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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3_3 문영미_문익환 통일의 집

by 어린이어깨동무 2020. 8. 19.

[평화를 담은 공간]

 

문익환 통일의 집 

 

문영미

 

문익환 통일의 집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문익환 목사와 부인 박용길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유택 박물관입니다. 통일의 집은 개인의 집을 넘어 민주주의 역사의 현장이지요. 문익환은 이 집에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비롯한 많은 글들을 썼고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습니다. 특히 그가 교도소에서 석방이 되는 날이면 많은 분들이 찾아왔지요. 그는 이 집에서 수도 없이 가택연금과 수색과 체포를 당했습니다. 골목길 앞에는 경찰 초소가 있었고, 담당 형사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1994년 문익환 목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박용길은 대문 위에 “통일의 집”이라고 직접 현판을 써서 붙이고 집을 시민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시민들이 통일을 논의하는 공 간으로 사용되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2011년 부인 박용 길이 돌아가신 후, 집이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2018년 문익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 모금으로 다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평화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작은 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의 성금으로 통일의 집을 복원하고_사진 김성곤 
2018년 6월 1일 통일의 집 개관식_사진 김성곤

여러분은 문익환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문익환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영화 “1987”의 엔딩 크레딧에 이한열 장례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분으로 기억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1989년 갑작스런 북한 방문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로 기억하지요. 그러나 막상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요.

그는 민주·통일 운동가 이전에, 탁월한 신학자이자 감수성 이 예민한 시인이었으며, 아내와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18년 6월 1일 만주 북간도에 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의 맏아들로 태어났지요.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용길과 1944년 결혼했고요.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전쟁 중에는 유엔군의 통역관으로 분단의 실상을 목격했지요. 이후 한국신학대학 구약학 교수로, 한빛 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했지요.

 

문익환의 글씨_사진 김익현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총 여섯 번에 걸쳐 10년 넘게 옥고를 치르셨지요. 1992년 옥중에 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1994년 1월 18일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이 집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늘 민주와 통일은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평화 사상가인 그는 평화에 대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적대감의 해소에 강조점이 있는 화해를 생각해 왔었습니다. 민주화도 민족화해요, 통일도 민족화해라고. 이렇게 민족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던 저의 관심이 평화의 문제와 함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 우리의 평화는 세계 평화와, 세계 평화는 우리의 평화와 끊을 수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평화야말로 우리의 사활을 결정하는 생명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결코 정치나 경제에 멎는 것이 아닌 훨씬 깊은 데서부터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인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욕심에서 발동하는 인간의 공격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선악을 이데올로기로 휘두르는 욕심인 것 같습니다.

-문익환 옥중 편지 1982년 9월-

 

근현대사료의 보고, 통일의 집

 

통일의 집은 근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를 3만여 점 이상 소장하고 있습니다. 문익환 일가는 1946년 만주에서 월남하여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30년대 성경, 40년대 문익환이 쓴 연애편지와 전쟁 중에도 오고 간 편지, 10년 넘게 감옥으로 오고 간 수천 통의 편지들, 성명서, 사진, 북으로부터 받은 선물과 예술 작품 등을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했습니다. 수장 자료들은 민주화·통일운동의 기념비적인 사료일 뿐 아니라 현 대사를 살아온 한 가족의 미시사적인 기록입니다. 또한 친구 윤동주, 장준하와 얽힌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재개관 이후 문익환 통일의 집에는 관람객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1970년 대의 정취가 느껴지는 주택과 마당에서 느껴지는 레트로 감성이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가족들이 생활하던 아늑한 생활 공간과 유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문익환 방북 30주년 전시_사진 유재홍
문익환의 글귀와 영상_사진 김익현 

문익환 통일의 집에서는 상설 전시와 기획전시, 온라인 아카이빙을 통해서 자료 전시와 교육, 연구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관전,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 “통일은 다됐어”전, “사랑의 기록가, 박용길”전, 전쟁 70주년 기념 “땅의 평화”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연극 공연 “할아버지의 선물”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정원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올 상반기에는 관람객들을 거의 맞이하지 못했지만 현재는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는 온라인 가상 전시, 온라인 유물 아카이브, 문익환 목사 옥중 편지집 발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강북구 수유리 인근 4.19 공원, 북한산 둘레길, 근현대사박물관 등과 함께 코스로 둘러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문영미 | (사)통일의집 상임이사와 이한열기념관 학예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역사적인 자료들을 보존하고 기록하고 전시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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