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 평화의 마중물]
검은 바다
송강호
2004년 12월 26일 아침 8시 수마트라섬 서쪽 바다 해저에서 리히터 지진 9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였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8시 25분경 높이 10미터 이상의 높은 해일이 아체 지역에 밀려왔다. 약 5분 사이에 20만 명의 아체 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사상초유의 대재난이 닥친 것이다. 개척자들1)은 즉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활동가들을 재난 지역에 파견하였다. 내가 아체를 찾아간 것은 2005년 3월이었다. 쓰나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이미 파견된 우리 동료들의 활동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아체 주민들로부터 검은 바다가 밀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쓰나미가 들이닥쳤을 때 거대한 검은 파도가 세 차례 산처럼 밀려왔는데 심해의 검은색의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가족들의 눈앞에서 서서히 죽어갔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검은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난민들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서 아체의 한 섬에서 지냈었는데 가끔은 바닷가에 나와 해변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들을 바라보면서 그 날 밀려왔다던 그 검은 바다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주석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개척자들이 아체에 가려고 했었던 원래 이유는 쓰나미 때문이 아니었다. 아체는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예전처럼 독립된 이슬람 국가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수카르노와 자바 중심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 당하였다. 그 후 강고한 아체인들은 오랜 세월 독립투쟁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의 반정부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고 이 끔찍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아체 국경을 통제했다. 외국인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후미진 곳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들이 아체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물건을 빼앗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아체 사방에는 인도네시아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자랑스런 국기가 아니라 처량하고 슬픈 것이었다. 아마도 4.3 때 제주도민들이 우리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과 탄압을 겪고 오히려 너도 나도 해병대에 자원했던 것과도 같은 심리일 것이다.
아체에 온 이래로 난 쓰나미 피해자들과 함께 난민촌에서 살았다. 때로는 뿡에(Punge)라는 마을의 난민 천막에서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슬림멈(Seulimeum)이라는 난민촌에서 지내기도 했다. 뿡에는 반다 아체의 바닷가에서 가까운 마을이라서 쓰나미가 왔을 때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었다. 어렵사리 파도에 떠밀리던 중 나무 위에 올라갔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간혹 살아남아서 부모가 없는 옛 집터에 천막들을 쳐 놓고 살아가고 있었다. 고아가 된 청소년들이 역시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자신들의 천막 안에 들여 재우고 같이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함께 먹기도 했다. 공고를 다녔었던 한 젊은이가 실력 발휘를 해서 높은 전신주에 올라가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 천막들에 전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이들은 이렇게 부모들과 친구들을 잃은 자기 마을에 다시 돌아와 폐허 위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천막들 사이에는 쓰나미 때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공동묘지(Guburan)가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우물을 길어 먹고 목욕도 했다. 밤에는 기분이 나빠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우물을 공포영화의 제목을 따와서 “링(ring)”이라고 불렀다. 대소변은 좀 떨어져있는 이슬람 사원 부속 화장실을 사용한다. 이곳 사원의 이슬람 사제(이맘)도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사진으로 볼 때 폐허뿐인 이 천막촌에서도 비록 불편은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쓰나미로 폐허가 된 반다 아체 [사진제공:USAID]
아체 섬의 주민들이 피난해 있었던 슬림멈 난민촌의 상황도 비슷했다. 내가 지냈던 24인용 군용 천막은 네 가족이 함께 귀퉁이를 나뉘어 사용할 만큼 널찍했다. 천막 안에서 사생활은 없었다. 낮에는 찌는 듯이 더워서 남자들은 밖에 있는 그늘에 함께 모여 소일을 했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외출을 삼가는 이슬람의 관습 때문에 무덥고 어두운 천막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밤에는 쥐들이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들조차 없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배급 받는 쌀도 있고 또 어부들인 고로 고기도 잡아와서 사는 이들 속에 나는 얹혀 살았다. 주중에는 이 난민들과 같이 그들의 섬에 들어가 그들의 집을 함께 지었다. 높은 해일이 들이 닥친 이곳 마을들 중에는 주민들의 반 이상이 몇 분 사이에 목숨을 잃은 곳도 여럿이다. 파도에 밀려온 양철 지붕으로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는 목이 잘린 사람들도 있었다. 우기에는 차가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무들을 줄에 묶은 후 바닷물 위에 띄워서 해변을 따라 끌고 와서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바닷속은 날카로운 산호들과 바위들이 많은데다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발에 상처가 생기곤 했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으로 지어놓은 집이 넘어지기도 했다. 음식은 밥과 물고기, 간혹 문어를 잡아 요리했다. 채소나 과일이 없었다. 어촌 사람이라 그런지 매일 물고기만 먹는데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배를 타면 환자들이 많았다. 쓰나미로 그나마 있던 진료소들이 모두 부서져서 반다 아체에 있는 병원까지 가야만 했다. 나와 늘 함께 지내는 아누아르(Anuar)라는 사람도 별 대수롭지 않은 배앓이로 아내를 잃었다. 그와 함께 비가 오면 빗물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지진 나듯 집안이 흔들거리는 천막으로 덮은 판잣집에서 지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눈 뜬 장님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로 집을 짓는다고 내다버리는 모든 살림도구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들이다. 라디오, 선풍기, 그릇들, TV, 냉장고, 옷과 이불 그 어느 것 하나 버려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쓰나미로 생긴 고아들과 홀로 남은 노인들을 위해 지은 집
: 루모 므파캇(함께 결정하는 집이란 뜻) [사진제공: 개척자들]
루모 므파캇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배우는 어린 아이들 [사진제공: 개척자들]
개척자들은 아체에서 작은 평화도서관을 세우고 있다. [사진제공: 개척자들]
아체 발링카랑의 평화도서관 사서 셀리 [사진제공: 개척자들]
“내게 강 같은 평화”는 없다.
하루는 반다 아체(Banda Aceh)에 와서 구호 활동을 하고있던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흩어져 활동하다 갑자기 만나게 되니 누가 설교를 할 것인지 찬송가는 무엇을 부를 것인지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 때 비교적 최근에 온 한 자원 봉사자가 그러면 우리가 다 아는 쉬운 복음 성가 하나를 같이 부르자며 “I’ve got peace like a river (내게 강 같은 평화)”는 모두 알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때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사역하시던 한 늙은 선교사님이 몹시 주저하시며 이 노래는 아체에서 부르기가 마땅치 않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비만 내리면 홍수로 수난을 겪는 이곳 사람들에게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또 쓰나미로 가족들과 집과 모든 소유를 잃고 심지어는 신체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이 어떻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또 화산과 지진으로 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에게 “내게 산같은 믿음”이란 가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익숙하고 친근한 이 노래를 이곳 아체에서는 함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평생을 보내며 반다 아체에서 희생자 가족들을 돕고 있던 한 노년의 미국 메노나이트 선교사의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부를 수 없는 찬송을 자기 흥에 겨워 불러왔고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없는 신앙을 자기도취적으로 믿어왔다. 우리의 몸에 밴 익숙해진 생활 방식과 믿는 방식 모두가 타인에게는 모난 돌처럼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에겐 남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체의 한 섬에서 난민들의 집을 지으면서 진정으로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바다는 자신을 고립시키는 장벽이 아니다. 정글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글을 슈퍼마켓처럼 여기고 있다는 한 선교사의 말처럼 이들에게 푸른 바다는 온갖 물고기들과 전복, 해삼, 조개, 새우, 게, 오징어, 문어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창고요 번화한 시장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운 풍랑과 싸우고 상어들에게 물려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는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우리를 둘러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자포자기야 말로 우리의 의식과 생각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버리고 우리를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그 검은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송강호ㅣ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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