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마중물]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2)
숱한 대화와 헌신 다음에, 평화는 느리게 온다
박종호
2019년 1월 16일(수), 코리밀라에서 이틀째, 북아일랜드에 온 지 나흘째 날이다.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창밖을 보니 거센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코리밀라는 바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스코틀랜드를 마주하고 있다. 유난히 물살이 센 바다라서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빗방울이 조금씩 흩날리던 어제와 달리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숙소 가운데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가볍게 먹었다. 코리밀라 공동체 식구들이 기른 싱싱한 야채와 과일, 그리고 빵, 커피다. 서울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침을 거르던 습관이 있지만, 여기서는 빵과 커피를 마시는 일을 지나칠 수 없다.
오늘 일정은 오전에는 쇼나 벨과 션 페터스를 만나 코리밀라에서 실천해 온 평화교육과 역사교육 이야기를 듣고, 오후에는 콜린 크렉과 함께 갈등 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대화법을 배우고, 저녁에는 데릭 윌슨 박사를 만나는 날이다. 코리밀라를 일구어 온 분들이 직접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들려 주신다. 하루 여덟 시간 남짓 듣고, 이야기 하고, 토론하고, 또 나누는 그야말로 길고 긴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기록은 심은보 선생님과 주예지 선생님이 맡았는데, 나도 따로 기록은 했지만, 이글을 쓰기 위해 다시 두 분 선생님 기록을 많이 참고했다. 빠짐없이 기록하느라 고생한 두 분에게 고맙다.)
코리밀라 공동체가 해 온 ‘만남과 평화교육’ 이야기를 쇼나 벨이 들려주었다. 쇼나 벨은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라가 고향인데, 1998년에 자원봉사를 위해 코리밀라에 왔는데, 아직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평화교육을 실천하느라,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아직도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웃으신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어 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코리밀라가 평화교육을 어떻게 발전시켜왔는가 하는 과정을 들려주었다. 흔히 사람들은 좋은 관계라고 하면 언제나 좋아야 하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좋은 관계’란 ‘논쟁을 하고 싸우더라도 회복이 가능한 관계’여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관계가 된다. 평화협정 이후 좋은 관계로 회복을 위한 방법에서 접촉이론(Contact Theory)을 따랐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양 쪽 집단의 청소년들을 함께 만나게 해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코리밀라는 그것을 잘하는 곳이었다. 만남을 통해 다름에 대한 노출, 같이 즐겁게 노는 것, 그 즐거움을 넘어서는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만남(접촉)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며 코리밀라에서도 계속하고 있는 일이지만 어려움을 줄 수 있는 도전 과제를 잊지 않고, 풀어내기 위해서 양쪽 집단이 만나기 전에 사전 작업을 하는 제3의 중재자 그룹이 있어야 하고, 같은 사람이 양쪽 집단을 오가며 준비시키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통제된 환경에서 동등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중재자 그룹이 맡고, 그런 사람을 키워내는 역할을 코리밀라가 맡는다. 코리밀라가 시민사회 안에서 서로를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Liaison 이론이라 부르는데 단순한 만남을 넘어서 서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디에 와 있는가? 이에 대한 쇼나 벨 대답은 이렇다. 평화협정 이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어떻게든 만나려고 해서 대화모임이 그렇게 많았다면, 평화협정 이후에는 시민사회에서 대화모임이 끊어져버렸다. 평화협정 이전에는 지원이나 기금이 대화를 하게 하는데 몰렸는데, 협정이후 딱 끊어져버린 것이다. 평화협정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대화’라고 말한다.
뒤이어 션 페터스는 역사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일랜드에서 역사 이야기는 언제나 논쟁적이다. 2007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이 의무교육이 되었고, 분단에 대해서 배우고, 그 분단이 북아일랜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배우게 했다. 현실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피하고 넘어갔던 것을 이제는 가르치라고 하니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 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는 일 역시 중요해 졌다. 하지만 공교육 교과목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가르치는 속에 녹여서 가르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시민교육 교사는 따로 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니 중학교 음악교사가 민주시민교육을 하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교육과정이란 정말 멋진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운전대와 스틱이 없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코리밀라는 2010년부터 ‘facing history and ourselves’라는 기관과 협력하여 학생들이 살아가는 현장, 현실 속에서 생각해볼 수 것들을 찾고 교육 자료를 계발하고 있다. 출발은 역사가 아니라 개인, 그리고 사회, 정체성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그것을 알고 싶은 나이이기 때문에 개인에서 시작해서 역사와 인간의 행동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역사적인 사건이 불가피한 발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누가 선택을 해서 나타난 사건이라고 이야기 한다고 한다. 인간 행동에 대한 공부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또, 날짜, 통계, 유명 인물도 중요하지만 일반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도 중요한 부분으로 본다. 큰 사건에 대해 공부한 후에는 판단, 기억, 유산에 대해서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은 콜린 크렉을 만난다. 콜린은 코리밀라의 전 대표로 현재 그가 개발한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대화’(Dialogue for Peaceful Change, DPC)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전세계를 돌며 분쟁 지역에서 평화로운 대화 활동을 위해 애쓰고 있다. 서울에도 다녀간 적이 있어서, 콜린의 강의는 듣기가 편했다. 물론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콜린은 Iceberg 모델을 통해 시간에 따라 갈등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소개한 후 개별적으로 갈등 지도를 그려 소그룹에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갈등을 해결하는 대화의 단계를 시간에 따라 예방, 개입, 중재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예방은 갈등이 이후의 상황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작업을 하는 단계이다. 개입 단계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단계로 갈등을 잠깐 멈추어 놓는 것이다. 중재 단계는 사람들의 저항감을 떨어뜨려주고 복원력을 길러주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계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한 순간에 변화시킬 수는 없다. 환경을 조성하고 맥락을 바꾸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는 단기간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잠깐 쉰 뒤에, 콜린은 갈등 지도를 그리는 법을 소개해주었다. 관계에 기호를 표시하게 함으로써 갈등을 보다 명시적으로 나타내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례를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개별적으로 자신과 관련된 갈등을 하나 선택하여 지도를 그린 후 4~5명의 모둠으로 모여서 자기 갈등 지도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콜린은 평화를 고무줄에 비유했다. 평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듯하다가도 손을 놔버리면 고무줄처럼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평화로운 내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비전이 필요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위험에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은 힘겹고 긴 여정이 될 수 있다. 콜린도 그랬고, 여기 코리밀라에 있는 모두가 입을 모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평화는 천천히 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실제로 겪은 긴 세월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리라. 콜린은 16살무렵 1970년대부터 코리밀라와 함께 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금방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만남이 시작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천천히, 느리게, 숱한 사람들의 비전과 헌신으로 평화는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 준다. (콜린은 오는 7월말 서울에 와서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대화, DPC 연수’를 어린이어깨동무와 함께 진행한다.)
종일 이어진 공부(?)는 허리와 눈,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우리 중고등학생들에게 미안해야 하고, 존경해야겠다고 궁시렁대면서.ㅋㅋ 저녁밥을 먹고 나서 우리들끼리 몇 가지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정진화 선생님은 평화마을 만드는 이야기, 댄 가즌 선생은 평화축구 이야기, 윤철기 교수님은 평화교육 학술대회 준비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내일 오전에 평화축구를 해 보기로 했다.)
7시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삼삼오오 차를 타고 어둠을 뚫고 마을로 달려간다. 늦은 밤, 데릭 윌슨 선생님 댁으로 가는 길이다. 그 곳에는 우리를 위해 데릭 선생님과 가족, 코리밀라를 오랜 세월 함께 일궈 온 분들이 모여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맛있는 포도주와 맥주를 들고 건배를 했다. 다시 세 모둠으로 나눠 이야기를 나눈다.
데릭 선생님이 모둠에서 나눌 이야기를 제시해 주었다. ‘나에게 있어 희망은 무엇인가?’,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만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가?’ 내가 참가한 모둠에는 이본 선생님과 데릭 윌슨, 사모님, 그리고 우리 네 사람이 참여하였다. 통역을 거쳐 듣는 이야기라 다 기억하기 어렵지만, 눈빛과 함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인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지만, 이런 대화 흐름이 코리밀라 구성원들에게는 익숙하게 잡리하고 있는 듯 했다.
늦은 밤, 다시 차를 타고 코리밀라로 돌아오는 시간. 나는 심은보 선생님, 김동진 박사, 데릭 윌슨, 사모님과 남아서 더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을 누렸다. 회복적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코리밀라에 와서 더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고, 데릭은 기꺼이 기회가 된다면 돕겠다고 답해 주었다. 만남과 환대, 친절, 이런 말들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경험한 순간이었다. 다시 빗속을 뚫고 숙소로 돌아와서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데릭 선생님 댁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앉아 있어야 했다. 평화는 정말 이렇게 먼 곳에서도 만난다. (2019. 1. 16.)
박종호|십여 년 전 어린이어깨동무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 어깨동무평화교육센터 연구위원,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학생들과 손잡고 금강산,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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