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아일랜드에서 배운 함께 살아갈 용기
-2025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 참가기-
정다빈
담벼락 너머 들려오는 소란, 소박하지만 평온했던 공동체가 분열되고, 이웃이 적이 되며, 폭력이 일상이 되어가는 생경한 풍경.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벨파스트>는 분쟁이 심화되던 1969년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혼란을 아홉 살 아이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영화 속 흑백 화면의 담담한 질감 속에 전해진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 무너지는 모습은 우연히 이 영화를 접한 후로, 내게는 북아일랜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7월, 2025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 참가를 통해 분쟁으로 고통받았고 여전히 그 갈등을 겪어내고 있는 아일랜드의 여러 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느꼈던 막연한 비극의 감정은, 포럼을 통해 마주한 도시들의 공기 속에 보다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사실 영화는 끝내 벨파스트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골목을 마주하고 함께 살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잔인해질 때, 더는 이곳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부모는 익숙한 동네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향한다. 그러나 모두가 떠나거나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포럼을 통해 데리와 벨파스트 그리고 코리밀라를 방문하며, 갈등의 기억을 안고 여전히 함께 또 분리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분리와 차별의 역사는 지금도 도시의 공기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총기를 겨눈 피의 일요일의 기억, 평화 협정 이후에도 섞이지 않고 같은 도시 위에서 분리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 평화의 이름을 가졌지만, 점점 더 높이를 더하며 계속되는 반목을 증언하는 피스월, 그 모든 것들이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이 살아온 시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물론 아픔과 슬픔만 남은 것은 아니다. 벨파스트에서 방문한 알시티(Rcity) 센터는 가까이에서 살아가면서도 만나거나 섞일 기회가 없는 가톨릭과 개신교 청소년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만나고, 놀고, 교류하며 성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한두 번의 캠프로 끝나는 단기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기 전체를 섬세하게 동반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만남 가운데 아이들은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머리에 뿔이 난 도깨비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흔히 종교간 분쟁이라고들 한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와 영국계 개신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교파 가운데서도 구교와 신교로 서로 다른 믿음을 가졌기에 서로 그토록 반목했다는 것이 아일 랜드를 방문하기 전 내가 가진 짧은 지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아일랜드를 방문해, 긴 반목과 지난했던 평화 프로세스의 과정을 확인하며 또한 코리밀라에서 그 세월을 살아온 아일랜드 사람들을 만나며 그 문제(The Troubles)의 핵심은 결코 종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머문 며칠은 이 갈등의 본질에 대해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했다. 프로그램의 퍼실리테이터 가운데 한 명인 던컨 모로우 교수는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미메시스(mimesis)’ 개념으로 아일랜드를 비롯한 분쟁 지역의 갈등을 설명한다. 갈등은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며 ‘비슷해지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교, 민족, 출신이라는 표면적 차이는 이 미메시스 구조 안에서 갈등의 실질적 원인이 아니라, 그 욕망과 두려움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었을 뿐이라는 설명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토록 길고 잔혹했던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다름을 발명해낸 것”이라면, 이 문제의 본질은 전혀 다른 데에 있는 셈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타자’로 규정하면서 사회 전체에 내면화된 채 전승되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이를 통해 공고화되는 분단과 반목의 체제. 이는 분명 비단 아일랜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위협’이라고 여기는 대상이 실제로 우리를 위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가 그 대상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를 넘어설 실마리 역시 분명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알시티와 어린이어깨동무의 노력처럼 반목하던 대상이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며 자랄 때 그 어린이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분명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세상과는 다를 것이다.

한편, 종교기관에서 일하는 활동가로서 개인적인 관심은 아일랜드의 평화 프로세스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역시 질문의 방향부터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포럼을 시작하는 첫날,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을 방문해 주드 랄 페르난도 교수님과 간담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주드 교수님은 “평화를 위한 여정은 종교만의 것이 아니며, 신학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성찰일 것”이라는 통찰을 전해 주셨다.
날카롭지만 따뜻한 주드 교수님의 대답은 여전히 종교가, 신앙이 무언가를 이끌고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평화 프로세스의 방해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묻게 했다. 평화를 향한 길은 특정한 종교나 이념, 통일된 신념 체계에서 비롯할 수 없으며 오히려 평화는 훨씬 더 작고 느린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시작됨을 느꼈기 때문이다. 같은 교리, 같은 신념을 믿는 사람들끼리의 연대가 아닌, 다름을 지닌 사람들끼리의 마주침과 경청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공존의 토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은 분명하다.
국적도, 나이도, 종교도 다른 80여 명이 함께 자고, 먹고, 대화한 코리밀라에서의 일주일이 지나며 나는 코리밀라가 건네는 희망은 코리밀라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이 아닌 오히려 이 공동체가 지닌 긴장에 있다고 느꼈다. 이런 공간을 만들고 세우고 가꿔오기까지의 수많은 어려움, 언제나 모두에게 열린 포용적인 공동체를 일구어나가기 위한 갈등이 코리밀라를 진정 평화의 씨앗을 키우는 공간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코리밀라는 코리밀라를 떠나는 순간 시작된다”는 말 역시 코리밀라는 머무는 동안에만 즐겁고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흩어진 이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살아내야 할 태도를 함께 연습하는 곳임을 상기해 주었다.
희망이 정말 보이지 않는데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에 관해 자꾸 비관적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희망은 불완전하고 불안하고 어긋나는 가운데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열어 보이는 용기라는 것에 관해 이번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은 가르쳐 주었다. 평화 프로세스는 ‘누가 옳은가’를 찾는 길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물으며 걷는 길일 것이다. 여전히 분단의 시대를 사는 한반도에 아일랜드의 경험은 많은 질문과 성찰의 지점을 동시에 던져온다. 이념과 세대, 정치적 입장과 신념, 혐오와 낙인이 교차하는 사회를 살며, 우리는 너무 자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며 나를 정당화하는 방식에 기대고 만다. 그러나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했던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상력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다빈 |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법학과 신학의 언어로 평화와 인권의 문제를 살피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역사적 기억과 정의로운 화해에 관한 다양한 접근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기반의 사회운동 현장에서 다양한 평화 교육과 연대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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