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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18 피스레터 No20_3 박정배_국수, 농마국수, 함흥냉면, 밀면
  2. 2019.02.19 피스레터 No17_5 박정배_명태
피스레터(글)2019. 11. 18. 18:40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국수, 농마국수, 함흥냉면, 밀면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남북이 북한에서 만날 때면 평양냉면이 언제나 화제에 오른다. 중국의 면(麵) 요리를 한국인은 국수로 부른다. 국수란 단어의 최초 기록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編)에 '국슈(麵)'으로 나온다. 면(麵)은 중국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면을 총칭하지만 한국에서는 밀가루, 메밀가루 등 모든 면을 총칭하고 국수도 마찬가지다. 서정범 교수는 한민족 고유어 '국'은 물이 중심인 음식을 말한다고 했고 '수'도 물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서정범 교수에 의하면 국수는  국물 음식이란 뜻이 된다. 평양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국수라 부른다. 평양의 국수가 유명해지면서 평양의 찬 국수는 평양냉면이 되었다.

 

 

농마국수(조선료리전집2000)

함경도 분들도 자신들의 면 음식을 국수라 불렀다. 타 지방 국수와의 차별이 필요한 순간이 되자 국수 앞에 정체성을 내세울 기호가 생겨났다. 평안도와 달리 함경도는 감자와 고구마가 많이 났던 탓에 이를 가루로 만들어 농마국수라 부르기 시작했다. 농마는 감자나 고구마를 걸러낸 가루인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지만 일반적으로 감자 녹말을 칭한다. 북한에서는 함흥냉면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만으로 추적하면 함흥냉면은 남한에서 함경도 실향민들이 만든 단어라고 추정된다. 미군병사 클리포드 L. 스트로버스(Strovers, Clifford L)는 1953년 11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미 공병부대원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을 사진에 담았다. 1954년 부산 국제시장을 찍은 사진 중에는 ‘함흥냉면옥’을 찍은 사진이 있다. 함경도식 냉면집답게 간판 아래 ‘회국수’란 글자도 선명하다. 1954년에 찍은 국제시장 ‘함흥냉면옥’을 비롯해 신창동 '고려정냉면', 시청 옆 '평양서부면옥', 동아극장 옆 '황금냉면옥', 동광동 '광락냉면'같이 냉면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부산의 전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된다.

 

속초 함흥냉면옥 1950년대 초반 사진

 

클리포드 사진집 <칼라로 만나는 1954년 Korea>에 실린 함흥냉면집

함흥냉면은 함경도 사람들의 안부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음식이었고 냉면집은 만남의 장소였다. 남한에 최초의 함흥냉면집은 함경도와 가장 가까운 속초에서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1951년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던 속초에 함흥냉면 집이 최초로 세워졌고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서울의 청계천 평화시장과 중부시장 오장동에 1954년부터 함흥냉면집들이 들어섰다. 함흥냉면은 함경도의 농마국수, 감자농마국수가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면서 생긴 변형된 음식 체계인 것이다. 남한 사회에 함경도식 냉면의 정착기는 평양냉면보다 험난한 과정을 겪는다. 평양냉면은 오래전부터 남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음식이었지만 농마국수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농마국수의 주성분인 감자 전분은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거기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함경도 음식의 특징과 가자미식해 같은 생선 꾸미가 올려지는 것도 다르다. 남한 사람들은 이런 음식 체계를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전쟁과 이후의 부산에는 감자 전분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남한 사람들의 식성과 재료 부족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게 된다. 당시 부산 구포국수가 유명했다. 전쟁과 이후에 미군에 의한 밀가루 공급이 확대되면서 밀가루로 만든 마른 국수인 구포국수는 부산 시민과 실향민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함흥에서 내려와 함흥냉면을 팔던 사람들은 남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고구마전분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었다. 실향민이 몰려 살던 우암동 입구에는 함경도 흥남 내호 출신 실향민이 세운 '내호냉면'이 들어서고 당감동에는 본정냉면, 함흥회냉면같은 식당이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부산사람들은 우동이나 소면 같은 밀가루 국수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다수를 차지하던 부산 토박이 손님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내호냉면은 창업 후부터 북한 실향민에게는 회국수같은 함경도식 냉면을, 부산 토박이들에게는 국수를 팔았다. 몇 년간의 냉면과 국수의 동거를 끝낼 새로운 면이 1959년에 내호냉면에서 만들어진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이 탄생하자 실향민들과 부산 토박이들 모두가 좋아한다. 당시에는 밀냉면, 경상도 냉면, 부산 냉면이라 불렀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 내호냉면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 정책에 인해 맞이한 밀가루 음식의 전성기와 때를 같이하여, 1966년 개금 시장 입구에 세워진 ‘개금밀면’이, 1970년대 초반 가야2동 동의대입구역에서 언덕이 시작되는 부근에 있는 ‘가야밀면’이 문을 열면서 밀면의 대중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00% 밀가루를 이용한 부드럽고 단 맛이 나는 면과, 새콤달콤한 양념과 한약재를 넣어 시원하고 담백하며 몸에도 좋은 육수로 만든 가야밀면에 대중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밀면이 함경도 사람들을 넘어 부산 사람들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함흥냉면보다 부드러워진 면발의 변화와 더불어 가야식의 달달한 한약재육수, 개금식의 개운한 닭고기육수가 완성된 뒤의 일이었다. 면과 육수가 부산의 재료와 풍토, 사람들의 입맛을 완벽하게 반영하면서 밀면은 비로소 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발전과 분화를 시작했다. 밀면은 한반도 현대사가 낳은 한민족의 음식이다. 북한 분들이 자신들이 낳은 음식의 남한식 변형과 탄생을 마음껏 맛볼 그날을 그린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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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9. 2. 19. 23:25

[시선 |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대한민국의 대표 생선이 된 함경도의 생선과 음식 문화

명태

 

박정배 음식칼럼니스


명태는 북한을 대표하는 생선이자 한민족 특유의 음식이었다. 러시아어 민타이(минтай), 중국어 밍타이(明太), 일본어 멘타이(明太)는 모두 명태에서 유래한 말이다. 명태에 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했던 무관(武官) 부자(父子)의 일기인 부북일기(赴北日記) 1645420일자에 판관이 생대구 2마리, 생명태(生明太) 5마리를 보내주었다로 나온다.

 

함경도의 생선 명태와 명태매운탕

 

명태라는 이름이 명천씨에서 왔다는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함경북도 명천이 무대다. 북한에서는 칠보산 근처 명천읍 보천마을에 명태란 이름을 만든 주인공인 태씨가 사는 '명태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잡지나 책에 자주 등장한다. 명태는 함경도의 특산물로 빠지지 않는다. 특히 신포의 명태와 명란젓이 유명하다. 북한의 천리마(200910) 잡지에는 명태에 관한 과장이 섞인 기사가 나온다. '명태 생선국은 입맛을 잃고 죽음의 문어구에서 헤매던 사람들에게도 생기와 활력을 주는 특효 있는 명약이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뜨뜻한 아래 구들에서 얼벌벌하게(얼얼하게) 한 그릇만 먹어도 10년 묵은 고뿔이 뚝 떨어진다는 명태 생선국이며 명태의 내장은 다 꺼내고 대신 갖은 양념을 한 순대 감을 다져 넣어 처마 끝에 주렁주렁 매달았다가 설명절 날 아침에 센 불에 푹 쪄내는 명태 통 순대, 대소한의 강추위에 얼대로 얼고 마를대로 말라 잘 타갠 솜 같이 부풀어 난 북어(마른 명태)를 쭉쭉 찢어 먹는 맛이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재료 그대로의 맛에 얼큰한 고춧가루를 섞어 먹는 함경도식 조리법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 명태매운탕은 2017년에 북한의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명태매운탕은 줄여서 명태국으로도 부른다. 조리법은 기본적으로 명태 대가리 국물에 명태와 알, 고지(명태 수컷 정소), 두부를 넣고 고추장으로 간을 한 음식이다. 여기에 게살을 넣어 맛을 돋구기도 하고 소고기 맑은 장국을 국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용대리 황태덕장

 

 

북한 명태 사정과 남북한 명태 방류 사업

 

북한에서는 음력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를 명태철(명태잡이철)’이라고 한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명태는 북한의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에서는 인민들의 부식물 문제를 푸는 데서 물고기 생산을 늘이는 것이 축산업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로동신문 19751125일자)라고 했다. 당시 명태 어로를 '명태폭포 쏟아지네' (조선문학 19743)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최근 들어 남한과 마찬가지로 명태 수확량이 줄어들면서 2017년부터 함경북도 련진수산사업소의 주도 하에 명태 인공알 받이새끼명태 기르기를 시도해 20174월말부터 5월 상순까지 수십만 마리의 새끼명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동해에 놓아주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남한의 명태는 거의 사라졌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고성 앞바다에 명태 1226000마리를 방류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재포획된 방류 개체는 총 4마리가 전부다. 해양수산부는 2019년부터 수산자원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에서 명태의 포획금지기간을 연중으로 신설함에 따라 앞으로는 대한민국 산 명태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완전이 없어졌다. 조선시대부터 함경도, 강원도 앞 바다에서 잡힌 명태의 주 소비처는 서울과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전체였다. 겨울에는 얼린 동태로, 봄 여름 가을에는 북어나 황태로 남쪽 사람들의 밥상과 제사상에 명태는 빠지지 않던 생선이었다.



고성 해양심층 고성태

 

명태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

 

명태는 크게 생태와 마른 명태로 나누어 이름이 구분된다. ‘선태鮮太는 생선명태生鮮明太의 약자인데, ‘태어太魚와 함께 생태를 지칭한다. ‘동태凍太는 동해안 일대와 서울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몽둥이처럼 딱딱하게 자연상태에서 얼은 생태를 말한다. 망태網太는 일반적으로 그물로 잡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함경남도의 방언으로 그물로 잡는 것 중에서도 가장 크면서 비싼 명태를 지칭한다. 크기에 따른 구분으로는 왜태애태가 있는데, 왜태는 함경남도의 방언으로 특대特大의 명태를 말한다. 왜태와 반대되는 의미의 애태 역시 함경남도 방언으로 막물태로도 불린다. ‘또는 아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아주 작은 명태를 말한다. 잡히는 지역으로 명태를 구분하기도 한다. ‘강태江太는 강에서 잡히는 명태가 아니라 강원도에서 잡히는 명태를 말한다. 서울 지역에서는 색이 검고 가벼워 품질이 나쁜 건명태를 부르는 말이었다. ‘간태杆太는 강원도 간성군 연안의 명태를 일컫던 말이다. 원산에서도 강원도산 명태를 강태 또는 간태라 불렀다. 그밖에 반 건조한 코다리와 어린 명태인 노가리도 있다. 현재 북한에서 많이 먹는 마른 명태로는 짝태가 있다.

 

 

북한의 노랑태 대한민국에서 황태가 되다

 

원산 이북의 추운 땅에서 만들어진 북어를 사람들은 노랑태 또는 더덕북어라 불렀다. 지금 우리가 먹는 황태다. 속이 노랗고 포실하게 살이 오른 황태는 분단 이전에는 남한 땅에서 만들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황태가 1950년대 말 실향민들에 의해 횡계의 용대리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남한 사람들은 황태를 비로소 소비하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황태나 북어는 러시아산 명태를 인제군 용대리와 평창군 횡계리에서 주로 가공한다. 북한의 음식 문화가 남한에 가장 안정적으로 정착한 예다. 1973312동아일보기사는 남한에서의 황태 역사를 선명히 증언해주고 있다. “휴전 3년 뒤인 1956년이었지요. 그해 봄부터 노랑태를 만들 수 있음직한 곳을 찾아 헤매던 중 대관령에 들렀을 때 손뼉을 쳤지요. 대관령 원주민들이 가을에 동해안에 내려가 명태를 사다가 일부는 먹고 나머지는 다음해에 먹으려고 새끼로 꿰어 처마 밑에 걸어두곤 하는데 이것이 봄이 되면 껍질이 노랗게 되고 고깃살도 폭신폭신해지는 게 훌륭한 노랑태가 아니겠어요.”

 

우리 명태는 없지만 황태와 북어 문화는 남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명태가 사라지면서 생태 문화도 대한민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북이건 남이건 명태가 풍성한 동해 바다를 기대한다. 점심에는 횡계에서 북어 해장국을 먹고, 저녁에는 함경도의 명태 매운탕을 먹을 날을 꿈꾼다.



고성 거진항 황태국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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