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정상회담 특집 피스레터 발간기념 이벤트!!


피스레터 안에 숨어있는 퀴즈의 정답을 맞추세요!



Quiz

이기범이사장은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을 때

옥류관 냉면을 총 몇 g 먹었을까요?



정답을 댓글로 달아주시면 정답자 중 선착순으로 10분께 선물을 드립니다. 


- 1번째~3번째(총 3명) : 어깨동무 20년의 활동을 담은 신간 

                               "남과 북 어린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 4번째~10번째(총 7명) : 커피 모바일 교환권


* 이벤트 기간 : 10월 22일~26일(조기마감 가능)

* 댓글은 지금 보시는 이 글에 달아주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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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0.19 00:13

[이슈]


오늘의 청소년, 내일의 한반도 평화를 상상하다

 

임수연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선언을 시작으로 분단 70여 년 간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의 반목과 화해가 재조명되고 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가 푸른 가을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처럼 높아만 간다. 종전이 선언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뉴스에서 반복되어 다루어지고 친구들과의 점심식탁 위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린다. 그런데, ‘~되어진다? 이야기 속의 주어를 찾으려니, 고개를 가우뚱하게 된다. 남북 두 정상의 악수와 포옹의 이미지가 강렬한 나머지 대화를 나누는 는 큰 야구장의 외야석 뒤에 앉은 관중처럼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듯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 내일이라도 닥칠 것만 같은 한반도 평화 시대를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야할 주인공인 청소년들은 어떤 느낌일까? 칠십삼 년 전에는 하나의 나라였고 지리적으로도 가깝지만 마음속에서는 너무도 먼 나라. 지난 10년간 학교 안과 밖에서 남과 북의 소통에 대해서 특별히 고민할 기회 없이 자라온 청소년들에게 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티브이에서 연일 보도되는 장면들은 유명인들의 결혼발표처럼 나와 상관없는 갑작스러운 이벤트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서울청소년창의서밋

<오늘 시민, 오늘 민주주의 NOW HERE>


한반도의 평화체제의 안착에 대한 기대가 시시각각 고조되는 오늘, 미래시대를 살아갈 청소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자리들이 많이 마련되고 있는 가운데, 하자센터1)에서 지난 9월 초에 열린 제10회 서울청소년창의서밋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 시민, 오늘 민주주의 NOW HERE>라는 부제로 열린 이 행사는 5월초부터 청소년기획단에 의해 준비되었다. 시민으로 '오늘''한국'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미래를 생각할 때 외면할 수 없는 네 가지 주제는 다르지만 괜찮은 삶에 대한 상상’, ‘행복한 페미니즘에 대한 상상’, ‘한반도 평화 시대에 대한 상상’,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상상인데, 이 중 반갑지만 갑작스러운 한반도의 평화에 어떻게 말 걸기를 시도하였는지 궁금하다.

 

1)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는 청소년의 자기주도성과 창의성 기반을 둔 창의적 공공지대(creative commons)’1999년 겨울에 문을 열어 영등포에서 열아홉 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웹사이트 www.haja.net

 

문재인 정권 때 남북관계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지만, 이번 남북정상회담일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저에게 큰 충격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불안을 접하면서, 어쩌면 우리는 탈분단에 대해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북 사이에 총을 든 군인들이 사라지고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텐데 말이죠

 

북한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이 지극히 적다고 생각해요. 사실상 북한에 대한 정보는 금기시 되었을 뿐더러 북한의 폭력적인 부분들과 도움이 필요한 모습만 강조 되어 왔잖아요.”

 

다음 세대의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탈분단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지금 시점에 남한의 청소년들은 탈분단,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지 이야기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우선 다른 청소년들도 이렇게 막연한 지 혹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온라인으로 설문을 진행하였다. 기획단 각자가 가진 편견과 막연한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고 활동가의 자문을 받으며 설문 응답지를 만들고 수정했다. 여는 행사<오늘 시민, 청소년 일상의 민주주의를 말하다>의 세 번째 이야기로 <한반도에 대한 상상> 세션에서 객석의 200여명의 청소년들과 <한반도 평화 시대 상상하기> 설문 결과를 공유하고, 이후 서밋 기간 동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어 소통해보는 공동 작업을 제안하였다.

 

더불어,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베를린까지 24일간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돌아온 여행학교 주말 로드스꼴라 청소년들의 <서울역을 국제역으로!>라는 퍼포먼스가 개막식과 이튿날 플래시몹으로 선보였고, 프로젝트 공유회 <사뿐사뿐 대륙을 횡단하다>도 진행되었다. 한반도 평화의 시대에 경의선을 타고 서울부터 열차로 유라시아횡단을 하게 될 상상을 키워가는 흥겨운 여정이었다고 한다.




<한반도 평화시대 상상하기> 온라인 설문결과


한반도 평화의 시대, 종전 후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체제로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다는 응답은 단 19.9%로 나타났다. ‘국가는 나누어져있지만 자유롭게 교류한다50.6%가 응답하였고, ‘하나의 국가가 되지만 각각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한다에 응답한 경우도 20.6%에 달하였으며,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으면 하되, 그 밖의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에 응답한 5%까지 포함하면, 76.2%가 무리한 통일보다 체제유지 하에서의 평화적 공생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답한 이유로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전쟁위기 해소’, ‘국력강화와 국제경쟁력 상승’, ‘북측과의 문화교류라는 응답이 있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두 집단 간의 편견과 차별’, ‘급격한 변화로 인한 사회혼란’, ‘북한 난개발과 부동산 투기등의 의견에 답한 비율이 높았다.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고 남북 간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면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북한 도시 방문하기부터 친구 사귀기살아보기까지 처음 가는 해외여행지에서 기대하는 바와 유사한 것들도 있었다. 한편, ‘북한 문화공연 관람이나 남북 청소년 교류에 대한 희망과 개마고원 락페스티벌’, ‘평양 퀴어 퍼레이드등 다양한 문화교류의 상상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모두의 식탁에 둘러앉을 주인공들을 상상하며


2004615일 어깨동무의 스태프로 어린이들과 함께 백두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그날 역시 천지는 백 여명의 어깨동무 방북단에게 큰 품을 열어주었다. 웅장한 정상의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내려오는 길 중턱의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연을 날리던 찰나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삶의 터전을 떠나 도망가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멋진 하모니로 노래를 부르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처럼, 그 순간만은 어떠한 머뭇거림 없이 평화로웠다.


<서울청소년창의서밋>의 피날레는 마당에 너른 식탁을 펼치고 참여 청소년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비청소년들이 소박한 저녁식사를 나누는 <모두의 식탁>으로 마무리 된다.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던, 어떤 원치 않는 두려움을 겪어왔던 관계없이 한반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진 청소년들이 어느 볕 좋은 날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아무런 긴장감 없이 각자의 꿈과 함께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 있는 하나의 점 같은 순간들이 반복되어 선이 되고 면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머지않아 우리에게 깃들기를 소망해본다.



 

임수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센터교육기획팀장.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팀 간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아시아의 평화환경을 키워드로 다음세대인 청소년들이 여러 꼴의 갈등을 포착하고 조정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에 손을 보태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0.18 21:34

[시선-한반도 평화읽기]


평양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의 평화

 

전현준

 



920일 역사적인 평양정상회담이 많은 파격을 남기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금번 평양정상회담은 북미관계가 답보상태인 상황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그러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고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진전은 물론 수많은 사변들을 남기고 종료되었다. 한반도 문제의 주요 당사자 중 한 사람인 트럼프 대통령도 대만족을 표시하였다. 평양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 문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9월 평양선언 중 한반도 평화유지와 관련하여 군사적 부문만 요약하면 관련국 참관 하에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영구 폐기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조속히 가동 등이다.

 

한반도 평화문제는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 동안 남북 간 적대관계와 북미 간 대결구조 때문에 한반도 평화는 늘 살얼음판을 걸어왔다. 두 가지의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는 한반도 평화유지가 불가능한데 금번 9월 평양선언을 통해 남북 간 적대관계는 거의 해소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북미대결구조이다.

 

북미 간 대결구조는 19537월 정전 협정 체결 이후 미국의 대북 공격 가능성 때문에 지속되는 면이 있었다. 북한 김일성 수상(주석)1953년 정전협정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봉합일 뿐 언제 미제가 보복침략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미제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방어병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재래식 무력증강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1989년부터 시작된 세계사적인 국제환경 변화는 북한이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였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소련 및 중국의 배신(?)은 북한으로 하여금 극심한 안보불안을 느끼도록 했고 핵무기라는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동하였다. 1993년부터 본격화된 북핵문제해결을 위해 미국이 19946월 고려한 미국의 북침계획은 북한을 결정적으로 불안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기밀 해제된 미국 문건에 의하면 1994년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전쟁을 계획했지만 인명 피해를 우려해 선제공격을 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2017128일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당시 미 국방부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3개월간 주한미군 52000, 한국군 49만 명이 숨지거나 다칠 것으로 예상해 대북 공격 계획을 접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46월 당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의 핵심 엘리트들은 미국의 대북 공격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김일성 주석은 카터 전 대통령의 극적인 주선으로 실시 예정이었던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20여일 앞두고 78일 갑자기 사망하였지만 북한관료들은 19941021북미 제네바 합의를 도출하였다.

 

그러나 북미합의는 예정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북한은 미국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몰래 핵무기 개발에 나섰고 200210월 그것이 들통 나기도 했다. 북한은 안보유지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직접 담판이 필수라는 것을 1974년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왔고 그러한 논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을 지속했고 20059‘9.19 공동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국이 곧바로 북한 해외자금을 묶는 ‘BDA사건을 일으키자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핵개발에 가속 페달을 밟아 20061091차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이후 북한은 핵실험을 지속하였는데 특히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4회에 걸친 핵실험이 이루어졌다.

 

김정은 위원장이 핵실험과 미국도착 가능한 ICBM 개발에 박차를 가한 이유는 신속한 안보유지 및 미국과의 협상카드 마련 때문이었다. 20123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로선을 천명한 김정은은 미국으로부터의 안보유지 없이는 국가체제 유지는 물론 경제발전도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다른 한편 미국까지 공격할 수 있는 ICBM을 개발한 이유는 미국의 협상 참여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전략적 판단이 반드시 성공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전략무기 개발에 대해 UN을 동원한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여 북한경제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UN안보리 제재를 피해 최대한 북한을 돕고 있으나 미국의 현미경 같은 감시로 인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담판을 통해 체제유지와 경제발전을 달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예전에는 미국의 대북 공격을 두려워한 북한만이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선호했지만 현재는 미국도 북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북한과의 직접 담판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미국이 북한 핵무기는 물론 ICBM, SRBM 폐기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둘러싸고 건곤일척 일합을 겨루고 있다.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김정은과 트럼프의 리더십 운명이 결정될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이번 기회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달성하려하고 북한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체제보장(CVIG)’을 달성하려 하고 있다.

 

미국과 북한 양국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양보하기를 원하고 있다. 미국은 선 핵 폐기 후 체제보장, 북한은 선 체제보장 후 핵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중간단계로서 북한의 핵관련 리스트 신고를, 북한은 미국의 종전선언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여의치가 않다. 북한은 최소한 종전선언을 통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핵무기 수, 핵시설, 핵물질, ICBM 등에 대한 신고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대북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 없이 모든 것을 신고할 경우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정확히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성실한 핵 신고 없이 종전선언을 해줄 경우 북한은 핵무기를 성실히 신고하지 않고 마냥 시간을 끌거나 속임수를 쓸 것이라는 의심을 갖고 있다.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는 증거이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으면 백약이 무효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북한은 미국의 체제안전보장 없이는 핵무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미국은 선제적인 핵무기 포기 없이는 거의 절대로 체제안정보장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과 미국 간 불신으로 인해 단기간 내에 북핵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북핵문제로 인해 한반도에서 26.25 전쟁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북핵문제가 아무리 중차대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빈대잡기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북핵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평화공존이 유지되어야 한다. 남북한이, 북한과 미국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면서 북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전쟁과 평화는 똑 같은 두 글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극과 극이다. 전쟁은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반면 평화는 인간성을 극대화시킨다. 전쟁과 평화의 의미는 양극단에 있기 때문에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서로 매우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전쟁과 평화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전쟁을 선택할 수도 있고 평화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전쟁을 할 만큼 잔인하지만 평화를 만들만큼 선하다.

 

4세기경 로마의 학자였던 베게티우스는 그의 군사학 논고에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하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보다 약 1천 년 전에 살았던 중국의 손자는 실질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고 정치, 외교 차원에서 적을 이기거나 적 군사력을 와해시킴으로써 승리하는 것을 최상으로 보았다.” 전쟁을 하지 않고도 문제해결방법이 있는데 굳이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도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전현준우석대 초빙교수(), 한반도평화포럼 부이사장(), 북한연구학회 회장(), 통일연구원 기조실장()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0.18 21:22

[시선 | 평화의 마중물]


그란샤크 학교 이야기

 

송강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북쪽 약 40킬로 지점에 그란샤크라는 척박한 지역이 있다. 이곳은 카불 강 건너편 수키 지역과 나뉘어져 있고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곤 해서 그에 따른 지역 주민들의 희생과 피해가 막심했다. 러시아의 침공 때도 그랬고, 탈레반과 북부 동맹군과의 내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마을을 방문했던 2002년 이른 봄, 폐허가 된 가옥들과 버려진 불발탄들, 흙무더기에서 쉽게 눈에 띄는 해골과 인간의 뼈들이 거듭된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이 곳 흙먼지의 뜨거운 열풍이 들이치는 광야 한 복판에 슬픈 운명의 학교가 다 허물어진 채 놓여있었다.

 

비운의 학교

 

이 그란샤크 학교는 이미 40년 전 러시아가 아프간을 침공하기 이전에 지어졌다. 건물의 모든 벽은 아프간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육중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그 두께가 50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튼튼하고 강한 건축물이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둑에 위치해 있어서 강변의 푸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건너편 수키 지역에는 비록 나무는 한 그루 없지만 우람한 바위산들이 늘어서 있어 그 위용에 압도당할 것 만 같다. 바로 그 산자락 한 언덕 위에는 아프간 내전 때 탈레반 전사들이 이 마을을 포격 했던 녹슨 탱크가 그 포신을 그란샤크 마을 방향으로 겨눈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이 마을을 처음 방문했었던 2003년 봄, 이 학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 만치 파괴되어 있었고 학교 운동장과 주변들이 지뢰밭이 되어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나 빈집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거나 나무 밑 그늘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고 강한 모래 바람이 불면 높은 담벼락 밑에서 바람을 피해가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할 학교 운동장에서 지뢰를 밟아 자기의 다리들을 잃어버렸다. 나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이런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반드시 지뢰를 제거하고 이 학교를 재건하여 학생들을 다시금 자신들의 배움터로 돌려보내리라고 결심했다. 용기는 때로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현실의 강요일 수도 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교 운동장의 지뢰를 제거하고 무너진 학교를 다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을 주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튼 마을의 중요한 숙원 하나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에 몹시 반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가진 돈이 하나도 없는데 이런 당돌한 약속을 하다니 내가 이 낯선 모슬렘 국가에 와서 국제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당장 그 자리에서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수년 내에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지뢰밭 안에 놓인 학교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와 동정을 자아냈고 각처에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개척자들1)은 학교 지뢰제거와 재건을 위한 모금뿐 아니라 학교를 짓는 일에도 직접 참여했다.

 

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재난, 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어린 시절 지뢰밭이 된 학교 운동장에서 다리를 잃은 청년

 

전쟁의 결과는 건물의 파괴뿐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결과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심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단된 손이나 발이 다시 회복되지 않듯이 다시 치유되거나 재생될 수 없는 상처인 경우도 있다. 전쟁을 한 번 겪은 사람들은 그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다시는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 중에서 태어나서 전쟁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인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전쟁은 일상이 되고 폭력과 살상에 놀라거나 경계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변덕스러워 지고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이들에게 교육은 무의미하고도 불확실한 투자처럼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마을 어른들이 학교 건축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해서 기뻐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들이 학교 건축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다음세대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과 투자 때문이 아니라 그 건축 과정에서 혹 자신들에게 돌아갈 지도 모를 금전 몇 푼의 이익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마음이 씁쓸해 지곤 했다. 우리 개척자들은 자기 자녀들의 교육에 희망과 기대를 저버린 사람들과 더불어 학교를 재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경험했다. 일꾼들에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면 집에서 총을 들고 와 총질을 해대기도 했다.

 

내가 아프간에서 실감한 것은 분쟁은 어린 아이들이나 여인들도 사납고 거칠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쉽게 때리고 어린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힘으로 맞서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런 폭력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에게 총은 위대한 우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총구에서 모든 권위와 질서가 나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는 이 그란샤크의 이런 거친 어린이들이 훗날 평화를 위한 불굴의 사도들이 될 날을 꿈꾸며 학교를 재건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전에는 우리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던 주민들이 친구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전에는 만나기만 하면 바체시, 바체시하며 무언가를 달라고 조르던 사내아이들이 자기 호주머니에 토마토 등을 가져와 부끄러운 듯이 살짝 보여줄 때 우리가 거꾸로 바체시라고 하면 즐거운 표정으로 깔깔 웃으며 나눠 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

 

처음에는 지뢰 때문에 이 학교를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지뢰가 다 제거되자 그 학교 안에 들어가 그 내부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귀퉁이들이 무너져 검은 칠판들에 그려진 학생들의 좌절과 희망이 담긴 낙서들을 볼 수 있었다. 또 그 심한 포격에도 아직 무너져 내리지 않은 돌 벽을 쓰다듬으면서 인간에게 슬픈 운명이 닥치듯 이 아름다운 작은 학교가 겪은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 근처의 모든 집들은 진흙집들인데 비해 이 학교는 카불 강변 전망 좋은 위치에 돌로 튼튼하게 지어져서 전쟁이 나기만 하면 언제나 군인들의 요새가 되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기듯이 이 학교는 전쟁이 일어 날 때마다 자신이 품어야 할 어린 학생들을 잃어버리고 사납고 무례한 군인들의 총포에 짓밟혀야만 했다.

 

아프간 평화캠프


개척자들의 아프간 캠프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물을 길어오고 새벽 묵상을 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는 여러 마을에서 평화학교를 열었다. 오후에는 뜨거운 햇볕아래서 무너진 그란샤크 학교를 재건하기 위한 노동을 했다. 학교 안팎에 가득 쌓인 진흙과 무너진 돌무더기를 치워야 했고 수년 묵은 건조한 똥들이 진흙과 뒤 섞여 미세한 먼지가 되어 폐부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이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화장실도 고쳤다. 이 화석처럼 딱딱한 똥들을 직접 손으로 집어 함께 모아 처리하는 여자 청년들의 모습을 마을 젊은이들은 무너진 벽에 걸터앉아 묵묵히 쳐다 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문화도, 종교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이 나라에 들어와 그들 중의 하나처럼 몸 부쳐지내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을 가르치고 무너진 학교를 재건하는 모습을 그들의 눈동자에 분명하게 그려준 것만은 사실이다.



학교를 다시 재건하기 위한 노동

 


평화캠프 참가자들이 학교 재건을 위해 노동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프간 청년들

 

우리는 새롭게 지어진 학교를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여학생들에게 헌정했다. 학교가 새로이 개교하는 날 어린 여학생들이 당당히 행진하여 남학생들 앞자리에 앉았다. 머리에 스카프를 한 어린 여학생들이 난생 처음 학교라는 곳을 들어와 어리둥절하면서도 희열에 차있던 모습이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날, 서러웠던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그란샤크 마을에 평화의 새 봄이 오는 것 같았다.



평화 캠프에 참가한 어린 학생들

 

천 년의 원한


20077월 분당샘물교회의 청년 23명이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라는 마을에서 피랍되고 배형규, 심성민 두 청년들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먼 나라의 전쟁이 어느새 우리나라의 일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개척자들의 아프가니스탄 평화학교도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중단되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모슬렘은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이슬람포비아(이슬람에 대한 두려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도 오래다. 그러나 정작 아프가니스탄에서 내가 만난 어린 아이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모슬렘들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모슬렘들을 처참하게 학살한 십자군전쟁의 쓰디쓴 기억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고 있다. 어쩌면 그 종교 전쟁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천 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모슬렘들의 마음속에 악마처럼 그려진 그리스도인 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몹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그리스도인이에요?” 처음에는 왜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는지 어리둥절했었다. 그란샤크 마을의 아이들에게는 낯선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자신들을 위해 지뢰를 제거하고 그 위에 무너진 학교를 다시 지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게다. 어느 날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땀과 흙먼지로 뒤덥힌 옷을 입은 채 차가운 카불 강물에 뛰어들어 목욕을 한 후 아직도 흰 눈이 쌓인 흰두쿠시의 영봉들이 붉은 노을로 빨갛게 물 드는 장관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저 만치서 어떤 소녀가 화급히 달려와 앞치마 자락 안에 숨겨온 작은 수박덩어리를 손에 쥐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버렸다.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당혹스런 일이 었다. 나는 이 소녀의 지극히 어린 아이다운 감사의 표현을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사이에는 천 년의 원한이 장벽처럼 막혀있지만 이 아프간 소녀의 용감한 행동은 우리에게 어느 날엔가는 이 장벽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예표가 아닐까?

 


다시 재건된 학교의 석벽에 새겨진 헌정사

 


송강호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10.18 21:11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2018, 1968년의 독일을 생각하며...

 

정진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 맞잡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든 남북한 두 정상의 모습! 한인 교포들의 사이에서는 물론, 때 마침 한가위 명절을 맞은 고국에서도 추석 인사를 넣어 두루 두루 회람한 사진은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저도 두 번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통해 올랐을 뿐입니다. 이제 일반 한국인들도 북녘 땅을 통해 백두산에 오를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남북의 동포들이 서로 보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와야 합니다. 남북한 통일 논의에서 그 비교준거로 통일 독일의 사례를 인용한 예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들은 대부분 독일 통일 사례는 한반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 특히 내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때문에 동서독 분단 시기에는 남북한처럼 극한의 적대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이해 이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분단 경험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남북한의 자유로운 왕래는 독일에서는 분단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졌어도 서베를린의 젊은이들은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머리를 깎고 서점에 들러 책을 샀습니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동서 베를린 사람들이 섞였던 프리드리히스트라세(Friedrichstraße)역에서 서베를린 사람들은 제품 가격이 더 저렴한 동베를린 매장에 들르곤 했습니다. 소위 철의장막이라 불리던 동서독 분단 장벽 사이로 사람과 물품과 편지와 방송이 오가며 탈경계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베를린은 사회주의 동독으로 둘러싸인 섬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진영의 상징 공간으로 극한의 자유가 허용되었답니다. 서베를린 거주민은 서독으로부터 생필품 및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청년들은 군대가 면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기 원하는 젊은 예술가나 지성인들이 군대를 피하기 위해 서독의 다른 도시에서 서베를린으로 옮겨오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후 복구가 급속히 진행되던, 냉전의 현장이자 자유의 도시 서베를린에 마흔 살의 윤이상 선생이 파리를 거쳐 도착한 건 1957년이었습니다. 분단 초기였기 때문에 베를린 장벽도 세워지지 않았었습니다. 당시 서양 음악계는 전통의 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음악 작품들을 만들고자 하는 지난한 고민들을 할 때였습니다. 정통 서양 음악을 제대로 배우고자 했던 윤이상 선생도 이러한 시대적 압박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자신만의 소리와 음악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에 시달리던 1958, 윤이상 선생은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당시 현대음악계에 선두 주자로 달리고 있던 존 케이지의 강연회에 참석합니다. 강연 제목은 소통(Communication)”. 그리고, 그 강연에서 존 케이지는 침묵이라는 화두를 던졌다고 합니다. 한 연구자에 의하면 바로 이 때 윤이상 선생이 불교에서의 해탈과도 같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열게 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셨다고 합니다.

 

서양 음악을 정통적으로 익힌 윤이상 선생은 자신의 문화적 뿌리인 한민족의 선율과 사상, 가치와 정신을 서양음악에 융합시키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도 몇몇 음악가들이 동서양 음악의 혼용을 시도했으나, 그것들은 그저 기계적인 결합이었을 뿐입니다. 반면 윤이상 선생은 동서양 음악의 질적인 융합을 최초로 성사시킨, 그래서 현대음악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음악가로 1960년대 초부터 이미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베를린이라는 독특한 도시 공간에서 윤이상 선생이 경험하고 내면화했을 탈경계의 감수성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유럽 냉전의 교두보였던 분단된 동서베를린이지만 교류와 소통이 상대적으로 원활하여 공간적 탈경계를 이미 경험합니다. 이에 더하여, 동서양 음악의 혼합이 시도되었던 문화적 탈경계 역시 중층적으로 체험함은 물론, 본인 스스로가 그런 동서양 경계를 잇는 매개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윤이상 선생에게, 유럽의 냉전 시공간은 보다 큰 이상과 감성을 지닌 세계적 음악가로서의 포부를 일깨웠으리라 봅니다. 그 탈경계 세계인으로서의 감성은 자기 민족과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포용으로부터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작품 Images의 근원인 강서고분묘의 백호 그림(사진출처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

 

한민족의 정서와 우주관의 원류를 직접 체감하고 싶었던 윤이상 선생은 1963년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북한 대사관의 초청으로 북을 방문하여 고구려 유적인 강서고분묘의 벽화를 만나게 됩니다. 북현무, 남주작, 동청룡, 서백호! 그러나 그 후과로 예상치 못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야 했습니다. 바로,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 의해 조작되어 자행된 불법 납치와 감금의 고난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동백림 사건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19683, 거장 카라얀, 스트라빈스키 등을 비롯한 전 세계 181명의 음악인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한 윤이상 구명 탄원서가 박정희에게 보내졌으며 각 신문들에 게재되었습니다.

 

당시 탄원서 내용 중 일부를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윤이상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 음악계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과 인품은 한국 문화와 예술을 한국 바깥 세계에 알리는, 매우 소중한 매개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므로 대통령 각하, 당신은 이 탄원서에 서명한 음악인들은 당신이 현재 건강이 악화된 윤선생이 자유롭고 건강한 사람으로 다시 그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을 바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국제 음악계는 윤선생이 필요하며, 동양과 서양의 중재자로서 그의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음악과 문화를 위한 대사로서 그는 매우 소중합니다.”

 

동백림 사건 당시 3차에 걸친 공판이 벌어진 1968, 독일에서는 위와 같은 음악인들의 탄원서 이외에도 매우 다각적인 구명 노력들을 펼칩니다. 위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함부르크 예술아카데미는 윤이상 선생을 회원으로 등록시켰으며, 서독일방송국은 재판 중인 윤선생에게 작품을 의뢰함은 물론 한국방송국 총재에게 한-독 간 문화 관계를 심히 훼손하는 윤선생에 대한 재판을 철회하라 압박하고, 당시 베를린 시장도 박정희에게 전보를 쳤고, 윤이상의 작품이 연주될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한 음악도가 연단에 올라 윤이상 구명을 위해 일하는 대신 그 작품만 연주하는 것은 정신분열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의 사진에서 보이듯 3차 공판 후 각종 독일 언론들이 그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500여명의 독일 학생들이 이를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윤이상 선생 구명을 위한 음악인들의 탄원서(사진출처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

 



1968년 겨울, 동백림 사건 3차 공판 결과에 대해 보도한 독일 언론들(사진출처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

 

독일 시민도 아닌, 한국에서 온 신예 음악인과 유학생 및 이주민들을 구명하기 위한 독일인들의 구명 운동 노력은 실로 지금 생각해도 감탄스러우며 그만큼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 윤이상 선생을 비롯, 함께 납치되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 받았던 피해자들이 19693월 전격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오게 됩니다. 끔찍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취급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래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여 일년 가까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던 윤이상 선생님. 그리고 199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현대 음악 세계에 새로운 역사가 된 그분의 작품들. 이 모두는 1968년 독일에서의 구명운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올해는 이러한 구명운동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기와 달리 남북한이 화해와 평화의 새 역사를 열고자 하는 중차대한 노력이 시작된 해이기도 합니다. 탈경계 세계인으로서 분단된 남북한 민족과 역사를 모두 통 크게 껴안으셨던 윤 선생님의 미래지향적 열망이 현실화되려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최근 독일 당국은 남북한 문제에 대해 미국의 강경 노선을 더욱 지지하는 상황입니다. 하여 올해가 가기 전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는 1968년 서명운동에 참가했던 생존 음악인을 찾아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고, 1968년 옥중과 병원에서 윤선생님이 창작하신 작품들도 일부 공연하고, 나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독일 및 문화예술인의 역할에 대해 논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과 밑으로부터 힘을 모으려는 작은 시도에 불과하지만,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여러분의 따스한 어깨동무와 관심을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정진헌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8.10.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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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20 00:23

[이슈]


'적군 묘지' 앞에서 생각하는 평화

 

박종호


지난 6월 29일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 콜로키움 ‘회복적 사회를 위한 평화교육’에 참석한 아일랜드 평화교육 실천가 데릭 윌슨(Derick Wilson)과 김동진 박사(트리니티 칼리지)를 2년 만에 반갑게 다시 만났다. 2017년 2월 아일랜드 평화교육 현장답사에서 만나고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으니 그 반가움은 컸다. 데릭 윌슨은 콜로키움에서 평화교육과 회복적인 사회, 이를 위한 교육자들의 실천에 대한 발표를 하였는데, 그야말로 아일랜드의 남북대립과 갈등의 한복판에서 회복적 실천을 위해 달려 온 자신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알맹이를 풀어놓았다.


‘회복적 실천은 삶의 방식이자 일하는 방식이다. 다른 이를 희생양으로 삼거나 비난하기보다 책임을 지는 것이다. 상대를 정당하게 대하고, 타인과 차이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그 차이를 축복하는 것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시간, 상상, 창조적인 에너지와 희망이 새로운 현실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받아 적은 말이다.


나와 너, 우리 학교, 사회, 그리고 이웃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고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다. 평화교육이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고, 또 먼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아울러 폭력에 대해서도 상대의 폭력은 부당하지만 자기 진영의 폭력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폭력에 대해 거부하고, 비폭력을 옹호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다.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말인줄 알면서도 또 얼마나 절박한 말인가.


다음 날인 6월 30일 이른 아침, 데릭 윌슨과 김동진 박사, 그리고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교육과정연구모임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초등·중고등학교 교사, 대학생, 어깨동무 활동가 20여명은 파주 ‘적군 묘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회복적 평화’를 떠올려 보기에 적절한 곳이라 여겨서 고른 곳이다. 자유로를 지나 문산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달리다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자장리부근에서 큰길가에 차를 세우고 일행은 모두 내렸다. 얼핏 지나치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워진 간판은 '북한군 중국군 묘지 안내도'이다. 적군 곧 한국전쟁에서 남쪽과 서로 적으로 맞선 상대, 북한군과 중국군의 무덤이다. 제1묘역, 제2묘역으로 표시된 입간판이 함께 서 있었다. '적군 묘지'로 알려져 있고, 군부대가 관리하는 곳인데, 직접 지키는 사람은 없다. 두 묘역 사이에는 농사를 짓는 밭이 있어서 실제로 일하는 분들이 무심하게 우리를 건너다보고 일을 하고 있기도 한다. "이곳은 6.25전쟁(1950.6.25.-1953.7.27.)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6.25전쟁 이후 수습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묘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월 묘역을 구성하였으며, 묘역은 6,099㎡로 1묘역과 2묘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잠깐 입간판의 내용을 읽은 뒤에 오른편 2묘역으로 먼저 가서 우리는 무덤 가운데 서서 작은 꽃다발을 놓고 묵념을 올렸다. 무덤마다 놓인 비석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어디에서 전사했는지 등의 기록이 적혀 있다. 한국 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가 함께 안장되어 있다가, 중국군 유해는 2014년 무렵에 송환되었다. 더러 ‘무명인’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젊은 넋이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이다.



다시 걸음을 돌려 처음 들어선 쪽으로 가서 1묘역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조금 더 잘 단장되어 있는 곳이다. 역시 함께 모여서 묵념을 하고, 준비해 간 구상 시인의 시 ‘적군 묘지 앞에서’를 정지영 선생님이 낭독하고, 또 다른 시 ‘휴전선’을 대학생이 낭독하고, 데릭 윌슨의 말씀도 들었다. 이런 고통스런 아픔의 현장을 찾아서 나누는 모습이 회복적 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이 될 것을 확신한다는 말을 하셨다.



1묘역의 말끔히 단장된 무덤을 돌아보다, 문득 무덤이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휴전선까지 불과 몇 십리, 비록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영혼이라도 고향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배려한 것이리라. 누구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위아래를 설득하고 그렇게 북쪽으로 배치하려고 애쓴 사람이 새삼 고맙다.


여기 이곳에 묻혀 있는 저 무덤 속 젊은이들이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 갈 날은 언제일까? 남과 북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 북한과 미국이 북쪽에 안장되어 있던 미국 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송환하는 뉴스를 보면서 더욱 우리 남과 북 모두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화해와 평화, 회복의 실천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거꾸로 확인하는 셈이다.


자신이 남에서 태어나, 북의 원산에서 자라고, 남쪽으로 내려 온 뒤, 한국 전쟁 때는 종군 기자로 참여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시를 남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남과 북 모두에 대해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며 아파한 시인 구상(1919-2004)이 쓴 ‘적군 묘지 앞에서’를 다시 읽어 보면서 답사의 소감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박종호ㅣ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현재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3:39

[시선 | 평화의 마중물]


검은 바다


송강호


20041226일 아침 8시 수마트라섬 서쪽 바다 해저에서 리히터 지진 9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였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825분경 높이 10미터 이상의 높은 해일이 아체 지역에 밀려왔다. 5분 사이에 20만 명의 아체 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사상초유의 대재난이 닥친 것이다. 개척자들1)은 즉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활동가들을 재난 지역에 파견하였다. 내가 아체를 찾아간 것은 20053월이었다. 쓰나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이미 파견된 우리 동료들의 활동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아체 주민들로부터 검은 바다가 밀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쓰나미가 들이닥쳤을 때 거대한 검은 파도가 세 차례 산처럼 밀려왔는데 심해의 검은색의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가족들의 눈앞에서 서서히 죽어갔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검은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난민들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서 아체의 한 섬에서 지냈었는데 가끔은 바닷가에 나와 해변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들을 바라보면서 그 날 밀려왔다던 그 검은 바다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주석1) 개척자들은 교회와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평화(Shalom)를 실현하는 것을 미션(Mission)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전쟁재난기아 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현장에 나가 평화를 위해 활동합니다.


개척자들이 아체에 가려고 했었던 원래 이유는 쓰나미 때문이 아니었다. 아체는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예전처럼 독립된 이슬람 국가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수카르노와 자바 중심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 당하였다. 그 후 강고한 아체인들은 오랜 세월 독립투쟁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의 반정부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고 이 끔찍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아체 국경을 통제했다. 외국인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후미진 곳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들이 아체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물건을 빼앗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아체 사방에는 인도네시아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자랑스런 국기가 아니라 처량하고 슬픈 것이었다. 아마도 4.3 때 제주도민들이 우리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과 탄압을 겪고 오히려 너도 나도 해병대에 자원했던 것과도 같은 심리일 것이다.


아체에 온 이래로 난 쓰나미 피해자들과 함께 난민촌에서 살았다. 때로는 뿡에(Punge)라는 마을의 난민 천막에서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슬림멈(Seulimeum)이라는 난민촌에서 지내기도 했다. 뿡에는 반다 아체의 바닷가에서 가까운 마을이라서 쓰나미가 왔을 때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었다. 어렵사리 파도에 떠밀리던 중 나무 위에 올라갔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간혹 살아남아서 부모가 없는 옛 집터에 천막들을 쳐 놓고 살아가고 있었다. 고아가 된 청소년들이 역시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자신들의 천막 안에 들여 재우고 같이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함께 먹기도 했다. 공고를 다녔었던 한 젊은이가 실력 발휘를 해서 높은 전신주에 올라가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 천막들에 전등을 달아주기도 했다. 이들은 이렇게 부모들과 친구들을 잃은 자기 마을에 다시 돌아와 폐허 위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천막들 사이에는 쓰나미 때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공동묘지(Guburan)가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우물을 길어 먹고 목욕도 했다. 밤에는 기분이 나빠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우물을 공포영화의 제목을 따와서 “링(ring)”이라고 불렀다. 대소변은 좀 떨어져있는 이슬람 사원 부속 화장실을 사용한다. 이곳 사원의 이슬람 사제(이맘)도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사진으로 볼 때 폐허뿐인 이 천막촌에서도 비록 불편은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쓰나미로 폐허가 된 반다 아체 [사진제공:USAID]


아체 섬의 주민들이 피난해 있었던 슬림멈 난민촌의 상황도 비슷했다. 내가 지냈던 24인용 군용 천막은 네 가족이 함께 귀퉁이를 나뉘어 사용할 만큼 널찍했다. 천막 안에서 사생활은 없었다. 낮에는 찌는 듯이 더워서 남자들은 밖에 있는 그늘에 함께 모여 소일을 했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외출을 삼가는 이슬람의 관습 때문에 무덥고 어두운 천막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밤에는 쥐들이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들조차 없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배급 받는 쌀도 있고 또 어부들인 고로 고기도 잡아와서 사는 이들 속에 나는 얹혀 살았다. 주중에는 이 난민들과 같이 그들의 섬에 들어가 그들의 집을 함께 지었다. 높은 해일이 들이 닥친 이곳 마을들 중에는 주민들의 반 이상이 몇 분 사이에 목숨을 잃은 곳도 여럿이다. 파도에 밀려온 양철 지붕으로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는 목이 잘린 사람들도 있었다. 우기에는 차가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무들을 줄에 묶은 후 바닷물 위에 띄워서 해변을 따라 끌고 와서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바닷속은 날카로운 산호들과 바위들이 많은데다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발에 상처가 생기곤 했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으로 지어놓은 집이 넘어지기도 했다. 음식은 밥과 물고기, 간혹 문어를 잡아 요리했다. 채소나 과일이 없었다. 어촌 사람이라 그런지 매일 물고기만 먹는데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배를 타면 환자들이 많았다. 쓰나미로 그나마 있던 진료소들이 모두 부서져서 반다 아체에 있는 병원까지 가야만 했다. 나와 늘 함께 지내는 아누아르(Anuar)라는 사람도 별 대수롭지 않은 배앓이로 아내를 잃었다. 그와 함께 비가 오면 빗물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지진 나듯 집안이 흔들거리는 천막으로 덮은 판잣집에서 지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눈 뜬 장님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로 집을 짓는다고 내다버리는 모든 살림도구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들이다. 라디오, 선풍기, 그릇들, TV, 냉장고, 옷과 이불 그 어느 것 하나 버려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쓰나미로 생긴 고아들과 홀로 남은 노인들을 위해 지은 집 

: 루모 므파캇(함께 결정하는 집이란 뜻) [사진제공: 개척자들]


루모 므파캇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배우는 어린 아이들 [사진제공: 개척자들]


개척자들은 아체에서 작은 평화도서관을 세우고 있다. [사진제공: 개척자들]


아체 발링카랑의 평화도서관 사서 셀리 [사진제공: 개척자들]



“내게 강 같은 평화”는 없다.


하루는 반다 아체(Banda Aceh)에 와서 구호 활동을 하고있던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흩어져 활동하다 갑자기 만나게 되니 누가 설교를 할 것인지 찬송가는 무엇을 부를 것인지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 때 비교적 최근에 온 한 자원 봉사자가 그러면 우리가 다 아는 쉬운 복음 성가 하나를 같이 부르자며 “I’ve got peace like a river (내게 강 같은 평화)”는 모두 알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때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사역하시던 한 늙은 선교사님이 몹시 주저하시며 이 노래는 아체에서 부르기가 마땅치 않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비만 내리면 홍수로 수난을 겪는 이곳 사람들에게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또 쓰나미로 가족들과 집과 모든 소유를 잃고 심지어는 신체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이 어떻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또 화산과 지진으로 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에게 “내게 산같은 믿음”이란 가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익숙하고 친근한 이 노래를 이곳 아체에서는 함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평생을 보내며 반다 아체에서 희생자 가족들을 돕고 있던 한 노년의 미국 메노나이트 선교사의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부를 수 없는 찬송을 자기 흥에 겨워 불러왔고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없는 신앙을 자기도취적으로 믿어왔다. 우리의 몸에 밴 익숙해진 생활 방식과 믿는 방식 모두가 타인에게는 모난 돌처럼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에겐 남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체의 한 섬에서 난민들의 집을 지으면서 진정으로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바다는 자신을 고립시키는 장벽이 아니다. 정글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글을 슈퍼마켓처럼 여기고 있다는 한 선교사의 말처럼 이들에게 푸른 바다는 온갖 물고기들과 전복, 해삼, 조개, 새우, 게, 오징어, 문어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창고요 번화한 시장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운 풍랑과 싸우고 상어들에게 물려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는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우리를 둘러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자포자기야 말로 우리의 의식과 생각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버리고 우리를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그 검은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송강호ㅣ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 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의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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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2018.08.19 23:23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안녕, 친구야!


정진헌


"안녕, 친구야~!“


어깨동무의 오랜 전통으로,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첫 인사를 드립니다.


윤이상하우스는 베를린의 클라도우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 현대음악의 5대 거장 중 한 분으로 추앙받는 윤이상 선생님께서 1974년 완공된 때부터 1995년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던 자택인 윤이상하우스. 이 집에서 윤 선생님은 120여곡이라는 대부분의 작품을 탄생시키셨지요.


얼마 전, 괴팅엔대학교 러시아학 은퇴교수께 윤이상이란 분을 아시냐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안다고 한 그 분의 대답에 어떻게 아시냐 되물었더니, 매우 황당해 하시면서, "모차르트를 어떻게 아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어떻게 답하냐? 너무 유명한 분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냐?"라고 답하시더군요. 독일에서는 이렇게 음악의 거장 윤이상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고급문화(hochkultur)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는 오래된 제도와 문화적 전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거장이 사셨던 집에서 저는 제 직장인 베를린 자유대학교로 출퇴근합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윤이상평화재단의 베를린 지부장으로 윤이상하우스의 관리 및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생업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긴 합니다. 이 집은 오랜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빈 집이었으니까요. 올 1월 초, 저는 정말 가구도 없었던 이 빈집에 혼자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적막한 동네, 을씨년스럽고 오래 비어있던 거택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첫 며칠 동안은 솔직히 무섭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분명 출근하면서 모든 불을 껐다고 여겼는데, 돌아와 보면 연주홀이 있는 아래층에 늘 불이 켜져 있곤 했지요. 그렇게 며칠 몇 주를 지내며 익숙해지고,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고장 났던 난방도 고치고, 빈 방들에 가구를 들이고, 레지던스 펠로우들도 선발하여 식구를 늘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윤이상의 후예와 신진 음악인들로 성대한 개관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적지 않은 음악인들,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들의 지인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그 분의 삶과 음악에 대해 배우고 논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삶을 재구성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이 집이 말해주는 윤이상선생님의 감성과 마음을 더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편지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윤하우스가 제게 가장 먼저 들려주었던 윤이상 선생님의 그리움과 열망이라는 두 화두를 공유할까 합니다.


윤하우스에 방문객이 오시면, 저는 먼저 발코니로 모십니다. 그리고는 동남쪽으로 시선을 멀리 올려 크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 펼쳐진 커다란 호수를 보시라 합니다. 베를린 사람들이 흔히들 반제(Wansee)라 부르는 호수지만, 이쪽 편은 하펠강(Havel)입니다. 윤이상 선생님은 바다가 보이는 고향 통영을 늘 그리워하셨답니다. 그래서 통영의 풍광과 그나마 비슷해 보이는, 커다란 호숫가의 이 집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윤이상 선생께서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1967년 독일에서 불법 납치되셨다가, 세계 유명한 음악인들과 독일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힘입어 1969년 풀려나신 후 독일 정부의 권유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그리고 스스로도 돌아가지 않으셨던 망명객으로 사셨지요. 통영에서의 유년기 추억은 윤 선생님 작품의 가장 소중한 자양분이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창작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윤이상하우스 전경


그렇게 저 멀리 고향의 그리움을 강물에 실어 두셨다면, 발코니 아래 정원에는 그 분의 미래지향적 열망이 선명하게 놓여 있습니다. 바로 한반도 모양을 본 딴 연못이 그것입니다. 남북으로 나뉜 현재의 한반도가 아니라 금붕어들이 남북으로 헤엄쳐 다니는 통일된 한반도. 그것은 고인이 추구하신 민족적 정체성이자 미래에 놓인 진정한 고향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아스포라, 즉 고국을 등지고 타지에서 삶을 영위하는 민족 공동체나 개인들에 대한 연구에서 고국(homeland)의 이미지는 늘 과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적지 않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그 후세들에게 있어 고국은, 현재의 분단된 남이나 북 중 하나에만 국한될 수 없기도 합니다. 제도적으로는 한 국가만 선택해야 하지만, 국제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열망 또한 존재합니다. 그래서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니는 재일동포 청소년들도 자신들의 조국은 현재에 있지 않고, 분단이 해소된 미래의 통일된 한반도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개인들에게 있어 그들이 진정으로 돌아갈 고국은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에 위치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 사회문화적 노력, 즉 미래지향적 문화 만들기의 과정을 인도계 미국 사회문화인류학자인 아준 아파두라이의 제안을 빌려, 열망이라 부릅니다.


한반도 모양을 본 딴 연못


윤이상 선생님께 고향 통영에 대한 향수는 과거, 고인의 유년기 추억에 기인합니다. 반면에 그 분이 추구하신 민족적 정체성은 분단선이 거둬진 통일된 한반도라는 미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인의 향수(과거)와 열망(미래)은, 하펠강가에 자리 잡은 집터, 그리고 한반도 모양의 연못으로 각각 재현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이상 선생님에게 있어 현재라는 시간은, 어떠한 공간적 유형으로 구체화되었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윤이상하우스가 이역만리 독일, 그것도 분단과 탈분단을 경험한 베를린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 윤이상 선생님 살아생전 납치와 고문을 자행했던 남한의 군부독재 정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들이 지배하는 현재적 고국은 윤이상하우스 공간에서는 철저히 무시된 듯 보입니다. 한 마디로 그 정통성을 상실한 것이죠. 반면에, 윤이상 선생님은 유년기 추억과 분단이 해소된 미래를, 서양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작품들에 녹여 내셨던 것입니다.


본인의 철학과 이념, 고통과 애도의 감정 등을 음악적 언어로 승화시키셨던 역사적 장소로서의 윤이상하우스. 저는 이 하우스에서 지난 봄 남북 정상회담을 인터넷으로나마 목격했습니다. 동트는 새벽, 창밖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합창은 마치, 고인의 기쁨을 노래하듯,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처럼 들렸습니다. 고인의 역사 의식과 미래지향적 열망이 고스란히 담긴 대작의 향연처럼, 새벽녘 윤이상하우스는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역사적 순간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와 민족사의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의 체취가 남겨진 윤하우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끝까지 읽으신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도 뜨거운 폭염으로 지치고 힘들지만, 고 윤이상 선생님이 꿈 꾸셨던 미래의 조국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꼭 감상하시기를 권하며, 오늘은 이만 인사에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진헌ㅣ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8.08.19 21:02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끔찍한 현실을 추상적으로, 파울 클레


김소울


과거에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화폭에 담겨졌지만, 대부분의 전쟁화에서 화가는 전쟁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달랐다. 전쟁의 규모가 컸던 만큼, 화가들도 대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징집되었고,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이를 지켜보고 경험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이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감정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 클레는 세기말적인 불안감에 대한 감정을 나타낸 표현주의 화가로,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등과 함께 ‘청기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청기사파는 흩어지게 된다. 칸딘스키는 징병을 피해 고국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고, 동료였던 마르크와 마케는 군대에 징집되어 전장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클레는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비롯된 형태를 거부한 추상을 추구하게 된다.


파울 클레, 『명분으로서의 죽음』 (1915)


<명분으로서의 죽음>은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화가 마르크를 기린 작품으로 <시대의 메아리>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매체는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 그림을 사용했다. 이 그림을 클레의 동료화가 마르크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닌,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자살을 알리는 지면에 사용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는 작금의 사회에 매우 격분하게 된다.


<명분으로서의 죽음>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클레는 소집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1916년 7월 예비군 보병연대에 소속되었지만,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게 된다. 바이에른의 왕이 뮌헨의 예술가들을 전장에 직접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항공학교의 회계과 서기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게 된다. 창조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전쟁은 모순된 관계이자 함께할 수 없는 위치라고 생각한 클레는 복무기간동안 자신의 모순적 입장을 성찰하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끔찍한 경험을 지속하던 클레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문구를 쓰게 된다. “이 세상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 추상적이 되고, 세상이 행복할 때 예술은 지금-여기에서 생겨난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렸던 클레가 생각한 추상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대립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클레의 그림은 점점 ‘지금-여기’가 아닌 ‘추상’의 세계로 발전하였다.


파울 클레, 『지저귀는 기계』 (1922)


이 작품은 클레가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그린 <지저귀는 기계>라는 작품이다. 클레는 이 그림을 통해 기계문명에 대한 불편함과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하게 된다. 전쟁에서 만났던 비행기, 탱크, 총 등 다양한 기계들은 그에게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릴 것만 같은 인공 새가 앙상하게 철사와 같은 선 위에 앉아 있다. 잉크가 얼룩진 것 같은 푸른 회색빛의 배경은 녹슨 느낌마저 난다. 그가 독일의 화가라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궁핍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그는 가까운 친구들을 많이 잃게 되었고, 전쟁의 비극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전쟁 이후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이라 칭하며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100점 이상의 작품을 몰수했다. 1937년 미술에서의 모든 ‘퇴폐’를 청산한다는 목적으로 히틀러의 지시 하에 <퇴폐미술전>이 뮌헨에서 열렸다. 이 때 파울 클레의 작품도 7점 포함되게 된다. 전쟁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한 클레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독일이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 클레는 이후 스위스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몰입하였고, 죽기 전까지 9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파울 클레가 정의한 예술은 다음과 같았다. “예술은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있는 끔찍한 현실을 오히려 어린 아이와 같은 추상화로 그려낸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아동화의 모방이라 여겨졌던 평가에서, 황폐해진 유럽에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예술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힘든 시기의 유럽인들에게 그의 그림은 아픈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잊지 않게 해주는 치유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럽던 시대에 완성된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 역시 피폐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플로리다 마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