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교실이야기]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임요한
2019년 2월 1일 금요일, 휴대폰에서 계속 알림 진동이 울린다. 음력 설 연휴를 앞두고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장거리 운전을 하고 있던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없었다. 네 시간쯤 되는 운전을 끝내고 스마트폰을 깨워보니 SNS 대화방에 메시지가 100건이 넘게 와 있었다. 올 3월 1일 자 우리 교육청의 인사 발령 공지를 보신 분들이 연락을 해 오신 것이다.
‘임요한 부장님, 인천영흥고 실화입니까? ㅎㄷㄷ;;;’, ‘요한, 무슨 일 생긴 거야? 시간 괜찮을 때 통화 좀 해.~’, ‘헐~ 요한 샘, 영흥고 뜬금포 뭥미?’, ‘임요한 부장, 이거 어떻게 된 거요, 대답 좀 해봐요.’ 등. 갑작스러운 나의 기타 인사군 전보 발령에 몇몇 선생님들이 걱정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임용이 된 이후로 줄곧 초빙을 받아 시내에 있는 학교, 그것도 지역에서 가장 부촌이라고 하는 곳의 가장 큰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해온 터였는데 만기도 되지 않아 갑자기 도서 지역의 고등학교로 발령이 났으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뭔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행정 처분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전임교 전입 3년 차에 도서 지역 기타 인사군에 희망 내신을 내고 이른바 ‘자진 입도’를 했다. 뒤에 알고 보니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를 1지망으로 희망한 사람은 인천광역시에 나밖에 없었던 듯하다. 아직도 나를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은 나에게 물어보신다. 왜 섬에 들어가게 되었냐고.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번 같은 대답을 해야 하다 보니 구구절절 긴 사연을 어떻게 하면 짤막하게 요약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내가 정리한 답은 ‘평화를 찾아서……’이다.
힘들었고, 지치기도 한 것 같다.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1년 반만에 고3 담임을 맡은 이래로 계속 고3 담임을 하면서 매일 조출만퇴에 때로는 주말도 반납하고 학교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아이들 수능 시험이 끝나고 겨울 방학이 되면 매년 어김없이 큰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3월이 되면 또 다시 반복. 그러던 중 전임교 2년 차에 처음으로 비담임이라는 것을 해볼 기회가 왔다. 교무 기획. 비담임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그 자리에 앉아 있던 1년 동안 나는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내가 학교에 공문을 처리하러 다니는 사람인지, 아이들과 공부를 하러 다니는 사람인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나는 ‘듀스’의 노랫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기필코 1층 본교무실에서 빠져나와야겠다, 수업 혁신과 아이들의 학업 능력 신장, 아이들의 대입 성공을 위해 이 한 몸 던져야 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업무 분장에 임했으나 나에게 던져진 건 보직 교사 임명장이었다. ‘학생부장’, 학교 다닐 때 우리가 그토록 싫어했던 ‘학주’, 우리 학교 ‘학주’가 바로 나였다. 학창 시절 두발 단속을 피해 달아나던 나를 추노하듯 끈질기게 쫓아왔던 ‘학주’가 20년이 지나 다시 나를 쫓아왔고, 다시 한번 ‘학주’를 피해 필사의 도주를 하던 나는 결국 노비문서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1년 동안 나는 새로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지금까지 이런 교사는 없었다. 교사인가, 수사관인가.’(영화 ‘극한 직업’의 대사를 재구성하여 인용함.)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듀스’의 노랫말을 또 생각했다. 친구를 괴롭힌 아이,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한 아이, 때린 아이, 맞은 아이, 훔친 아이, 도둑맞은 아이, 담배를 피운 아이, 오토바이를 탄 아이, 기물을 파손한 아이, 선생님께 대든 아이 등 매일매일 학교에서 무언가를 잘못한 아이들과 수사반장 놀이를 하였고, 학교 안전, 학교 환경, 학생 상담 등의 기타 업무는 덤이었다. 물론 그 업무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할 때도 있었다. 또한 공무원은 나라가 시키는 업무를 묵묵히 하면 되는 사람이다. 내가 되고 싶어서, 그토록 하고 싶어서 몇 수까지 해서 들어온 교직 아닌가. 찬밥, 더운밥 가릴 경력도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육아 휴직, 파견 휴직, 연수 휴직 등도 생각해봤지만 갚아야 할 돈이 많았다. 해외 파견도 생각해봤지만 영어가 안 되었다. 그러던 차에 영흥도에서 근무하던 선배가 만기가 되어 시내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흥도는 그 선배를 만나기 위해 1년 전 한 차례 방문해 본 섬이었다. 과거에는 배로 입도를 했지만 지금은 교각이 놓여 차로도 들어갈 수 있는 섬이다. 만기가 아니라 전보 내신 점수가 부족해 못 갈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교장, 교감 선생님께 내신을 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분들은 내가 학교에 무언가 서운한 것이 있는지, 아내도 허락을 한 것인지 등을 물어보시며, 만기 때까지 있어 주기를 부탁하셨다. 늘 인자하게 대해주셨던 교장, 교감 선생님께 인간적인 죄송함도 없지는 않았지만(지금 생각해도 전임교 교장, 교감 선생님은 정말 인자하신 분들이었고, 나에게는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학교를 떠나기로 했고 결국 내가 원했던 인천영흥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약 50Km, 차로 한 시간, 송도에서 시흥까지 가서 시화방조제 건너 대부도, 대부도에서 선재대교 건너 선재도, 선재도에서 영흥대교 건너 영흥도. 바다를 세 번 건너고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오래 달린 후에야 비로소 영흥도는 우리에게 그 속살을 보여준다. 이렇게 힘든 여정을 매일 왕복하면서 지금은 어떻냐고 물어보신다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시로 대답한다.
평화롭고 행복하다. 영흥도에는 평화가 있다. 우선 아이들이 너무 착하고 순수하다. 너무 착하고 순수해서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모두 예쁘고 사랑스럽다. 물론 내가 금사빠 기질이 조금 있긴 하지만 나는 우리 학교에 와서 첫날부터 이 착한 아이들에게 퐁당 빠져버렸다. 학폭도, 선도위원회도 없다. 무단 지각, 무단 결석이 없고, 담배 연기도 없고, 복도나 운동장에 쓰레기도 없다.(물론 매점이나 편의점이 학교 근처에 없다. 5리는 걸어 나가야 무언가를 살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도 없고, 선생님에게 대드는 아이도 없다. 아이들이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학교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학교다. 다른 학교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 학교는 그런 학교다. 한 학급에 15명 남짓, 한 학년에 두 학급, 중고등학교 6개 학년을 합해도 200명이 채 안 된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우신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렇다. 교사는 32명, 선생님들은 출퇴근도 하시지만 많은 시간 관사에서 생활하시며 다들 가족처럼 지내는 분위기이다. 4시 반이 되면 재빨리 학교를 빠져나와 각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 관사 방에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주신다. 수업도 좋다. 2학년 문학은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아이들도 아주 어려서부터 늘 같이 자라온 아이들이라 모둠 활동의 호흡도 좋고, 참여도 아주 적극적이다. 방과후학교 수업과 야간 특강을 많이 한다. 시내 학교에 있을 때는 방과후 수업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댓발은 나왔지만 사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는 이곳 아이들에게는 비루할지언정 나의 방과후 수업이 필요하다. 방과후 수업료는 전액 영흥화력발전소에서 육영 사업으로 지원한다. 영흥도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섬이다. 본인의 열정과 노력만 있으면 기업으로부터 많은 교육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입도 1개월밖에 안되었지만, 언제 이 콩깍지가 벗겨질지 모르겠지만, 또 언젠가 지금의 평화에도 위기가 찾아오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나의 섬 생활은 너무 평화롭고 행복하다.
내일은 2학년 2반 열 여섯 명의 천사들을 데리고 제주로 현장체험학습을 떠난다. 지난주에는 내 문학 시간을 몽땅 할애해 다 같이 소설 ‘순이 삼촌’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내일, 4월 3일에 우리 반 천사들이 4.3 평화공원에 가서 무얼 보고, 어떤 생각을 나에게 이야기해 줄지, 창피한 고백이지만, 수학여행 인솔이 기다려지기는 처음이다.
임요한 ㅣ 인천영흥고등학교 국어 교사.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 읽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은 국어 교사. 여러 길 돌고 돌아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무얼 잘하는지, 이다음에 뭐가 될지 궁금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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