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9. 11. 19. 09:03

[한반도평화읽기]

 

희망의 근거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

 

정영철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8월 북의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은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10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금강산을 현지지도하면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도록’지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열린 ‘비동맹정상회의’에 참석한 북의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은 ‘역사적인 남북 선언들이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남조선당국의 외세의존정책과 사대적 근성’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남북관계의 개선은 외세의존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 앞에 지닌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북의 발언은 남북관계가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한 마디로 남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 사대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관계의 개선은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로 인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제재의 대상이 아닌 관광과 여타의 협력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제대로 된 남북 협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야 이러저러한 대북제안을 하고 있지만 (돼지열병 방역등)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는 상황,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의 대북 제안은 말 그대로 명분 쌓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통일부 장관조차도 비무장지대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엔사의 간섭으로 인해) 대북제안의 실질적인 이행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타미플루 지원의 경우에는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차량 출입을 통제하면서 무산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국제적인 제재를 명분으로 한 노골적인 간섭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 우리 정부의 태도는 엄혹한 대북 제재 그리고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희망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현상유지에서는 자율성’을, 그러나 ‘현상타파에서는 종속성’을 보이고있다. 지난해에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남북 간의 역사적인 회담과 합의를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지는 뒤로 미뤄놓고, 오로지 북과 미국의 만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내세웠던 ‘담대한 여정’에서 ‘담대’는 쏙 빠지고, 오로지 중재자만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이 강조했듯이 우리는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여야 한다. 하루빨리 ‘중재자의 신화’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다른 문제로 넘어가보자.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고 있고, 지난해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에서도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 국방비는 ‘이전의 10년 정권’보다도 더한 증액이 이루어지고 있고, 더욱 파괴적인 무기가 도입되고 있다. 평화를 주장하고, 이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증강은 대북 강경정책을 펼치던 정권보다 더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를 바라보는 북의 입장에서 과연 남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을까? 지난 평양에서 열렸던 월드컵 예선에 대해 통일부 장관까지 ‘실망스럽다’고 했지만, 정작 ‘실망’을 표해야 하는 쪽은 북이 아닐까?

물론 우리 정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북미관계의 개선이 남북관계의 개선의 결정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정부가 스스로를 ‘중재자’의 울타리에 가두어놓고, 북과 미국의 사이에서 ‘중재’를 한다는 것이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난 역사적 경험을 보면, 우리는 남북관계의 힘을 통해 오히려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고, 남북관계 개선–북미관계 개선의 선순환을 만들어내었다. 과거 2000년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가 그러했고, 당장 지난해 판문점 ‘번개회동’을 통해 좌초 위기였던 북미회담을 성사시켰던 경험이 이를 보여준다.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바로 남북관계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힘을 바로 세우는 것은 정부의 노력과 함께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해 힘을 합칠 때만 가능하다. 과거 2000년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정부와 함께 시민사회가 남북관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힘을 합쳤고, 지난해 2018년에는 전쟁 위기의 한반도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길에 정부와 시민사회가 뜻을 같이하였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연대는 우리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노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고, 시민사회는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를 향해서 우리 내부의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남북의 교류와 화해를 위한 협력의 정당성과 그를 위한 동력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다. 든든한 내부의 동력이 마련된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국제사회도 쉽게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난해부터 남북관계는 정부가 주도하고 시민사회는 한 발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어찌 보면 시민사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평양’행 비행기에 올라타는 꿈만을 이야기했지, 평화와 번영의 공고한 토대를 만드는 것에서는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모두가 ‘평양’행 비행기를 놓칠 수 있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정부와 시민사회는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할것이다. 최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 범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우리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종속’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지금처럼 북미관계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세로는 남북관계의 문제를 풀 수도 없고, 우리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제대로 된 남북관계의 힘은 남북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 내었을 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든든히 의지해야 할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정영철ㅣ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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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7. 6. 19. 14:30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 1,001마리의 소떼가 휴전선을 넘다


정영철


19986월은 한반도의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된다. 집념의 기업인이라 불리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20세기의 가장 멋진 퍼포먼스를 펼쳤다. 바로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서산농장의 소떼 500마리가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넘어가는 장면이었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20세기의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 이름 했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과거 미국과 중국을 이어주었던 핑퐁외교에 빗대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외교라 이름 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500마리의 소떼가 판문점을 넘는 그 광경은 감동과 아름다움이었다. 서로가 총을 겨누고,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을 일삼던 바로 그곳에서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소떼가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500마리의 소떼가 지나간 길은 그로부터 4개월 후 다시금 501마리의 소떼가 또 지나가면서 총 1,001마리의 소떼몰이 방북이라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1998년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있었고,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악화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새롭게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더욱이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남북관계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로서 햇볕정책을 내놓고 있었다그러나 남북관계는 생각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이전 정부 시절 악화된 남북관계와 더불어 1994제네바 합의로 위기를 넘긴 북미관계 역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19988월에는 금창리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오히려 북한과 미국이 공방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북한이 대포동 1라 불리는 로켓 발사를 감행함으로써 북미관계까지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주영 회장은 소떼 방북이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였을까?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금강산 근처의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이다. 6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앞으로 땅만 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소 판돈 70원을 가지고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세 번의 가출 끝에 서울에 정착한 그는 훗날 현대그룹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을 세우게 된다. 이때 그가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소 판돈 70원이 결국 소떼 1,001마리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사실, 정주영은 북한으로부터 세 번의 초청을 받게 된다. 1987년과 88년에 초청을 받은 그는,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방북을 승인받지 못하였다. 이후, 마침내 1989년에서야 세 번째 초청 만에 방북 길에 오르게 된다. 그가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첫째로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종의 실향민이었다. 그의 고향 강원도 통천은 금강산 자락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겨울이면 눈이 1m 이상 쌓이는 곳이었다. 서산농장의 소떼를 바라보는 정주영에게 그 장면은 마치 자신의 고향을 느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 이외에 그의 소떼 방북에는 기업가로서의 모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 대한 투자를 통해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경제적 이익을 선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중 특히 금강산 개발은 이곳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꾸림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고 기업가적인 입장에서는 향후의 다가올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북한에 대한 모험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9년 첫 방북에서 그는 금강산 개발에 대해 북한과의 공동 개발 협정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제 곧 닥쳐올 북핵 문제와 김영삼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 악화라는 국면을 만나면서 아무런 진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딱 8년 후인 1997년 북한의 광명성경제협력연합회장명의의 초청장을 다시금 받게 된다. 방북을 앞둔 그는 서산농장에서 오랜 동안의 고민 끝에 거대한 퍼포먼스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 방북하는 것이었다.


▲ 1998년 6월 16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하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 Ⓒ민중의소리


흔히 소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역사적 감정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아니 동물이라기보다는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동반자였다. 돈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겠다는 생각을 거부한 정주영에게 소는 자신의 개인사에 비춰보더라도, 그리고 민족적 정서에 비춰보더라고 가장 적합하였다. 소떼 방북에 나서던 날 그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서울로 찾아들 때 무작정 이 길을 통해 달려왔었지요. 이제 소떼들을 몰고 고향을 방문하니 매우 감격스러워요. 황소걸음이라도 통일의 날이 다가오길 바랍니다.”고 소회를 밝혔다. 북한도 그의 소떼 방북에 대해 정 회장 일행이 따뜻한 동포애의 지성을 담아 마련한 소들을 가지고 왔다. 북측 관계 일꾼들이 정 회장 일행을 판문점에서 혈육의 정으로 따뜻하게 영접할 것이다고 중앙통신을 통해 전했다.


마침내 1998616일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45대와 함께 정주영 회장은 판문점을 통과해서 북한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사료를 실은 트럭과 승용차 10대 등 소떼 방북은 1km 나 행렬이 이어질 정도의 광경을 연출했다. “소는 한 뼘의 농토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셨던 아버님께 바치고 싶은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라고 했던 그가 소 판돈 70원을 500마리의 소떼로, 그 후 4달 이후에는 또 다시 501마리의 소떼로 갚았던 것이다.


소떼 방북은 전 세계적인 이벤트였고, 남북에게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남북관계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두 번의 소떼 방북이 있고 난 후, 그해 1118일 마침내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관광객 889, 승무원 480, 안내원 50, 그리고 오락 담당 9명을 태운 28,000톤급 금강산 크루즈 여객선 현대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였다.


▲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객 800명을 태우고 첫 출항하는 '현대 금강호' Ⓒ현대아산


소떼의 방북은 이벤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곧이어 닥친 대자연재해 등으로 심각한 식량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경제가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른 상황에서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소떼의 방북은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에게는 엄청난 지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당시 소떼 방북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때마침 출범했던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정부 시절의 성과와 함께 심각한 오류를 교훈으로 삼아 대북정책에서의 정경분리를 추진하였다. 정경분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를 떠나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겠다는 것은 기업인에게 새로운 도전을 북돋게 했다. 특히, 현대의 입장에서는 지금껏 북한과의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근본적인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89년 금강산 관광에 대해 개발 약속까지 하고서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1997년 북한의 정주영 회장 초청은 금강산 관광 등 현대의 대북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결과 1998년 소떼 방북,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의 합의(6), 마침내 금강산 첫 관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주영의 소떼가 연출했던 1km가 넘는 행렬의 장엄했던 광경도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소떼가 한 번 지나간 길을 그 후 10여 년 동안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고갔다. 북한을 관광하기 위해서,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 남한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과 유니버시아드 게임 등을 응원하기 위해서,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부지런히도 오고갔다. 길은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지런히 밟고 지나갈 때에야 만들어진다. 소떼가 꾹꾹 눌러놓았던 그 길을 따라 10여 년 동안 부지런히 오가면서 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떼 방북으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휴전선과 판문점은 다시금 누구도 오도가도 못하는 적막한 공간으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살벌한 대결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금강산의 발길도 끊겼고, 개성공단의 철도와 도로도 끊겼다. 한 동안 총성이 멈추었던 휴전선의 하늘에 총성이 울리기도 하였고, 지뢰를 밟은 어린 병사들의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남북이 만들어놓은 길에 어느새 잡초만 자라나 무성한 풀밭을 이루고 있다.


소떼 방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회장은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고 난 그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2001년 만해상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에는 DMZ 평화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소떼 방북은 2000년 정상회담으로, 그리고 2007년의 또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세계인이 이를 전위 예술이라고 칭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단의 숙명을 뛰어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이 있고, 민간이 할 일이 있으며, 기업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때로는 정부가 앞서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민간이, 때로는 기업이 앞서갈 수도 있다. 분명 소떼 방북은 기업이 앞서서 분단의 휴전선을 헤집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정부가, 민간이 그 뒤의 철조망을 걷어내었다. 이렇게 통일과 평화의 길은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힘을 합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모든 것을 독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정부의 독점은 곧 분단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단의 정치를 넘기 위해서는 정부, 민간, 기업이 힘을 모아야 한다. 1998년의 소떼 방북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당시 소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지금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 풍성한 소떼가 되었는지, 혹은 관리 부실로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배고픔에 한 점 고기 덩어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다. 당시 소떼를 싣고 떠났던 트럭이 지금도 북한 땅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한다. 소떼의 향취를 간직한 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마 당시의 소떼는 그 등위에 평화와 통일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당시의 소떼가 짊어졌던 짐이 다시 우리의 어깨위에 놓여있지 않을까? 남북 모두 소떼만도 못하다는소리는 듣지 말아야겠다.

 


참고한 글

권영욱,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서울: 아라크네, 2013)

전도근, 신화를 만든 정주영 리더십(서울: 북오션, 2010)

아시아경제신문, 재계 100 - 미래경영 3.0 : 창업주 DNA서 찾는다(서울: FK미디어, 2010)

파이낸셜뉴스 산업부, 집념과 도전의 역사 100(서울: 아테네, 2004)

김인수, 시대정신과 대통령 리더십(서울: 신원문화사, 2003)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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