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7.10.30 14:07

[이슈 | 여전한 먹구름]


여전한 먹구름

 

김명준







어느 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선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세월이. 


2002년 3월 말의 오사카였다. 봄이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을 무렵이었으나 겨울의 방해였는지 저녁무렵의 오사카 하늘의 검은 먹구름은 비를 뿌리고 있었다. 다음날의 조선학교 졸업식.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 (약칭 오사카 동중, 東大阪朝鮮中級学校) 였다. 


무슨 신대륙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내 심장은 뛰고 있었다. 치마저고리가 눈에 들어왔고 그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린 여학생이 동무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눈물 흘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달리 색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선생님도 눈물을 흘렸다. 모든 말들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분명히 또박또박 우리말이었다. 남도 북도 아닌 그들의 우리말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지만, 그리고 나의 ‘재일조선인’과 ‘우리학교’에 대한 시선도 더 깊어졌지만,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하늘은 검고 매일같이 비만 뿌리고 있다. 일본의 하늘은 적어도 재일조선인에게는 한번도 맑은 적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는 비가 아니라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9월 13일 수요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카스미가세키역 1번출구 앞은 1500여명의 조선학생과 동포들이 내지르는 한숨과 비탄으로 가득했다.  2014년 부터 3년 동안 진행되었던 ‘무상화 재판’의 1심 판결이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로 ‘패소’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슬픔이 도를 지나쳐 다리의 힘을 잃고 주저 앉은 어머니가 보였고, 눈물 범벅이 되어 하늘만 쳐다보는 동포 학생들이 있었다. 


2010년 4월 자민당 50년 독재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일본 민주당은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법’을 시행했다. ‘고등학교에 준하는 교육을 받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는 훌륭한 취지였다.  일본 교육법 상 ‘각종학교’에 속하는 외국인 학교 또한 이 법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내 최다의 외국인학교인 ‘조선학교’ 도 물론 수혜 대상이었다. 학부모, 학생들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주당은 공공연히 ‘정치 외교적 문제와 관계없다’ 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일본의 언론과 정부 각료의 ‘납치문제’ , ‘북한 때리기’에 혜택이나 온정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던 동포들이었으니 새 정부의 이런 조치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환희의 나날은 잠시였을 뿐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오직 조선고급학교(전국 조선학교 64개교 중 10개교) 만이 이 대상에 제외된 것이다. 


물론 이유는 ‘정치외교적인 문제’ 였다. 북과 관계가 있다는 것, 조총련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 등이다. 법적 제도적 ‘차별’을 공공연히 시행하지 못하고 ‘심사대상’으로 둔다는 식의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민주당 정부. 2011년의 대지진과 연이은 실정으로 자민당에게 다시 정권을 내주었던 것이 2012년이었다.  제2차 아베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아베정권은 그 정체를 드러내는 첫 작업으로 ‘무상화에서 조선학교를 영구제외’할 것을 선택했다. ‘고교무상화법’의 ‘규정’까지 마음대로 뜯어고치면서 ‘조선학교’를 공식적이고 영구적으로 확고불변하게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2010년 무상화에서의 제외 이후로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사이에 어머니들은 UN으로 달려가 호소했고, UN사회권규약 위원회의 시정권고, 인종차별철폐 위원회의 시정권고가 있었지만 일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수업과 클럽활동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가 홍보 전단지를 뿌리고 서명을 받았다. 그 거리에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조직화, 격렬화 되어가던 ‘혐오주의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들과 한 뿌리인 우익 지자체 지사들은 조선학교에 지급해야 할 ‘교육보조금’을 끊어버렸다. 교사들의 월급은 끊어지고 고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학부모의 부담은 늘어만 갔다.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있을 때 학생들이 용기를 냈다. 


2013년 1월 부터 전국 5개 조선고급학교 학생 250여명이 스스로 원고가 되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오사카, 히로시마, 아이치, 큐슈, 도쿄의 조선학교 학생들이었다. 각 지역마다 일본의 유력한 인권변호사들이 변호인단을 꾸렸다. 투쟁은 재판정에서만이 아니라 ‘무상화 연락회’라는 일본인 지원단체가 중심이 되어 ‘집회’, ‘호소’, ‘선전’ 등으로 이어졌다. 화요일 마다 오사카 부청 앞에서 수요일마다 도쿄의 지하철 역 앞에서 금요일 마다 문과성 앞에서 집회와 항의를 이어갔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지난 7월 19일. 



히로시마에서 첫 선고공판이 열렸다. 원고인 조선학생 측의 ‘패소’. 

7월 28일, 열흘을 지나 오사카에서 또다른 판결이 나왔다. 이번에는 ‘원고측의 전면 승소’였다. 오사카 동포들 뿐만 아니라 전체 동포들이 환호했고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했다. 일본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9월 13일. 도쿄의 학생들은 ‘패소’했다. 재판장은 ‘원고측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재판비용은 원고측이 부담한다’라는 두 마디를 남긴채 인사도 받지 않고 황급히 재판장에서 사라졌다. 102쪽이나 된다는 판결문의 요지 조차 읽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판결문의 어디에도 피고인 국가가 주장하는 ‘정치외교적 판단이 아니다’ 라는 것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고교무상화의 대상이 되면 학생 1인당 년간 12만엔~24만엔의 취학지원금을 받게 되어있다. 정부의 지원이 일체 없으며, 지자체의 지원조차 끊어진 조선학교는 해당 취학지원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부족한 학생 수(10개 고교 1500여명) 때문에 교원 월급은 커녕 학교 운영도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의 판결은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무상화법의 본래 취지를 무시하고 ‘규정’까지 고쳐가며 조선학교를 정치적, 외교적 문제를 이유로 차별하고 있는 일본 행정부를 사법부가 견제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정당화시켜주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내년인 2018년 초에는 아이치와 큐슈의 무상화 재판 선고가 열릴 것이다. 또 2018년 말이나 2019년 초에는 오사카와 히로시마 그리고 도쿄 재판의 고등, 최고 재판소의 판결 또한 나올 것이다. 1948년 4월 24일, 오사카의 16살 김태일 소년이 일본경찰의 조선학교 폐쇄령에 맞선 집회에서 진압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른바 한신교육투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 해에 조선인들은 계엄령이라는 엄준한 상황 속에서도 학교를 끝끝내 지켜냈다. 그러나 다음해는 1949년 1월 방심한 틈을 타 일본정부는 조선학교를 폐쇄해 버렸다.  그 때로부터 정확히 70년이 지난 지금,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일본의 민족교육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2010년 당시 조선고급생이었던 어떤 학생이 그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당시 원고였던 학생이 이제 변호사가 되어 어쩌면 자신의 사건을 변호사 자격으로 바라보게 될지 모르는 ‘슬픈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런 사태를 그저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는 그들 ‘재일동포’들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일본의 하늘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검은 비구름이다.




김명준 ㅣ 영화 '우리학교' 감독,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