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레터(글)2018.02.19 14:29
[시선 | 브루더호프에서 날아온 평화 편지]


영국에서 아리랑을 불러봅니다


원마루


안녕하세요, 어깨동무 식구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설날을 맞을 준비를 하시겠군요.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살게 된 지 이제 10년이 되어 가는데 여전히 저는 음력 설을 지내야 새해가 온 것 같고, 김치 만두를 빚어 떡만두국을 끓여 이웃을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세배도 하고 윷놀이를 노는 시간을 기대합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한국에서는 나이만큼 만두를 먹는다고 말해주었는데 올해는 만두를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깨동무 가족 모두 풍성한 설날을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명절이 오고 한국이 그리워질 때면 저는 아내, 아이들과 노래를 불러보는데 요즘 떠 오르는 노래는 개똥벌레와 아리랑입니다. 개똥벌레는 예전에 한 번 마을의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공동체 축제 때 불렀는데 친숙한 곤충이 등장해서 그런지, 아니면 개똥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소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입에 착착 붙는 노랫가락 때문인지 마을 사람 모두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한 친구는 이 노래를 영어로 번역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아니면 돈 고워에이(Don't go away) 돈 고 워에이 돈 고워에라고 흥얼거리는 친구를 간혹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슬프면서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울다 잠이 든다로 마무리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사람들 노래(folk song)인 포크송 개똥벌레 덕에 친구를 많이 사귀었습니다.


두 번째 노래 아리랑은 이곳 영국 식구들이 가장 잘 아는 한국 민요(folk song)입니다. 한국 손님이 오셨을 때 청하면 곧잘 부르는 노래가 이 노래이고, 런던에서 한국문화 행사가 열리면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저희 마을의 음반 도서관에 가면 미국의 포크송 가수 피트 시거가 세계 여러 나라의 민요를 모아 부른 음반이 있는데 거기에는 한국의 아리랑도 담겨 있습니다. 피트 시거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노래를 부르기 전에 관객들에게 아리랑의 배경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아리랑을 당시 고통당하던 사람들의 애환을 부른 노래인 동시에 남과 북의 사람들이 두루 아는 노래이기때문에 남북의 일치를 상징하는 노래라고 합니다.


피트 시거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정든 터전을 떠나야 했던 여행길에 아리랑을 부르며 슬픔을 달랬고, 서로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방마다 특유의 가락과 노랫말의 아리랑이 불리고 있지요. 그리고 아리랑은 소련 때문에 강제로 고국을 등져야 했던 고려인들에게도 불렸습니다. 저는 예전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17년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독일과 전투를 치르다가 포로로 잡인 고려인들이 수용소에 부른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프로이센 수용소에 갇혔던 김그리고리(김홍준)과 안 스테판(한국 이름 미상)이 불렀던 아리랑 노래가 100년이 지나서 공개된 겁니다.


두 사람이 부르는 애달픈 아리랑 곡조를 듣고 있자니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서 평화가 와서 정든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곳 영국에서 제가 찾던 형제애의 삶을 기쁘게 살고 있지만, 고국의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곳의 상황을 염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쩌다가 저도 모르게 아리랑을 콧노래로 부르게 되는데 그때는 한국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동시에 한국의 평화를 기원하게 됩니다.


고려인 전쟁 포로가 부른 아리랑 듣기


마을 식구들이 저녁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 부르는 모습. 사진: bruderhof.com/ko에서


곧 열릴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의 노래로 아리랑을 연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피트 시거의 말대로 이 노래는 남북 평화의 상징인 게 틀림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치적 입장을 잊은 채 손을 맞잡고 노래를 함께 부르다 보면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습니다. 아직 북한과 미국의 오래된 적대 관계를 풀어야 하는 등 넘어야 할 고개가 많지만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평화의 아리랑을 부르며 교류의 문을 열어나가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어깨동무가 다시 북녘의 어린이병원과 콩우유 공장, 학용품 공장을 찾아가 지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설에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우리 가족, 마을 식구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민요는 모름지기 우리의 삶을 담고 마음을 담아 함께 만들어 부르는 노래라고 하니 저희 나름대로 노랫말을 붙여 부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지어 부르는 노래는 영국 아리랑 또는 저희 마을 이름을 따서 너도밤나무 아리랑이 되겠군요. 벌써 입에서 노랫말이 흘러나와 한 번 적어봅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 봄이 왔네 새봄이 왔어 평화의 봄을 열어나 보세

(후렴)


2. 총을 버리고 손 맞잡고서 화해의 세상을 만들어봐요

(후렴)


3. 잠긴 문을 열어젖히고 기쁨의 잔치를 열어나 보세

(후렴)


영국 학교에 다니는 저희 아이들에게 한국 노래 부르기는 한국말을 배우면서 우리네 문화를 배우고, 아픔과 희망을 나눌 기회입니다. 멀리서지만 어깨동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마음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소식 전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2018년 2월 3일

너도밤나무 숲에서, 마루와 아일린 드림



원마루  아내와 함게 세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6, 2, 유치원)을 기르며 영국 도버 근처의 너도밤나무(Beech Grove) 브루더호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가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등을 번역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심포지엄2017.12.14 14:33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개원 기념 심포지엄 

한반도 평화교육의 길을 찾다


- 평화시민교육의 필요성과 새로운 시도 (정용민)

-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평화통일을 위한 어깨동무의 길 찾기 (정영철)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8.01 14:02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서울과 평양의 환호, 세계의 부러움: 2000년 정상회담


정영철


한 사람은 비행기 트랩 위에서, 또 한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트랩 아래에서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2000613일 오전 1037, 역사의 한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바로 그날 2000613일은 한반도 분단사에 새로운 역사가 쓰인 날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동안 전쟁과 적대, 갈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소멸을 주장했던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평양의 하늘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던 희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바로 2000년 정상회담이었다.

 

우리처럼 오랜 세월 분단을 경험했던 동-서독도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정상회담을 통해 동-서독의 화해와 협력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비록 불행의 땅으로 변했지만 예멘 역시 남북 예멘의 정상회담을 통해 전쟁의 방지와 통일을 위한 숱한 회담을 전개했었다. 지금도 지중해의 조그만 섬나라인 분단된 키프로스에서 남북 키프로스의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상호 필요에 의해 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변국들의 중재와 압력에 의해 열리기도 한다. 예멘의 경우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중재가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으며, 키프로스는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00년 정상회담은 어찌 보면 1970년대부터 남다르게 한반도 문제를 고민해온 김대중의 필생의 역점 사업이었을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김대중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예비군제 폐지와 대체, 4대국교차승인론 등 굵직한 한반도 관련 공약을 내세우며 박정희를 압박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면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자신의 통일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정상회담은 아마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고, 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1998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그는 199811월부터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이로부터 약 17개월간에 걸친 막후접촉과 상호 밀사 및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마침내 2000410일 정상회담을 발표하게 된다. 이 당시 남북한의 막후 라인은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후일 국정원장)과 북한의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김보현과 북의 전금진(우리에겐 전금철로 잘 알려져 있는 북의 아태부위원장) 라인도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도 다양한 시그널을 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003월의 베를린 선언이었다. 베를린 선언은 경협의 확대’, ‘남북의 화해·협력’,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당국자 대화를 핵심 골자로 하는 대북 제안이었다. 이 베를린 선언이 나오기 이전, 북은 이미 우리에게 경협에 대한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북의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공식화시킨 것이 베를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남북정상회담

본 저작물은 '국정홍보처'에서 '2000'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김대중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상회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이었다.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났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평양에서의 모습은 파격 그 이상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정일위원장의 공항 영접, 북의 군인들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던 모습, 두 정상이 같은 승용차를 타고 환호하던 평양 시민들을 만나면서 퍼레이드를 벌인 점 등등.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 광경에서는 서울에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까지 눈물을 보일 정도의 감격이었고, 모든 기자들이 박수를 치며 이에 환호하기도 하였다. 외신 기자들 역시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였고, 이 순간만큼은 우리를 가장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다. 그간 북을 싸워 없애야 할 적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상대임을 인정하였고, 남북이 더 많은 만남과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실제 정상회담 이후로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경유하여 멀리 에돌아 평양을 가야하는 현실을 비판하였고, 결국 서울과 평양 간에 직항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함으로써 남북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김정일위원장 팬클럽까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정상회담이 가져다 준 남북 일상의 변화였다.

 

역시 가장 큰 변화는 국민들의 북에 대한 인식이었다. 적이 아니라 동포로, 협력을 통해 같이 공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할 통일의 다른 한 주체로 북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약 30만 명의 군중이 두 정상의 만남에 길거리 환영을 보여주었다면,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도 자발적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따뜻하게 환대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2000년은 서울과 평양이 세계 주요 외교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급박하게 서울을 찾았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평양과 서울을 동시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두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국 역시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베이징을 찾아 중국지도자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라면 북과 미국이 상호 특사를 주고받으면서 수교 협상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점이다. 그해 10월 조명록 특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역시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북과 미국은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여 수교까지 염두에 둔 합의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200010월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는 조명록 특사 (출처:통일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0001023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공연을 관람하던 중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출처:통일뉴스)

 

장 중요하게는 지금까지 남북이 서로를 향해 적대와 갈등의 패러다임으로 보던 것을 뒤집어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이다. ‘안보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아닌 공존과 평화화해와 협력이 더 인기 있는 구호가 되었고정치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 청사진을 발표하였다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당국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남북의 교류와 협력에 나서게 되었다제주도에서는 감귤을 북에 보냈고경기도에서는 휴전선 인근의 방역 사업에 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경상남도는 통일 딸기사업을 통해 지자체간의 새로운 협력모델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기업들은 개성공단을 넘어 북과의 더 넓은 경제 합작을 위한 진지한 모색을 하였고시민단체는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기찬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이 있은 후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그 사이에 남북은 그야말로 많은 일들을 벌렸고때로는 웃고때로는 울고때로는 싸우면서 서로를 이해하였다초기에는 참으로 많은 실랑이가 있었다호칭 때문에 얼굴을 붉혀야 했고남에 내려온 북의 응원단은 구겨진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에 분노하였다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그렇게 서로를 배워 가는 시간이었다이런 점에서 보자면정상회담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움이 아닐까통일은 아주 거창하게 보자면막막한 미래의 일이지만우리의 주변에서부터 만남을 이어간다면 소소한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이해하고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일상의 평화와 일상의 통일을 꿈꾸게 해준 것이 바로 정상회담이었던 것이다.

 

-미 공동코뮤니케: 코뮤니케는 일명 공식발표 혹은 공동성명서로 해석된다. 2000 -미 공동코뮤니케는 역사적으로 북미관계의 일대전환을 의미하는 공식발표였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북은 조명록 당시 총정치국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조명록 특사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북미관계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그 결과 양국은 2000 10 12 -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게 된다.  -미 공동코뮤니케의 핵심 내용은 두 나라의 적대관계 청산과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의 협력, 양국 관계의 정상화였다. 또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북이 클리턴 대통령의 방북을 요청하고, 이를 위해 당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이를 준비하기 위해 방북하기로 한 점이다. 실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0 19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미 공동코뮤니케는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합의로서 의미를 갖지만, 이후 미국의 정치정세가 급변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 2000년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게 패하면서 북미 관계는 이후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정창현, 남북정상회담 600(서울: 김영사, 2000)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2(서울: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5)

임동원, 피스메이커(서울: 중앙북스, 2008)

임채완, 전형권, “6.15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및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한국동북아논총17(2000)

2000년 한·러 공동성명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8.01 13:49

[이슈]


2017년 여름 평화의 편지: 증오의 다리를 건너면 무엇을 만날까


이산(이이화) 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8, 우리 현대사를 회고하는 것은 깊은 상심을 동반한다. 극악한 35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났으나 잘못 낀 첫 단추는 대가가 처참하다. 반민족 과거 청산에 실패하고 단일 민족정부 수립에 실패한 과오는 두 세대가 흘렀어도 현존 문제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빼앗긴 나라에서 시달리던 민족혼이 되찾은 나라에서도 부대끼는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서 오는가? 하얼삔역의 총탄이자 아오내장터의 태극기이듯 그릇된 흐름에 맞서는 불굴의 혼마저 죽은 것은 아니어서 19604.19혁명, 1980서울의 봄’, 1987‘6월 항쟁으로 생명력은 분출했으나, 이내 5.16 군사정변, 5.18 광주학살, 민주세력의 분열로 억눌렸다. 이 땅에 두 세대가 지나갔어도 나와 다른 생각엔 여전히 증오의 화살을 주저하지 않는 광장에 서 있다. 우리는 그 증오의 다리 어디쯤 있는가?


이념에 휘둘린 해방’(역사가 바로 서고 상처를 보듬어 시나브로 어우러지는 해맑은 광복의 날을 고대한다)정국을 살아낸다는 것은 칼날 위 묘기여야 했다. 낮밤으로 뒤바뀌는 세상을 단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던 이 땅 구석구석 덮친 피비린내는 인간본성을 회의하게 한다. 제주, 여수순천, 문경, 보도연맹, 노근리, 함평, 산청함양, 거창……. 얼떨결에 맞이한 해방으로 쥐구멍을 찾던 친일세력의 야수성을 도구로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양민학살을 활용하였고, 여순사건을 제압하고 만들어낸 국가보안법은 뒤이은 아류 독재정권들에게도 요긴한 올가미였다. 시커멓게 탄 민의는 깊이 묻어야 하는 엄혹한 시대가 참 길었다.

 

2009년 귀향한 나를 찾아와 조용히 글이나 쓸까 하던 성유보 선생께 한 말씀 주십사 2012526, 동호서당에서 마련한 다섯 번째 강좌는 이후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의 향방에 영감을 제시했다. 일생 정론직필의 언론인으로 살아온 선생은 관용을 주제로 삼으면서 우리 사회의 관용할 수 없는 것들을 분명히 짚었다. 남북분단으로 몰아간 김일성·이승만의 정치야욕, 반민특위 해체의 반민족 행위, 국가보안법의 폐해 등. 일생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던 지역 어른 몇몇의 입에서 곧 빨갱이란 증오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와 같지 않은 생각을 경청하지 않는 경직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야겠다는 역사학도로서의 존재이유를 일깨운 자리였으니, 선생은 물론 그 어른들과의 해후가 얼마나 고마운지. 억지 죄목으로 갇혀 망가진 몸으로도 굳건하던 선생은 그 1년 뒤(2014. 10. 8.) 살아온 삶을 다 연재하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홀연 떠났다. ‘통일레일의 해맑은 포부를 말하던 그 모습 선한데, 다시 여쭤들을 수 없으니 가슴 아프다. 선생이 떠난 한 달 뒤 고등법원에서, 이듬해 봄 대법원에서, 선생을 옭아맸던 국가보안법 위반재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고고하고자 하던 심신을 망가뜨린 동시대인의 행위가 왜 살아서는 화해를 구하지 못했을까? 애초 무죄였던 선생은 마석모란공원 묘역에 누였으나 편히 잠들 수나 있을까? 선생의 원고에 이런 말이 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절대왕정과 공존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군국주의자를 관용할 수 있겠는가? ‘관용사회의 모델이라고 할 만한 프랑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 문제에 부닥쳤다. 나치 협력자 숙청 문제였다. 카뮈는 반 나치 저항신문 <콩바combat전투>지에,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고 기고했다.”

 

현대사의 원혼을 달래는 길은 옥죄는 금기를 하나씩 풀어헤치는 것이다. 하나둘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고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선을 허물 때,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기약하는 유연한 묘안들이 나타날 것이다. 사방이 트인 공간, 고택 누마루에 앉아 술렁술렁 바람을 맞으며 절감한다. ‘대화라는 꼭지로 이질의 가치관들이 만나 어떻게 부대끼고 깎여지는지 지켜보는 일은 절절하다. 2015년 해방 70년의 과제를 생각하며 빨치산과 토벌대의 만남도 그 선상에 놓였다. 한국 현대사의 상처가 깊은 지리산 벽송사 선방에 이제 팔순 구순에 접어든 어르신 여러 분이 마주 앉았다. 혈기방장하던 청년일 때 서로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 우리 동지를 죽인 자들과 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했고 덕담 한마디 오가지 못했으나, 헤어지면서는 그동안 참 애썼소. 건강하게 오래 사시오.”라고 말 건넸으니, 그 깊은 주름에 증오도 좀 묻히는 것인가. 그 자리를 알리는 말에 이렇게 적었다.

 

저 들에 나가 밭갈이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과연 제대로 답할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수많은 군인과 경찰과 빨치산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냐고 물어보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고 말할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

 

자유롭고자 하던 영혼들에게도 현대사의 칼바람은 비켜가지 않았다. “8·15해방은 그의 모순을 극단적인 비극의 형식으로 연출하였다. 그가 태어나고 사랑했던 도시 서울은 그가 들었던 민주주의 민족문학의 깃발에 불법의 낙인을 찍었고, 그가 선택했던 도시 평양은 그의 치열했던 삶을 반역의 죄명으로 모욕하지 않았던가. 날짜도 모르게 처형된 그의 쇠약한 심신은 반세기가 넘는 오늘까지 하늘 아래 어느 한 곳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기 힘든 안타까움을 선사한다. 그의 삶은 식민지시대의 위험한 지뢰밭을 횡단하고 있고, 그의 죽음은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가장 아픈 상처에 직결되어 있다.”라고 한 임화(고택에서듣는인문학강좌47_염무웅, <임화의 해방전후>, 2015. 11. 28.(), 둔산재)가 그랬고, 정치 문인으로 갈아타기 힘든 한결같은 문학주의자 백석(고택에서듣는인문학강좌 48_박태일, <백석, 어디 있는가?>, 2015. 12. 26.(), 영승서원)이 그랬다.

 

분단 한반도는 통일 독일을 자꾸 쳐다보게 된다. 연착륙 통독에 이르게 된 씨앗이 바로 신뢰에 기초한 소통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독의 동방정책Ostpolitik은 빌리 브란트라는 진보적 지도자가 대화로 평화공존을 강화하면서 화해를 통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이런 기조는 이후 헬무트 콜 등 보수 정권으로 바뀌고도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억누를 수 없는 동독인의 통일 열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어 증오로 원점 회귀하는 우리에겐 뼈아프다. 더욱이 지정학적 요지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을 녹록하게 할 국제관계의 역량을 고심하게 한다. 해방 70년의 과제를 짚은 일환으로 고택을 찾으신 노교수의 말씀 몇 대목은 지금도 되뇌고 있다.

 

해양세력을 겨누는 또는 대륙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다리’.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인식되었다. 한말 제국세력들은 동강난 다리나 부러진 로 만들어 한반도를 나눠 갖고자 하였으니, 일제의 독식이 마감하면서 결국 그리 되었다. 침략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고

자 한반도 중립지대 안이 개화파 지식인들에게서 나왔으나, 미력했다. 지난 세기의 제국주의와 냉전주의 잔존물을 극복하여 불행한 이며 다리가 되어버린 남북분단을 허물고 세계 평화로 나아갈 해양과 대륙을 잇는 진정한 평화가교는 어느 즈음인가?”(고택에서듣는인문학강좌 45_강만길, <분단시대의 역사를 위하여>, 2015. 9. 26.(), 침류정) 신념의 인간은 향기롭다. 좌에 섰건 우에 섰건, 적이었건 동지였건, ‘보다 우리를 앞세웠던 그 삶은 숙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방법은 달랐지만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공로는 한결같았습니다. 서럽고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권을 한번 가져보고 싶었다.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의 말발굽처럼 민적을 찢고 스스로 목을 친 이주환의 자귀처럼 생명력 넘치는 불굴의 혼은 2017년으로 넘어오면서 광장의 촛불에서 그런 꿈을 꾸었었다.

 

8월의 상심은 전쟁 없는 평화를 간절히 꿈꾼다. 인간의 것이 아닌, 짐승의 것인 전쟁에 좋은 전쟁이 어디 있고 나쁜 전쟁이 어디 있는가. 그 본질은 증오이다. 이 증오의 다리를 건너 따뜻한 인간애를 만나고 싶다. 힘이 아닌 오로지 이해로 이루어지는 평화 아닌가.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새벽 4시에 맛보는 8월의 대기는 쌉싸름하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파랗게 날 돋는 바람이 흐른다.


 

* 시민후원으로 지속되는 고택에서듣는인문학강좌는 누구에게나 열린 시민강좌로, 참가비 없이 후원은 자유롭게입니다.

* 연구공간 파랗게날은 Daum이나 NAVER 검색창에 파랗게날또는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를 입력하여 만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PDF)2017.07.26 16:30

피스레터 no1 창간준비1호-final-재수정.pdf

 

 

 

 

 

● 함께 만드는 평화|최혜경

●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 판문점|정영철

● 플라톤이 말하는 전쟁의 기원|정경화

● 평화학 공부와 실천|김동진

● 욕 대장 종오 이야기|최관의

● 또 하나의 휴전선, 북한식당|강주원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6.19 14:34

[시선 아일랜드에서 쓰는 평화학 이야기]


아일랜드에서 바라보는 한반도 평화 2


김동진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후, 세계 많은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아일랜드 방문이 늘어나고 있다. 일례로 필자가 피스레터를 쓰고 있는 오늘, 518, 스리랑카의 타밀과 싱할라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들과 함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와 데리에 모여, 2009년 스리랑카 타밀 지역 물리바이칼 대학살을 기리는 벽화 제막식을 거행했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대한 한국 신문 기사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 필자는, 거의 30년 뒤 같은 날 타밀 민족에게 발생한 학살과 아픔을 기억하는 행사 가운데, 국가 폭력으로 희생당한 분들의 얼굴이 인종과 국경을 넘어 하나로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1972년 블러디 선데이를 경험한 아일랜드 사람들이, 타밀 대학살에 대한 행사를 후원하고 조직한 것도 단순한 공감을 넘어, 타민족의 고통 속에 자기민족의 아픔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제막식 내내 눈물을 흘리던 타밀 여성 한 분은 마치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아일랜드 행사 준비 관계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유엔, 유럽연합 의회, 영국, 미국 등 세계 여러 곳을 돌며, 타밀 대학살을 증언해 온 이 여성은 그동안 자신의 증언을 들어 준 사람들도 매우 고마웠지만, 아일랜드에서는 동정을 넘어 진정으로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같이 연대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된 오늘, 타밀 지역 물리바이칼에서는 희생자를 기리는 마음으로 작은 조약돌에 이름을 써넣는 행사마저도 금지되어 있다. 고향에서 금지된 행사를 타국의 환대 속에 진행한 타밀 사람들의 아픔은 어떤 한 민족만의 아픔이 아닐 것이다.


▲ 5월 18일, 스리랑카의 타밀과 싱할라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들과 함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와 데리에 모여, 2009년 스리랑카 타밀 지역 물리바이칼 대학살을 기리는 벽화 제막식을 거행했다. 

@ www.tamilnet.com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한창이던 2000년대 중후반 한반도와 스리랑카의 평화 프로세스는 위기를 거듭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결국 중단되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위기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스리랑카의 경우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결국 싱할라 정부의 타밀 지역 폭격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수십만 타밀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물론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도 순탄한 길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IRA 등 무장단체의 무장 해제 문제, 과거사 청산 문제, 권력 공유 문제 등 평화 프로세스의 걸림돌로 인해 의회가 붕괴되는 등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는 2000년대 중반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북아일랜드 무장단체들은 결국 무장 해제를 선언했다. 강경파인 신페인당과 민주연합당이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하여 권력 공유를 이끌어 냈다. 아일랜드와 영국 정부, 유럽연합은 지속적으로 시민사회의 평화교류협력 사업을 독려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걸까? 북아일랜드 시민사회 평화단체들을 방문한 타밀과 싱할라 사람들은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타밀과 싱할라 시민사회의 평화 활동과 화해작업이 아일랜드보다 덜 역동적이었기 때문일까. 아일랜드 단체의 사람들은 그 때문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가에 대해 역설했다. 물론 자신들의 평화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정학적 환경이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영국, 유럽연합 모두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성공하기 위해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유럽연합의 성공을 위해 아일랜드의 평화정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스리랑카의 평화 프로세스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던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에 도움이 되지 않는 프로세스였다. 타밀 반군이 둘러싸고 있던 트링코말리 항구는 세계 수준의 자연항으로 중동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핵잠수함이 정박하기에 최적의 전략항구였다. 미국은 스리랑카 싱할라 정부와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타밀과 싱할라 사이의 군사적 균형을 무너뜨려, 싱할라 정부가 대 타밀 전쟁과 학살을 기획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결국 타밀과 싱할라 시민사회 사이의 협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 이후 타밀 지역은 싱할라 정부의 군사 통치 지역이 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지정학적 악조건은 평화 프로세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발언으로 촉발된 북미 관계 악화, 북한의 계속된 핵개발, 미사일 실험은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계속 증가시켰다. 민간의 교류협력 사업은 결국 전면 중단되었다. 새로운 한국 정부가 평화 프로세스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이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변수이다.


한편 안타깝게도,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와 함께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지정학적 환경도 점차 부정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은 브렉시트 찬성을 추진했고, 신페인당은 다시 통일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결국 올 해 초 북아일랜드 의회가 붕괴되었고, 아직까지 정부가 구성되지 못한 채로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순간 다시 한 번 남북 아일랜드 사이에 군사분계선이 설치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도 커져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한반도와 스리랑카를 함께 바라보는 오늘, 필자는 갈등의 핵심 쟁점이 해결되지 않는 한, 평화 프로세스는 지정학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항상 위기에 봉착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말 어렵게 시작한 평화 프로세스가 너무나도 어이없게 무너져 내리는 이유이다. 결국 지정학적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지역 갈등 집단의 지도자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을 최우선 전략으로 삼을 수 있는가가 평화 프로세스의 지속가능성에 가장 중요한 열쇠로 보인다. 하지만 갈등 집단의 정치 군사지도자들에게 이런 평화에의 헌신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 일일까? 갈등과 외부위협을 활용해 자기 집단의 충성도와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싶은 유혹은 어느 지도자에게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좌절하기는 이르다. 아일랜드에서 열린 타밀 5.18 행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한목소리로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느꼈다고 말한다. 타밀 대학살만을 바라볼 때, 타밀 사람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버렸고, 이는 타밀만의 고통이라고 느꼈지만, 아일랜드 사람들과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이들은 전 세계에서 전쟁과 갈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꿈꾸기 시작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꿈꾸는 우리가 다른 민족의 아픔과 평화 프로세스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 국가의 시민사회가 가진 힘만으로 한 지역의 평화 프로세스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바꾸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의 상황을 널리 알릴 때, 이는 갈등과 전쟁을 활용해 권력을 유지하는 매력적인 정치 전략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가장 강력한 평화적 수단이 될 수 있다.

 


김동진 한신대에서 신학을시드니대학에서 평화학을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다현재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국제평화학 겸임교수로 평화학을 강의하면서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6.19 14:30

[시선 | 평화를 이야기하는 철학자들]


겸애(兼愛)를 주장한 세계시민주의자 묵자

: 무엇이 묵자(墨子)를 전쟁에 뛰어들게 하였는가?


정경화


묵자는 중국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 사람으로 유가와 비교될 정도로 일가를 이룬 사상가이다. 특히 국가 간 전쟁으로 민중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당시, 묵가(墨家)라는 집단을 형성하여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에 직접 뛰어들어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묵자는 가족애를 강조했던 유가사상을 비판하였는데, 이런 묵자에 대해 맹자는 애비도 모르는 금수와 같은 존재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겸애를 주장하여 머리끝에서 발꿈치에 이르기까지 온 몸이 다 닳도록 천하에 이로운 일이라면 행하던 사람이었다.”고 말하여 묵자의 실천가로서의 헌신을 높게 평가했다.


▲ 묵자 - 사진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묵자가 살던 시대 중국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때로 열강의 주변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장기화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침략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이 묵자이다. 묵자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의견을 비공(非攻)이라는 말로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전쟁은 의롭지도 이롭지도 않기 때문에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침탈하는 것은 우리가 남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훔치는 것과 같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또한 지배자의 입장에서야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거느리는 백성을 수를 늘려 이로움을 취할 목적이 있겠지만,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묵자는 보다 근본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해치지 않지만 남을 해치곤 한다. 이렇게 나와 남을 구별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나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나듯이 전쟁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런 마음으로 말미암아 천하의 큰 이익이 생겨난다.


이러한 마음, 타인을 자신과 같이 위하는 마음이 겸애(兼愛)이다. 묵자는 겸애를 특정한 타인만을 사랑하는 별애(別愛)와 구별한다. ()이라는 한자어는 두 개의 벼 화자()와 한 개의 손 수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이 손으로 두 포기의 벼를 모아 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겸애는 모두를 아우르는 인류애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루 모든 사람을 사랑한 후에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두루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두루 모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된다.

 

묵자는 가족애나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사랑과 같이 차별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느 누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이를 공격하고 착취할 수 있기에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겸애가 평화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태도임에도 당장 전쟁이 계속 일어나는 속에서 겸애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묵자는 보다 직접적인 행동에 나선다.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편에 맞서 싸울 평화유지군의 필요성을 느낀 묵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 뿐 아니라 군사전술을 개발하고 전쟁에 대비한 훈련을 실시한다. 실제 묵자의 무리는 강력한 군사조직이 되어 전쟁을 막는 성과를 이룬다. 강대국인 초나라가 성 공격 기술이 뛰어난 공수반을 앞세워 약소국인 송나라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열흘밤낮을 걸어 초나라의 혜왕을 만나 전쟁을 만류하지만 혜왕은 전혀 전쟁의 의지를 거두지 않았다. 이에 묵자는 혜왕이 보는 앞에서 공수반의 성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수성 전술의 시범을 보였다. 공수반이 묵자를 먼저 죽이고 송나라로 쳐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지만 묵자는 동료들이 송나라에서 대비하고 있음을 알려 혜왕이 결국 전쟁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묵자는 나의 평화, 자국의 평화만을 걱정한 애국주의자가 아니라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침략자에 맞서는 방어전쟁까지 불사한 실천가였다. 겸애라는 사랑이 미치는 범위가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묵자는 겸애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임을 주장한다.

 

넓은 지역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좁은 지역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같은 것이다 겸애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을 사랑하던 것과 미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현재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모두 같은 것이다.

 

묵자는 전쟁과 같은 불행에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세계시민주의 활동가일 뿐 아니라, 미래 인류에 대해서도 걱정한 사람으로 요새로 치면 지속가능성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인 것이다.


묵자는 겸애를 실천하는 것은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주장한다. “하늘의 의지는 사람들이 힘이 있으면 서로 일을 도와주고, 재물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 주고, 올바른 도를 알고 있으면 서로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하늘의 의지를 따르게 되면 국가 간 전쟁이 사라지고, 사회는 평등해져 모든 사람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묵자가 인류의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때로부터 2500여년이 지난 지금, 전쟁은 사라지지 않고 인류 전체가 평화로워지는 날은 요원해 보인다. 묵자가 당시 목격했던 민중의 삶은 굶주린 자가 먹지 못하고, 추운 자가 입지 못하며, 피곤한 자가 쉬지 못하는 것이었다. 현대인 또한 무력전쟁으로 인해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로 인해 생존과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현대인들이 여전히 평화와 평등의 가치를 빼앗긴 채 살고 있는 것은 연대와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겸애가 인간사회의 바탕이 되지 못하고, 자기만 그리고 자기 가족과 주변인들만 위하는 별애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특권층일수록 별애가 커서 하늘의 뜻을 거슬러 힘도, 재물도, 지식도 독점하고 타인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일삼아 민중의 삶이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 별애가 매우 각별한 정치인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불운을 겪은 바 있어 민중의 고통이 극심한데, 특히 미래에 대한 배려가 없어 청년과 어린이들이 가장 위협받고 있다. 평화로운 세상,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겸애를 키우고, 별애는 잠재우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하여 진정한 하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겸애의 정치를 실행할 정치지도자, 머리끝에서 발꿈치에 이르기까지 온 몸이 다 닳도록 천하에 이로운 일이라면 행할 실천가로서의 정치지도자 또한 절실하다.

 



정경화 | 대학에서 때때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세상에 정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녹록하지 않아 늘 궁시렁대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 만드는데 일조하고픈 소망은 꼭 쥐고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6.19 14:30

[시선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관계사]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 1,001마리의 소떼가 휴전선을 넘다


정영철


19986월은 한반도의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된다. 집념의 기업인이라 불리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20세기의 가장 멋진 퍼포먼스를 펼쳤다. 바로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서산농장의 소떼 500마리가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넘어가는 장면이었다. 이를 두고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20세기의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 이름 했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과거 미국과 중국을 이어주었던 핑퐁외교에 빗대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외교라 이름 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500마리의 소떼가 판문점을 넘는 그 광경은 감동과 아름다움이었다. 서로가 총을 겨누고,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을 일삼던 바로 그곳에서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소떼가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500마리의 소떼가 지나간 길은 그로부터 4개월 후 다시금 501마리의 소떼가 또 지나가면서 총 1,001마리의 소떼몰이 방북이라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1998년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있었고,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악화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새롭게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더욱이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남북관계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로서 햇볕정책을 내놓고 있었다그러나 남북관계는 생각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이전 정부 시절 악화된 남북관계와 더불어 1994제네바 합의로 위기를 넘긴 북미관계 역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19988월에는 금창리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오히려 북한과 미국이 공방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북한이 대포동 1라 불리는 로켓 발사를 감행함으로써 북미관계까지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주영 회장은 소떼 방북이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였을까?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금강산 근처의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이다. 6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앞으로 땅만 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소 판돈 70원을 가지고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세 번의 가출 끝에 서울에 정착한 그는 훗날 현대그룹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을 세우게 된다. 이때 그가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소 판돈 70원이 결국 소떼 1,001마리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사실, 정주영은 북한으로부터 세 번의 초청을 받게 된다. 1987년과 88년에 초청을 받은 그는,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방북을 승인받지 못하였다. 이후, 마침내 1989년에서야 세 번째 초청 만에 방북 길에 오르게 된다. 그가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첫째로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종의 실향민이었다. 그의 고향 강원도 통천은 금강산 자락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겨울이면 눈이 1m 이상 쌓이는 곳이었다. 서산농장의 소떼를 바라보는 정주영에게 그 장면은 마치 자신의 고향을 느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 이외에 그의 소떼 방북에는 기업가로서의 모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 대한 투자를 통해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경제적 이익을 선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중 특히 금강산 개발은 이곳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꾸림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고 기업가적인 입장에서는 향후의 다가올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북한에 대한 모험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9년 첫 방북에서 그는 금강산 개발에 대해 북한과의 공동 개발 협정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제 곧 닥쳐올 북핵 문제와 김영삼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 악화라는 국면을 만나면서 아무런 진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딱 8년 후인 1997년 북한의 광명성경제협력연합회장명의의 초청장을 다시금 받게 된다. 방북을 앞둔 그는 서산농장에서 오랜 동안의 고민 끝에 거대한 퍼포먼스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 방북하는 것이었다.


▲ 1998년 6월 16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하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 Ⓒ민중의소리


흔히 소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역사적 감정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아니 동물이라기보다는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동반자였다. 돈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겠다는 생각을 거부한 정주영에게 소는 자신의 개인사에 비춰보더라도, 그리고 민족적 정서에 비춰보더라고 가장 적합하였다. 소떼 방북에 나서던 날 그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서울로 찾아들 때 무작정 이 길을 통해 달려왔었지요. 이제 소떼들을 몰고 고향을 방문하니 매우 감격스러워요. 황소걸음이라도 통일의 날이 다가오길 바랍니다.”고 소회를 밝혔다. 북한도 그의 소떼 방북에 대해 정 회장 일행이 따뜻한 동포애의 지성을 담아 마련한 소들을 가지고 왔다. 북측 관계 일꾼들이 정 회장 일행을 판문점에서 혈육의 정으로 따뜻하게 영접할 것이다고 중앙통신을 통해 전했다.


마침내 1998616일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45대와 함께 정주영 회장은 판문점을 통과해서 북한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사료를 실은 트럭과 승용차 10대 등 소떼 방북은 1km 나 행렬이 이어질 정도의 광경을 연출했다. “소는 한 뼘의 농토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셨던 아버님께 바치고 싶은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라고 했던 그가 소 판돈 70원을 500마리의 소떼로, 그 후 4달 이후에는 또 다시 501마리의 소떼로 갚았던 것이다.


소떼 방북은 전 세계적인 이벤트였고, 남북에게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남북관계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두 번의 소떼 방북이 있고 난 후, 그해 1118일 마침내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관광객 889, 승무원 480, 안내원 50, 그리고 오락 담당 9명을 태운 28,000톤급 금강산 크루즈 여객선 현대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였다.


▲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객 800명을 태우고 첫 출항하는 '현대 금강호' Ⓒ현대아산


소떼의 방북은 이벤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곧이어 닥친 대자연재해 등으로 심각한 식량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경제가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른 상황에서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소떼의 방북은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에게는 엄청난 지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당시 소떼 방북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때마침 출범했던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정부 시절의 성과와 함께 심각한 오류를 교훈으로 삼아 대북정책에서의 정경분리를 추진하였다. 정경분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를 떠나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겠다는 것은 기업인에게 새로운 도전을 북돋게 했다. 특히, 현대의 입장에서는 지금껏 북한과의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근본적인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89년 금강산 관광에 대해 개발 약속까지 하고서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1997년 북한의 정주영 회장 초청은 금강산 관광 등 현대의 대북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결과 1998년 소떼 방북,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의 합의(6), 마침내 금강산 첫 관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주영의 소떼가 연출했던 1km가 넘는 행렬의 장엄했던 광경도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소떼가 한 번 지나간 길을 그 후 10여 년 동안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고갔다. 북한을 관광하기 위해서,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 남한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과 유니버시아드 게임 등을 응원하기 위해서,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부지런히도 오고갔다. 길은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지런히 밟고 지나갈 때에야 만들어진다. 소떼가 꾹꾹 눌러놓았던 그 길을 따라 10여 년 동안 부지런히 오가면서 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떼 방북으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휴전선과 판문점은 다시금 누구도 오도가도 못하는 적막한 공간으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살벌한 대결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금강산의 발길도 끊겼고, 개성공단의 철도와 도로도 끊겼다. 한 동안 총성이 멈추었던 휴전선의 하늘에 총성이 울리기도 하였고, 지뢰를 밟은 어린 병사들의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남북이 만들어놓은 길에 어느새 잡초만 자라나 무성한 풀밭을 이루고 있다.


소떼 방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회장은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고 난 그 이듬해에 별세하였다. 2001년 만해상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에는 DMZ 평화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소떼 방북은 2000년 정상회담으로, 그리고 2007년의 또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세계인이 이를 전위 예술이라고 칭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단의 숙명을 뛰어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이 있고, 민간이 할 일이 있으며, 기업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때로는 정부가 앞서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민간이, 때로는 기업이 앞서갈 수도 있다. 분명 소떼 방북은 기업이 앞서서 분단의 휴전선을 헤집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정부가, 민간이 그 뒤의 철조망을 걷어내었다. 이렇게 통일과 평화의 길은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힘을 합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모든 것을 독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정부의 독점은 곧 분단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단의 정치를 넘기 위해서는 정부, 민간, 기업이 힘을 모아야 한다. 1998년의 소떼 방북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당시 소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지금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 풍성한 소떼가 되었는지, 혹은 관리 부실로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배고픔에 한 점 고기 덩어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다. 당시 소떼를 싣고 떠났던 트럭이 지금도 북한 땅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한다. 소떼의 향취를 간직한 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마 당시의 소떼는 그 등위에 평화와 통일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당시의 소떼가 짊어졌던 짐이 다시 우리의 어깨위에 놓여있지 않을까? 남북 모두 소떼만도 못하다는소리는 듣지 말아야겠다.

 


참고한 글

권영욱,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서울: 아라크네, 2013)

전도근, 신화를 만든 정주영 리더십(서울: 북오션, 2010)

아시아경제신문, 재계 100 - 미래경영 3.0 : 창업주 DNA서 찾는다(서울: FK미디어, 2010)

파이낸셜뉴스 산업부, 집념과 도전의 역사 100(서울: 아테네, 2004)

김인수, 시대정신과 대통령 리더십(서울: 신원문화사, 2003)

  

 

정영철 |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북한, 통일, 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
피스레터(글)2017.06.19 14:30

[이슈]


남과 북의 '사랑과 전쟁'


황윤옥(하자센터 센터장)


겨울이면 아이들의 허리까지 올 정도로 내리는 눈이 예사였다고 한다. 바다가 멀지 않아 생선도 먹을 수 있었고, 밭농사도 지을 수 있어서 감자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올 해 여든 넷, 친정엄마의 고향은 일제강점기의 함경도 영흥군이다. 지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금야군. 태어났을 때는 일본이, 지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인인 땅. 여든 넷의 할머니는 그곳에 어린 시절과 엄마 산소를 두고 남으로 내려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그런데 고향을 두고 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국민이 된 대한민국은 전쟁을 벌였고, 고향은 적진(敵陣)이 되었다. 38선을 넘어서 내려 온 서울에서 다시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했던 친정엄마에게 전쟁은 고향을 잃은 상실로, 북의 군대에 쫓겼던 공포로 남았다. 그 전쟁의 경험은 할머니의 삶 가장 밑바닥에 국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존감각을 자리하게 하였다.


지금 일하고 있는 하자센터는 청소년기관이어서 청소년들의 활동리듬에 맞추어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하고 월요일에 휴관한다. 언젠가 토요일 행사 중에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토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냐고 해서 하자센터는 월요일에 쉰다고 했더니, 바로 왜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느냐는 한숨이다. 근무일도 다 나라가 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기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걱정은 곧 여든 넷 할머니가 국가에 대해 갖는 두려움이다. 북쪽 국가에 쫓겨 고향을 잃었고, 이제 남쪽 국가의 말을 잘 들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정작 당신은 두려움이라고 느끼지 조차 못하고 있는 두려움.


그렇다. 지난 60년을 넘는 기간 동안 북쪽의 국가와 남쪽의 국가는 모두 전쟁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아, 국민이 겪은 전쟁의 경험과 상처 위에 군림하였다. 정전이 아니라 휴전이어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위협은 늘 유효했다. 60년도 넘는 세월동안 그렇게 친정엄마는 국가가 필요할 때마다 전쟁의 경험을 소환 당했다. 치유와 회복의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올 해 현충일 추념식에서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라고 한 대통령의 고백은 놀랍고 고맙다. 전쟁을 국민들을 겁주고 휘두르는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음을 드디어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인정하였다는 데서 놀랍고, 이제 전쟁의 경험에 눌리지 않고 상실과 공포의 경험에서 벗어나는 치유와 회복을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고맙다.


▲ 2012년 어린이어깨동무의 날 '6.25를 평화의 날로' 


난학교*의 시작도 쫓겨남이었다. 한남동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일본인 건물주가 비싼 값에 싸이에게 건물을 팔면서 갑자기 운영을 포기하고 쫓겨나야하는 재난을 맞는다. 일방적 통고, 강제집행 등 내몰림과 쫓겨남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면서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오히려 재난에서 배우는 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재난학교라는 이름 사이에 아름다울 미()를 넣었다. ‘난학교’, 재난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그것의 출발은 재난을 직시하는 힘이다. 전쟁은 지난 역사에서 한반도의 가장 큰 재난이었고, 여든 넷 할머니의 온 삶을 쥐고 흔들어 놓은 재난이었다. 전쟁이 통치의 수단을 벗어났으니 이제야말로 우리의 전쟁 경험을 직시하고 한반도를 재난 학교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베로나의 두 가문, 몬태규가와 캐플릿가 사이에는 어디에서 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원한이 있다. 두 가문의 이 해묵은 원한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애틋한 연인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의 전제이자 배경이다. 원한을 자기 가문의 힘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삼고 있는 어른들 덕분에, 원수 집안이지만 왜 원수가 되었는지는 모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비극이다. 원한에 대해 질문할 수 없기에 결국 죽음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랑. 한반도의 재난학교는 남과 북의 원한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사랑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올해 625일은 전쟁의 경험을 소환하는 날이 아니라 남과 북이 전쟁을 넘어서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반도라는 재난학교에서 마음 놓고 사랑하는 남과 북의 로미오와 줄리엣들을 상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재미난학교 :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되고 있는 한남동의 문화공간 테이크아웃드로잉은 드로잉 사태를 재난이라고 명명하며, 재난의 공공성을 선언했다. 이후 재난현장에 난학교를 스튜디오 형태로 세워 문화와 예술로 재난을 넘어서는 활동을 하고 있다.


* 젠트리피케이션 : 상업지역 재활성화와 함께 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기존 소규모 임차인이 비자발적인 이동을 하게 되고, 그 자리에 대형 프랜차이즈가 들어서는 잠식현상



황윤옥 | 어린이어깨동무 이사이자, 하자센터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사무총장, 어린이어깨동무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남녘 어린이와 북녘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고루 해왔습니다. 얼마 전까지 서울시교육청 참여·소통보좌관으로도 일했습니다.

Posted by 어린이어깨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