋째, 양념을 잘합니다. 게다가 분량조차 많고 값조차 눅은싼데야 더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동아일보, 1926년 8월 21일, 「평양인상, 요리비판 평양냉면」)

'겨울에 평양냉면이라면 얼른 동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앉아 덜덜 떨면서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먹는 맛은 도저히 다른 데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무슨 특별히 담그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오. 평양은 물이 좋고 웬일인지 다른 지방보다 무 맛이 다른 데다가 일기가 차가우니까 한번 익은 맛이 변하지를 아니하므로 그 맛이 그대로 보존되어 씩씩한 맛을 잃지 않는 것뿐입니다.' (동아일보, 1926년 8월 21일)

분단 전의 기사를 보면 평양냉면은 순메밀면에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육수나 겨울에는 주로 동치미 국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분단 이후의 냉면에 대한 기록은 1960년 옥류관 건설 이전에는 찾기 힘들다. 이후 북한에서 옥류관은 '민족 료리의 원종장(原種場)'(로동신문, 2011년 2월 4일자)으로 평양냉면은 '인민이 사랑하는 민족 음식'이 된다. 평양냉면이 평양과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오랜 전통을 지닌 음식이었다. 둘째는 김일성과 김정일 위원장의 냉면 사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1995년 9월 21일자 로동신문에 실린 '고유한 민족 음식 평양랭면'이란 기사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최근에도 어버이 수령님(김일성)께서 생전에 평양랭면은 순메밀 가루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시였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바로 평양랭면의 특징이며 자랑이라고 가르치시었다. (중략) 고유한 민족 음식인 평양랭면은 메밀 껍질을 지내(너무 지나치게) 벗기지 말아야 구수한 메밀 냄새가 잘 풍기며 육수물도 시원하게 잘 만들어야 고유한 맛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먹을 때에도 식초를 국수 발에 친 다음 그것을 육수 물에 말아야 고유한 제 맛이 난다.' 당과 수령, 인민이 사랑하는 평양냉면의 지위는 평양냉면이 단순한 음식을 넘어섰음을 말해준다. 때문에 평양냉면은 남북정상회담의 상수가 되었다. 평양냉면은 해방이전과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1990년대 중반까지는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국물을 섞은 육수와 동치미를 사용하고 면발은 메밀을 주로 사용했지만 고난의 행군과 김정일 위원장의 감자 권장 정책에 의해 메밀에 감자나 고구마 전분이 섞인 냉면이 일반화되었다. 

 

서울냉면

 

서울냉면


서울냉면의 시작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19세기에 여러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서울의 냉면 역사는 오래되었고 평양과는 별도로 시작되었다. 18세기 무렵의 한양은 상업의 발달과 얼음과 쇠고기, 돼지고기가 일반화되어 냉면 문화의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유만공(柳晩恭, 1793~?)이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세시풍요』(歲時風謠, 1843)라는 시집에도 냉면이 등장한다. '냉면집과 탕반(湯飯), 장국밥집이 길가에서 권세를 잡고 있어, 다투어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마치 권세가 문전처럼 벅적인다.'고 적고 있다. 냉면하면 고종 임금이 유명하지만 순조 임금의 이야기도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88)이 중국과 조선의 사물에 관해 기록한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 「춘명일사」(春明逸史)편에는 순조 임금의 냉면 이야기가 나온다. 

‘초년(1800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순묘(純廟), 순조는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가지고 왔으므로 임금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 일은 측근 시신(侍臣)이 자못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다.’ 

19세기 말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지규식(池圭植, 1851~?)이 20년간 쓴 『하재일기』(荷齋日記, 1891~1911)에도 1895년 4월 12일, 20일, 24일 연이어 냉면을 먹은 기록이 있다. 19세기 말엽 냉면은 서울에서 매우 보편적인 외식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서울에는 무교동의 ‘혜천옥’, 관철동의 ‘평양루’ 등이 유명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북한 실향민들이 대거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 서울의 평양냉면집들은 평양에서 온 냉면 본가에게 맛에서 밀리고, 실향민들의 모임 장소로서도 북한 출신 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몰락하게 된다. 대한민국에 평양냉면이 다시 번성하게 된 것은 1972년 8월 30일에 이루어진 남북적십자 본 회담을 전후로 신문과 방송이 북한 관련 기사를 봇물처럼 쏟아내면서부터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실향민이 아닌 대한민국 출신의 셰프들이 냉면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온 실향민 중심의 평양냉면 문화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평양의 평양냉면이 식량난과 민족 음식의 정체성이란 기준의 한계에 봉착한 것과 달리 서울의 평양냉면은 여러 가지 냉면 문화가 공존하는 속에서 새로운 발상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육수의 전통인 양지육수를 기본으로 해방 이후 정착한 실향민 냉면에, 최근에 북한을 이탈한 주민들의 요즘 북한식 냉면까지 서울의 냉면은 다양하다. 최근 들어 메밀을 몇 가지 섞는 면발에 투플러스 쇠고기로 만든 국물과 꾸미를 장착한 완전히 새로운 미식 냉면이 연착륙하면서 이제는 서울냉면이라는 선언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 조성되었다. 평양 사람 서울냉면 먹고, 서울 사람 평양냉면 먹는 날이 어서 오는 즐거운 상상으로 더운 여름을 이기련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피스레터(글)2019. 8. 13. 17:00

[평화의 마중물]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3)

평화를 향한 열정이 우리를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한다 

 

박종호

 

북아일랜드에 온 지 다섯째 날, 1월 17일, 코리밀라를 떠나는 날이다. 지난 밤 데릭 윌슨 교수님 집에서 받은 감동이 남아서일까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두 해 만에 다시 와 본 이 곳을 또 떠나야 한다. 아침을 가볍게 먹고 어제 댄 가즌 선생님이 소개한 평화축구(Peace Soccer)를 잔디밭에서 해 보기로 한다. 평화축구의 목표는 이기고 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우리 편 저쪽 편이 어디라도 잘하면 손뼉을 쳐 주어야 한다. 선수를 바꾸는 일도 자유롭다. 댄이 심판을 맡고 우리는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규칙은 서로 협력하고 또 협력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기고 싶은 마음은 숨기지 못한다. 드디어 내 발끝에서 흘러간 공이 상대편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손흥민 선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만세를 부르는데, 갑자기 상대방 선수들도 같이 달려와서 어깨동무를 하고 흥겹게 축하해 준다. 이겨야 한다는 마음보다 같이 좋아하는 운동이라니! 잠깐 충격에 사로잡혔다가, 마치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모두 참 잘 했다며 환하게 웃으며 이끌어 주는 댄 가즌 선생님과 둘러서서 웃으면서 축구를 마쳤다. 돌아가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평화축구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구도 공부도 모두 전쟁이고 이기는 사람만이 기억에 남고 진 사람은 패배자로 낙인찍는 세상에서 평화축구는 분명 큰 흔들림을 가져 올 것이라 생각한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사진을 찍느라 한바탕 웃고 떠들고 나서 짐을 꾸려서 떠날 준비를 한다. 

 

평화축구


데릭 박사와 김동진 박사의 안내로 데리 오크그로브(Derry Oakgrove)통합학교와 데리(Derry), 아일랜드 국경선 방문을 하려고 출발하였다.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 넘게 달려서 오크그로브 학교에 닿았다. 차에서 내려서 춥고, 미끄러운 터라 발을 조심해 가며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학교는 초등, 중등 통합과정으로 운영하고 있고, 한눈에 보기에도 시설이 참 훌륭해 보였다. 먼저 강당에 들어가서 안내를 받았는데 마침 오후와 저녁에 있을 연극 공연을 위해 공연 장비를 설치하고 있다. 전문가들 도움을 받아서 장비를 설치하는 곁에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방문한 우리들을 맞아 주려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눈다. 모둠마다 서너 명 학생들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우리가 던지는 질문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활기차고 유창하게 대답이 이어 나온다. 

잠깐 오크그로브 학교와 같은 통합학교와 통합교육에 대해서 살펴보자. 북아일랜드에서 통합교육은 신교도와 구교도의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서 이를 초등, 중등 교육에서 실현하자는 움직임으로 출발하였다. 서로 다른 종교와 가치관을 안고 자란 아이들에게 평화, 화해, 공존의 가치를 같은 공간에서 일상적인 만남을 공유하면서 익히도록 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와서 교육학자들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통합교육 운동이 번져나갔고, 2016년 현재 63개의 초,중등 통합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학교에 다녀야 할 어린이, 청소년의 7% 정도인 22,509명 정도가 통합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북아일랜드 통합교육위원회에서 학교 설립과 행정 지원, 교사 연수와 프로그램 지원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이후 오히려 흐름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전환학교, 공유교육 같은 흐름이 더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어제 밤 데릭 윌슨 교수님 집에서 만난 코리밀라 공동체 어른들은 모두 걱정하는 얼굴로 이런 흐름은 서로를 만나게 하고 통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분리하고, 쉽게 통치하려는 정치가들의 편의주의에서 나온 흐름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통합교육은 장애를 지닌 학생들을 일반 학교 교실에서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말이다. 북아일랜드에서 쓰는 통합교육과는 결이 다른 말인데, 보태어 말하면 우리나라도 남과 북이 다가 올 화해의 시대에 교육에서 바로 맞닥뜨려야 할 과제가 바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다가올 가까운 과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곳이 바로 북아일랜드 통합학교인 셈이다.)

다시 오크그로브 학교 학생들과 나눈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 방문단은 학생들에게 통합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만족하는지, 어떤 수업을 받고 있는지, 앞으로 대학에 가고 싶은지를 물었다. 고3 과정이고 ‘모범생’ 표시인 배지를 가슴에 두세 개씩 단 학생들은 정말 씩씩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수업 시간은 35분씩 10시간이고, 마지막 학년 학생들은 두 시간을 연달아 쉬기도 한다고 한다. 

“공부 말고 학생들 스스로 하는 것은 없나요?”
“학교의 학생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역사 수업 시간에 갈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배우고 있나요?”
“수업 말고 평화에 대한 활동, 방과 후 활동 같은 것을 하고 있나요?”
“앞으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요?”
“체육 수업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질문은 이어지고 학생들 대답도 바로 나왔다. 내가 던진 역사 시간 수업에 대한 대답을 옮겨 본다. 

“고학년(고등 과정) 역사 수업에서 남북 아일랜드의 갈등 역사를 배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랐기 때문에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나이가 좀 들어서 이 갈등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교육 내용을 묻고 싶었는데, 다음 일정 안내가 나오는 바람에 여기서 멈추었다. 대답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서 우리 교실 학생들 표정이 자꾸 겹쳐 떠오른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고등학교 3학년들에게 이런 여유가 넘치는 표정을 보는 날은 어쩌다 가끔 정말 드물게 만난다. 아, 졸업식 날은 밝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어지는 대화는 놓치고 말았다. 처음 이 학교에 들어 올 때 학생들을 위해서 사진 촬영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어느새 우리 선생님들은 학생들 그림이 그려진 벽이며 내용들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학생들도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을 같이 찍어 준다. 이 학교는 북아일랜드에서 대학 진학하는 학생들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하고, 학생들도 자부심이 대단해 보인다. 북아일랜드 통합학교가 모두 이 학교처럼 운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그래서 이곳 교육자들도 고민이 깊어 보인다. 

 

통합학교 방문 모둠 활동 


오크그로브 학교를 나와서 간 곳은 아일랜드 국경선이다. 국경선 하면 총을 든 남북의 병사들이 말없이 마주 보고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아일랜드 국경선은 좀 싱거운 곳이다. 그냥 남북으로 이어진 길에 차들이 씽씽 달리고 그 한켠에 여기가 남북을 나누는 경계선이라는 표지만 덜렁 서 있다. 우리는 그래도 사진은 남겨야 한다며 달리는 차들 옆에서 조심조심하면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브렉시트’ 이후 다시 이 국경선에 장벽을 쌓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총길이 499km, 도로만 275개, 날마다 국경선을 넘어서 출퇴근하는 사람 3만 명, 여기에 다시 장벽을 세우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다시 장벽을 마주하고 대결의 시대로 돌아 갈 수는 없다. 

국경선 근처에서 있었던 슬픈 역사 이야기를 듣다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러 음식도 나눠 먹었지만, 기네스 생맥주를 높이 들고 평화를 위해 건배하는 일은 빼먹지 않았다.

 

데리 성벽 위해서 시내를 바라본 모습 


우리는 점심을 먹고 바로 버스에 올라 데리 방문에 나섰다. 2017년에 왔을 때 데리에서는 하루 묵으면서 천천히 걸어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고, 이곳에서 평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기도 했다. 오늘은 저녁 일정 때문에 서둘러서 17세기에 만들어진 데리 성벽을 걸으면서 1972년 1월 30일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성벽 아래 건너다보이는 벽화와 상징물, 그리고 성벽 뒤편 현대적인 건물로 가득한 런던데리(영국) 마을을 대비하면서 1998년 평화협정 때까지 3천 5백여 명의 사망자와 더 많은 부상자를 남긴 대립과 갈등의 상처를 눈으로 보았다. 놀라운 것은 그 대립과 갈등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평화와 화해를 염원하고 있고 다음 세대들이 이 역사의 현장에 와서 그렇게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느껴보기를 바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데리 시내를 걸어서 도착한 곳은 포일강 양쪽을 이어주는 피스 브리지(Peace Bridge), 다리 이름처럼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남쪽과 북쪽이지만,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오가면서 오랜 시간이 덧쌓여서 조금씩 갈등과 대립이 풀려가는 꿈. 그 꿈의 현장이기도 했다. 다리 한 가운데서 다 같이 사진을 찍고 다시 벨파스트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벨파스트에 돌아와서 한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집 떠나오면 집밥이 그립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한 편이라 허겁지겁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저녁 책잔치에 쓸 꽃다발을 구하러 거리로 나섰다. 

오후 7시, 벨파스트 코리밀라 사무소에서 평화 책잔치(Book Concert)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시민사회(The Korean Peace Process and Civil Society, 김동진. 2019.)가 시작되었다. 좁은 공간이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 박사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김동진 박사와 같은 대학에서 동료로 일하는 미첼은 아일랜드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와 연구에 매진하는 김 박사를 칭찬했고, 다른 연구자는 할 수 없는 전문성 깊은 성과를 이렇게 출판해서 평화프로세스와 시민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소감을 말하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다룬 주제, 한국에서 지속된 평화구축 과정을 다루고, 어린이어깨동무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노력을 다룬 점, 평화학의 개념을 잘 소개하고, 적용하려고 한 점에서 크게 기여하였다고 말했고, ‘교수들은 정작 책을 많이 읽지 않는데, 이 책은 꼭 읽을 만하다.’고 말을 맺었다.

 

책잔치 모습 


김동진 박사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란 말을 연거푸 하면서 감격스런 표정을 짓고는, 코리밀라 식구들, 트리니티 컬리지 학생들, 서울에서 온 어깨동무 선생님들을 불러주었다. 책을 쓰면서 아일랜드와 한반도를 나란히 올려놓고, 더욱이 ‘한국을 잘 모르는’ 서양의 학자들에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영어로 말하고는 다시 서울에서 온 우리를 위해 우리말로 다시 말하고, 통역을 맡아 준 댄 가즌 선생님에 대한 칭찬도 했다. 마치면서는 ‘책 바우처’를 선물로 나누어 주기도 하셨다. 

이어서 질의응답이 이어지고, 마치기 전에 데릭 교수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때로는 즐겁지만 고립되고 힘든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를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헤어지기 전에 한 문장씩 나누자.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들어도 어떤 것이 우리가 지치지 않고 일을 하도록 하는 힘이 되나요?’ 물으셨다.
 
어린이어깨동무 김윤선국장이 먼저 답을 했다. ‘안녕, 친구야!’ 어깨동무에서 즐겨하는 인사말을 소개하면서 남북의 어린이들이 만나서 친구가 되자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알시티(R-city)를 이끄는 알란이 말을 받았다. “저는 평화를 위한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이 없으면 금방 지칩니다. 저는 청소년들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 열정을 보고, 그 열정이 저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한국에서 온 분 누가 더 말해 줄래요? 그러면서 데릭은 나에게 눈짓을 보내왔다. 나는 엉겁결에 일어서야 했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을 선생님들과 같이 해 왔고, 그 인연으로 이번에 두 번째로 북아일랜드에 왔습니다. 헌신적이고 활동적인 여러분들을 만나서 반갑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한반도 평화가 오기까지 그날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남과 북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운동에 힘껏 참여하겠습니다.” 버벅대며 자리에 앉았다. 

책잔치는 근처 펍으로 옮겨서 뒤풀이(미첼 교수는 한국에서 온 분들을 위해 순서에 넣었다고 했다.)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신기하게도 아일랜드 분들은 딱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났고, 남은 기네스는 나와 몇 사람이 독차지 했다.ㅋㅋ 호텔로 돌아와서 댄 가즌, 심은보, 김경옥 선생님과 같이 맥주를 더 마셨다. 최관의 교장선생님 지갑을 좀 털었는데, 다음날부터 꽤 오래 시달릴 만한 일을 저지른 셈이다. 벨파스트에서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더블린으로 가야하고, 가슴에 남은 감동도 안고 가야 한다.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