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12.20 10:28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평생에 걸쳐 반전화를 그린 화가, 베레시차긴

 

김소울


국에서 러시아 미술은 그리 익숙지 않다. 서양미술사를 소개하는 책에서도 우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의 미술을 주로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문화적인 편식이 강한 편이고,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러시아야 말로 수 없이 반복된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평화와 반전의 시각에서 러시아 미술은 눈여겨보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바실리 베레시차긴(Vasily Vereshchatin)19세기 러시아에서 활동한 반전화가였다. 우리는 모네, 마네, 고흐 등 수많은 19세기의 서양화가들을 알고 있지만 평생에 걸쳐 반전화를 그린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한국에 잘 소개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국경지대, 그리고 전쟁을 담고 있으며 희생자와 승리자 모두의 입장에서 그림을 써내려갔다. 그는 피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를 전쟁을 위한 세금으로 빼앗겨야 했던, 그리고 소중한 아들과 아버지를 싸늘한 주검으로 맞이해야 했던 러시아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던 화가였다.

 

베레시차긴은 10대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해군으로 복무를 하였다. 그리고 투르키스탄 전쟁을 비롯한 발칸전쟁, 러시아-터키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해군사관학교 당시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주변에서는 그가 장교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군사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그는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야간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사관학교 졸업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정식 주간으로 입학하게 된다.


 

바실리 베레시차긴, 전쟁 예찬(1871)

 

<전쟁 예찬>은 그가 참전했던 전쟁을 주제로 한 연작 투르키스탄 연작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는 20세기 반전 포스터에 수 없이 사용되고 또 사용되었을 정도로 단순 명료하게 반전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황량하고 메마른 대지에는 해골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맞이해 주는 것은 굶주린 까마귀들 뿐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나타내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액자에 문장을 기입하곤 했는데 <전쟁예찬>의 액자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위대한 정복자에게 바친다라는 문구를 적음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비참함을 불러일으킬 뿐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로부터 전쟁에서 승리의 상징은 적장의 목을 베어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살아있던 죽었던 상관없이 말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목을 전시하듯 높게 쌓아 올린 모습, 그리고 오른쪽 위에 보이는 누군가가 살았던 부서진 집은 너무나도 참혹하지만 하늘은 푸르르기만 하다.



 바실리 베레시차긴, They celebrate(1872)

 


바실리 베레시차긴, 죄수들의 휴식장소(1879)

 

적군의 목을 베어 걸어놓는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비난은 다음 해에 그린 <They celebrate>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가운데에 서 있는 흰 옷을 입은 인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결과를 알리고 있는 모습이다. 편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 낙타나 백마의 등에 탄 사람들도 있고 앉아있는 개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자리를 축하하고 있는 중이다. 전쟁을 거치며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그 과정과 희생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의 편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로 하얗고 긴 장대가 우뚝 서 있고, 그 위에는 적의 머리가 승리의 상징처럼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승리자들은 전쟁의 결과를 축하하지만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1878년부터 1879년까지 1년에 걸쳐 완성된 <죄수들의 휴식장소>는 가릴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주저앉아 눈보라를 맞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목처럼 그들은 정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눈보라에 버려진 고장난 수레바퀴는 마치 고장나고 그릇된 역사와도 같다.

 

베레시차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화가로서 전력을 다해 전쟁을 비난하지만 그것이 효과적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정면으로 맞서 가차없이 비난한다.” 러시아-터키전쟁을 향해 비난의 시선을 던진 그를 당시 알렉산더 2세는 인간 쓰레기 아니면 미친 놈이라고 언급했다. 베레시차긴은 단념하지 않고 러시아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반전작품들을 그려나갔고, 결국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받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베레시차긴의 시대와 같은 대규모 전쟁이나 학살은 부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타인을 짓밟은 대가를 과시하는 인간의 잔인함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하며 그것의 치열함은 그 시대의 전쟁과 같지 않은가.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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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끔찍한 현실을 추상적으로, 파울 클레


김소울


과거에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화폭에 담겨졌지만, 대부분의 전쟁화에서 화가는 전쟁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달랐다. 전쟁의 규모가 컸던 만큼, 화가들도 대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징집되었고,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이를 지켜보고 경험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이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감정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 클레는 세기말적인 불안감에 대한 감정을 나타낸 표현주의 화가로,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등과 함께 ‘청기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청기사파는 흩어지게 된다. 칸딘스키는 징병을 피해 고국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고, 동료였던 마르크와 마케는 군대에 징집되어 전장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클레는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비롯된 형태를 거부한 추상을 추구하게 된다.


파울 클레, 『명분으로서의 죽음』 (1915)


<명분으로서의 죽음>은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화가 마르크를 기린 작품으로 <시대의 메아리>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매체는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 그림을 사용했다. 이 그림을 클레의 동료화가 마르크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닌,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자살을 알리는 지면에 사용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는 작금의 사회에 매우 격분하게 된다.


<명분으로서의 죽음>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클레는 소집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1916년 7월 예비군 보병연대에 소속되었지만,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게 된다. 바이에른의 왕이 뮌헨의 예술가들을 전장에 직접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항공학교의 회계과 서기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게 된다. 창조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전쟁은 모순된 관계이자 함께할 수 없는 위치라고 생각한 클레는 복무기간동안 자신의 모순적 입장을 성찰하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끔찍한 경험을 지속하던 클레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문구를 쓰게 된다. “이 세상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 추상적이 되고, 세상이 행복할 때 예술은 지금-여기에서 생겨난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렸던 클레가 생각한 추상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대립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클레의 그림은 점점 ‘지금-여기’가 아닌 ‘추상’의 세계로 발전하였다.


파울 클레, 『지저귀는 기계』 (1922)


이 작품은 클레가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그린 <지저귀는 기계>라는 작품이다. 클레는 이 그림을 통해 기계문명에 대한 불편함과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하게 된다. 전쟁에서 만났던 비행기, 탱크, 총 등 다양한 기계들은 그에게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릴 것만 같은 인공 새가 앙상하게 철사와 같은 선 위에 앉아 있다. 잉크가 얼룩진 것 같은 푸른 회색빛의 배경은 녹슨 느낌마저 난다. 그가 독일의 화가라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궁핍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그는 가까운 친구들을 많이 잃게 되었고, 전쟁의 비극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전쟁 이후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이라 칭하며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100점 이상의 작품을 몰수했다. 1937년 미술에서의 모든 ‘퇴폐’를 청산한다는 목적으로 히틀러의 지시 하에 <퇴폐미술전>이 뮌헨에서 열렸다. 이 때 파울 클레의 작품도 7점 포함되게 된다. 전쟁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한 클레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독일이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 클레는 이후 스위스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몰입하였고, 죽기 전까지 9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파울 클레가 정의한 예술은 다음과 같았다. “예술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있는 끔찍한 현실을 오히려 어린 아이와 같은 추상화로 그려낸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아동화의 모방이라 여겨졌던 평가에서, 황폐해진 유럽에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예술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힘든 시기의 유럽인들에게 그의 그림은 아픈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잊지 않게 해주는 치유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럽던 시대에 완성된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 역시 피폐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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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신념을 위한 암살, 그리고 전쟁의 시작


김소울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식민지 욕심은 점점 높아져 갔다. 산업은 날로 발달하였고, 그들은 물건을 만들 원료, 그리고 물건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였다. 원료도 풍부하고 물건을 팔 시장도 넓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대륙은 제국주의라는 이름하에 유럽의 군대에 지배당하게 되었고, 한순간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많은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뒤늦게 식민지 확보에 참여하려는 독일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내에서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던 1914년 어느 날, 세계를 뒤흔든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던 사건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암살사건은 1,000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초가 된다.


아킬레벨트람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 (1914)

 

주요인물에 대한 암살사건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주요한 암살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몰래 죽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암살은 의외로 어두운 밤에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암살 대상이 움직이고 접근하기 쉬운 백주대낮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아킬레벨트람의 그림 속에 그려진 암살 사건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한 낮에 사건이 발생했음을 한 눈에 보여준다. 그림 속의 청년은 황태자 부부의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이 청년뿐만 아니라 많은 암살자들은 자신이 암살 대상을 살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을 뿐,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몰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두 암살에 포함될까? 사적인 감정에 휩싸여 바람난 남자친구를 죽이거나, 거액의 돈을 노리고 누군가를 청부살해 하는 것은 암살이 아니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감행되는 기습적인 살인만이 암살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렇기때문에 암살의 대상은 주로 최고 권력자이고 동기는 주로 종교적 이유나 정치적 이유 즉, 신념을 포함한다.

 

세르비아 청년 역시 암살을 저지른 배경에는 신념이 깔려있었다.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1878년에 독립했던 국가이다. 발칸반도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곳으로 1300년대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세르비아는 독립 이후 주변의 지역을 합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1908년 어느 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주변 지역인 헤르체고비나와 보스니아를 차지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세르비아 사람들은 분노한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을 이유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열강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독일과 함께 삼국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이 동맹은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위협받을 때 군사를 보내 서로 돕자는 내용이었다. 과거 프랑스혁명 이후의 빈(Wien)체제, 그리고 지금의 한미동맹이 그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삼국동맹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삼국협상이다. ‘삼국협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동맹관계로, 이들은 독일이 힘을 키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와 함께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밟고 세계 최대 강국이 되려는 야심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와 러시아군의 저항은 강력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고,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전쟁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의 항복과 함께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의 일이다.

 

폴 내시, 메닌거리(1919)

 

폴 내시는 군인의 꿈을 키우던 영국의 화가였다. 전쟁 발발 직후, 그는 망설임 없이 예술가부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수많은 그림으로 전쟁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메닌거리>19184, 영국전쟁기념위원회로부터 전쟁의 기록에 대한 전시를 의뢰받아 그린 가로 182cm의 거대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가 참전했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이프로 전투의 장면으로, 폐허가 된 거리의 단상을 뿌연 연기와 함께 묘사하고 있다.

 

<메닌거리>에서 묘사된 회색빛 연기로 뒤덮인 도시의 모습, 그리고 잎 하나 남지 않은 그루터기는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여과 없이 묘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1,000만 명, 그리고 부상자는 약 2,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쟁은 목적을 잃고, 그 누구도 원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장면. 이 많은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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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노예제도, 인간이 인간에게 빼앗은 인권


김소울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건 신생 국가 아메리카.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완전하게 반하는 뜨거운 감자가 있었으니, 바로 노예제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땅의 주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양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고, 그들을 노예로 완전하게 부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자 서양인들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노예사냥꾼을 이용하여 흑인을 납치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그린 노예선이다. 이 그림의 부제는 <폭풍우가 밀려오자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바다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납치되어 배에 실려 팔려가던 노예들이 바다에서 겪은 실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783년 노예들은 족쇄가 채워져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비좁은 배의 바닥에 누워 몇 개월 동안의 항해를 견뎌야 했다. 최대한 많은 노예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실에 노예들을 눕혔고, 노예들은 물건처럼 온 몸이 고정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며 항해가 어려워지고 음식이 부족해지자 상인들은 다치거나 병드는 등 살아있는 이들마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만다. 이 항해 도중 1/3 이상이 사망하였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1840)

 

노예제도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1672년 영국의 찰스 2세는 왕립회사에 노예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 회사는 이후 약 90년간 백만 명이 넘는 노예를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게 되는데, 이 노예무역은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였고 17C-19C 거래된 흑인 노예들의 수는 1,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과거에는 단 맛을 내는 식품 재료는 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코란과 함께 서쪽으로 꿀보다 달콤한 설탕이 전해지게 된다. 11세기 말 설탕이 유럽에 상륙하자 유럽인들은 순식간에 설탕의 강력한 단 맛을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설탕의 원료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경작지를 위해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엄청난 인원이 노예무역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노예로 팔려간 이들은 끌려간 땅에 사탕수수 모종을 심고, 수확하였으며, 그것을 빻아 설탕을 만들어 냈다. 1800년경 당시 영국인 250명의 연간 설탕 소비량이 1톤에 달한 것으로 집계될 만큼 그들의 설탕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으며 1톤의 설탕은 흑인노예 한명이 평생을 바쳐 수확해 내는 양이었다. 설탕에 가장 탐닉했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들을 팔기 위해 보낸 선박의 수는 2,704척이다. 이러는 가운데 200-400만 명의 노예가 항해 중 사망하게 된다.


 프랑수와 오귀스트 비아르, 노예무역(1833)

 

비아르가 그린 <노예무역>이라는 그림 안에서 흑인 노예들을 납치해 온 흑인 족장이 백인 상인과 흥정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백인 귀족은 편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빈번하게 일어났던 노예무역, 그리고 흑인노예를 그저 경매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백인들의 끔찍했던 과거를 기록한 작품이다. 노예는 서양인들에게 화물이나 말과 같이 거래해야 할 물건에 불과했고, 그런 노예에게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흑인 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 당시 전 세계가 양모 대신 면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면화 재배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꼭 필요했다. 면화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채찍질을 했고, 도망가다가 붙잡히면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뺏는 일까지 일삼았다. 그러던 중, 1873년 버지니아 주에서 냇 터너라는 흑인 노예가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살해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흑인노예 10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착한 흑인 노예 톰이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내용을 읽은 미국인들은 노예제도의 잔혹함에 대해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예제의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가던 18614,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는 길고 소모적이며 비극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9, 링컨 대통령은 중대한 노예 해방령을 내렸다. 그는 남부 연합의 일부를 이루는 주에 사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고 북부에서도 노예제를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못했으며, 노예제 해방령은 부분적으로 밖에 실시되지 못하였다.

 

1864년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링컨은 완전한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수정을 제시했으며, 1865년 초 의회를 통해 수정안을 강행한 후, 링컨 대통령은 암살당하게 된다. 헌법을 완전하게 수정하기 전 까지 법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했던 미국은 1865년 헌법수정안을 선포하고 미국과 그 영토 내 노예제도를 헌법상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미국의 주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했고, 1995년이 되어서야 미시시피주를 마지막으로 미국의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비준하게 된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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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PDF)2018.04.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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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아메리카 대륙, 승자만을 위한 자유의 나라


김소울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경, 황금과 보석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콜럼버스 일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정복한 강자들이 미화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당시 해양진출을 활발히 도모하던 스페인의 팽창정책과 콜럼버스의 개인적 야망은 일치하였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앞으로 발견하는 지역의 식민지 총독 및 부왕의 칭호를 내리고, 그 곳에서 산출된 귀금속의 1/10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며 그 자손들에게 직위가 영구히 상속될 것이라 명시하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을 했다. 때문에 지금도 카리브해 연안의 섬들을 서인도라 명명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후에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땅임을 밝혀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다.


외젠 들라크루아,『콜럼버스의 귀환』(1839)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영웅으로 칭송 받았으며, 왕과 왕비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게 된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콜럼버스의 귀환>에서는 보석과 귀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명예와 부에 대한 그의 야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콜럼버스의 열망과 욕심은 그를 분명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 영광을 이룩하기 위해서 수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1492년 10월 12일 이후 원주민들에 대한 길고 험한 대학살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이는 유럽인들의 약 400여년에 걸친 아메리카에서의 착취와 정복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과 아메리카 본토의 총독 겸 주지사가 되었으며, 토착 원주민들에게는 공납과 부역을 명령하였다. 신속하게 노예정책을 도입하고, 그들로부터 옥수수와 면화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한편, 금광 채굴 등의 강제 노역을 시키게 된다. 그는 토착 원주민들이 할당량의 금을 채우지 못할 경우 수족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이 때 많은 원주민들이 도망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에 대한 조직적인 몰살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가혹정치로 인해 약 800만명으로 추정되는 타이노(Taino)족이 1500년경, 그가 총독의 자리를 떠날 때 약 10만명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콜럼버스가 떠난 이후에도 그가 표방했던 3G정책은 지속되었다. Gospel(기독교의 전파), Glory(왕에 대한 영광), Gold(황금 약탈)로 요약되는 3G정책 결과 1514년 겨우 22,000명의 토착 원주민들이 생존하였고, 1542년에는 단지 200명의 원주민들만이 살아남았다. 그 이후 토착 원주민은 멸종되었다.


원주민의 땅이지만 식민지가 된 신대륙에서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새롭게 발견된 담배와 같이 귀한 물건들의 교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초기 정복자들은 이 땅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식민지의 교역을 통해 부자가 되어 다시 유럽에서 살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이주정책이 필요했고, 아메리카에 정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토지 50에이커(61,000평)을 제공하는 인두권 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그리하여 초기에 아메리카대륙에 뛰어든 스페인에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뒤따라 식민정책에 합류하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1772)


벤자민 웨스트가 그린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당시 신대륙에 모여든 사람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국의 귀족이었던 윌리엄 펜은 1681년에 펜실베니아에 있는 식민지 땅을 받게 된다. 펜은 영국과 식민 아메리카 등지에서 일어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의 한 부류인 퀘이커(Quarkers) 교인이었다. 퀘이커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교회조직을 부정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성격을 띄고있었다. 이 때문에 성공회와 퀘이커교는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다. 펜은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아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은 후, 그곳을 ‘펜실베니아’라 명명하고, 퀘이커 교인들처럼 박해 받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하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토착 원주민들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우애의 도시라는 의미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인디언과 맺은 펜의 협정>에서는 원주민들과 윌리엄 펜이 서로 만나 협정을 맺고 선물을 교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우애적이던 영국인들과 원주민들의 관계는 1718년 펜의 사망과 함께 깨지게 된다. 벤자민 웨스트는 이 그림을 펜의 사망 54년 이후에 그리게 되는데, 그림에서는 후에 일어났던 원주민에 대한 학살 장면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인물들은 윌리엄 펜과 그의 친구들이고, 오른쪽에는 펜실베니아의 토착 원주민들이 보인다. 벤자민 웨스트는 왼편의 인물 뒤에는 석조건물과 배, 그리고 무엇인가를 나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의 인물 뒤에는 나무와 풀, 그리고 벌거벗은 원주민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18세기말 서양 사회를 지배했던 문명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당연시 여기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왼쪽 아래에는 서양식 의복을 말끔하게 입은 인물들이, 오른쪽 아래에는 젖을 먹이고 있는 원주민 여성, 그리고 나무판에 아이를 묶어 놓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뒤편에 서있는 서양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는 반면 원주민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활이 들려 있는데, 이는 결국 서양인들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것이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약 100년이 지난 후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던 영국정부가 다양한 명목으로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식민지인들은 1775년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신대륙에서 시작된 서양인들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들이 일구어 낸 자유의 나라 미국. 그 그늘 아래에는 그들의 자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희생된 수 많은 원주민들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원주민들의 피로 물든 역사 위에 일궈낸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 벤자민 웨스트의 그림 속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