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9.02.20 01:01

[이슈]


신년의 희망과 다짐

평화로 한 걸음 더평화를 위한 모두의 어깨동무!

 

정영철


2018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평화와 번영의 첫 발을 뗀 한 해였습니다. 전쟁의 위기를 딛고 남북의 정상이 세 번씩이나 만나 전쟁없는 한반도를 선언했고, 70여 년을 적대관계로 대결해왔던 북과 미국이 만나 평화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합의하였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2018년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거대한 발자국을 뗀 해로 역사에 기록되기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새로운 희망의 2019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졌듯이, 북은 2019년 신년사를 통해 북미간 회담은 물론이고 남북간에는 화해와 협력을 더욱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습니다.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김정은 위원장은 연초에 중국을 방문하여 더욱 적극적인 외교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고,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도 벌써부터 일정과 장소 문제를 중심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의 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고, 올해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고 하여, 평화를 향한 행보를 지속할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올 한해도 남북 그리고 미국과 중국을 엮는 드라마같은 변화가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한반도 평화를 향한 한 걸음 더 의미있는 진전이 되리라고 기대됩니다.

 

다가오는 2차 북미 정상회담과 서울에서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면, 지금의 답답한 교착상태가 풀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난 시기 남북관계의 단절을 상징했던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도 북의 비핵화에 발 맞추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북제재가 해제되고 남북의 협력이 차질없이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올해 남북이 밝힌 신년사와 최근의 북중, 북미간 움직임을 통해 그럴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북관계는 평화와 번영으로 한발 더 내딛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움직임이 모두 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중심이 되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고, 앞으로도 더 적극적인 발걸음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한반도의 평화는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정부의 평화를 위한 발걸음에 민간도 함께할 때 더 공고한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한 해가 모두를 당황스럽게 할 정도의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민간이 미처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면, 올 해는 민간도 그 길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 평양을 방문하고자 하는 희망과 단절되었던 북과의 교류와 협력을 말하지만, 이 길을 가장 확실하게 열어젖히는 방법은 한반도에 평화가 공고화되고, 남북의 공존과 번영에 대한 가치가 확고해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 곳곳에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보다는 여전히 대결과 적대를 원하는 세력, 북과 미국의 만남에 불만을 가지는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남북의 정부, 미국 그리고 중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변화의 길목에서 이들이 언제든지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민간이 평화를 위한 여정에 든든한 받침대가 되고 전 국민이 평화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올 해 우리의 과제는 평화로 한 걸음 더: 평화를 위한 모두의 어깨동무!’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올 한해 <어린이어깨동무>도 이 길을 변함없이 걷고자 합니다. 끊어졌던 대북 인도적 지원의 재개를 비롯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펼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길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어깨동무의 평화교육과 평화활동을 강화할 것이며,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북녘의 어린이들을 위한 지원활동도 더욱 창의적이고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전개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 회원분들과 어깨동무를 지지하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어깨동무의 모든 회원분들 그리고 어깨동무를 지지하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평화와 번영의 길에서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2019년의 새해 인사를 대신합니다. 흔히들 꿈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실현된다고 합니다. 새해가 벌써 한 달을 넘긴 이 시점에 이 평범한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봅니다. 모두가 어깨동무하는 그 길에 평화와 번영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2019평화를 위한 모두의 어깨동무의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가정에 올 한해를 상징하는 복된 돼지가 한 아름 안기길 바라면서, 평화와 번영의 길에서 두 손 꼬~옥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9.02.20 00:54

[시선-한반도 평화읽기]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

평화는 만남과 용기두려움을 감소시키는 행동

박종호


북아일랜드에 온 지 셋째 날, 115, 코리밀라에 가는 날이다. 나는 20172월에도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 연수에 참여하여 이곳에 온 적이 있다. 두 해 만에 다시 가는 길, 그 사이에 얼마나 바뀌어 있을까, 내가 알아 볼 사람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틀 밤을 묵을 준비를 하면서 짐을 꾸려서 버스에 탄다. 모두 열여섯이 함께 움직이는 터라 부산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버스는 벨파스트를 벗어나 밸리캐슬로 달려간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려서 코리밀라에 도착하자, 데릭 윌슨 박사, 포드릭 오투마 대표가 반갑게 맞아 준다. 데릭은 서울에 오셨을 때 파주 북한군 중국군 묘지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그때를 기억하면서 반가워해주셨다. 어깨동무와 인연이 깊은 자원봉사자 오진의 선생도 반갑게 만났다.

 

짐을 풀고, 등 뒤로 바다가 보이는 큰 방에 나는 그 때 그 자리에 다시 앉아서 포드릭과 인사를 나누었다. 포드릭은 코리밀라의 역사를 찬찬히 소개하고, 둘레를 돌아다니면서 공간에 대한 사연을 풀어놓는다. 이곳에 평생을 바친 봉사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원, 우리가 머무는 곳의 벽에 걸린 자전거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으면서 코리밀라 공동체가 걸어 온 길이 그저 그런 시간이 지나가서 쌓여 온 곳이 아니고 열정과 헌신, 지치지 않고 느리지만 목표를 향해 걸어 온 이들의 땀과 기도가 일군 곳임을 알았다.

 

코리밀라(Corrymeela) 공동체는 북아일랜드의 혼돈과 대립, 갈등의 시기에 젊은이들이 서로 다른 이들과 만나서 풀어가는 공간을 마련하는데서 출발하였다. 경치가 좋은 곳에, 바깥에서 일정하게 분리 고립된 곳에서 만남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이 주는 이점을 살리고, 이를 공간을 가꾸고 만드는 일에도 어김없이 실현하고자 한다.





포드릭은 강의를 시작하면서 바로 우리들에게 돌아가면서 이곳에 와서 지금 마음에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나누자고 한다. 이 공간에 와서 무슨 궁금한 것이 생겼나? 잠깐 생각하고 나는 차례가 되자 두 해 전에 이곳이 왔을 때는 바다가 보이는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오늘 다시 와서 둘러보면서 이곳에서 꿈을 이루고자 애쓴 분들의 뜻이 곳곳에 스며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벨파스트에서 북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화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심지어 북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를 지원하는 경제 지원 프로젝트 제목이 ‘Peace’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평화가 돈이라는 점에도 신기하고 놀랐다. 정말 내가 아는 평화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내 이야기를 종이 칠판에 적은 데릭 윌슨은 “WHAT IS PEACE?”라고 적었다.

 

자유에 대해, 공부에 대해, 관계에 대해 같은 물음이 이어지고, 큰 종이 두 장에 가득 질문을 적은 뒤에 포드릭은 찬찬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람이 만나는 것은 내러티브가 만나는 것이고, 갈등도 그대로 내러티브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궁금증, 호기심(Curiosity)이 배움과 만남에 정말 중요하다. 책 읽기가 호기심을 채우는데 필요하며 읽기에서 상상력, 감수성이 발휘된다. 책을 읽는 일은 상상력을 키우고, 상상력은 사람을 만나거나 할 때 필요한 공감능력을 키우는데 필요하다. 적대적인 사람들이 만나는 일은 서로 다른 내러티브가 함께 펼쳐지고, 위험한 상황이 따르지만, 그래도 여기서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평화로 가기 어렵다. 예를 들면 젠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이 참여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조약을 먼저 맺고 그 다음에 만나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따라서 해라 하면, 그냥 이끄는 것이고, 뜻을 이룰 수 없다.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고, 그 안전한 장소에 모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모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 놓고,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 코리밀라에 모이면 다양한 질문이 나오고, 자기 이야기가 나온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내러티브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퍼실리테이션(촉진자)도 필요하다. 아일랜드, 여기 코리밀라 대화의 공간에는 불을 피우는 장작불, 불태우는 공간이 있다. 장작불은 아일랜드 말로 심장 박동 소리를 뜻한다. 장작불이 타는 소리가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이다.

 

어떤 질문을 갖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이 사람들이 이미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은 뭘까? 이미 갖고 있는 의문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호기심은 지성을 동반한다. 교육활동이나 사회에서 보통 호기심을 많이 가진 사람은 기피하거나, 처벌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평화는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지금 현재평화로운 행동을 하지 않으면 평화로운 미래는 오지 않는다. 우리 코리밀라 공동체는 궁금해 하고, 호기심을 갖는데 용기를 가진 사람들과 지내기를 좋아한다. 그 사람들이 변화를 만든다고 믿는다. 그 사람들이 신뢰받는 사람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을 수도 있다.

 

한편,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지칠 수 있다. 의심도 많이 받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이들을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 평화활동가들을 만나는 공간, 일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이 이 공동체에 와서 쉴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프로그램을 많이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냥 와서 쉴 수 있는 공간, 생각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 권력 관계에서 보면 위험한 사람들이다. 소외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을 동반한 성숙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을 갖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분쟁은 예측할 수 있지만, 오히려 평화는 예측 가능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평화를 얻기 어렵다. 우리가 궁금함을 갖지 못하고, 용기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그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것 때문이다. 앞서 평화는 무엇인가 질문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우리는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져 본 것은 만남이고 용기이고, 어떤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행동이고, 그런 것을 우리가 해 온 것이다.”

 

포드릭은 내가 한 물음, 평화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을 주었다. 한 개의 대답이라고 했다. 다른 더 많은 대답은 나한테 달려 있다. 내가 만나고,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고 찾아가야 한다.




저녁을 먹고 만난 이본 네일러 선생님도 그랬다. 인형극과 평화교육 강의, 인형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잡아서 자기 이야기를 이어간다. 종교 상징물을 들고 상대가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지, 돌아가며 듣다 보니 내 손에 든 달마상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 사람들 사이의 갈등하는 이야기를 인형을 가지고 풀어낼 수 있다. 왕따, 싸움, 소외, 고통을 상대의 처지에서 말하고, 느껴 볼 수 있는 것. , 그래서 인형극이라는 형식을 넘어서 인형극 내용에서 자기 모습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느껴보고 연대하고, 공감해 보는 것. 이래서 인형극과 평화교육이 닿는다. 가슴 절절하게 느끼고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끌어 나가는 이본 네일러 선생님의 내공이 무서울 정도로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내공은 하루아침에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30년 가까이 교실에서 학생들과 살아 온 나는 어떤 내공을 이야기로 내보일 수 있을까? 재작년 서울에서 이본을 만났을 때 그때는 느끼지 못한 놀라운 능력을 보았다. 평생을 특수교육에 애쓰면서 인형을 가지고 만나고 소통하는 일에 전념해 온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은 감동이다.

 

9시 전체 명상 기도 모임에 가 보았다. 동굴 같은 방에 어린이까지 스무 명 남짓 둘러 앉아 기도문을 같이 읽고, 이본 네일러 선생님이 만남, 갈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상황을 가지고 인형극을 보여주셨다. 모두가 숨죽이며 인형극을 보고, 생각을 나눈다. 이본은 앞서 두 시간 강의를 하고, 바로 이어서 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신다. 다 같이 다짐하는 노래를 부르고 헤어졌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살짝 흐려서 별은 쏟아지지 않지만, 거센 소용돌이가 친다는 저편 바다도 고요하다. 그리고 파란 잔디가 자리를 잡은 마당을 천천히 걸어서 밤 숙소로 돌아와 몸은 피곤하지만,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여기 코리밀라에서 느끼는 이 뜨거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타자를 치면서 기록을 한다. 내일도 코리밀라를 이끌어 온 네 분을 만나야 한다. 션 페터스, 쇼나 벨, 콜린 크렉, 데릭 윌슨. 정말 기대가 되는 만남. 궁금한 것을 묻고 또 묻기로 한다. (2019. 1. 15.)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9.02.19 23:54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평화의 북소리를 그리며


 정진헌

 

기해년, 황금돼지해라는 새해가 밝았습니다. 독일에서 새 해 첫날은 카운트다운과 함께 쏘아 올리는 크고 작은 폭죽 소리와 불빛으로 시작합니다. 평상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독일인들도 저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각자 가져온 폭죽에 불을 붙여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일 년 중 12월말 단 며칠만 폭죽을 판매하고 연말연시에만 터뜨릴 수 있기에 가족 단위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요란하다 싶게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새해맞이 법석도 그때뿐입니다. 독일에서 1월은 그리 유쾌한 달이 아닙니다. 밤은 긴데 짧은 낮 동안에도 해 보기가 어려운 날씨 탓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감기에 걸리거나, 우울해 합니다. 성탄절 장터에서 흥겹게 보내는 12월과는 일상의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간혹 저는 1월을 보내봐야 독일에서 왜 철학이나 신학 등이 발달했는지 이해한다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계절이 새해 첫 달인 1월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올 해는 연초부터 불운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일은 꼬였고, 경제적 손실도 생겼으며, 감정도 상했습니다. 액땜이라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억울한 일로 심리적 고통을 겪는 와중에 든든하게 내 편이 되어준 분들이 많았다는 것. 그렇게 마음 한 켠을 추스르며 스스로 평온을 찾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억울함과 분함을 부추기는 자존심과 정의감, 포기와 좌절을 종용하는 개인주의, 저항과 대안을 시도해보려는 모험심 등 내 안의 다양한 욕구와 가치관들이 서로 엉키거나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이역 땅 베를린에서는 역사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 첫 번 째는 세계 남자 핸드볼 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이 참가한 것이었습니다. 작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 스포츠가 평화와 화해에 기여함을 보여준 사례라며 독일 외무성 장관이 개막식 인사에서 유난히 강조하였습니다. 비록 독일과의 개막전에서 패했지만 남북한 선수들처럼, 북측 대사관 소속 직원과 가족들도 남측 사람들과 함께 공동 응원단으로 참가하였었기에 의미가 컸습니다. 장벽을 거두어 낸지 이제 곧 서른 해를 맞는 베를린은 남과 북에게 잠정적 통일과 화합을 선경험케 해 주는 접촉 공간(contact zone)이 되어 주었습니다. 경기장 밖은 빨리 어두워지고 춥고 바람이 불었지만, 단 백 명밖에 안 되는 남북 응원단이 35천의 독일 관중 속에서도 뒤지지 않고 목청껏 코리아 이겨라를 외치며 뜨거웠습니다.


 

세계 남자 핸드볼 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민족의 하나됨을 염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과거사와 현재를 두루 살피는 일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핸드볼 대회가 마무리된 후 베를린에는, 현재 일본에서 부당하게 차별받고 있는 조선학교 상황을 알리고 연대하고자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아동인권위원회에 일본 정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조선학교 학부모회와 그분들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시민연대 그리고 해외동포연대 분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조선학교 학부모님들은 독일까지 오시지는 못한 채 귀국하셨고, 대신 한국과 미국에서 오신 활동가분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며칠 전부터 손님맞이와 행사 준비를 나누어 진행했고, 다양한 연령대의 교민은 물론, 일본여성모임과 독일 활동가들도 초대했습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길은 단지 한반도 영토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750만 정도 되는 해외 한인들도 분단국가의 축소판을 경험합니다. 그 중에서 재일 조선학교의 현재와 미래는 진정한 한반도 평화의 내용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기에 동포 연대를 통한 국제적 지지세력 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베를린 조선학교 간담회

 

우리의 근현대사는 고난의 서사시임에 분명합니다. 성공적 이야기를 위해 과거의 고난이 더욱 부각되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은 3050클럽 즉, 5천만 이상 인구를 지닌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는 국가들 대열에 일곱 번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로서는 처음이라니,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성공 신화가 미완의 역사적 과제와 현재적 어려움 등을 가리는 구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최근 한국은 계층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인성과 감수성이 피폐화되고 있습니다.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상황에서는 더 힘든 약자가 보이질 않고,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근시안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중시하면 결국 구관이 명관이 된다는 식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외로워도 꿋꿋이 걸어가는 삶은 고결합니다. 우리는 올 1월에 그러한 어르신을 잃었습니다. 14살 어린 소녀로 끌려가 22살까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셨던 김복동 할머니. 고인께서는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최초로 위안부 문제를 직접 증언하신 이후 국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운동가로 향년 93세까지 한길을 걸으셨습니다. 고인의 혼은 이제 나비가 되어 훨훨 저 세상으로 떠나셨지만, 고인의 유지는 이제 우리 후대의 몫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넋을 기리고자 윤이상하우스에 작은 소녀상과 함께 추모 공간을 만들어 제를 올렸습니다.

 

윤이상하우스 김복동 할머니 추모공간

 

그리고 할머니의 단호한 외침이 새겨진 손목 띠를 차기로 했습니다; “There must never be another victim like us (다시는 우리와 같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됩니다)” Kim Bok-Dong


할머니께서는 과거의 희생자이시지만, 과거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미래적 열망을 실천해 오신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육신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겪으셨고, 오랜 동안 피해 사실을 숨겨야 했던 사회문화적 폭력에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을 텐데도 고인의 바람은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더 이상 할머니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바람은 그토록 지켜지기 어려운 걸까요? 일본 정부나 천황의 진정성 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2차 세계 대전 패망국 독일은 그 죄과로 분단이 되었고, 나치 전범들을 끝까지 찾아내 단죄함은 물론이요,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국가적 사죄를 올렸습니다. 세계적으로 유태인 세력이 컸던 이유도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 참회는 지금도 공공의 기억으로 재생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전범으로서 어떠한 처벌을 받았고 스스로 참회를 했던가요? 분단도 조선반도가 당했고 그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도 조선땅에서 벌어졌습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민간의 일이거나 개인적 선택의 문제였다는 지극히 몰역사적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지요. 물론 지난 박정희 정권 시기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 정권 시기를 거치며 한국 정부도 절반의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우리 안의 파시즘 역시 성찰하며, 할머니의 유지처럼 미래지향적 역사의식을 반듯하게 세워야 하는 과제를 위해 예술, 학문, 일상의 영역에서 다각도로 노력해야 합니다.

 

윤이상 선생님은 고통에 대한 인지를 작곡가의 생명으로 보셨습니다. 1983년 하신 말씀입니다; “A composer cannot view the world in which he lives with indifference. Human suffering, oppression, injusticeall that comes to me in my thoughts. Where there is pain, where there is injustice, I want to have a say through my music. (무심하게 살아가는 작곡가는 세상을 볼 수 없다. 나는 인간의 고통, 억압, 불의에 대해 생각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나의 음악을 통해 말하고 싶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오기 전인 1986, 일본 도쿄에서 교향곡 제4“Im Dunkeln singen (어둠속에서 노래하라)”가 세계 초연됩니다. 이 작품은 전쟁 중에 수탈당하고 상처받은 여성들, 다시 말해, 일본군 위안부들의 고통을 위안하고, 평화를 염원하고자 작곡한 것입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자신의 고통이 미래에도 반복되지 않도록 염원하셨듯이, 윤이상 선생께서는 위안부 여성들의 아픔을 보편적 언어인 음악을 통해 승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전범국 일본의 수도에서 말이지요.

 

올해는, 북측에서는 3.1 인민봉기라 불리는 3.1운동 백주년이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을 기리는 해이기도 합니다. 2차 북미회담도 곧 열린다고 하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한 단계 진전되리라 봅니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의 잘못에 대해 보다 엄격해야 합니다. 구습은 아주 쉽게 되풀이되고, 기득권 세력들은 기회를 틈타 항상 자신들의 자리를 재생산하려 합니다. 과거를 덮고 통 큰 화해를 얘기하는 건 약자와 피해자의 권리와 관용이지, 기득권자의 몫이 아닙니다. 역사의 상흔을 감성으로 느끼고 공감하며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은 이제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국가를 초월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독일에서도 3.1운동 백주년을 기리는 뜻 깊은 공연이 기획되어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의 초기 음악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다름슈타트 시의 현대음악제 폐막 작품인 타악기 독주곡 마르시아스(Marsyas)가 그것입니다. 작곡가 코드 마이에링(Cord Meijering) 선생이 3.1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을 윤이상하우스 상주음악가 정은비씨가 31일에 연주합니다.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숲의 정령으로, 자신의 피리 연주에 도취되어 아폴로와 경쟁했다가 지고 맙니다. 그 형벌로 피부가 벗겨져 그 피부는 북이 됩니다. 그 북을 칠 때마다 마르시아스는 고통을 느꼈다지만, 그의 고통은 오히려 북소리로 승화되어 악기의 전설로 전해지게 되었답니다. 3.1운동과 만난 마르시아스는 일제의 총칼에 맨몸으로 저항한 조선 백성, 일본군 폭압에 짓밟힌 위안부가 됩니다. 평화적 시위는 무참히 짓밟히고, 위안부 소녀들의 아픔도 오랜 동안 무시되었었지만, 그 정신은 다시 살아나 더 큰 평화를 향한 열망의 몸짓과 소리로 재현됩니다. 수십 개 다양한 타악기들의 울림으로 부활할 나비의 꿈. 새로운 역사의 봄도 힘찬 북소리로 깨어나리라 기대해 봅니다.

 


마르시아스 타악연주가 정은비 & 공연복장을 협찬해 준 소녀상 작가 김서경

 

우울하고 힘들었던 기해년 첫 달을 보내며 다시 한 번 역사를 돌아보고 마음가짐 역시 새로이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까치까치 설날이 왔습니다. 정초의 불운은 음력 지난해로 넘기고, 올 한해 어깨동무하며 다시 새 역사의 한길 더불어 갈 수 있겠습니다. 어깨동무 친구들 모두 평화의 북소리가 울리는 기해년 되시길 바랍니다.

 


정진헌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 (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9.02.19 23:34

[시선 | 평화의 마중물]


역사의 길에서 평화를 찾다

 

김영환

내가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97년 여름의 일이다

 

남북어린이어깨동무의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친구들과 함께 일본 최북단의 땅 홋카이도(北海道) 슈마리나이(朱掬内)를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서 머나먼 혹한의 땅으로 강제연행되어 혹독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열린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현재 동아시아공동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얼룩진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인, 재일조선인, 아이누1)친구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삽을 들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두 나라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 빽빽하게 얽힌 대나무 뿌리를 걷어내고, 조심스레 한 뼘 한 뼘 땅을 깎아 내려가자 쪼그린 자세로 유골이 되어 묻혀있는 이름 모를 강제동원 희생자와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교과서로만 배우고 말로만 들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처음으로 눈앞에 마주한 순간이었다.

 1)아이누: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에 분포하는 소수 민족

 

이름도, 국적도 알 수 없는 희생자는 유골이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고통과 암흑의 세월을 딛고 역사의 증인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물음을 던졌다.

 

이 사람은 식민지에서 끌려온 조선인인가 아니면 빚에 쫓겨 온 일본인 노동자인가? 이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끌려왔을까? 왜 이 사람은 1945년 해방이 되고 60여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숲속에 묻혀 있을까? 고향에는 이 사람을 기억하는 가족들이 있을까?’

 

60여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강제동원 희생자는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만남을 선사했다. 한국인, 재일조선인, 일본인, 아이누 등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존재들이 유골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함께 마주하고, 서로의 다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곳에서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재일조선인 친구들을 처음으로 만났고, 70년대부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밝히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애써온 일본의 시민들과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곳에서 국가와 민족 벽을 넘어 손을 잡은 사람들은 참혹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켜 왔고 지금도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나 역시 일본에서 5년 동안 평화운동을 배웠고, 지금도 역사의 길에서 평화를 찾는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다

 

20181030,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철(신일철주금 주식회사’)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원고 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이 입은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여 피고 신일철주금이 원고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943년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한 19세의 청년 이춘식은 94세의 노인이 되어 법정에서 승소판결을 들었다. 그러나 2013년 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던 원고 여운택 할아버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1997년부터 21년 동안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함께 싸워 온 신천수 할아버지도, 2005년부터 13년 동안 한국의 법정에서 함께 싸워 온 김규수 할아버지의 모습도 이날 법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박근혜의 청와대와 외교부는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정치적 야합을 꾀하면서 한일관계의 악화를 빌미로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미루도록 지시했다. 양승태의 사법부와 피고 일본 기업의 대리인 김앤장은 한통속이 되어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재판거래를 통해 확정판결을 고의로 지연시켰다. 국가권력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를 벌이는 동안 이 날을 평생 기다려왔을 세 분의 피해자는 끝내 승소판결의 기쁨을 맞지 못하고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누구를 위한 국가이고, 누구를 위한 정부이며, 누구를 위한 사법부인가?

 

1997년부터 일본 법정에서 시작된 재판투쟁을 지원해 온 일본 시민들도 이 날 법정에서 승소판결의 기쁨을 함께 했다.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 나카타 미쓰노부(中田光信). 40대의 공무원 신분으로 재판지원 활동을 시작해 온 두 사람은 여운택 할아버지가 재판을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찾은 날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오라며 자신들에게 돈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일본 사람은 못 믿겠다며 할아버지가 돈을 맡기기를 주저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 2003년까지 일본에서 진행된 재판을 위해 할아버지가 일본을 찾을 때마다 지원자들은 할아버지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부자지간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었고, 한국에서의 재판투쟁도 지원하며 할아버지의 곁을 지켜왔다. 할아버지가 끝내 승소판결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매년 성묘를 거르지 않는 정성을 쏟아왔다.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두 사람은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훔쳤다.

 


왼쪽부터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 , 여운택 할아버지, 나카타 미쓰노부(中田光信)

 

강제동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일관계의 악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5한일협정을 졸속으로 맺어 일제 피해자들의 권리를 짓밟았다. 2015년 박근혜는 외교참사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합의를 발표하여,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존엄의 회복을 위해 싸워 온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2018년 대법원의 승소판결이 있기까지 역사 정의와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은 필요할 때만 국익을 말해온 권력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외로운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 온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잡아 온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다. 국익을 들먹이며 한일관계의 악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피해자의 곁에서 손잡아 온 이들에게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내일이 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동아시아공동워크숍,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 평화박물관에서 평화운동을 했다. 동아시아 시민들이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이곳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9.02.19 23:25

[시선 |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대한민국의 대표 생선이 된 함경도의 생선과 음식 문화

명태

 

박정배 음식칼럼니스


명태는 북한을 대표하는 생선이자 한민족 특유의 음식이었다. 러시아어 민타이(минтай), 중국어 밍타이(明太), 일본어 멘타이(明太)는 모두 명태에서 유래한 말이다. 명태에 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했던 무관(武官) 부자(父子)의 일기인 부북일기(赴北日記) 1645420일자에 판관이 생대구 2마리, 생명태(生明太) 5마리를 보내주었다로 나온다.

 

함경도의 생선 명태와 명태매운탕

 

명태라는 이름이 명천씨에서 왔다는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함경북도 명천이 무대다. 북한에서는 칠보산 근처 명천읍 보천마을에 명태란 이름을 만든 주인공인 태씨가 사는 '명태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잡지나 책에 자주 등장한다. 명태는 함경도의 특산물로 빠지지 않는다. 특히 신포의 명태와 명란젓이 유명하다. 북한의 천리마(200910) 잡지에는 명태에 관한 과장이 섞인 기사가 나온다. '명태 생선국은 입맛을 잃고 죽음의 문어구에서 헤매던 사람들에게도 생기와 활력을 주는 특효 있는 명약이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뜨뜻한 아래 구들에서 얼벌벌하게(얼얼하게) 한 그릇만 먹어도 10년 묵은 고뿔이 뚝 떨어진다는 명태 생선국이며 명태의 내장은 다 꺼내고 대신 갖은 양념을 한 순대 감을 다져 넣어 처마 끝에 주렁주렁 매달았다가 설명절 날 아침에 센 불에 푹 쪄내는 명태 통 순대, 대소한의 강추위에 얼대로 얼고 마를대로 말라 잘 타갠 솜 같이 부풀어 난 북어(마른 명태)를 쭉쭉 찢어 먹는 맛이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재료 그대로의 맛에 얼큰한 고춧가루를 섞어 먹는 함경도식 조리법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 명태매운탕은 2017년에 북한의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명태매운탕은 줄여서 명태국으로도 부른다. 조리법은 기본적으로 명태 대가리 국물에 명태와 알, 고지(명태 수컷 정소), 두부를 넣고 고추장으로 간을 한 음식이다. 여기에 게살을 넣어 맛을 돋구기도 하고 소고기 맑은 장국을 국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용대리 황태덕장

 

 

북한 명태 사정과 남북한 명태 방류 사업

 

북한에서는 음력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를 명태철(명태잡이철)’이라고 한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명태는 북한의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에서는 인민들의 부식물 문제를 푸는 데서 물고기 생산을 늘이는 것이 축산업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로동신문 19751125일자)라고 했다. 당시 명태 어로를 '명태폭포 쏟아지네' (조선문학 19743)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최근 들어 남한과 마찬가지로 명태 수확량이 줄어들면서 2017년부터 함경북도 련진수산사업소의 주도 하에 명태 인공알 받이새끼명태 기르기를 시도해 20174월말부터 5월 상순까지 수십만 마리의 새끼명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동해에 놓아주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남한의 명태는 거의 사라졌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고성 앞바다에 명태 1226000마리를 방류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재포획된 방류 개체는 총 4마리가 전부다. 해양수산부는 2019년부터 수산자원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에서 명태의 포획금지기간을 연중으로 신설함에 따라 앞으로는 대한민국 산 명태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완전이 없어졌다. 조선시대부터 함경도, 강원도 앞 바다에서 잡힌 명태의 주 소비처는 서울과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전체였다. 겨울에는 얼린 동태로, 봄 여름 가을에는 북어나 황태로 남쪽 사람들의 밥상과 제사상에 명태는 빠지지 않던 생선이었다.



고성 해양심층 고성태

 

명태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

 

명태는 크게 생태와 마른 명태로 나누어 이름이 구분된다. ‘선태鮮太는 생선명태生鮮明太의 약자인데, ‘태어太魚와 함께 생태를 지칭한다. ‘동태凍太는 동해안 일대와 서울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몽둥이처럼 딱딱하게 자연상태에서 얼은 생태를 말한다. 망태網太는 일반적으로 그물로 잡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함경남도의 방언으로 그물로 잡는 것 중에서도 가장 크면서 비싼 명태를 지칭한다. 크기에 따른 구분으로는 왜태애태가 있는데, 왜태는 함경남도의 방언으로 특대特大의 명태를 말한다. 왜태와 반대되는 의미의 애태 역시 함경남도 방언으로 막물태로도 불린다. ‘또는 아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아주 작은 명태를 말한다. 잡히는 지역으로 명태를 구분하기도 한다. ‘강태江太는 강에서 잡히는 명태가 아니라 강원도에서 잡히는 명태를 말한다. 서울 지역에서는 색이 검고 가벼워 품질이 나쁜 건명태를 부르는 말이었다. ‘간태杆太는 강원도 간성군 연안의 명태를 일컫던 말이다. 원산에서도 강원도산 명태를 강태 또는 간태라 불렀다. 그밖에 반 건조한 코다리와 어린 명태인 노가리도 있다. 현재 북한에서 많이 먹는 마른 명태로는 짝태가 있다.

 

 

북한의 노랑태 대한민국에서 황태가 되다

 

원산 이북의 추운 땅에서 만들어진 북어를 사람들은 노랑태 또는 더덕북어라 불렀다. 지금 우리가 먹는 황태다. 속이 노랗고 포실하게 살이 오른 황태는 분단 이전에는 남한 땅에서 만들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황태가 1950년대 말 실향민들에 의해 횡계의 용대리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남한 사람들은 황태를 비로소 소비하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황태나 북어는 러시아산 명태를 인제군 용대리와 평창군 횡계리에서 주로 가공한다. 북한의 음식 문화가 남한에 가장 안정적으로 정착한 예다. 1973312동아일보기사는 남한에서의 황태 역사를 선명히 증언해주고 있다. “휴전 3년 뒤인 1956년이었지요. 그해 봄부터 노랑태를 만들 수 있음직한 곳을 찾아 헤매던 중 대관령에 들렀을 때 손뼉을 쳤지요. 대관령 원주민들이 가을에 동해안에 내려가 명태를 사다가 일부는 먹고 나머지는 다음해에 먹으려고 새끼로 꿰어 처마 밑에 걸어두곤 하는데 이것이 봄이 되면 껍질이 노랗게 되고 고깃살도 폭신폭신해지는 게 훌륭한 노랑태가 아니겠어요.”

 

우리 명태는 없지만 황태와 북어 문화는 남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명태가 사라지면서 생태 문화도 대한민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북이건 남이건 명태가 풍성한 동해 바다를 기대한다. 점심에는 횡계에서 북어 해장국을 먹고, 저녁에는 함경도의 명태 매운탕을 먹을 날을 꿈꾼다.



고성 거진항 황태국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9.02.19 23:07

[시선 |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극도로 예민한 중2 스물아홉이 모였다.

그중 담임이 가장 예민할 때 생기는 일들에 관하여.

 

마지막 이야기. 다정한 작별

 

주예

 

 

대학 시절, 부산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새내기 오티에서 처음 얼굴을 보고 대학 다니던 내내 강의도 같이 듣고 졸업해서 임용 공부도 같이 했던, 마음을 같이한 단짝친구였다. 친구가 서울에서의 짐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가던 날, KTX를 타기 전 친구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청춘 드라마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별 장면은 아니었다. 추운 겨울날에 눈물, 콧물 찔찔 흘리면서 가지 말라고 한 번 더 질척이는 완벽한 진상이었다.-심지어 연인도 아닌 친구이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서 서로 웃곤 한다. 그 때는 이제 다시 지난 6년간의 세월처럼 같이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고 생각을 나누고 하루 종일 붙어 지내는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게 다가왔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울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한참을 울고 난 이후에야 친구를 놓아줄 수 있었다.

 

 

겨울 방학이 지났다. 봄방학까지 남은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와 마무리 정리를 한다. 교실 사물함과 책상 속도 비우고, 청소도 하고, 친구들과 인사도 하고. 새해가 된지 한 달 정도가 지났지만 보던 얼굴들이 익숙해서 그런지 여전히 2018년인 듯하다. 참 애매한 일주일이다. 생활기록부 점검 등 업무는 많지만 수업을 하기에는 곤란하다. 방방 뜨는 분위기에 집중해서 수업을 듣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뭐를 할까 고민하다가 자습이나 독서를 시키고 심심한 아이들은 국어 관련 퀴즈를 준비해가서 학습지를 채우면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다 보니 마지막 수업 날이 왔다. 사실 교과 수업에 들어가는 반은 딱히 이별 멘트를 준비하지 않았다. 물론 국어가 일주일에 네 시간이나 들어서 정이 든 아이들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담임이 아니어서 내 새끼(?)라는 생각이 덜하기 때문일까. 이별이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마지막을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고개 숙인 정수리만 보고 헤어지기는 아쉬워 고민하다가 종치기 2분 전에 잠깐 얼굴 보면서 인사하고 헤어지자고 슬쩍 말을 건네 본다. 자다가 일어나라는 소리에 귀찮아서 눈을 반쯤 뜨는 아이, 문제집 풀다가 슬쩍 눈길을 주는 아이, 종 치기만을 기다리면서 시계에서 눈을 못 떼는 아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증이 묻어 있는 아이. 가지각색의 얼굴들이 교실에 차오른다. 그냥 잘 지내라고 인사나 하려고 했는데 날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에 잠시 후회한다. 뭔 말이라도 준비해 올 걸. 준비 안 된 상투적인 아무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

 

1년 동안 고생했어요. 2반 덕분에 즐겁게 수업할 수 있었어요. , 올해 3학년은 안 할 것 같기는 한데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해 줄 거죠? 방학 잘 보내세요.

 

글로 보니까 더 멋없다. 그래도 1년 동안 얼굴을 맞댄 아이들인데. 스스로의 멋없음에 탄식하면서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박수 소리가 들린다. 충동적인 마지막 인사에 예상치 못한 박수여서 더 놀랐다. 이런 멋없는 마지막 멘트에도 박수를 쳐 주는 아이들이 참 고맙다. 1년 동안 수업할 때 가장 애 먹은 반도 예외 없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박수를 친 건 아이들이었지만 정작 받는 사람이 더 고맙고 참 기분 좋은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교과 수업 아이들과 마지막을 보내고 이제 우리 반 아이들이 남았다. 교사가 되기 전에 마지막 헤어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꽤나 어렸을 적부터 선생님을 꿈꿔 왔기 때문에 나중에 학교에 가면 아이들과 하고 싶은 이것저것 목록이 있었는데 그 중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마지막 헤어짐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헤어질 때 감동적인 장면, 눈물과 함께하는 뭐 그런. 작년에는 신규인 것을 고백했었다. 아이들이 몇 살이냐, 선생님 처음이냐, 어디 학교에서 왔느냐끈질기게 물어도 중학교는 처음이야^^”라면서 철벽 방어를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희들이 첫 제자였다고 털어 놓았다. 그동안 서툴렀던 것들이 많았을 텐데 이해해주고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나름 혼자만의 감동을 받았었다. 서른 명이 다 모인 교실에서 아이들을 이렇게 마주하는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참 아쉬웠다. 이제 다시는 아이들을 이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퍽 섭섭했다. 이별의 공허함은 다시는 이 순간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에서 온다. 아이가 먼 곳으로 전학을 가거나 해외로 유학을 갈 때 어쩌면 이 아이와 평생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울컥한다. 아이들을 다음 학년으로 올려 보낼 때도 이제 각자 다른 반으로 뿔뿔이 흩어져 다시는 이렇게 서른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괜히 울컥한다.

 

첫 해에 비해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웠던 이번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어려웠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보통 시원섭섭함인데, 이 중 시원함과 섭섭함이 차지하는 비율이 문제이다. 다 끝난 마당에 솔직해지자면 이번 아이들은 '시원'섭섭하다. 더 이상 아이들 간의 관계 문제로 골머리 앓지 않아도 되는 구나. 더 이상 학부모들과의 전화로 긴장할 일이 없겠구나. 물론 또 다른 아이들, 또 다른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이 반을 벗어난다는 것이 해방감을 주었다. 그래도 막상 마지막으로 본다고 하니 마음이 또 싱숭생숭하다. 마지막 종례를 하러 들어가는데 교실 불이 꺼져있다. 들어서는데 칠판에 정성스럽게 쓰인 주예지 선생님, 사랑합니다.’ 글씨와 꽃다발과 편지를 건네주는 작은 손이 보인다. 남자 아이들은 서로 안아드리라고 장난을 치고 있다.-물론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다.- 나도 머쓱하게 괜한 말을 해본다. “우리 이런 거 하는 사이 아니잖아, 왜 이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놀라우면서도 민망하다. 깜짝 파티가 한 세심한 여자 아이의 주도 아래 진행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내심 기특하고 고맙다.

 

방송으로 종업식이 끝나고 마지막 종례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돌이켜 보면 미안한 것도 많았고, 고마운 것도 참 많았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얼른 가고 싶어 가방을 매고 친구들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런 아이들이다. 끝나고 친구들과 같이 놀러 갈 피씨방과 맛있게 먹을 떡볶이가 눈에 아른거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건강하고 예쁜 아이들이다. 결국 1년 동안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만 전한 채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고 아이들을 보냈다. 아무리 시원함이 컸다고 해도 조금 남아 있는 섭섭함이 고개를 들어 존재감을 알린다. 다정한 말 한 마디 못하고 보낸 것이 못내 섭섭하다.

 

 

부산 친구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사실 대학 초부터 그 친구는 졸업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별을 두려워하던 쫄보였던 나는 언젠가 그 친구에게 큰 마음을 먹고 통보했었다. 어차피 너 부산 가야 하니까 너무 친해지지 말자고. 지금부터 정 떼자고. 그런 바보 같은 모진 소리에도 대학 내내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가 참 고맙다. 부산으로 떠날 때 친구는 참 다정했다. 또 보면 된다고, 부산에 친구가 있으면 놀러 오기 얼마나 좋은 줄 아냐고, 자주 보자고.-친구 말대로 부산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매 여름마다 부산에 놀러 간다.- 또 보자고 안아주던 친구의 다정한 작별처럼 아이들도 다음을 기약하며 이제 놓아주어야겠다. 5년 뒤 스무 살의 나에게 쓴 편지를 인질로 강제 소환할 그 때까지.

 

다정하게, 안녕.


 

주예지 국어가 어렵다는 아이들의 투정 어린 원성에 나도 어렵다며 유치한 설전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는 국어교사입니다. 2017년에 목동중학교에 교사로서 첫발을 디디고 2년 동안 중2 아이들과 함께 지냈고 2019년에는 중2를 맡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는 중입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1:31

[이슈]


내게 단비가 되어준 평화교육 워크숍

 활동가와 함께하는 평화교육 워크숍 후기

주희영


나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길라잡이 1기 강사이다. 학교에서 평화통일수업으로 어린이들을 만난 지 4년이 되어간다. 올해 부쩍 내가 이대로 수업을 해도 되는지 고민이 많았다. 평화라는 추상적이지만 소중한 의미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고민도 되고, 일상에서 내가 평화롭지 못할 때 평화수업을 하는 나의 이중적 모습에 내 스스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평화교육을 더 많이 접하고 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내게 전달 된 메일 한 통 활동가와 함께하는 평화교육 워크숍은 내가 바라던 워크숍이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신청했다.

 

기대하던 워크숍 날이 다가왔다. 워크숍은 세션1, 2로 진행되었다. 세션1. ‘알시티 프로젝트의 교육 매뉴얼과 실제는 알란 화이트가 진행해주셨고 세션2. ‘평화교육 진행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워크숍은 포드릭 오투마가 진행해주셨다. 알란 화이트가 청소년의 창의적이고 자발성 높은 알시티의 교육 사례를 설명하고 뒤이어 포드릭 오투마가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워크숍 시작부터 끝까지 앉아서 진행했다. 앉아서 하는 워크숍이라 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넘치는 동적인 워크숍이었다.






그는 대화를 할 때, 책을 읽을 때, 첫 문장에 집중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첫 문장에 담긴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참여자들에게 자신이 읽었던 책 중 기억나는 책의 첫 문장을 적어보라고 했다. 한 참여자가 발표한 책의 첫 문장을 듣고 느껴지는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다. 작가의 성격, 가족, 시대상황, 감정 등 다양한 이야기를 참여자들과 나누며 첫 문장이 이리도 많은 것을 내포한다는데 놀랐다.

 

다음은 자신에 대한 책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첫 문장에 무엇을 쓸지 적어보라고 했다. 2~3명이 자신이 쓴 첫 문장을 발표하고 포드릭은 참여자들에게 첫 문장이 전하는 느낌을 자유롭게 말해보라고 했다. 자유롭게 느낌을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참여자들이 첫 문장을 쓴 한 참여자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놀랍고 흥분되고 새롭고 신나기까지 했다.

 

다음은 조국에 대한 책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첫 문장을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얼른 첫 문장을 적고 발표하고 싶었다. 내 문장에 대한 나의 깊은 내면을 참여자들의 느낌을 통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첫 문장을 발표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면 눈물이 난다참여자들이 느낌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전쟁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국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등은 내가 쓴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나는 매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저항감이 든다. 너무 강하다’, ‘거부감이 느껴진다이러한 말들이 내게 불편하게 다가오면서 갑자기 마음이 굳어졌다. 저항감과 거부감 두 단어만이 내 머리에 맴돌고 모든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참여자들에게 섭섭하고 서운했고, 그들이 나의 감정을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은 회오리가 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발표하지말걸, 나의 의도와 다르게 말한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나? 등 혼란스런 생각들이 내 마음과 몸을 얼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워크숍은 계속 진행되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포드릭이 이 활동에서 전하고자 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태극기가 휘날리면 눈물이 난다는 내가 쓴 조국에 대한 책 첫 문장일 뿐 책은 그 책을 읽는 다양한 독자의 해석으로 읽혀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쓴 의도대로 읽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깊은 내면을 알고 싶어서 발표했고 나의 깊은 내면을 그 날 만났다. 나와 상반된 생각을 만났을 때 유연하지 못하고 내 몸과 마음이 경직되는 것을 내 스스로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다름을 만났을 때 편견과 혼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평화로움이 서로가 배우고 공감하는 관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신뢰와 평화가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문장에 각자의 느낌을 나누어 주고 워크숍을 함께 한 참여자들과 평화에 대해 고민했던 나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뭉클하게 만나게 해준 포드릭과 청소년과 평화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알란, 소중한 자리를 준비해준 사무국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만날 때, 일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내 마음에 편견과 혼란은 없는지,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나서 기쁘고 그런 나와 친하게 지내려 한다.

 

주희영어린이어깨동무 평화길라잡이 1기 강사이다. 성대골마을학교에서 3년간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어린이문화연대 소모임 '개구쟁이'에서 어린이 청소년 연극 읽는 활동을 했고, 어린이책시민연대에서 책모임을 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1:20

[시선-한반도 평화읽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은 없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2018년 성과와 2019년 과제

조성렬


“역사의 문을 빠져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아라!” 이것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여러 공국(princes)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민족이 처음으로 단일국가인 독일제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1990년 통일될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시 사민당은 국가연합을 거쳐 단계적으로 통일하자고 주장했지만, 집권당인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기 위해 조기통일을 추진했다.


1989년 10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시작해 동독에서 과도정부 수립, 자유 총선거, 개혁정부 등장 및 동서독정부의 통일협상을 거쳐 마침내 1990년 10월 1일 정식으로 통일국가를 선포했다. 이처럼 동서독의 통일은 채 1년도 안 돼 이루었다. 이러한 속전속결식 통일로 후유증도 적지 않았지만, 그 때 통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동서독은 분단국가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독일 통일의 역사적인 교훈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처럼 조기통일을 내걸고 당장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역사에서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열렸을 때 이를 잘 활용하여 민족적 과제를 성취해 내야한다는 의미이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해 더 이상 이 땅에서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남북관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두 차례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회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신의 옷자락’을 잡지 못했다.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10월에는 조명록 북한군 차수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이 이루어졌지만 11월 미 대선에서 대북 강경파인 부시대통령의 당선으로 관계개선이 무산되었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기회의 창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올해의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작년 1년은 수소폭탄과 ICBM 시험 성공 직후 북한의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과 이에 맞선 미국의 코피작전 등 대북 군사행동론으로 1953년 휴전 이래 최대로 전쟁위기가 고조됐던 해였다. 신베를린선언, 8.15경축사, 한중정상회담, 미 NBC인터뷰 등 전쟁을 막으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필사적인 노력과 금년 1월 신년사를 통한 김정은 위원장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대남특사 파견과 같은 결단으로 다행히 한반도 정세는 전쟁에서 평화로 급반전되었다.


2018년 한 해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미 4월과 5월, 9월 세 차례나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고 올해가 가기 전에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 중이다. 무엇보다 70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양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의 출범 이전부터 냉랭했던 북중관계가 3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풀린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이처럼 2018년은 한반도 대전환이 시작된 해이다.


한반도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뭐니 뭐니해도 김위원장의 핵무기 포기 결단과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문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 및 정치적 계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세 지도자가 마부 역할을 하고 한반도 비핵화가 말이 되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거대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민족사의 분수령이 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됐지만, 이미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교류협력의 경험을 가진 남북관계와 달리 지난 65년간 적대관계를 유지해 왔던 북미관계는 오랜 불신으로 기대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그 때마다 한국이 북미 사이에서 중재자로 나섰다. 5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밝혔을 때 5.26 번개 남북정상회담으로 양측을 중재했고, 8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했을 때도 대북특사 파견과 9월 18~20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북미 대화의 동력을 재창출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중재자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남측과는 핵문제를 논의를 할 수 없다던 북한을 설득해 유관국 전문가의 입회 아래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해체하며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핵시설 등을 영구히 폐기하기로 약속한 ‘9.19 평양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사소한 군사충돌만 발생해도 대화와 협상이 단절됐던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군사적 신뢰구축과 초보단계 운용적 군비통제 방안을 담은 ‘남북군사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처럼 한국은 중재자 역할을 넘어 당사자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마차가 나가는 앞길에는 곳곳에 돌부리가 널려있어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북간, 북미간 상호불신이 최대 걸림돌이었다. 변변한 재래식무기도 없는 북한이 어렵게 만든 핵무기를 포기하겠는가, 변덕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북한과 한 안전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가, 미 행정부가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미 의회가 반대하면 못 지키는 것 아닌가, 북미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한데 남북관계가 너무 빨리 나가는 게 아닌가, 남북관계 과속으로 한미관계가 삐끄덕거리는 건 아닌가 등등 기존의 불신이 새로운 불신을 만들어내며 갈 길을 어렵게 했다.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나 내부사정 따위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납치문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해체 등 자국 이익을 앞세우며 미 행정부와 의회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 대비해 북일대화에도 나서고 있다. 중국도 종전선언 참여는 물론 평화협정 체결과 그 이후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하려고 한다. 한발 떨어진 러시아도 6자회담의 재개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신과 방해에 따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1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평화의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수십년 동안 진행되어 온 남북관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빠른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해 네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내년 1~2월 중에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미 비핵화 협상의 진전과 함께 또다시 가속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2019년 새해를 맞이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우리는 어떤 자세로 풀어가야 할 것인가? 지금 주변국들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과도한 개입은 프로세스의 진행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남북미의 3두 마차로 달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따라서 우선은 의사소통을 통해 그들의 이익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율해 가다가 어느 정도 목적지가 보일 때 관련 주변국의 참여를 허용하면 될 것이다.


남과 북은 1948년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된지 벌써 70년이나 되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휴전한지도 6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상시적인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 왔다. 전쟁 재발의 위기에서 벗어나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 ‘신의옷자락’을 붙들고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에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빨리 진행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과속이란 없다.


조성렬ㅣ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장,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전략공간의 국제정치: 핵・우주・사이버 군비경쟁과 국가안보>, <뉴 한반도 비전: 비핵 평화와 통일의 길>, <한반도 평화체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체제의 전망>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1:08

[시선 | 평화의 마중물]


평화를 가르치는 꿈

 

송강호

언덕 위에서 종을 울려라!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 설레임과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했을 때 처음에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너무 막막하고 불안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국가간에 혹은 인종이나 종교간에 갈등과 분쟁을 겪는 현장을 찾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르완다 내전이 한창인 1994년 6월 이런 물음을 갖고 세 명의 청년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아프리카에서 절대 가난과 더러운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상황은 차라리 생지옥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밖에서 상상했던것 보다 아프리카가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주는 매우 아름다운 땅이며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아프리카 사람들도 어떤 방면으로는 우리 보다 유능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들이 가난과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유는 바로 부족들 간의 갈등과 분쟁 때문이고 이런 분쟁은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소위 기독교 국가들에 의한 비인도적인 식민지 경험으로 비롯된 것들이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슬람이 강세인 북부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 전역의 많은 나라들의 기독교인 비율은 우리나라보다 높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기독교적인 사회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에는 돈을 사랑하는 병든 기독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전파된 기독교는 마치 에이즈에 감염된 피가 수혈된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에게 정의와 평화의 혈청이 죽어버린 썩은 기독교가 퍼져나가게 했다. 교회들의 모양은 있으나 생명력은 없는 그런 죽은 기독교 사회가 되어버렸다. 미사나 예배를 드리며 평화의 주님을 노래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면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현실 속에서 교회도 기독교 신앙도 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드는 일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1994년 르완다의 내전은 농경을 주로 하는 후투족과 유목민인 투치족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전쟁이었다. 우리는 바나나 운송차량을 타고 거대한 바나나 농장을 지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가르는 카게라(Kagera)강을 건너 르완다 국경에 접한 한 난민촌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는 수 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작은 천막 하나 만을 두른 채 삶을 연명해 가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UN 천막 앞에 줄을 지어서 옥수수와 콩 그리고 식용유를 배급 받았고 좀 더 큰 여자 아이들은 하루에 두 차례 정도 물동이를 이고 약 3, 4 Km를 걸어가서 더러운 식수를 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땔 나무 조차 없었기 때문에 불을 펴 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난민촌에서 밤만 되면 캄캄한 가운데서도 모여서 밤이 늦도록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어른이 소리를 매기면 어린이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따라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밤 나는 어느 한 그룹을 찾아가서 도대체 무슨 내용의 노래를 그리 밤새 부르는 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 노래가 자기 종족의 원수인 투치족들을 죽여서 눈을 빼고, 코와 귀를 잘라서 씹어먹자는 내용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린 세대의 미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어둠 속에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도망치듯이 뒷걸음질을 쳐 내 천막으로 돌아왔다. 이런 현실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뒤척이며 밤을 새우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깨어 일어날 즈음에는 이미 천막의 문 틈으로 환한 아침햇살이 내 얼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천막의 문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늘 그렇듯이 건너편 언덕에는 우중충한 옷을 걸쳐 입은 난민들이 삼삼 오오 둘러 앉아 노름을 하거나 마약을 함께 씹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수 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투치족들의 복수를 피해 죽음의 강을 간신히 탈출해 나와서 이곳 난민촌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조차 도박과 마약, 매춘으로 세월을 보내며 자녀들에게는 복수와 증오를 가르치고 있었다. 난민촌에는 내일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 다른 복수의 전쟁이 준비되고 있는 카라그웨(Karagwe) 분지의 한 언덕에 올라 그 아래 수없이 늘어선 난민들의 천막들을 바라보며 하나의 환상을 품게 되었다. 평화를 가르칠 젊은이들을 온 세상에서 불러 이 언덕 위에 천막 학교를 세우고 종을 울리자. 언덕 높은 곳에서 아래 너른 분지로 울려퍼지는 그 종소리를 듣고 저 밑에 늘어선 난민들의 천막들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학교를 향해 뛰어 올라오리라. 눈을 감으면 평화를 배우겠다고 언덕 위로 달려오는 어린이들의 천진 난만한 얼굴들과 빛나는 눈망울들이 떠올랐다. 평화학교에 관한 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민촌에 천막으로라도 학교를 세운다면 이 천막학교는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게 된다. 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회에 “당신들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라는 소리 없는 설교다. 그리고 한 사람이나 사회가 자신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한 과거의 원한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나 분쟁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개척자들을 통한 평화 사역을 하기 위해 분쟁 지역에서 평화 캠프를 열고 평화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평화학교의 꿈은 아프리카의 분쟁 현장 한 복판에서 피어났다.


평화학교 학생들의 활동: 종이 비행기 날리기


평화학교의 어린이들


평화학교의 시작


개척자들이 처음 평화학교를 연 곳은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동티모르였다. 1999년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강압적인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집들을 불살랐다. 끔찍한 고문을 당했거나 강간당한 여인들도 무수했다. 나는 동티모르 교회의 목사들을 만나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자국의 군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직접 보게 하고 화해를 위한 재건에 참여하게 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하셨던 한 여자 목사님이 하늘을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목사인 내가 화해를 하자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파서 아무리 부드러운 솜털이 닿는다 할 지라도 우리에겐 너무 큰 아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나이 많으신 목사님을 가리키며 “저 목사님은 자녀가 10명인데 한 사람도 그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목사님과 둘러 앉은 다른 목사님들을 둘러 보았다. 모두 고요한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이가 지긋한 한 목사님이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우리는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을 때 당신은 우리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해 우리는 평화학교에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불러 올 수 없었다. 한국 청년들과 독일 청년들이 첫 동티모르 평화학교에 참여하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평화로와 보였다. 집들이 불타서 초가지붕 밑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면서도 이따금 파티를 열고 밤새 춤을 추기도했다. 우리는 낮에는 함께 집을 짓는 노동을 해서 피곤했지만 저녁에는 파티장에 까지 초대되어 밤이 늦도록 춤을 함께 추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때도 있었다. 그저 뜨겁게 사랑하고 안아주며 위로해 주겠다는 결심으로 갔지만 그러기에 한 달은 생각보다 긴 기간이었다.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이 바닥이 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자 참가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동요들을 가르쳐 주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곰 세마리, 거미 줄에 걸렸네, 영심이 짝짝 맞아 영심이 등등. 우리들은 아무런 것도 나눈 것이 없는데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돌아가는 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모두 정글에서 원숭이를 사냥하여 특별한 원숭이 탕을 만들어 주며 떠나지 말고 남아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회의를 해서 자원하는 두 명의 여자 청년들을 남겨두고 동티모르를 떠나왔다.


동티모르 평화학교 학생들과 함께


동티모르의 평화학교 모습


동티모르 투민의 학살 희생자 묘역


평화학교 참가자들을 위한 환송 파티의 동티모르 전통춤


1년 후 우리는 그 마을을 다시 찾았다. 작은 마을 버스의 지붕에 올라타고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어린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우리는 마을 한 가운데 성당 앞 뜰에 둘러 앉아 다시 찾아 온 동티모르에서 우리를 반겨 준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한 어린이가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든 마을 아이들이 작년에 참가자들에게서 배운 한국 동요들을 모두 메들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1년 내내 아이들이 이 뜻도 모르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우리는 10년이 넘도록 동티모르에서 평화학교를 열었고 우리 자신이 평화교육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그곳에서 배웠다.


개척자들은 전쟁과 미움으로 원수된 나라나 부족들 간의 갈등과 분쟁을 억제하고 돌이켜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 말레이지아, 아프가니스탄, 캐시미르 등지에서 열어 많은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평화학교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분쟁지역의 난민촌 어린이들을 만나 그들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고 사랑의 손길이 되어 주었다. 우리가 가르치던 마을에는 이제 작은 평화 도서관들이 생겨나 어린 아이들이 그 곳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2.20 10:55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우리 모두 어깨동무할 것입니다

독일에서의 윤이상 구명운동 50주년 기념 평화 토크 콘서트


 정진헌

 

1124일 오후, 스산한 하늘이 금방이라도 겨울비를 뿌릴 듯 했습니다. 독일에서 흐린 하늘과 가벼이 내리는 비는 흔한 겨울 풍경이지만 큰 행사를 위해 멀리서 오시는 분들이 혹시 힘드실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 대신에 미리 약속하셨던 많은 분들이 속속들이 윤이상하우스로 도착하셨습니다.

 

독일에서의 윤이상 구명운동 50주년 기념 평화 토크 콘서트. 이 행사는 지난 호 평화의 편지에서 소개해 드렸듯, 1968년 독일을 중심으로 전 세계 유명 음악인 181명이 윤이상 구명을 위한 탄원 운동에 서명하고 언론과 한국 정부에도 공개적으로 보낸 “Appell fűr Isang Yun”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 1967-69년 사이 박정희 정권하에서 자행되었던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대해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며, 향후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화예술()의 역할을 미래지향적으로 논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에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과 그 후대 작곡가의 작품 공연까지 더해져, 지식인은 지식으로, 예술가는 예술로, 역사를 넘나들며 지성과 감성을 자극한 종합예술 행사였습니다.

 

발표와 좌담, 연주 등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기라성같은 석학과 음악인들이 독일 도처와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짧은 준비 일정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해주었습니다. 장소가 좁아 50명만 모실 수 있는 곳인데도, 70여분이 넘는 한국인, 독일인, 학자, 음악인, 젊은 층, 노년 층 모두 빼곡히 끼어 앉아 장장 7시간 여를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이 행사의 의미를 높이 인식한 법무법인 양재 소속 변호사 세 분이 멀리 서울에서 날아오셨습니다.

 

본 행사는, 개회 특별 공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칼스루헤 음대 한가야 교수의 피아노와 소프라노 서예리 선생께서 기대에 찬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는 윤이상하우스 큰 행사의 타이틀곡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는 윤이상 선생님의 50년대 초기 가곡에 이어,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선생님의 피아노곡, 그리고 제주 4.3항쟁의 망명인으로 일본에서 사셨던 음악인 한재숙님(한가야 교수의 부친)의 가곡 망향제주는 이 행사의 의미를 감성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귀빈 소개를 하자니 관객 모두가 가족이자 귀빈이셨기에 적지 않은 분들을 한꺼번에 소개해드렸습니다. 이어, 주독대한민국대사관 정범구 대사님께서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셔서 행사의 중요성을 되새겨주시는 축사를 해주셨고,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독일대사를 역임하신 도리스 헤르트람프 (Doris Hertrampf) 여사께서도 독일과 남북한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주신 윤이상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축사를 해주셨습니다. 재독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서는 다른 일정상 대사께서 참석하지 못했으나, 향후 협력사업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1부 기억과 증언 세션은, 재독 한국인의 관점과 경험, 그리고 독일인의 그것들을 공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튀빙겐대학교 한국학과장이신 이유재 교수께서 "동백림 사건과 한국을 위한 초국가적 민주화 운동"이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냉전의 경험이 달랐던 시공간적 맥락의 중요성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 막 시작된 무렵에 독일 유학길에 오르셔서, 이후 대표적인 재독 철학자이자 통일운동가로 윤이상 선생님과 오랜 친분을 가지셨던, 송두율 교수께서 "내 체험공간 속의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주제로 역사적 사건을 생생한 삶의 이야기로 증언해주셨습니다.

 

잠시 환기시키는 차원이자, 동백림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미술작품으로 공감하고자, 이응로 화백의 옥중화를 감상하였습니다.

 

1부의 두번 째 세션은, 독일분들의 발표를 경청했습니다. 준비된 책상 위에 오래된 원본 문서들을 올려 놓은 독-한협회 회장 우베 슈멜터(Uwe Schmelter) 박사는, 동백림사건이 터진 1967년도 당시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역사 문화적 전환기(68운동)에 대한 독특한 시대적 배경과 동백림 사건으로 촉발된 독일-한국간 연대 활동을 소개했습니다. 윤이상선생님의 제자 중 한 분이셨던 어빈 코흐-라파엘(Erwin Koch-Raphael) 교수는 간결한 발표를 통해 윤이상선생님과의 만남과 옥중 작품 "나비의 미망인" 관람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수십 년간의 경험이 녹아있기에 그 모두를 담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았으나, 참으로 의미있는 지적인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2부로 넘어가기 전, 앞서 감상했던 이응로 화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자, 큐레이터이자 미술사학자 박계리 자유대 초빙교수께서 이응로 화백의 삶과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주셨는데, 이로써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늘의 화두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하여, 2부 콘서트는 예술을 통한 시대적 감성을 공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윤이상하우스 상주음악가 정은비 타악기 연주자가, 그리스에서 활동하다 프랑스로 망명한 크제나키스의 레봉을 힘차게 연주하여 우리의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이어서 윤이상 선생님 작품의 정통 해설가이신 국제윤이상협회 볼프강 슈파러 회장께서 윤선생님의 옥중 작품인 "(Riul)"의 음악적 특성에 대해 강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윤선생님의 제자인 토시오 호소가와 선생의 Memory of Isang Yun을 트리오 Sonia Achkar, Martin Funda, Jonathan Weigle 의 섬세한 연주로 감상했습니다. 이어서 지난 여름 레지던스 펠로우로 지냈던 작곡가 양이 룩군이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으로 만든 가곡을 메조소프라노 민수연(Su Yeon Hilbert)님이 불러 감성의 깊이를 더해주셨습니다. 이런 감성의 물결에 더해, 윤이상 선생님의 률(Riul)을 악보와 함께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러다보니 어느 덧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렸고, 우리는 원래 약속한 일정보다 더디게 가고 있었습니다. 하여 3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화예술의 힘 좌담 세션은 시간을 줄여서 진행하되, 발언자와 관객들이 함께 깊이있는 논의를 해나갔습니다. 우베 슈멜터 박사의 사회로, 정은비(Eunbi Jeong), 성악가 홍일(Hong Il), 다름슈타트 음대 코드 마이저링(Cord Meijering) 학장께서 개인적 경험과 음악의 시대사적 역할 및 중요성에 대해 창의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윤이상하우스를 통해 남북한 음악인들이 소통함은 물론, 윤이상 선생님의 작품을 함께 연주하는 활동의 중요성을 공유하였습니다. 한 분 한 분 소중한 얘기와 공연으로 열정 가득한 7시간여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교민들이 정성스레 준비해 주신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서로 사진도 찍고, 더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음악과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는 정감있는 뒤풀이를 가졌습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수고해 주신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먼저, 베를린 행사를 위해 좋은 의견과 더불어 재정 지원을 해주신 한국의 윤이상평화재단을 비롯, 한국의 강원랜드에서 선뜻 협찬을 해주셨고, ()어린이어깨동무도 기부금을 보내주었습니다.

 

베를린 현지에서도 후원이 이어졌습니다. 한국문화원에서 가능한 재원을 모아주었고, 베를린기독교한인교회에서는 동시통역기 무료 대여에 후원금까지 얹어주셨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이 제2대 회장을 역임하셨던 재독한인총연합회(총회장 박선유) 역시 후원금을,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과도 오랜 동지셨고 저희 행사때마다 손님들을 위한 음식과 주류 준비는 물론 상차림까지 해주시는 한민족유럽연대(의장 최영숙) 선생님들은 이번에도 든든한 후원자셨습니다. 신성식 선생님은 낙엽흡입기계를 가져오셔서 베란다 청소를 손수 해주셨고, 자유대학교 동료 학자들과 학생들, 멀리 다름슈타트에서 온 작곡 전공 이어진양 등이 봉사해주었습니다. 독일 최고의 동시통역사인 교포2세 이지예님은 다음 날 새벽 UN회의 통역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뜻깊은 행사에 봉사하겠다며 텍스트도 없는 발표와 좌담 등을 하루 종일 통역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이 행사는 많은 분들이 뒤에서 애써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과정 동안 스크린막 뒤 음향실에서 녹음과 기술적 문제를 담당해 준 승환(John Lee)씨와 야콥(Jakob Prell)에게 감사하고, 이틀 동안 와서 음악홀 정리와 마당 쓸기 등 궂은 일을 묵묵히 해준 철학도 정지원군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무엇보다, 행사 준비부터, 콘서트 기획, 홍보와 마무리까지 열심히 일하다 몸도 크게 상한 정은비 상주음악가에게, 그리고 다시 한 번, 애정과 관심으로 참여해주신 발표자와 음악인들께 큰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윤이상 선생님께서 많이 기뻐하시리라 믿으며, 이제부터 동백림 사건은 재조명되고, 한 맺힌 피해자분들의 명예가 제대로 회복되어, 그 과정에서 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길이 예술을 통해 한 차원 높게 진행되도록, 이 행사에 함께 해주신 우리 모두 어깨동무할 것입니다.

 

정진헌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