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한반도 평화의 봄, 시민사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윤철기
한반도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6개월은 오랜만에 가슴 설레는 시간이었다. 냉전과 분단의 역사가 종착역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남과 북의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오가며 악수하는 순간,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판문점은 더 이상 분단의 상징이 아니다. 도보다리는 남과 북의 정상이 함께 거니는 순간, 지난 70년간 분단의 모순과 상처를 치유할 ‘오작교’가 되었다. 판문점 선언은 남과 북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남북 정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선언할 때 다시 판문점에서 만났다.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6월 12일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대통령이 손을 맞잡았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평화는 약속으로 시작되지만 실천으로 완성된다. 남북 모두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대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쟁의 역설이다. 그래서 남북한은 대화를 포기 하지 않았고, 지난 70년 동안 여러 차례 중요한 합의들을 했다.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때마다 남북한 간의 긴장은 고조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은 깊어졌다. 경제적 손해도 컸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개성공단이 갑자기 폐쇄되면서 그 손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갔다. 분단비용을 실감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시간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속세의 필부들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억겁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포기 하지 않았다.
분단이 남긴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는 평화의 실천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약속의 이행이 중요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반도의 평화는 남북한 정상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했던가. 남, 북, 미 정상은 지난 6개월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예술이 아니라 마술과도 같은 시간이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하지만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권력의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남, 북, 미 정상들에게도 큰 부담이다. 지금 이 순간 남, 북, 미 정상의 정치적 의지를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력의 의도가 곧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분단구조를 끝장 낼 평화의 정치는 최고지도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분단의 역사에서 권력은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다. 분단구조에서 끝임 없이 권력은 적을 만들어 냈다. 남북한 관계에서 권력은 어렵게 합의한 내용들을 명확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깨뜨리고는 했다. 국가안보와 이데올로기는 합의 파기와 불이행의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다.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전적으로 정치에 맡길 수 없는 이유이다. 경제와 사회문화 영역에서의 인도적 지원과 교류와 협력은 안보의 위기가 도래하면 한 순간에 중단되었다. ‘창구단일화’의 논리가 당연시 받아들여졌다.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지키고자 어렵게 쌓아올린 공든 탑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적을 만드는 정치’가 부활하였다.
분단구조의 정치는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적을 만든다. 적을 만드는 정치는 그 정당성을 스스로 찾지 않는다. 적의 문제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적을 만드는 정치는 위험한 정치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이다. 평화는 적과의 공존을 요구하는 일이기에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분단구조 하에서 적을 만드는 정치는 언제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어렵게 찾아온 한반도의 봄을 정치에만 모두 맡길 수 없는 이유이다. 적을 만드는 정치는 탈분단과 평화를 실현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분단의 정치를 끝장 낼 수 있는 것은 위정자(爲政者)들이 아니다. 분단구조 하에서 권력이 평화를 통해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시민’이다. 정치가 평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했지만, 그 평화를 지키는 일은 시민사회의 몫이다. 시민사회는 때로는 지지와 직접적 행동을 통해서, 때로는 비판과 견제를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나갈 주체이다.
본래 정치는 사회와의 대화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연극무대에서 배우의 방백(傍白)처럼 혼자 떠들어대면 사회가 알아서 자신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기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적 공론장을 제도화했다. 바로 의회이다. 의회는 시민의 대표들이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제도적 공론장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회는 남북한 관계의 문제에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의견을 조율하는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제도화된 공론장도 안보위기가 발생하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게다가 국제정치 무대에는 제도화된 공론장이 부재하다. 국제여론이 있지만 그 영향력은 취약하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투영될 공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내외에서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권력에 요구할 수 있는 수단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특히 정치가 안보위기라고 규정하면 시민사회의 발언권은 사라졌다. 분단구조 하에서 안보위기는 언제나 실재한다. 따라서 안보위기의 양상과 수준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필요했다. 지난 시기 개성공단이 문을 닫을 정도의 안보위기의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안보위기의 수준에 대한 평가는 철저히 권력의 판단에 맡겨졌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을 때 입주기업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속가능한’ 경제협력 모델이 추진되어야 한다. 개성공단은 남북한 경제협력의 상징이다. 개성공단이 다시 문을 열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남북한 정부가 필요에 따라 쉽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경제협력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의 공간이 지속되는 것은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경제협력을 통해서 남북한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 증대될 때,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협력의 외연을 확대하고 참여자들을 확대함으로써 남북한 경제와의 연계성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권력이 자의적 판단으로 경제협력을 중단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한 경제협력은 북한이 노동력과 토지와 같은 생산요소를 제공하고 남한이 자본과 기술을 투입하는 기능적인 모델이었다. 그리고 생산품은 남한 기업들에 의해서 남한경제나 수출을 통해서 유통되었다. 북한경제 보다는 남한경제와 연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통일부가 개성공단의 문을 닫는다고 할 때, 북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화를 지키기에는 상호의존성이 낮았다. 그래서 외연을 확대하고 북한의 공장과 기업소들이 경제협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남북한 사람들이 참여할 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당장에는 한국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할 것이다. 협동조합과 같은 형태로 경제협력에 참여함으로써 조합원 자격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권력은 시민들의 참여가 확대되었기에 자의적으로 경제협력을 중단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남북한의 상호의존성이 증가하고 경제협력이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오래되고 낡은 ‘창구단일화’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에서 정부의 허락 없이 시민사회의 대북 교류와 지원은 불가능하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지속되면서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대북제재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정부는 대북지원과 교류를 중단할 것을 기업과 시민단체에 요구했다. 또 다시 남북한 관계에서 정부만이 유일한 행위자가 되었다. 창구단일화의 논리는 남북한 관계의 긴장이 고조될 때, 출구를 찾기 쉽지 않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정부의 공식적인 대화 채널이 막혔을 때 남북한 간 교류·협력 사업을 하는 기업과 시민단체는 공식적·비공식적 대화채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안보 위기 국면에서 시민사회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을 가지기 어렵다. 안보위기는 민주적인 정책결정을 중단시키는 이유가 되며 시민사회는 하향식(top-down)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복종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시민사회의 참여를 확대하고 창구를 다원화해야 한다. 이는 남북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과 서신왕래를 비롯해서 다양한 사회문화 교류가 자유롭게 진행됨으로써 평화가 남북한 사람들 모두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시나브로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이는 적대적 인식에서 호혜적이고 평화적인 인식으로의 대전환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정착을 가로막는 세력들이 등장하는 것을 견제함으로써 평화를 지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평화체제와 같이 남과 북의 정치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도’에 의해서만 공고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항구적으로 지키려는 남북한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 비판과 견제, 그리고 교류와 협력과 같은 직접적인 소통과 참여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북미정상회담도 끝났다. 한반도의 평화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분단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평화를 완성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완전히 핵이 사라지고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시민사회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눈을 가리고 적대적인 분단구조를 이용해서 권력을 가지려는 세력이 언제 어느 때이고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은 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며 민주적인 과정과 방식으로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다. 평화는 누군가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시민들이 나설 차례이다.
윤철기ㅣ사회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학 공부를 시작했다. 북한 정치경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평화와 정의에 대한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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